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 경력
1.1. 2000~2008 시즌
(출처 : 포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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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제일고등학교 3학년 때 김상진, 서재응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의 고졸우선 지명을 받은 김상훈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2000년에 입단한 후 최해식이 은퇴한 2001년부터 주전 포수를 맡아 왔다.[1]
공격력에서는 당시 박경완, 홍성흔이나 진갑용이 있어서 묻히지만 포수임을 감안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였다.[2]수비에서는 2003년에는 도루저지율을 무려 0.554를 찍으며 역대 도루저지율 1위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3] 이렇게 초기 4년이 김상훈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2004년 어깨 수술을 받은 뒤 도루저지율이 급락했고, 국민 볼배합[4]이라고 허구한 날 까이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KIA가 2번이나 최하위를 할 당시의 주전포수가 김상훈이었다. 그러나 백업 역할을 해 줘야 할 차일목과 송산에 비해 김상훈의 실력이 월등히 우수했고[5] 이재주가 있기는 했지만 이 쪽은 그나마 공격력이 그럭저럭 무난해서 포수로는 안 나오고 지명타자로 나왔다. 그래서 그나마 수비가 좋은 김상훈이 계속해서 주전포수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2008년 포수 출신인 조범현 감독이 KIA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후 백업 포수인 차일목과 함께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6]
여담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8번 타자이자 마지막 선발 포수로 출전했다.[7]
1.2. 2009 시즌
KBO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수상자 (2009) |
2009년 한국시리즈 1차전 5회초 2사 1,3루에서 폭투 상황에 3루 주자를 아웃시키고 웃는 모습.
2009년 주장으로써 이종범과 함께 팀을 잘 이끌어나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타격면에서는 2009년 규정 타석 채운 타자들 중 제일 낮은 0.230을 기록, 최악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타율이지만... 득점권 타율은 0.320, 특히 2아웃 상황 득점권 타율은 0.389였다. 변태스탯도 이런 변태스탯은 없다. 또 그에 힘입어 이 시즌에 12홈런(개인커리어 역사상 처음으로 두자릿수 홈런) 65타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그의 프로데뷔 후 최다타점이었으며 커리어하이라고 볼 수 있는 03시즌(타율 0.279, 홈런 7개, 타점 46타점)보다 19점이나 높은 타점이다.[8] 게다가 타격 지표마저 차일목보다 더 우위에 있다.
그리고 리그에서 유일하게 많은 포수 수비이닝을 소화한데다가 박경완, 강민호, 진갑용 김정민 등이 몽땅 부상으로 골골댔기 때문에 골든 글러브를 받을 만한 포수도 없었다. [9] 그래서 당연히 상대적으로 우수한 성적을 거둔데다가 팀을 우승시킨 김상훈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 것.
타격을 제외하면 포수로서의 약점은 2할대에 머무르는 도루저지율. 하지만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SK 주자들의 도루를 3번이나 잡아내면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물론 타격에서는 아웃카운트 판매기(...)였지만 훌륭한 리드와 통솔력으로 KIA의 V10을 이끌어냈다. 그래서 FA를 신청했고 그 해 1호 FA 계약을 마쳤다. 계약금이 8억원이며, 연봉은 2억 2500만원으로 그 동안의 노고를 생각하면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1.3. 2010 시즌
2010 시즌에도 여전히 변태스탯은 계속되는 듯. 초반 9경기 타율이 2할 6푼인데 타점은 8점을 올렸다. 그 중 7점이 2아웃 상황. 게다가 25경기를 치르고 나서 결과를 보니 타율 0.296으로 팀내 수위타자. 더 황당한 것은 그 25경기 동안 서른 번 가까이 출루했는데 득점 0(...).이 시즌에 포수 미트를 도둑 맞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포수는 새로운 미트에 적응하는데 한두달 걸린다고. 그러나 미트를 가져갔던 팬이 자수하며 돌려줬다고 한다.
2010년 8월 13일 롯데전 2사 만루 상황에서 상대 투수 배장호의 초구를 공략해 만루홈런을 쳐냈다.
하지만 2010년 팀이 4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윤석민, 유동훈, 김선빈, 손영민과 함께 기아 4강 탈락의 오적으로 뽑혔다.
1.4. 2011 시즌
2011년 이후로는 노쇠화가 오기 시작했는지 선발출장 빈도가 줄어들었고, 차일목이 주전포수 자리를 이어받으며 백업으로 물러났다.
2011년 8월 어깨부상으로 6개월 간의 재활치료 판정을 받아 사실상 시즌아웃.
1.5. 2012 시즌
3월 4일 실시한 도핑검사에서 '특정약물'인 프레드니솔론(Predinsolone)이 검출되어 엄중경고 조치를 받았다. 다만 해당 약물 성분이 국제반도핑위원회 규정상 의약품에 일반적으로 함유돼 있어 '도핑 규정을 본의 아니게 위반한다고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도핑물질로 남용될 소지가 적은 물질'[10]로 분류되어 있었고, 청문회를 통해 김상훈이 치료 목적으로만 해당 약물을 사용하였음과 은폐 및 경기력 향상 의도가 없었음이 입증자료로 충분히 확인됐기에 그 정도로 끝났다. 참고로 프레드니솔론의 대표적인 부작용은 근력 약화(...)다. 스테로이드라고 다 같은 스테로이드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자기 관리에 엄격해야 할 프로선수가 야구규약 및 도핑금지 규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약물을 부주의하게 복용한 것 자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 같은 약물을 복용하다 적발된 주니치 드래곤즈의 이바타는 무려 300만엔의 벌금 처분을 받았다.다만 여기에서 주된 쟁점이 되는 것은, 진짜 경기력 향상을 목적으로 약물을 복용한 경우, 이를테면 대놓고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복용한 진갑용과 같은 경우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 하고많은 약쟁이들 가운데 왜 하필 진갑용인가 하면, 2002년 아시안게임 당시 도핑에 걸린 진갑용이 고대 후배인 김상훈을 아시안게임에 보내고 싶어 소변에 약을 탔다(...)는 변명을 들이댔기 때문이다. 당시 이에 대한 김상훈의 반응은 "모르는 선배가 왜 나에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 모르게 잘 챙겨주고 있다고 생각하겠다."(...) 덕분에 인터넷 야구 커뮤니티에서 진갑용의 약물복용이라는 주제가 나올 때마다 진갑용을 쉴드 치기에 급급한 팬덤에 의해 계속 소환되고 있다. 단순한 치료 목적으로 사용한, 그것도 경기력 향상은 커녕 경기력 저하를 우려해야되는 프레드니솔론과 도핑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테스토스테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시즌이 시작한 후에는 노쇠화 때문인지 별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다. 차일목이 컨디션 난조로 2군으로 갔을 때는 송산에게 선발 라인업에서 밀리기까지 하였을 정도.
8월 22일 무등야구장 LG 트윈스전에서 팀이 4:5로 리드하던 9회초,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한 윤요섭 대신 대주자로 나온 이대형을 도루저지로 잡아냈다! 이후 팀은 상대의 추가 득점을 막아내며 4:5로 승리.
8월 26일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2회초 2사 1,2루 상황에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선취 쓰리런 홈런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팀은 6:0으로 승리.
9월 2일 한밭야구장 한화 이글스전에서 8:1 6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만루홈런을 터뜨렸다!
1.6. 2013 시즌
서재응과 김진우가 선발일 때 같이 선발 출장을 하였고, 간간이 백업 포수로도 나왔다. 그리고 늘상 그랬듯(...) 나올 때마다 욕을 먹었다. 그런데 성적은 또 나쁘지 않은 것이, 4월 27일 경기 후를 기준으로 타율이 .286에 OPS가 .741(...).4월 27일 오른손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 대신 올라온 선수는 이성우. 이후 어찌저찌하다 5월 14일 1군으로 다시 올라왔다.
5월 15일, KIA의 패배에 쐐기를 박는 어이없는 플레이들로 팬들에게 무참히 까였다.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3:3으로 균형을 맞추며 경기하던 9회말, 1사 만루 끝내기 찬스에서 박희수에게 삼진을 당하고 물러났다. 그 후 연장전에서 11회초에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던 송은범의 원바운드 투구를 손으로만 블로킹하여 결국 한 점을 내줘 공수 양면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11회말, KIA가 여차저차 2사에 주자 두 명을 루상에 놓으며 또 경기가 뒤집힐 수도 있다는 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타석에 등장한 건 김상훈(...). 결국 그는 시원하게 2루수 플라이를 때리며 경기를 매듭지었다. KIA는 이 경기에서 SK보다 안타를 더 많이 치고 도루를 더 많이 하고 삼진을 덜 당하고 실책을 덜 하고도 패했는데, 전적으로 패전의 책임은 김상훈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나올 때마다 욕을 먹었지만, 김상훈만큼 수비할 줄 아는 포수가 차일목 정도를 제외하면 아직 KIA에는 없는지라 여전히 애증의 대상이다. 그리고 5월 말, 근육통으로 2군으로 내려가자 또다시 김상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차일목의 컨디션 조절 차원 2군행으로 6월 26일 1군 복귀를 했는데 9연승을 달리던 팀이 복귀하자마자 1무후 4연패 하는 등 선발로 나온 7경기 중 1승 1무 5패라는 거지같은 성적을 내면서 역시 까이는데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7월 6일에 차일목이 선발로 나오자마자 기아는 이겼다..
그 이후에도 차일목을 2군으로 보내면서까지 꾸준히 선감독이 밀어주었으나 기아는 6위까지 DTD.. 결국 박경태와 함께 8월 8일자로 2군행. 기아팬들은 그만 은퇴하라고 아우성이었다. 선동열 감독이 포수 강제 리빌딩 차원에서 이홍구를 중용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은퇴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7. 2014 시즌
하지만 2014년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차일목과 마스크를 나눠썼다.KIA팬들의 사실상 공적인 상태인데 무안타에 도루저지가 없는 수준이라 차일목과 함께 단골 까임 대상이었다. 그나마 차일목은 만루홈런을 친 이후 도루도 간간히 저지하고 타격도 약간 좋아지기라도 했지 이 양반은 그런거 없는 상태라 경기를 질 때마다 늘 원흉으로 지목되던 수준.
결국 4월 16일에 경미한 부상 탓에 지명타자로 출전했었던 김주찬과 함께 말소되었다. 다만 본인이 자청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워낙 이미지가 나빠서 별 좋은소리를 못 들었다(...). 빨리 은퇴하고 코치연수나 갔다오라는 게 대다수 팬들의 중론이었다.
최해식에 따르면 은퇴 수순에 들어간 듯 하며 코치 연수를 준비중이라고 한다.
앞으로 코치로서의 활약을 기대해보자.
이후 7월 8일에 은퇴 기사가 뜨며 은퇴가 확정되었다. KIA 김상훈, 15년 정든 마스크 벗는다 기사에 의하면 이미 6월 중순부터 외국인 선수 점검차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김상훈이 데려온 첫 외국인 선수가 바로 저스틴 토마스.
김상훈의 아내와 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2군에 자청해서 내려갔을때 이미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1) (2)
이후에는 시즌 종료 때까지 선수단과 합류하면서 팀 분위기를 추스리는 코치 및 멘토 역할을 하였으며 시즌 후 마무리 훈련 때에는 배터리코치 대행 역할[11]을 수행했다. 마무리 캠프 이후에는 지도자 연수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KIA 타이거즈와 결연을 맺고 있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미네소타 트윈스를 거치며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2. 국가대표 경력
2.1.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상술했듯 진갑용의 약물 문제로 대타로 발탁됐고, 대표팀의 우승으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1] 참고로 90년대 주전 포수를 맡아왔던 정회열이 1997년 말 방출되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고 1998~2000 시즌은 김지영, 권오성 등의 포수유망주들의 더딘성장과 김상훈, 차일목의 대학행으로 인해 주전포수인 최해식을 빼면 포수가 없었다! 결국 1998~2000시즌동안 최해식은 혹사를 당했고, 후유증때문에 2001년 33세의 나이에 조기은퇴한다.[2] 해태에서 기아로 바뀌면서 김성한 감독 시기 기아의 공격력은 최고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종범과 김종국이 테이블세터에서 꾸준히 도루와 안타로 밥상을 차리면, 중심타선에서 장성호, 박재홍, 홍세완 등이 버티고 있었고 이재주, 신동주나 정성훈(박재홍과 트레이드), 김경언도 타격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김성한 감독이 거포를 중시했고, 단장 정재공도 비슷한지라 마해영과 심재학을 데려오지만 실패, 박재홍도 1년 활약하고 팀과 안맞아 SK로 떠나고 유남호, 서정환을 거쳐 주전들의 줄부상과 노쇠화가 겹치고 투수진도 약화되면서 흔히 기탈리아라고 불리는 타선 약화 현상이 지속된다.[3] 특히 삼성은 그해 KIA를 상대로 단 한개의 도루밖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KIA를 상대로 5승2무12패로 절대적인 열세를 기록한다.[4] 긍정적인 별명이 아니다. 국민들도 쉽게 알 수 있는(...) 수준 이하의 볼배합을 보인다고 붙여진 별명이다.[5] 차일목은 서정환 이전까지 2군 포수였고, 서정환 시기에 그나마 1군에 올라왔지만 타격도 수비도 영 시원찮았다. 그나마 조범현이 감독이 된 이후에 월등히 발전했다. 송산은 타격이 김상훈보다는 양반이었지만 수비(리드 등)가 월등히 떨어졌다.[6] 2008 시즌에는 시즌 초반 부상을 당해 35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 해 이범석이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 뻔했을 때도 차일목과 배터리를 이루고 있었다.[7]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선발 라인업은 1번 김종국-2번 최익성-3번 장성호-4번 산토스-5번 신동주-6번 이동수-7번 김창희-8번 김상훈-9번 홍세완이었다.[8] 굳이 타선수와 비교를 하자면 2009시즌 홍성흔이 119경기 64타점이다. 0.371을 기록한 선수보다 타점이 많다는 것.[9] 이 외의 팀을 보더라도 받을 만한 선수가 없었다. LG의 주전포수였던 조인성도 09시즌에는 김상훈보다 더 떨어지는 성적을 냈고, 두산의 최승환도 마찬가지였다. 한화의 신경현은 타격지표가 더 우수하지만 한화가 최하위를 한데다가 출전 경기수가 훨씬 모자라며 히어로즈 강귀태가 그나마 타격지표에서 비벼볼만 했지만 수비가 시원찮은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10] 이 점에서 일단 경기력 향상 약물(Performance-Enhancing Drugs)을 복용한 다른 사례들과는 구분된다.[11] 그도 그럴 것이 감독이 바뀔 때 배터리 코치도 같이 바뀌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