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31 21:16:13

궁중어


宮中語

1. 개요2. 발달3. 특징
3.1. 어휘3.2. 화법
4. 단어5. 자료6. 현황7. 대중매체에서

1. 개요

궁중(宮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끼리 쓰던 특수한 말. 왕족을 매우 높여 부르는 극존칭을 포함해서, 왕족의 신체, 생리, 사용하는 물건 등까지 높여 불렀다. 이는 서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차별을 두어 왕실의 권위를 높이거나, 천하거나 불쾌하게 여겨지는 말을 왕족에게 함부로 쓸 수 없어 에둘러 표현하기 위해 발달한 것이다.

궁중어라고 하여 반드시 궁중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고, 일반인들도 왕족이나 왕족의 신체, 생리, 물건 등을 이를 때에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세워져서 사멸한 단어들이 많지만, 마누라 같은 소수의 단어들은 일반 언어에 스며들어 사용되고 있다.

2. 발달

궁중은 일반 사회와 격리된 별개의 사회라고 할 수 있고, 그 특성상 폐쇄적인 성격도 나타나므로, 언어도 마찬가지로 일반 사회에서 쓰는 것과는 차별화되어 간다. 거기에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는 유별 의식과, 왕권을 드높이려는 목적이 작용하여 궁중어라는 특수한 언어가 탄생하였다. 특정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점에서는 은어의 특성도 띈다.

한국의 궁중어는 상고시대부터 있었겠으나, 고려 이전의 궁중어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조선 왕실고려 왕실의 인적·물적 자산을 이어받았고, 고려 왕실에 신라 왕실과 통혼하며 밀접한 혈연 관계를 맺었으므로, 신라부터 대한제국까지 계승되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대표적으로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주요 인물에게 쓰던 '마누라'라는 경칭은, 그 단어의 연원을 신라 시대의 '마립간'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고려가 건국되고, 수도개경으로 정하면서 서라벌에서 만들어진 신라 왕실의 궁중어에 더해 개성 지방에서 쓰던 말들이 궁중어로 유입되었을 것이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 한성부로 천도하면서 지금의 서울 지방에서 쓰던 말들이 궁중어로 유입되는 과정을 거치며 약간의 변형들을 거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원 간섭기 이후에는 고려 왕실과 원나라 황실이 통혼하며 몽골로부터 복식이나 음식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것들을 지칭하는 몽골어 단어들이 궁중어로 많이 유입되었다. 이것들 중 그대로 조선 왕실로 이어져 사용된 것이 많은데, 예컨대 조선 시대에 왕족의 식사를 '수라(水剌)'라고 한 것도 본디 몽골어로 음식을 뜻하는 '슐라'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3. 특징

3.1. 어휘

한국의 궁중어는 원 간섭기의 영향으로 몽골어에서 유래한 궁중어도 많지만, 일반 언어에 비해 한자어를 사용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무래도 순우리말보다는 한자어가 더 격이 높다는 인식에서 그렇게 된 듯하다. 일반 사회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이 많고, 워낙 어려운 한자어가 많아 궁중어는 웬만해서는 일반인들이 바로 알아듣기 힘들다.

그렇다고 순우리말의 비율이 적은 것도 결코 아니다. 특히 바깥 사회보다 변화가 느리고 보수적인 궁중 사회의 특성상 언어도 느리게 변화하여 옛 한국어의 어휘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전해지는 궁중어는 고대 한국어중세 한국어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예법이 까다롭고, 위계 질서가 분명한 왕실 특성상 겸양어와 극존체의 표현들이 많고, 직설적이기보다는 에둘러 표현하는 화법이 발달하였다. 을 왕이라 직접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꺼려 하여 대전(동음이의어)#기타 한자어(大殿)이라 부른 것이나, 왕을 상징하는 (龍)이나 (玉)에 빗대어 왕의 몸을 옥체(玉體),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 등으로 부른 것이 그 예이다.

마찬가지로 왕비도 직접적으로 거론하기를 꺼려 왕비가 기거하는 전각의 별칭인 중궁(中宮), 중전(中殿), 내전(內殿), 곤전(坤殿) 등으로 불렀으며, 왕세자동궁(東宮), 춘궁(春宮) 등으로 불렀다. 이처럼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이 많았다.

3.2. 화법

대화의 전체적인 면에서도 일반인들은 듣고 바로 뜻을 알기 어려운 화법을 많이 썼다. 과거에도 백성들은 구어체를 많이 썼으나, 상류층에서는 문어체를 많이 썼는데, 궁중에서는 그 문어체의 사용 비율이 더 높았을 것이다. 이는 직설적인 화법을 피하고, 에둘러 말하려는 궁중어의 습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것이 요즈음에 흔히 말하는 교토식 화법이랑 비슷한데, 궁중은 각자의 정치적인 입장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므로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고,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체통을 크게 깎는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의 훌륭한 예시가 바로 1945년 8월 15일쇼와 덴노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며 직접 녹음한 옥음방송이다. 여기서 "은 시운(時運)이 흘러가는 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와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쉬운 말로 풀면 "연합국에게 끝내 패하여 항복하는 나라의 치욕을 당하게 되었으나, 이것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열고자 한다." 정도의 뜻이다. 일본의 대다수 국민과 한국인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다가, 추후에 신문 보도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포고령을 보고 "그게 그 뜻이었구나"라고 대략적으로 유추할 정도였다.

4. 단어

  • 거동(擧動), 거둥: 나들이.
  • 건개: 반찬
  • 기수: 이불
  • 두굿겁다: 기쁘다
  • 매화:
  • 매화틀: 변기
  • 마리: 머리
  • 보령(寶齡): 왕의 나이.
  • 붕(崩), 붕어(崩御), 붕조(崩殂): 본디 황제의 죽음에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지만, 외왕내제를 표방하던 한국왕조들도 임금의 죽음을 이따금씩 이렇게 표현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왕에게만 사용하는 것이 통례였고, 그 밖의 왕족들에게는 '붕'이나 '붕어'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 송송이: 깍두기
  • 수라(水剌): 왕·왕비·대비·왕세자·왕세자빈 등 왕실 주요 인물의 식사. 그 밖의 왕족들에게는 사용하지 않았다.
  • 승하(昇遐): 왕·왕비·대비·왕세자·왕세자빈 등 왕실 주요 인물의 죽음을 두루 이르는 말. 그 밖의 왕족들에게는 사용하지 않았다.
  • 엄색(嚴色): 왕이 화가 난 표정
  • 옥루(玉淚): 왕의 눈물.
  • 옥안(玉顔): 왕·왕비·대비·왕세자·왕세자빈 등 왕실 주요 인물의 얼굴을 두루 이르는 말.
  • 옥음(玉音): 왕의 음성(音聲).
  • 옥체(玉體): 왕·왕비·대비·왕세자·왕세자빈 등 왕실 주요 인물의 을 두루 이르는 말.
  • 용안(龍顔): 왕의 얼굴.
  • 조라치: 잡역부
  • 조리개: 장조림
  • 족건(足巾): 버선
  • 침수(寢睡):
  • 통기(通氣): 왕의 방귀.
  • 프디: 깔고 자는 .
  • 합궁(合宮): 합방(合房), 즉 왕과 왕비, 또는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성관계를 의미한다.
  • 혈(血):
  • 훙(薨), 훙서(薨逝), 훙거(薨去): '붕'보다는 한 단계 낮은 급의 표현으로, 황실에서는 황제를 제외하고 황후·태후·황태자·황태자비 등의 죽음에 사용하던 표현이었고, 제후국에서는 왕을 비롯하여 왕비·대비·왕세자·왕세자빈 등 왕실 주요 인물의 죽음에 사용하였다. 그 밖의 왕족들에게는 사용하지 않았다.

5. 자료

광해군 대에 쓰여진 계축일기혜경궁 홍씨가 썼다는 한중록 등의 궁중 문학에서 당대 궁중어가 많이 나온다. 특히 한중록은 사극들이 대사 고증을 하기 위해 많이 참고하는 자료이다.

6. 현황

한국의 경우, 마지막 군주정 국가인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공화정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사멸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1966년까지는 살아있었기 때문에 구황실이 있던 창덕궁 낙선재에서는 1960년대까지 사용되었으나, 순정효황후가 승하한 이후로는 아예 사멸하였다. 그 이후에 낙선재에 있던 이방자 여사는 사망할 때까지도 한국어를 못 하였고, 덕혜옹주도 태어나서 오랜 기간을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궁중어 사용에 익숙치 않아 궁중어는 순정효황후 승하 이후로 사실상 단절되었다.

다만 소수의 단어들은 조선왕조의 수도였던 서울에서, 서울 방언에 녹아들어 여지껏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했듯 '마누라'라는 단어는 과거 왕족에게 사용하던 경칭이었다가, 지금은 의미가 변하여 남편이 아내를 호칭하는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은 궁중어가 서울 방언에 녹아든 것은 조선왕조 시절에 경화세족(京華世族)[1] 중 궁중에 출입하던 관리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입된 것이기도 하고, 왕족들이 출궁 이후에 대를 이으며 경화세족으로 편입된 영향도 있다. 또, 궁에서 일하던 궁인들이 경술국치 이후 출궁하여 서울시내 거주하며 그들로부터 퍼진 것도 있다.

대한제국 황실이 사라진 이후 잘 쓰이지 않던 궁중어를 최근에 재발굴하여 신조어처럼 쓰는 경우도 있는데, 최근에는 아주 잘생긴 사람의 얼굴을 일러 왕의 얼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던 '용안'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 것이 그 예다. 위의 '마누라'와 더불어 의미가 바뀌어 살아남은 궁중어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황실이 유지되고 있으므로 내부적으로는 궁중어를 쓰고 있다. 다만 국민들에게 대외적으로 메시지를 내보낼 때에는 예전처럼 궁중어를 쓰지는 않는다.

7. 대중매체에서

군주정이 폐지된 한국에서는 왕실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나마 고증에 충실하다는 KBS 대하드라마마저도 궁중어를 완벽히 고증하지는 않으며, 어미하소서체를 쓰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퓨전 사극으로 가면 아예 현대 말투를 쓰는지라, 화면을 가리면 이게 사극인지 현대극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수라를 들 때, '잡수소서', 혹은 '드소서'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궁중어 표현대로라면 '젓수소서'라고 해야 맞다. 이것을 잘 고증한 드라마가 2001년SBS에서 방영한 여인천하[2]이다.

사극의 궁중어 고증 미비가 만연한 데에도 불구하고 개중에는 궁중어를 고증하려고 노력한 작품들도 있는데, 이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 바로 1995년에 SBS에서 방영한 장희빈1998년MBC에서 방영한 대왕의 길이다. 두 드라마 모두 임충 작가[3]가 집필했는데, 한중록을 많이 참고한 흔적이 엿보인다. 최근에도 대부분의 사극에서 만연한 잘못된 궁중어를 벗어나 보다 사실에 가깝게 고증하려는 작품들이 간간히 나오고는 있다.
[1] 조선 시대에 서울에 살던 양반들.[2] 이 드라마는 퓨전 사극의 형태를 많이 따르고 있음에도, 당대 복식이나 말투 고증 등은 준수하게 지킨 편이다.[3] 배우 임호의 부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