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e10510><tablebgcolor=#e10510> | 포뮬러 1 월드 챔피언십 역대 드라이버 챔피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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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F1 팀 명예 감독 | ||
Mercedes-AMG PETRONAS Formula ONE Team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안드레아스 니콜라우스 "니키" 라우다 Andreas Nikolaus "Niki" Lauda | |
출생 | 1949년 2월 22일 오스트리아 빈 | |
사망 | 2019년 5월 20일 (향년 70세) 스위스 취리히 주 취리히 취리히 대학병원 | |
국적 | 오스트리아 | |
출전 횟수 | 177경기 | |
월드 챔피언 | 3회 (1975, 1977, 1984) | |
그랑프리 우승 | 25회 | |
포디움 | 54회 | |
폴 포지션 | 24회 | |
패스티스트 랩 | 24회 | |
첫 경기 | 1971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 |
첫 그랑프리 우승 | 1974년 스페인 그랑프리 | |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 1985년 네덜란드 그랑프리 | |
마지막 경기 | 1985년 호주 그랑프리 | |
소속 | <colbgcolor=#000><colcolor=#fff> 드라이버 | STP 마치 엔지니어링 (1971~1972) 말보로-BRM (1973) 스쿠데리아 페라리 S.p.A SEFAC (1974~1977) 파르말라트 레이싱 팀[1] (1978~1979) 말보로 맥라렌 인터내셔널 (1982~1985) |
감독 | 재규어 레이싱 F1 팀 (2001~2003)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포뮬러 원 팀 (2019~ / 명예 감독) | |
스태프 |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포뮬러 원 팀 (2012~2019 / 비상임 이사) | |
종교 | 가톨릭 |
1976년 뉘르부르크링에서 사고를 당하기 직전의 모습. | |
말년의 모습. 화상으로 귀부분이 일그러진 것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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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국적의 전 포뮬러 1 드라이버이자 전 항공사 Niki Air의 CEO. 현역 시절 별명은 불사조.2. 생애 및 선수 경력
1949년 오스트리아에서 명문 금융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조부를 비롯해 집에서는 그가 하라는 가업은 안 하고 레이싱을 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라우다는 이에 반발하여 집을 뛰쳐나와 레이서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무일푼으로 집을 나온 탓에 포뮬러 2에 출전하기 위해 당시 환율로 3만 파운드나 되는 돈을 자기 목숨을 걸고 빌려 왔다고. #F3, F2를 착실히 거쳐나가 1971년 마치 팀에서 드디어 F1 데뷔를 가졌고, 이후 BRM으로 이적한다. 루키 시절의 퍼포먼스는 그렇게 좋지 못해서 BRM 드라이버 시트를 확보하기 위해 자기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그 돈을 팀에 건네줘야 했다.[2] 그러나 BRM에서 만난 한 사람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데 그 사람은 바로 팀 메이트 클레이 레가조니. 성적은 부진하지만 그의 무궁무진한 포텐셜을 간파한 레가조니는 이듬해인 1974년 친정 팀이었던 페라리로 복귀하면서 팀 측에 라우다를 영입할 것을 강력히 추천했고 이 덕분에 라우다는 페라리 소속이 된다.[3][4] 페라리에 입단한 라우다가 페라리 312T의 테스트 후 엔초 페라리에게 한 말은 "쓰레기만도 못한 차지만 내가 어떻게든 잘해보죠."
페라리 팬들은 처음엔 보잘것 없는 경력의 그를 미덥잖게 여겼고 페라리에서 첫 해의 성적 역시 그저 그랬지만 이듬해인 1975년에는 개인 첫 드라이버 챔피언이자 페라리에 10년 만의 드라이버 챔피언을 안겨 준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가 난리났던 건 물론이요, 무일푼으로 내쫓았던 집안 식구들도 이제는 그를 인정하게 되었음에도 정작 본인은 무덤덤했다고. 여담으로 당시 드라이버 챔피언 트로피를 동네 카센터 무료세차권과 교환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76년에도 그의 페이스는 최고조였고 시즌 5승을 챙기며 그의 전성기를 순조롭게 이어나가는 듯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의 시즌 10라운드 독일 GP를 맞이하는데...
악명높은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에서 그의 차량이 타이어와 브레이크에 문제를 일으키며 충돌,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6] 동료 드라이버들[7]의 목숨을 건 구조와 페라리 측의 신속한 지원요청으로 가까스로 구출되었으나 전신 3도 화상[8], 골절, 유독가스로 인한 폐 손상을 입게 되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가망 없다는 의사들의 판정에 결국 신부까지 데려와 병자성사를 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키는 포기하지 않은채 계속 회복하였고, 급기야 6주 후인 13라운드 이탈리아 GP에서 아직 화상이 덜 나아진 몸으로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레이스에 복귀한다. 그리고 당당히 4위로 레이스를 마침으로써 불사조란 별명을 얻는다.
그 해 16번째이자 마지막 경기인 일본 그랑프리에서 그 해 드라이버 챔피언이 유력한 상황이었고 3그리드를 확보하고도 니키는 레이스에서 폭우가 내리자 안전 문제를 이유로 레이스 포기 선언을 하였다.[12][13] 라우다는 화상 여파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눈꺼풀 화상도 있었지만 눈썹이 다 타 버리면서 땀이 눈으로 그대로 들어가는 악조건에 처해 있었고, 여기에 비까지 오면서 시야가 엉망이 되니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챔피언 자리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맥라렌의 제임스 헌트에게 단 1점차로 넘어간다. 독일 GP에서 천국 문턱까지 밟았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걸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었지만, 엔초 페라리는 이 결정에 대해 불같이 화를 냈고, 이로 인해 페라리와의 사이는 점점 벌어진다. 독일 GP 사고에서 후속 조치가 미흡했던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다음 그랑프리인 오스트리아 GP를 아예 페라리 전체가 보이콧했을 정도로 라우다를 아꼈던 엔초 페라리가 이럴 정도였으니 라우다의 레이스 포기 결정이 얼마나 파급 효과가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14][15]
이듬해인 1977년에도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하며 다시 페라리에 드라이버 챔피언십과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안겨줬지만, 엔초 페라리와의 사이는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978년 브라밤으로 이적, 두 시즌을 활동한 후 "목숨 걸고 빙글빙글 도는게 지겹다."며 1979 시즌 후 첫번째 은퇴를 한다.
다만 라우다의 브라밤 이적은 단순히 이것만은 아니었고, 1977년 로터스가 그라운드 이펙트[16]의 우수함을 입증하고, 타 팀들이 차례차례 그라운드 이펙트를 도입하는 와중에, 페라리는 78년 후반기 투입될 예정이던 312T3에도 그라운드 이펙트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브라밤의 BT46은 비교적 미드필드 팀인 브라밤이었지만 그라운드 이펙트를 도입해 선두권 경쟁이 가능한 수준의 차량이었다. BT46은 냉각 문제를 겪고 있었고 그래서 이런저런 냉각 성능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었는데, 시즌 중에 도입된 BT46의 개량형인 BT46B를 개발하던 중, 고든 머레이[17]가 그라운드 이펙트 장치를 탑재하기 어려운 BT46[18]을 가지고 다운포스를 최대한 뽑아낼 궁리를 하다가, 차 뒤에 팬을 달아 석션 효과를 일으켜 다운포스를 생성할 궁리를 하여[19] 이 팬을 냉각용으로만 쓰는 팬이라고 오리발을 내밀고(...)[20] 단 한 번의 레이스이긴 했지만 압도적인 성능차로 우승을 차지했었다. 다만 브라밤의 차는 확실히 빨랐지만 꾸준히 문제를 일으켜, 잦은 문제로 몇 번이나 리타이어 해야 했고, 이후 '팬 카'도 단 한 레이스만에 장착이 금지되었다.[21] 1978 시즌의 페라리와 브라밤은 결국 로터스에게 30 포인트 정도의 차이[22]로 사이좋게 압도당했고 라우다도 챔피언십 4위에 그친다. 어쨌든 결과는 따라주지 못했지만 F1 드라이버로서 우승하기 위한 차를 찾아가는 시즌이었다 볼 수도 있다.
그 이후.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던 라우다는 그동안 모은 자본을 바탕으로 저가 항공사인 라우다 항공(Lauda air Luftfahrt AG)[23][24]을 설립하여 CEO이자 조종사로도 활동한다. 몇 년 후 항공사는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그 때 맥라렌에서 드라이버 복귀를 제의해왔다. 항공사 운영 자금이 필요했던 라우다는 이를 수락하면서 1982년 다시 F1에 복귀한다.
이미 죽을 고비도 한번 넘겼고, 나이도 30대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지만 그의 기량은 여전했다. 복귀 첫 시즌에 5위를 하며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2년 후인 1984년 팀 동료이자 후배였던 알랭 프로스트를 간발의 차로 제치고 개인 통산 세번째이자 마지막 월드 챔피언이 된다.[25] 그리고 85년에 1승을 마지막으로 달성하고 두번째이자 최종 F1 은퇴로 마감한다.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라우다 항공의 CEO로 계속 활동하다가, 주주들과의 마찰로 라우다 항공의 운영에서 손을 떼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재규어 레이싱 F1 팀의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2003년 또 다른 저가 항공사인 Niki Air를 설립, CEO 겸 조종사로 활동 중이었다. 니키 항공은 AB의 계열로 들어갔다가, AB의 파산 후 운항이 중단됐다. 그러자 니키 항공을 2018년 재인수, 라우다 모션 항공으로 개칭했다가 라이언에어에 재매각했다. 이후 2020년에 라우다 유럽 항공사를 창설해 지금까지 운항하고 있다.또한 2012년부터는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F1 팀의 비상임 회장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그러던 중 2013년 싱가포르 GP 때 데이비드 베컴이 방문해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어느 영국 웹사이트가 이걸 '베컴이 자신의 노인 팬과 사진을 찍다 (Beckham poses with an elderly fan at the Singapore Grand Prix)'라고 보도하는 큰 굴욕(...)을 겪었다. 기사는 곧 조롱을 받고 수정되었지만, 라우다의 새 별명이 하나 늘어나게 되었다. #
사고 당시 곁을 지켰던 첫번째 부인과 이혼한 후 두 번의 결혼을 더 했는데, 3번째 부인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여사원으로 무려 30세 이상 연하의 손녀뻘(...)이라고 한다.
4. 사망
2019년 5월 20일 빈에서 7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폐 이식을 받았으나, 8개월 동안 투병한 끝에 타계했다. 빈 슈테판 대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열렸으며, 루이스 해밀턴 등 주요 인사 300여 명과 시민들이 참석해 라우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라우다의 사망 직후 열린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F1 그리드가 온통 라우다를 추모하는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진행했으며, F1 팀의 모든 드라이버와 크루들이 함께 라우다를 상징하는 빨간 모자를 썼다. 메르세데스는 니키 라우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루이스 해밀턴의 44번과 발테리 보타스의 77번 차량을 라우다의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색 모자의 색상으로 헤일로를 부분도장하였다. 해밀턴은 라우다의 헬멧을 오마주한 디자인의 새 헬멧으로 바꾸어 착용하고 경기에 출전하였으며, 페텔 또한 자신의 헬멧에 니키의 이름을 붙히고 출전하였다. 메르세데스 외 다른 9개 팀들[26]도 니키를 상징하는 데칼들을 차량 외부에 붙였다.
러시 : 더 라이벌에서 라우다를 연기했던 다니엘 브륄은 라우다를 추모하는 게시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5. 영화화
니키 라우다와 그의 라이벌 제임스 헌트의 관계를 그린 영화 <러시 : 더 라이벌(Rush)>[27]가 2013년 개봉하였다.감독은 론 하워드, 니키 라우다 역에 다니엘 브륄[28], 제임스 헌트 역에 <토르> <어벤져스>의 스타 크리스 헴스워스가 출연한다. 시간적 배경은 니키가 사고를 당한 시즌인 포뮬러 1 1976 시즌을 다룬다. 영화 촬영을 위해 당시 사용되었던 빈티지 레이싱카를 제작하거나 대여하였다. 인간관계 면에서는 픽션이 많지만, 레이스 구도 및 사고 장면, 차량 및 서킷 재현 등은 엄청난 고증을 거쳤으며 레이싱 장면 또한 CG를 거의 쓰지 않고 촬영되었다.
6. 기타
- 애로우 엠블렘 그랑프리의 매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니키 라우다의 화상과 붕대 투혼을 모댈로 한 닉 라무다 라는 캐릭터가 나오며 주인공 토도로키 타카야가 이 캐릭터를 본받아서 부상을 입었음에도 다시 레이스에 도전한다는 설정이 사용되었다.
- 라우다 항공 004편 추락 사고 당시 보잉이 사고원인 조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급기야 본인이 직접 사고현장까지 가서 조사팀과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 생전 항공 사고 수사대에 출연했던 그는 당시 보잉의 태도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화가 난다고 말했다.[29][30]
- 픽사 영화인 카 독일어판 더빙에서 1인자 캐릭터인 스트립 웨더스를 맡았다. 각국의 대표적 전 레이스 드라이버를 캐스팅하는 방침에 따라간 것.
- 2021년 2월 23일에는 고든 머레이 오토모티브의 슈퍼카인 T.50의 고성능 버젼의 이름이 라우다의 이름을 딴 T.50s NIKI LAUDA로 명명되었다.
7. 연도별 성적
7.1. 포뮬러 1
시즌 | 팀 | 경기 | 우승 | 폴 포지션 | 패스티스트 랩 | 포디움 | 포인트 | 순위 |
1971 | STP 마치 레이싱 팀 | 1 | 0 | 0 | 0 | 0 | 0 | - |
1972 | 12 | 0 | 0 | 0 | 0 | 0 | - | |
1973 | 말보로-BRM | 14 | 0 | 0 | 0 | 0 | 2 | 18위 |
1974 | 스쿠데리아 페라리 | 15 | 2 | 9 | 3 | 5 | 38 | 4위 |
1975 | 14 | 5 | 9 | 2 | 8 | 64.5 | 1위 | |
1976 | 14 | 5 | 3 | 4 | 9 | 68 | 2위 | |
1977 | 14 | 3 | 2 | 3 | 10 | 72 | 1위 | |
1978 | 파르말라트 레이싱 팀 | 16 | 2 | 1 | 4 | 7 | 44 | 4위 |
1979 | 13 | 0 | 0 | 0 | 0 | 4 | 14위 | |
1982 | 말보로 맥라렌 인터내셔널 | 14 | 2 | 0 | 1 | 3 | 30 | 5위 |
1983 | 15 | 0 | 0 | 1 | 2 | 12 | 10위 | |
1984 | 16 | 5 | 0 | 5 | 9 | 72 | 1위 | |
1985 | 14 | 1 | 0 | 1 | 1 | 14 | 10위 |
[1] 파르말라트는 이탈리아의 유제품 회사로 주로 치즈로 유명하다. 당시 브라밤의 메인 스폰서였으며 팀 명칭도 파르말라트였다.[2] 한 마디로 페이 드라이버였다. 다만 그 때는 지금처럼 기업이 스폰서가 되어주는 시스템이 없었기에 자기가 직접 돈을 구해야 했다.[3] 레가조니와 라우다는 사적으로도 관계가 좋았다. 타인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 타입인 라우다가 마음을 열었던 몇 안되는 F1 드라이버였다. 영화 러시에선 레가조니 덕분에 첫번째 부인을 만나는 것으로 등장한다.[4] 이후 레가조니는 200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라우다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끝까지 우애를 증명했다.[5] 이후 영화 러시 : 더 라이벌에서 다니엘 브륄이 이 장면을 재현했는데, "돼지같은 성능"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라우다는 독일어가 모국어인데, 독일어에서 돼지를 뜻하는 Schwein이 심한 욕 중에 하나라는 걸 생각하면 쌍욕을 한 셈이다. 그리고 "이 차는 페라리잖아!" 라며 응수하는 페라리 쪽 엔지니어에게 "똥덩어리겠지! 언더스티어는 밥먹듯이 일어나고, 무게중심은 재난 수준이야. 정말 대단해! 이런 온갖 멋진 시설들을 가지고 이딴 거를 만들어?"라며 매우 성질 냈다.#[6] 라우다는 이미 그 전부터 뉘르부르크링이 구조적으로 안전에 매우 취약하다며 독일 GP를 개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7] 헤스케스-포드 팀의 하랄트 에르틀과 가이 에드워즈, 서티스-포드 팀의 브렛 룽거, 울프-윌리엄스 팀의 아르투로 메르차리오 4명. 특히 메르차리오는 앞에서 사고가 나자 주저 없이 차를 세운 뒤, 소화기 한 대도 조달되지 않은 최악의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엄청난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 라우다를 차 밖으로 끄집어 낸 장본인이다. 에드워즈는 룽거와 에르틀과 달리 사고를 피했음에도 현장으로 돌아와 불에 휩싸인 니키를 끄집어내는데 도움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훈장을 받는다. 하지만 불길이 워낙 거센만큼 손에 2도 화상을 입었다.[8] 참고로 전신 1도 화상만 되어도 살아날지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9] 그리고 이 사건 이후 뉘르부르크링은 한동안 F1 캘린더에서 삭제되었다가 남쪽에 새로이 F1을 위한 GP 슈트레케를 만들고서야 F1캘린더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10] 레이스가 끝난 후 자신의 헬멧을 스스로 벗지도 못할 정도로 몸상태가 만신창이였고, 피트 크루들이 헬멧을 대신 벗겨 주자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붕대가 드러났다고 한다. 이 때 화상 여파로 좋지 않았던 시야는 영화에서 재현되기도 했다.[11] 영화 러시에선 한 기레기가 라우다의 화상입은 얼굴을 빗대어 부인이 얼굴을 보고 뭐라고 하던가요?라고 묻자 처음에는 조금 언짢아하면서도 평소답게 유쾌하게 부인이 말하길 운전은 얼굴이 아니라 발로 하는 거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농담을 섞어 대답했지만 기레기가 재차 "그 몸으로 부인과의 결혼 생활이 계속될 것 같나요?" 라는 굉장히 무례한 질문을 계속 하자 욕을 하면서 기자회견 끝났다며 걸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이 기레기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던 제임스 헌트에게 화장실로 끌려가 입에 카메라를 물고 죽빵이 꽂히면서 헌트에게 "이제 니 아내한테 가서 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봐라, 등신아."라고 들으며 응징당한다. 다만 이 장면은 라우다가 말하길 헌트가 기자를 팼던 일은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 아니고 할리우드식 극적인 장면 가미였다고 한다.당시 헌트에게 망치가 없어 다행이라는 댓글은 덤[12] 독일 GP에서도 그랬듯이 라우다는 서킷의 위험성을 들어 동효 드라이버들에게 일본 GP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번엔 많은 드라이버들이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그랑프리에서 챔피언이 결정되는 무대인데 주최 측이 그랑프리를 취소할 리가... 아아 장사하자! 결국 라우다의 주장에 동조하던 드라이버들도 어쩔 수 없이 레이스에 참가한다.[13] 슬픈 사실은 라우다가 레이스를 포기할 때까지만 해도 쏟아지듯 내렸던 비가 그 후 점점 약해졌다는 것이다.[14] 사실 라우다는 의식을 되찾은 이후 엔초 페라리의 이 같은 결정에 "자신이 없는 동안 라이벌 제임스 헌트가 포인트 가져가는 것을 최대한 견제하는 것이 팀의 임무인데 그걸 왜 포기하냐?"면서 분노했다고 한다. 이 오스트리아 GP에서 헌트는 3포인트를 땄고, 어쩌면 이 덕에 1976 시즌 챔피언이 될 수 있었으니 라우다가 엔초 페라리에게 분노한 것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15] 더군다나 페라리가 라우다의 회복기간 동안, 대체 드라이버로 라우다와 사이가 유독 안 좋았던 브라밤의 카를로스 로이테만을 고용한 일이 겹치면서 라우다와 페라리 간의 사이는 그 전부터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16] 차의 하부 공기압을 낮춰 차를 지면에 달라붙게 하는 기술. 거창하게 서술되는 경우가 많지만 기술적으로는 차체(특히 사이드 팟 부분) 자체를 하나의 윙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래서 '윙 카'라고도 불린다. 물론 사이드 스커트 같은 이런저런 장치들이 달려서 엄밀히 말하면 디퓨저와 다르긴 하지만 디퓨저의 연장선으로 보이도 큰 차이는 없다. 프론트/리어 윙 같은 부분은 추가적으로 부착해야 하는 부품들인 반면, 차를 어떻게 만들던지 간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차체에서 다운포스를 내도록 하다 보니 공기 저항 대비 다운포스 효율이 최고로 좋은 기술이다. 그러다 보니 프론트와 리어 윙의 중요도가 낮아져서(이 시절엔 섀시 자체만으로 전체 다운포스의 90%까지 뽑아냈다. 윙이 장착되어 있지 않거나 장착되어 있어도 작게 달려 있는 차량들이 많았는데 오히려 적정량의 공기 저항이 확보되지 않아 브레이킹 성능 관련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고, 극적인 다운포스를 추구하다 보니 효율을 최대한으로 뽑아내기 위해 지상고도 최대한 낮게 설계하였는데 차체가 바닥에 쓸리면서 차체에서 나오는 다운포스도 순간적으로 거의 없어져 버려서 불안정한 기술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2022년 규정 변경 전까지는 그라운드 이펙트(=극단적인 플로어 설계)가 금지되어 있었고 2022년부터 적용되는 그라운드 이펙트도 1980년대처럼 극한까지 가는 게 아니라, 적정선에서 도입되는 정도로 추진되었다.[17] 훗날 맥라렌 F1을 개발한 전설적인 엔지니어이다.[18] 알파로메오의 엔진을 사용했는데, V형 엔진보다 훨씬 널찍한 플랫 12기통 엔진이라서 엔진룸의 너비도 덩달아 넓었다 보니 사이드 팟 면적이 작았다.[19] 이것은 이미 이전에 미국의 섀퍼럴이 트랜스암에서 2J 섀시 뒤에 2개의 팬을 달아 실험해본 적이 있었다. 이 때에도 넘사급 다운포스를 만들어내며 경쟁자들을 압도했고 이후 해당 시리즈에서 금지되었다.[20] 냉각 목적의 팬은 허용된다는 규정의 틈새를 파고든 전략으로, BT46이 냉각 문제를 겪고 있었기도 하고, 이 팬이 실제로 냉각 기능을 제대로 해서 협회 측에게 OK를 받았다.[21] 다운포스를 만들었던 팬의 경우에는 후방 차량에게 작은 모래 자갈 등의 더티 에어를 심하게 뿌려댔기 때문에 예선 때부터 다른 팀들이 항의를 줄곧 해왔고 당시에 팬 기술을 금지하냐, 마느냐에 말들이 많았다. 판결도 규정 위반과 허용 사이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 FIA에서 최종적으로 브라밤의 손을 들어주었다. 눈치를 보던(당시엔 F1 팀들의 연합인 FOCA가 있었는데 브라밤의 수장이었던 버니 에클레스톤이 이 곳의 리더 비슷한 느낌이었고 이는 브라밤이 타 팀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브라밤에서 그냥 팬의 사용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다. 규정상으로 금지된 것은 그 다음의 일.[22] 로터스가 86점, 페라리가 58점, 브라밤이 53점이었다.[23] 1979년 설립하여 1999년 오스트리아 항공에 인수되었다. 의외로 1992년 6월에 김포국제공항에 취항한 적이 있으며 탑승률 저조로 3개월만인 1992년 9월에 단항했다. 탑승률이 저조했던 이유는 당시 대한항공이 이미 모스크바 경유로 빈에 취항 중 (최종 종착지는 취리히)이었기 때문이다.[24] 보잉 767의 역추진 장치 결함으로 발생한 라우다 항공 004편 추락 사고가 일어난 그 항공사이다. 이 사고는 항공 사고 수사대 시즌 13에 방송되었으며 생전 라우다가 직접 출연하여 인터뷰도 진행했다.[25] 단 0.5점 차 드라이버 챔피언으로, F1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드러이버 챔피언이 되었다. 0.5점의 소수점은 1984 시즌 모나코 그랑프리가 폭우로 중단되어 드라이버들이 원래 포인트의 절반만을 받은 것 때문에 부여되었다.[26] 레이싱 포인트, 윌리엄스, 페라리, 알파 로메오, 하스, 레드불, 토로 로쏘, 맥라렌, 르노 등 전체[27] 원제는 'Rush'이지만 국내에서는 부제가 붙어 '러시 : 더 라이벌'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28]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독일 육군 저격수 프레데리크 촐러,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헬무트 제모로 출연한 배우. 라우다와의 외모 싱크로율이 상당하다. 라우다가 그랬듯 입이 튀어나오도록 틀니를 했으며 촬영을 위해 니키 라우다 특유의 오스트리아 억양의 영어 발음까지 익혔다고..[29] 그도 그럴 것이 NTSB와 FAA가 협박에 가깝게 사고원인이 설계결함임을 얘기하고 나서야 보잉은 767의 역추진 장치에 문제가 있었다는걸 인정했다. 또한 니키는 이 사고 때문에 기단 부족과 신뢰도 저하로 인해 승객 운송량이 크게 떨어져 억울하게 항공사를 날려먹을 뻔 했다.[30] 아이러니하게도 라우다 항공 추락사고는 이후 보잉 737 MAX 결함사태때 보잉의 이와 같은 태도가 과거 보잉 737의 러더 듀얼서보벨브 결함 사태와 같이 회자되기도 했다. 보잉은 737의 방향타 결함 때도, 767의 역추진장치 결함 때도 끝까지 NTSB 조사보고서에 명시된 결함을 인정하지 않았던 전과가 이미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문제가 된 부품을 소리소문 없이 리콜하는 행태를 보여 당시에도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