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20:08:14

마이클 패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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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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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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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패러데이
Michael Faraday
파일:Michael_Faraday_sitting_crop.jpg
출생 1791년 9월 22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서리주 뉴잉턴 버츠
사망 1867년 8월 25일 (향년 75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미들섹스 햄프턴 궁전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학자
분야 물리학, 화학
소속 런던왕립학회
수상 코플리 메달 (1832, 38)
로열 메달 (1835, 46)
톰프슨 메달 (1846)
알버트 메달 (1866)
배우자 사라 바나드 (1821년 결혼)
종교 개신교(장로회)[1]
서명 파일:마이클 페러데이 서명.svg
파일:Michael_Faraday.jpg
1857년 당시의 패러데이

1. 개요2. 생애3. 과학적 업적
3.1. 화학 분야3.2. 물리학 분야3.3. 대중강연 활동3.4. 폭로자(debunker)
4. 종교적 신앙5. 어록6. 미디어에서의 마이클 패러데이7. 기타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화학자.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 대중강연자이자 강령술 폭로자. 그와 동시에 종교적 신앙심으로는 당대에 유명했던 독실한 개신교인이다. 아인슈타인이 존경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생전 아인슈타인의 연구실 벽에는 패러데이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성공한 인간 승리의 사례로도 유명하다.

별칭으로 맥스웰과 함께 전자기학의 아버지 라고도 불린다. 화학 분야에서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물리 분야에서도 매우 중대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전자기 유도는 그를 빼놓고서는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SI 단위에서 축전기정전용량을 나타내는 단위인 패럿(farad, [math( \mathrm{F})])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2. 생애

런던 근교에 있는 뉴잉턴 버츠[2]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다. 가난을 피하기 위해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이사한 그는 그때부터 서점의 제본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점원으로 일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이 제본했던 과학과 관련된 서적들을 읽었는데, 이때부터 과학적 흥미가 생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일반 강연을 들으면서 화학 실험도 시도해 보았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던 중에 패러데이의 고용주는 이런 사실을 고객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던 와중 그런 고객들의 아버지 중 왕립학회의 높으신 분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드디어 19세 때, 당시 최고의 과학자인 험프리 데이비의 강연 티켓을 받게 되어 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이후 아예 과학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이 기록한 노트를 제본해 데이비에게 보냈으며, 이게 데이비의 눈에 띄었다. 마침 데이비가 실험 중 눈을 다치게 되어 치료기간 동안 자신을 도와줄 조수가 필요했는데[3], 데이비는 그때 패러데이를 자신의 연구 조수로 발탁했다.

험프리 데이비 본인도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불릴 만큼 유능한 사람이었다.[4] 또한 열이 에너지의 일종임을 증명하고 전기 분해 실험 및 알칼리 금속을 발견하는 등 결코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하필 제자가 본인보다 훨씬 더 월등한 천재인지라 그의 다른 업적들보다 패러데이를 발굴해낸 것이 그의 최고의 업적으로 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당시에도 제자를 높게 치는 사람이 많아선지 패러데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패러데이의 논문에 손을 대 자신이 기여했다는 문구를 추가하기도 했고, 왕립학회의 회원이 될 때 의장이었던 그가 반대했고 패러데이의 가입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반대표는 단 1표가 나왔는데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서는 이를 시기한 데이비가 패러데이를 전문분야가 아닌 유리 연구분야로 좌천성 지시를 내렸고, 패러데이는 여기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당시 실패한 유리 실험물을 말년에 전자기와 빛의 파동 관계를 증명하는 실험에서 아주 요긴하게 써먹었다고 나온다. 앗!시리즈 18권 전기가 찌릿찌릿 편에서 데이비의 모터는 작동하지 않는데 패러데이의 모터가 작동하자 질투를 느낀 데이비는 패러데이가 자신의 모터를 훔쳐갔다고 주장했지만 패러데이는 정직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라 누구도 그의 주장에 관심갖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실험을 보조하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이때가 1813년, 불과 22세였다. 이후 1824년에는 왕립학회 회원, 그 다음 해에는 왕립 연구소 주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산업 혁명의 바람이 불던 영국에서, 밑바닥에서 돈 많은 부르주아의 전유물로 일컬어졌던 과학 분야의 이런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건 당시로선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중년 무렵에는 기억상실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코스모스에서는 병이 심하여 패러데이의 아내가 편지에 추신을 가필해주기까지 했으나 그는 말년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에서 가난한 하층민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자수성가하여 기회를 잡고, 견제와 지병의 고통 속에서도 온화한 인품을 지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인간찬가의 삶을 살다 간 인류의 귀감이다.

이하에 서술될 다양한 업적을 남긴 뒤, 죽을 무렵엔 웨스트민스터 묘지에 장사를 지낼 것을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기사 작위도 사양했는데 이때 남긴 유명한 말이 "그냥 패러데이로 남고 싶습니다"다. 그래서 그는 죽은 뒤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외에도 살아생전 온갖 혜택 제안이 들어왔지만, 패러데이는 그 구미 당기는 제안들을 대부분 다 거절했다. 패러데이는 "지적인 노력에 대해 상을 준다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패러데이의 이러한 겸손한 면모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고, 지금도 패러데이는 아이작 뉴턴,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찰스 다윈 등과 함께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3. 과학적 업적

마이클 패러데이의 과학적 업적은 화학/물리로 나뉜다.

3.1. 화학 분야

흔히 패러데이를 물리학자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는 화학에도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애초에 처음으로 했던 실험이 화학실험이었다. 염화질소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 특수강(特殊鋼)에 관한 연구, 염소의 액화연구 등 실험 화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825년에 벤젠을 발견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다.[5] 게다가 화학적인 방법으로 합성한 금 나노입자를 거의 최초로 발견하기도 하였다. 전기분해를 생각해 낸 것도 이사람이다.

3.2. 물리학 분야

그러나 단연 패러데이가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역은 물리학이었으며, 특히 전자기학에서 매우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가 전자기학에서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전기와 자기의 연관성을 밝혀낸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전기와 자기를 별개의 것으로 보았지만, 패러데이의 연구를 통해 하나로 합쳐질 수 있었다. 이때 전기와 자기의 통합에 일조를 했던 것이 전자기 유도의 발견으로, 자기장의 변화가 전류의 흐름을 유도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패러데이가 처음으로 이를 발견한 것이다.

패러데이는 전문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수학에서 매우 약한 모습을 보여서 전기와 자기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지언정 이를 수학적인 언어로 깔끔하게 정리하지는 못했다. 이후 전자기 유도를 포함한 전자기학 전체를 깔끔한 식으로 정리해 낸 사람이 바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다. 그리고 이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20세기 물리학의 최대 업적들 중의 하나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유도된다.

아무리 맥스웰이 전자기식을 수학적으로 유도해냈어도, 패러데이의 실험 데이터가 없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또한 맥스웰 방정식 식에서 유도된 상대성 원리도 패러데이의 실험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패러데이를 존경하며 아무리 이론물리학이나 계산물리학(computational physics)이 발달해도 실험의 중요성은 절대로 약화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된다. 또한 그가 발견한 전자기 유도는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단적으로 이게 없으면 지금의 발전기가 존재할 수 없다.[6][7]

여담으로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나이 차이가 40년 이상 났지만, 서로의 성과를 인정하고 굉장히 존경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온화하고 겸손하여 미담이 많은 것도 공통점이다.

3.3. 대중강연 활동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패러데이는 정규 과학 교육을 받기 어려운 처지의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과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키우기 위해,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자신이 재직하고 있었던 왕립 연구소에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공개 강연을 실시하였다. 그 중 1860년에 그는 1개의 양초만을 가지고 6번에 걸쳐 실험을 하고 강연을 했는데, 이를 동료과학자인 윌리엄 크룩스가 편집을 하고 서문을 써 그 다음 해에 출간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양초의 과학. 패러데이가 얼마나 뛰어난 실험가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강연이 영국인들의 인상에 워낙 깊이 남아서인지 과거 20 파운드 화폐 뒷면에 실린 적도 있다.

패러데이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했던 실험은 영국 왕립 협회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마다 시행되고 있다. 20세기가 된 이후에는 BBC로 전국 중계까지 한다. 영국 왕립협회의 전통인 만큼 강사진도 어마무시하다. 강연했던 사람의 목록을 보자면 리처드 도킨스, 칼 세이건 등 일세를 풍미한 대 학자들이 포함되어있다.

3.4. 폭로자(debunker)

오늘날 제임스 랜디 같은 초능력 사냥꾼들이나 마이클 셔머 같은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의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오컬트 및 초자연현상에 대한 폭로자, 즉 "디벙커" 로서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미 마이클 패러데이가 그러한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의 타겟은 바로 강령술로, 그의 검증 과정을 지켜보면 실제로 제임스 랜디가 떠오를 정도다.
파일:attachment/faraday-spiritualism.jpg
강령술사들이 영혼을 부르면 탁자가 움직인다고 설레발을 치자 패러데이는 강령술사들 몰래 약간의 장치를 해서 미세하게 손이 움직이면 건초더미가 쓰러지도록 고안한 탁자에서 검증해 보라고 제안했고, 강령술사들은 물론 보기 좋게 실패했다. 영혼이 어쩌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끔 손을 조금씩 움직여서 강령술사들이 테이블을 흔들었던 것이다.[8] 1853년, 패러데이가 그 결과를 저널에 보고하자 수많은 강령술사들이 Ad Hoc 가설을 내세우며 들고일어났고, 패러데이는 그 모든 도전들을 전부 받아주었으나 200년쯤 후대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작 나타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영국에서의 강령술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아무도 믿지않게 되었다.

그리고 자칫 대중적 생명력을 얻어 위험해질 수도 있었던 강령술은, 패러데이의 활약 덕분에 진작에 그 실체가 까발려져서 한낱 철없는 어린아이들의 유흥 정도로 전락하게 되었다.

4. 종교적 신앙

당대의 많은 초창기 과학자들처럼, 마이클 패러데이 역시 지극한 신앙심과 과학자로서의 사고방식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의 관점에서 자연 만물은 신의 섭리와 능력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바로 이 맥락에서, 그 중에서도 물리학적 기본 법칙에 대해서라면 그거야말로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고전역학의 세계관에서 본다면, 신의 섭리로 운행하는 이 모든 세상은 수학적으로 아름답고 깔끔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마이클 패러데이 역시 이 당시의 이와 같은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패러데이의 교파는 스코틀랜드 장로회 칼뱅주의 계통의 소수교파였는데, 근거지에서 이름을 따서 글래사이트(Glasite)라고도 불리며, 지도자 샌더먼(R.Sandeman)의 이름을 따서 샌더매니언(Sandemanian)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대표적인 잉글랜드 국교회 반대주의(Nonconformity)의 입장을 취했는데, 신에게 소속된 나라인 교회가 세속의 권력을 잡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패러데이의 신앙심은 매우 깊다. 물론 패러데이는 '자연과학'은 결코 '신앙'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녔으며, 자연과학으로 알아낸 것들을 일종의 계시처럼 여겼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을 급히 알현하러 가는데 교회 일요일 예배 복장을 갈아입지 않고 그냥 그대로 알현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다. 옷을 갈아입으려면 교회 예배에서 먼저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는데, 자신을 지켜주는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9] 전자기력의 발견 이후에는 심지어 중력에까지 흥미를 보였는데, 당연히 그로서는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력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가설은 그 자신의 개신교적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0]

패러데이의 후임이었던 존 틴들(J.Tyndall)은 저 유명한 틴들 현상을 발견한 인물이기도 한데, 패러데이와는 딴판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실제로 틴들은 무신론적 불가지론자에 가까우니,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패러데이와 여러모로 비교가 될 만한 인물이다. 틴들은 물론 패러데이의 업적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지만, 그와는 별개로 패러데이의 종교적 열성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던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패러데이가 기도실 문을 열 때, 그는 실험실의 문을 닫는다."
그럼에도 일단 틴들은 패러데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굉장히 좋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패러데이는 그 특유의 겸손함과 검소함, 모난 데 없이 온유한 성격으로 당대에 평판이 좋았고, 틴들 역시 그의 인품에 대해서만큼은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 가면서[11] "패러데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라고까지 할 정도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패러데이의 종교인이자 과학자라는 특성 때문인지, 종교와 현대과학의 관계를 다루는 템플턴 재단에서는 아예 연구소를 세울 때 패러데이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름하여 패러데이 과학종교연구소. 영국의 세인트 에드문드 컬리지 산하 연구소다.

5. 어록

What good is a new-born baby?
갓 태어난 아기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But still try, for who knows what is possible?
그래도 계속해라, 가능할지 누가 아는가?
There’s nothing quite as frightening as someone who knows they are right.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Nature is our kindest friend and best critic in experimental science if we only allow her intimations to fall unbiased on our minds.
자연의 암시가 우리의 마음에 치우치지 않도록 내버려둔다면, 자연은 우리의 가장 친절한 친구이자 실험과학에서 최고의 비평가이다.
Speculations? I have none. I am resting on certainties.
추측? 나에게는 없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Nothing is too wonderful to be true if it be consistent with the laws of nature, and in such things as these, experiment is the best test of such consistency.
자연의 법칙과 일치하기만 한다면 진실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또한 자연의 법칙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아는 데는 실험만큼 좋은 것도 없다.

6. 미디어에서의 마이클 패러데이

비밀결사 매의발톱단 - 5기 7화에서 언급된다. 패러데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입양한 아들로 본래는 무사였으나 자신의 적성에 더 맞는 도시락 제조업자로 진로를 바꾼다. 패러데이의 도시락은 초반에 부진을 면치 못했으나 야마구치씨의 조언을 듣고 도시락에 아보카도를 넣은 이후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훗날 패러데이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보카도를 넣을 생각을 어찌했는지에 대해 질문받게 되고 패러데이는 스스로 떠올린 것이라 거짓말을 한다. 이 일화는 패러데이 아보카도의 법칙이라 불렸고 패러데이는 이후에도 잘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7. 기타

  • 풍문에는 마이클 패러데이가 자기장 실험을 하고 있는데 관료들[12]이 와서 "이걸 어디다 쓰나? 이거 돈 되나?"라고 태클을 걸자, 차분하게 "훗날 여러분들이 이것에다 세금을 매길 수 있을 겁니다." (One day sir, you may tax it.)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래요, 갓 태어난 아기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Of what use is a new-born child?)라고 비꼬았다고도 한다.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 관료들의 무지가 이슈가 될 때마다 반복적으로 회자되는 이야기.
  • 브라질너트 효과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 패러데이 외에도 수학을 못 했던 물리학자로 소개되는 인물들이 있다. 닐스 보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땄기 때문에 패러데이와는 상황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 둘은 어디까지나 이론물리학 관점에서 수학이 약하다 한 것일 뿐이다.
    우선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 수학천재로 인정받던 학생이었다.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졌을때도 교수들이 수학적 천재성만 보고 "아 얘는 진짜 수학 천재라, 다른거 조금만 더 하면 좋을텐데"라고 하고 "너 어차피 유학생이니까 우리나라(스위스) 고등학교 졸업시험 안 봤으니까 그거 봐서 합격해 오면 다시 입학시험 안 보고 입학하게 해줄게"라고 했던 수준이었다.(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재수용으로 스위스 학교에 1년 다니고 그 졸업시험에서 수학 포함 이과 과목을 모두 만점 맞았다.) 대학교에서도 수학-물리학 교육과를 매 시험마다 벼락치기로 봐서 졸업할 정도의 수학 실력은 있었다. 다만 대학교 중간에 수학에 흥미가 떨어지는 바람에 수학을 포기해 버려서 나중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풀어낼 때 많이 고생했던 건 맞다.
    하지만 패러데이도 결국 수학을 못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당대의 탑급 석학치곤 못했다는 소리지, 적어도 한국대학 학부생 수준의 미적분학 지식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니, 결코 수포자는 아니다. 애초에 자연과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대학생 수준 이상의 수학지식을 기본적으로 깔고 가야한다. 아인슈타인도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으로 풀어낼때 사용했던 수학이론이 수학계에서도 갓 나온 따끈따끈한 최신 이론이었기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디까지나 어려움을 겪은 것일 뿐 결국은 증명해냈다. 따라서 패러데이도 보통 사람 관점에서는 넘사벽의 수학 천재로 보일 정도로 전문적인 과학연구에 필요한 수학지식은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저 둘처럼 체계적인 수학 교육을 받지 못해서 전자기학의 이론체계를 스스로 완성하진 못했을 뿐이다.


[1]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교회의 분파인 글라사이트파(Glasite)의 일원이었다. 집사장로로 봉사할 만큼 독실한 신자였다고 한다.[2] 현재는 런던에 편입되었다.[3] 참고로 이 실험이 바로 플루오린을 분리해 정제하는 실험이었다. 플루오린은 다른 원자로부터 전자빼앗는 정도가 너무 강해서 분리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뿐더러, 그 와중에 각종 유해물질들이 쏟아져나오기 때문에, 플루오린 정제 실험을 하다가 골로 간 과학자들도 수두룩했다. 때문에, 주기율표를 고안해낸 불멸의 업적을 세운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를 밀어내고, 화학계의 난제인 플루오린 분리에 성공한 앙리 무아상노벨화학상을 거머쥐었을 정도다. 당시 험프리 데이비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프랑스물리학자이자 화학자게이뤼삭과 함께 이 실험을 했는데, 둘 다 무사하긴 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해야했다.[4] 사실 이 사람도 인간승리의 모범이다. 콘월의 외딴 해변가 마을에서 가난한 목각사의 아들로 태어나, 16살에 아버지의 사망 후 생계를 위해 약제사의 조수가 되면서 독학으로 화학을 배워 과학자가 됐다.[5] 다만 명명을 한 것은 패러데이가 아니었고, 일반인들에게는 벤젠 하면 케쿨레의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꿈 얘기가 워낙 유명한지라, 또한 전자기 유도로서 물리학에 워낙 큰 획을 그은 인물이라서, 벤젠 발견은 그의 업적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은 편이다.[6] 발전기 자체가 저 실험 세팅에서 코일자석의 스케일만 엄청나게 키워서 훨씬 많은 전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발전기가 여러 종류로 나뉘는 건 자석을 어떤 방법으로 움직이게 하느냐, 그 중에서도 자석과 연결된 터빈을 움직이게 할 수증기를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내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7] 심지어 놀이기구에서도 이 전자기 유도가 사용된다. 바로 자이로드롭인데, 브레이크로 이 전자기 유도를 사용한다. 그래서 낙하 도중 갑자기 정전이 되어도 영구자석을 이용하는 거라 안전하게 멈출 수 있다.[8] 실제로 오늘날의 적지 않은 자칭 초능력자들도 이런 원시적인 트릭을 이용한다.[9] 오늘날 어지간히 극단적이라는 근본주의자들도 이런 종류의 주장까지는 하지 않는다. 사실 현재는 교회에서도 학생들의 여행일 경우엔 특히, 비신자 부모님을 안심시키기위해 대부분 보험을 들어놓는 상황이다.[10] 그의 관점에서 모든 자연법칙은 서로 우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이론체계만 가지고도 전자기력뿐 아니라 중력까지도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그가 믿는 바에 따라 신의 섭리가 법칙으로서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심으로부터 떠올린 생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사실상 1800년대에 통일장 이론에 대한 출발선을 그어본 셈이었던 것이다.[11] 정확히 말하면 디모데전서/티모테오 첫째서간 3장 2~7절의 내용. 참고로 우리말 성경의 그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12] 글래드스턴 수상이 직접 왔다고도 하지만 패러데이는 글래드스턴이 수상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