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팅겐 대학교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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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팅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 Georg-August-Universität Göttingen | |
<colbgcolor=#153268><colcolor=white> 표어 | In publica commoda (공공의 선을 위하여) |
개교 | 1737년 ([age(1737-01-01)]주년) |
국가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총장 | 라인하르트 얀(Reinhard Jahn) |
소재지 | 독일, 괴팅겐 (Wilhelmsplatz 1, 37073 Göttingen, Germany) |
학생 수 | 31,619명 (2017/18) |
교원 수 | 4,209명 (2019) |
교색 | Uni-Blau (#153268) [1]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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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파일:Göttingen_asv2022-06_img42_Uni_Aula_Wilhelmsplatz.jpg | 파일:Goe.Uni.SUB.detail.03.jpg |
알테 아울라(Alte Aula)[2] | 대학 중앙 도서관(SUB)[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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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153268> 대학 소개 |
괴팅겐 대학교[4]는 독일 니더작센 괴팅겐 시에 위치한 국제적으로 중요한 연구 대학이다. 영국 국왕이자 하노버의 선제후였던 조지 2세에 의해 1737년 계몽주의 시대에 설립된 오랜 전통을 지닌 이 대학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개혁대학교 중 하나였으며, 20세기에는 수학과 이론 물리학의 총 본산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현재 정식명칭은 괴팅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Georg-August Universität Göttingen)이며, 2003년에 공법 재단(Stiftung Öffentlichen Rechts)으로 전환되었다.[5] 13개 학부로 구성된 괴팅겐 대학교는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아우르고 있으며, 현재 약 30,000명의 학생이 210개 이상의 학위 과정을 통해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6] 지금까지 대략 4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곳으로. 이러한 역사와 전통 때문에 유럽 내에서는 손꼽히는 명문 대학교로 명성이 높다. 2010년 타임즈지의 대학 랭킹에서는 독일 내에서 최고의 대학, 유럽 내에서 9위를 차지했다.
2. 역사
2.1. 설립 배경
1734년, 영국 국왕이자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인 조지 2세는 하노버의 총리인 게를라흐 아돌프 폰 뮌하우젠에게 괴팅겐에 대학을 설립하여 계몽주의 이념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여 설립되었다. 당시 유럽에 불고 있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으로 설립된 대학 답게 그에 걸맞은 교수진이 구성되었으며, 이런 학풍을 따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괴팅겐은 국가도 아니고 독일도 아닌 유럽의 대학이다"라고 유명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초기의 대학 인프라는 소박하여 승마장과 펜싱 하우스만 있었으며, 강의는 파울리너 교회, 니콜라이 교회,[7] 도미니카 수도원 또는 교수들의 집에서 열렸다. 대학 강당은 19세기에 들어서야 건설되었다.
2.2. 18 ~ 19세기
18세기 내내 괴팅겐 대학교는 자유로운 정신과 과학 탐구에 대한 헌신으로 독일 대학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1769년부터 1799년까지 저명한 학자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Georg Christoph Lichtenberg)가 실험 물리학 교수직을 맡았으며,[8] 1812년까지 20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을 자랑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당대 가장 현대적 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는 법학부가 특히 유명해졌으며, 요한 슈테판 퓌터(Johann Stephan Pütter)와 구스타프 휴고(Gustav Hugo), 카를 프리드리히 아이히혼(Karl Friedrich Eichhorn) 등이 법학을 가르쳤다. 하인리히 하이네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 같은 유명 인사들도 이곳에서 법학을 공부했다.괴팅겐 대학교는 신학과 고대 연구의 국제적 중심지로도 인정받았다. 1809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이곳에서 형이상학과 심리학을 공부했으며, 대학은 계몽주의 기관으로서 괴팅겐 역사학파를 배출했다. 그림 형제도 이곳에서 가르치며 독일어 사전을 처음으로 편찬했다.
그러나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 왕위를 이어받으며, 살리카법을 따르는 하노버 왕국에서는 빅토리아의 삼촌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왕위를 이어 받게 되었다. 평생 군생활을 하였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는 자유주의를 경멸하였으며, 권위주의적인 전제군주국으로 개혁하기 위해 자유 헌법을 철회하였다. 이에 그림 형제를 포함한 괴팅겐 대학교의 일곱 명의 교수가 공개적으로 항의를 하였는데, 하노버의 왕에 의해 이들이 추방되면서 대학의 명성은 타격을 입었다. 이후 '괴팅겐 7 교수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교수와 학생들의 정치적 소동이 발생했고, 1834년에는 학생 수가 860명으로 감소했다.
2.3. 20세기
1920년 괴팅겐 수학자들의 단체 사진[9] |
이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괴팅겐 대학교는 다시금 학문적 정점을 이루었다. 괴팅겐은 자연과학, 특히 수학에 강한 집중을 유지했다. 이 전통은 '수학의 왕자'로 알려지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는 18세기에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물리학/수학 분야 교직을 맡았다. 가우스가 직접 설립한 천문대가 지금도 멀쩡히 남아있다. 그 후 페터 구스타프 르죈 디리클레와 베른하르트 리만이 차례로 교수직을 맡아 대수학, 기하학, 수론 분야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00년경에는 다비트 힐베르트와 펠릭스 클라인이 전 세계의 수학자들을 괴팅겐으로 끌어들였으며, 이로 인해 괴팅겐은 20세기 초에 수학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03년, 괴팅겐 대학교의 교수진은 121명, 학생 수는 1529명이었다. 유명한 철학자이자 현상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에드문트 후설이 괴팅겐으로 와 강의하기 시작했다. 루트비히 프란틀(Ludwig Prandtl)은 1904년에 괴팅겐 대학교에 합류하여 향후 20년 동안 유체역학과 항공역학의 선두 주자로 발전시켰다. 1925년에는 카이저 빌헬름 유체역학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경계층 개념을 도입하고 바람의 방향에 따른 공기 흐름을 계산하여 수학적 항공역학을 창시했다. 프란틀의 많은 제자들이 항공역학 분야에서 기본적인 기여를 했다.
물리학에서 양자역학이 태동하고 현대물리학이 한창 개진되어기던 시기, 1921년부터 1933년까지 물리학 이론 그룹은 비상대론적 양자역학 이론의 발견자 중 한명인 막스 보른이 이끌었다. 그 뿐만 아니라 막스 플랑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은 거의 모두 괴팅겐 대학교를 거쳐갔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알려진 미국 과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막스 보른의 가장 유명한 제자 중 한 명으로 이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물리학과와 수학과의 커리큘럼이 굉장히 타이트하게 구성되어있다.
이를 바탕으로 20세기 초반 이후 폭발적으로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독일 내부에서는 '경제기적'(Wirtschaftswunder,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라인강의 기적)과 더불어 '괴팅겐의 기적'(Wunder von Göttingen)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구 10만 내외의 작은 도시에서 끊임없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자유주의적 학풍은 19세기 말에 다시 되살아났으며, 1919년 에미 뇌터가 여성으로서는 독일 최초로 교수로 임명된 곳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괴팅겐 대학 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의 유수한 대학 및 학계들 덕에 독일어가 국제 학술 언어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전세계가 영어로 논문을 쓰듯, 당시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출판되는 논문들 조차 독일어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어야 완전한 학문적 훈련을 받은 것으로 여겨졌기에, 많은 미국 학생들은 독일에서 유학하기를 바랬고, 독일에서 공부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이에 자연스럽게 괴팅겐 대학교는 미국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많은 미국 정치인, 변호사, 역사가, 작가들이 괴팅겐에서 교육을 받았다. 예를 들어, 괴팅겐에서 2년간 공부했던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은 국무장관과 하버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조지 티크너(George Ticknor)도 괴팅겐에서 2년 동안 고전 문학을 공부했다. 외교관이자 역사가인 존 로스롭 모틀리(John Lothrop Motley)도 괴팅겐에서 2년 동안 공부하면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 정치인이자 역사가인 조지 밴크로프트 (George Bancroft)는 1820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은행가이자 JP모건 체이스의 설립자인 J. P. 모건도 괴팅겐 대학교에 진학, 졸업하였다.
2.4. 나치 독일시기
하지만 괴팅겐 대학교도 나치즘의 열풍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30년대에 괴팅겐 대학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연구로 대표되는 "유대인 물리학"에 대한 나치의 탄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3년에 있었던 "대숙청"으로 불리는 사건에서 막스 보른, 빅토르 골트슈미트(Victor Moritz Goldschmidt), 제임스 프랑크, 유진 위그너, 레오 실라르드, 에드워드 텔러, 에드문트 란다우, 에미 뇌터, 리하르트 쿠란트(Richard Courant) 등의 학자들이 추방되거나 나치를 피해 도망쳤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나치 독일을 떠나 미국, 캐나다, 영국 등으로 피신했다. 대숙청 이후, 1934년에 독일 수학의 상징이 된 다비트 힐베르트는 나치 교육부 장관 베른하르트 루스트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루스트가 "유대인의 영향에서 벗어난 괴팅겐의 수학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힐베르트는 "괴팅겐에는 더 이상 수학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나치로 인해 독일 학계에 몸담았던 수많은 인재들이 사망하거나 외국, 특히 미국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유망했던 학자들 크게 줄어들어 괴팅겐 대학과 독일 학계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반대로 한 때 미국인이 독일로 유학가 배움을 받고자 했던 학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미국인들도 더 이상 독일로 유학할 필요가 없어졌다. 결과적으로 세계 학계의 중심도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2.5. 현대
괴팅겐 대학교는 1945년 영국의 통제하에 서부 지역에서 최초로 재개된 대학이 되었다. 당시 4,296명의 학생이 등록했으며, 이 중 78%가 남성이었다. 남학생 중 98.5%가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고, 이들 중 약 1/3은 장교 출신이었다. 이들 중에는 괴팅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두 번의 국가시험을 통과한 후에 독일 대통령이 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도 있었다. 또한, 후에 여러 부서에서 연방 장관과 총리실장을 역임한 전쟁 참전자인 호르스트 엠케(Horst Ehmke)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괴팅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한 후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갔다.1953년에는 구형연쇄반응로를 개발한 루돌프 슐텐(Rudolf Schulten)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아래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5년 12월에는 첫 번째 자치학생회(AStA)가 선출되었고, 초대 의장은 전직 국방군 장교이자 나치 저항 운동가였던 악셀 폰 뎀 부쉐(Axel von dem Bussche)가 맡았다. 1946년 7월에는 자유롭게 선출된 학생 대표들이 처음으로 괴팅겐에서 영국 점령지구 1차 학생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정기 모임에서 독일 학생회 연합이 탄생했다.
1957년에 괴팅겐의 18명 교수들은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에게 독일의 핵무장에 반대하는 '괴팅겐 선언'을 발표했다.
1950년대 말까지 괴팅겐의 학생 수는 4,500명에서 6,000명 사이를 오갔다. 1962년에는 빌헬름스하펜에 있던 사회과학대학이 괴팅겐에 흡수이전되면서 사회학과 정치학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이전과 함께 많은 새로운 교수들과 학생들이 괴팅겐으로 오게 되었다. 이에 괴팅겐 대학교는 대규모 대학으로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오래된 형태의 전통적인 대학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으로 인해 괴팅겐 대학교는 일시적으로 30,000명 이상의 학생이 다니는 대규모 대학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 괴팅겐에서는 매우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공부하게 되었다. 앞서 거론한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외에도 독일의 전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도 괴팅겐 법학부를 졸업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괴팅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며 남편인 하이코 폰데어라이엔을 만났다.
1978년에는 니더작센 교육대학교 괴팅겐 분교가 통합되어 모든 교원 자격 과정을 대학에서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증가하는 학생 수를 수용하기 위해 1960년대에 인문학을 위한 새로운 캠퍼스가 괴팅겐 시내 북쪽에 계획되고 건설되었다. 이 캠퍼스에는 학생식당이 있는 학생복지시설, 다목적 건물(MZG)인 '푸른 탑', 그리고 1,000석 규모의 대강당을 포함한 중앙 강의실 건물(ZHG)이 세워졌다. 근처에는 법학부(Juridicum), 신학부(Theologicum), 경제사회과학부(Oeconomicum)를 위한 세미나 건물이 건설되었다. 1992년에는 중앙도서관이, 2013년에는 학습 및 연구 건물이 이곳에 개관되었다.
1970년대에는 괴팅겐 의과대학 건물들도 도시 북부에 새로 건설되었고, 자연과학 연구소와 실험실(XLAB), 그리고 초빙교수를 위한 주거 시설도 베엔데(Weende) 지역에 세워졌다.
1989년 독일 마르크(DM) 지폐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리즈가 발행될 때, 지폐에 그려진 아홉 명의 인물 중 네 명이 괴팅겐 대학교의 교수였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10 DM), 파울 에를리히(200 DM), 야코프 그림과 빌헬름 그림(1000 DM). 10-DM 지폐에는 가우스의 초상 외에도 괴팅겐 대학교의 역사적인 건물들, 천문대와 강당이 포함되어 있었다.
괴팅겐은 다시금 교육과 연구 중심의 대학도시로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전쟁 전의 명성을 잇기 위한 노력을 하여 유수 학자들을 채용하였다. 볼프강 파울은 1944년부터 1952년까지 괴팅겐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9년 폴 트랩 발명으로 물리학 노벨상을 수상했다. 에두아르트 로제(Eduard Lohse)는 1964년부터 1971년까지 괴팅겐에서 신약 성서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70/71년에는 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1971년에는 하노버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983년부터 괴팅겐 막스 플랑크 생물물리화학 연구소 다이렉터이자 괴팅겐 대학교의 명예 교수인 에르빈 네어는 괴팅겐 대학 정교수인 베르트 자크만과 함께 세포 내 개별 이온 채널의 기능에 대한 획기적인 발견으로 199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마찬가지로 2002년부터 괴팅겐의 막스 플랑크 생물물리화학 연구소 다이렉터를 역임하고 2004년부터 괴팅겐 대학교의 명예 교수인 슈테판 헬은 2014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만프레트 아이겐와 토마스 쥐트호프는 각각 1967년 노벨 화학상과 2013년 노벨 생리학상과 수상하였다.
법조계에서도 두각을 들어내는데, 많은 국내외 최고 법원 판사들이 괴팅겐 대학교 법학부와 연관되어 있다. 2021년 기준으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16명의 현직 재판관 중 4명이 괴팅겐 대학교와 관련이 있다. 이 중 두 명은 현재 괴팅겐 대학교 법학부 교수이며, 두 명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2021년에는 괴팅겐 대학교 국제 공법 교수였던 게오르그 놀테가 독일 연방 공화국을 대표하여 국제사법재판소(ICJ) 판사로 취임했다. 대만의 사법원장으로 2016년부터 재직 중인 쉬쭝리(許宗力)는 1986년에 괴팅겐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학부
괴팅겐 대학교는 13개의 학부와 38개의 유관 기관 및 연구소를 포함하고 있다. 공학이나 음악, 미술관련 학부는 존재하지 않는다.[10]- 학부
- 경제학부
- 농업과학부
- 물리학부
- 법학부
- 사회과학부
- 산림과학 및 산림생태학부
- 생물학 및 심리학부
- 수학 및 컴퓨터과학부
- 신학부
- 지구과학 및 지리학부
- 인문학부
- 의학부 (괴팅겐 대학교 의과대학)
- 화학부
4. 캠퍼스
학교 캠퍼스는 괴팅겐 시내를 기준으로 구시가지 바로 북쪽에 붙어있는 중앙캠퍼스(Zentralcampus), 중앙캠퍼스에서 북쪽으로 2km정도 떨어져있는 북캠퍼스(Nordcampus)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의대 및 의대부설병원(Universitätsmedizin/Klinikum)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같은 학부라고 같은 캠퍼스에 위치해있는게 아니라 학과에 따라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한 경우도 있다. 후술하겠지만 가령 생물학과 건물과 심리학과 건물 그리고 수학과 건물과 컴퓨터과학과 건물은 떨어져있다.학습 및 연구 건물(LSG)[11][12] |
중앙캠퍼스는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고슬러거리(Goßlerstraße)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뉠 수 있는데, 동쪽엔 1800년대 중후반 그륀더차이트(Gründerzeit) 시절에 지어진 장식을 넣은 옛 벽돌 건물들이 있고 이 곳에 학생회 본부, 대학부설 극장(Theater im OP), 언어 및 핵심 자격 중앙 시설(ZESS)[13] 그리고 탑옆 학생식당(Mensa am Turm), 인문학부(철학부), 심리학과, 사회과학부, 의학부 건물 일부 등이 위치해있다. 사회과학부 건물은 2010년대에 완공된 신축건물이다.
한편 서쪽엔 전후 중앙캠퍼스를 새로이 지으면서 조성된 곳으로, 중앙도서관(SUB)과 중앙강의동(ZHG), 파란탑(Blauer Turm), 중앙 학생식당(Zentralmensa), 학습 및 연구 건물(LSG), 신학부와 법학부, 경제학부가 위치해있다. 파란탑은 대학 건물들 중 가장 높은 건물로, 창문이 파란색이어서 붙은 명칭이고, 대학 행정 사무실 등 다용도 건물로 사용 중. 아무래도 학생식당과 도서관도 있고 여러 학부들이 옹기종기 위치해있는 곳이다보니 학생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이 곳에는 벚꽃이 많이 심어져있다.
물리학부 건물 |
중앙캠퍼스와 북캠퍼스 사이에는 의과대학(UMG)과 대학병원(Klinikum)이 위치해있다. 약 1,500개의 병상을 보유한 대형 병원으로 남부 니더작센의 유일한 최대 의료 제공 기관이다.[14]
구 대강당(Auditorium)[15] |
당연히 대학의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구시가지에도 역사적인 대학건물들이 존재하며, 대표적으로 대학 본관(Aula am Wilhelmsplatz)과, 구 학생식당(Alte Mensa), 구 대강당(Auditorium), 구 도서관(Historische Gebäude der SUB mit Paulinerkirche),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 구 동물학박물관(현 Forum Wissen)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대학 본관이 있는 곳을 빌헬름스플라츠(Wilhelmsplatz)라고 부르는데 이 곳에 입학지원이나 등록금납부, 각종 서류 증빙 등을 담당하는 행정처와 구 학생식당(Alte Mensa)이 있다. 구 도서관엔 구텐베르크 성경 등 주로 고서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는 없다. 구 대강당은 일부 미술관/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구 동물학 박물관은 괴팅겐 기차역 바로 옆에 위치해있으며, 2020년대에 개보수공사를 거쳐 종합 학문 박물관으로 오픈하였다. 구 학생식당도 더 이상 학생식당으로 쓰이지 않고, 컨퍼런스 홀로 쓰인다. 니콜라이 교회는 대학 소속 교회로, 신학과에서 사용된다.
4.1. 후생 시설
괴팅겐 대학교의 학생식당과 기숙사는 괴팅겐 학생복지처(Studentenwerk Göttingen)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 심리상담이나 고민상담 서비스와 더불어 댄스와 사진 유료 강의도 제공한다.학생식당(Mensa)은 위에서 언급된 세 곳 외에도, 중앙캠퍼스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탈리아식 학생식당(Mensa Italia)과 대학병원내에 위치한 Mensa Mittags가 있으며, 8곳의 카페테리아/비스트로가 별도로 존재한다. 북학생식당은 학생들 사이에서 맛없기로 악명이 높아서, 북캠퍼스 학생들 다수가 물리학과에 있는 카페테리아나 중앙캠퍼스까지 가서 점심식사를 하는 경우가 잦다. 해당 학생식당은 202?년을 목표로 건물 뼈대만 남기고 새로 짓는 공사가 진행되어, 북캠퍼스에 가건물을 세워 Lunchbox란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식비는 학생증을 이용하여 컨택리스 방식으로 지불한다. 학교 곳곳에 학생증에 현금 또는 카드로 금액을 충전할 수 있는 무인기들이 설치되어있다.
기숙사는 대학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이곳 저곳에 산별적으로 위치해있고, 건물의 형태도 달라서 기숙사마다 요금과 분위기 등이 천차만별이다. 시내나 그 주변에 있는 기숙사들은 수퍼마켓이나 택배픽업장소 등의 시설에 접근하기 편한 반면, 북캠퍼스 위쪽이나 대학병원 동편에 위치한 기숙사들은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구시가지나 대학병원 서편, 중앙캠퍼스 북쪽, 북캠퍼스 남서쪽에 위치한 기숙사들이 가장 인기가 많지만 그만큼 또 당첨되기는 하늘의 별따기.
독서실의 경우에는 중앙캠퍼스에 위치한 중앙도서관과 LSG를 사용하면 된다. 독서실은 100% 온라인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교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한 뒤 학생증카드로 입장이 가능한 구조이다. 예약을 하지 못했다면 중앙도서관 열람실 내 책상들을 이용할 수 있으나, 1층 열람실은 시끄러운 편이고, 상층의 열람실 책상들은 이곳 저곳에 산재해있어서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 의대 부속 병원내에도 독서실이 있으나, 의학부는 다른 학부들과 전산적으로 완전히 분리가 되어있어서 독서실뿐만 아니라 학생식당도 이용하기 복잡하다.
도시 기준 북동쪽에 위치해있는 대학부설 체육센터(Hochschulsports Göttingen, 구 Uni-Sports)에서는 학생 및 교직원에게 구기, 육상, 수영, 실내스포츠 익스트림 스포츠 등 다양한 스포츠 강의와 자유트레이닝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으며, 피트니스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괴팅겐 국제센터(International Office)는 대학병원 남쪽에 위치해있다. 외국 국적 학생이나 교환학생 등의 행정을 담당하는 곳으로 신입생들은 해당 건물 환영 센터에 찾아가면 소정의 선물(보온 병 등)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유학생으로서 어려운 점 등이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국제 학생간의 교류 프로그램 등도 있어서 정기적으로 만나 친구를 사귄다던지, 음식 등으로 교류한다던지 등을 할 수 있다.
학내 동아리에 대한 정보는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https://www.uni-goettingen.de/en/531612.html 다만, 독일의 학생 동아리들은 취미생활보다는 학생운동, 사회운동, 봉사 등에 집중되어있다. 그 외에 대학 오케스트라(Universitätsorchester)와 대학 합창단(Universitätschor), 대학 빅밴드(XYJazZ)가 있으며, 괴팅겐 학생복지처 소속 합창단(Unicante), 재즈밴드(UniRoyal)가 있다.
4.2. 교통
독일의 여타 대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자전거와 대중교통이 주요 교통수단이다. 주요 캠퍼스들 연결해주는 자전거 도로가 잘 깔려져있고, 사용자들도 많아서, 자전거만 있다면 큰 문제 없이 대학생활을 할 수 있다. 중고 자전거는 종종 10유로도 안되는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할 수 있으며, 월 단위로 대여해주는 자전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자전거 도난 사건이 빈번한 곳이기 때문에 반드시 주의하여야 한다. 특히 전기 자전거의 경우엔 길거리에 세워두지 않아야 한다.괴팅겐내 대중교통으론 버스만 존재하며, 학생증에 포함된 Semesterticket또는 Deutschlandticket으로 따로 표를 구매하지 않고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16] 버스 21, 22, 23번의 경우 구시가지와 중앙캠퍼스, 대학병원, 북캠퍼스 모두를 이어주는 황금노선이다. 41번과 42번도 유사한 경로이나, 북캠퍼스 외곽을 살짝 들리거나, 북캠퍼스 대신 대학부설 체육센터를 이어준다. 91번과 92번은 중앙캠퍼스 중앙부를 지나가나 대학병원은 경유하지 않고, 북캠퍼스도 외곽만 살짝 들린다.
학생증에 포함된 Semesterticket으로 니더작센 내에 일반등급 기차(ICE 또는 IC 제외)는 모두 무료로 탑승할 수 있다. 니더작센 경계 또는 월경지 도시인 카셀, 함부르크, 브레멘, 파더본, 뮌스터, 빌레펠트 등도 무료로 여행할 수 있다. Deutschlandticket의 경우엔 독일 전역에서 일반 등급 기차 뿐만 아니라 각 지역 대중교통(버스, 지하철 및 트램 등)도 무료이다.
5. 전통
괴팅겐의 삶에 대한 오래된 속담이 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구 시청 지하에 위치한 레스토랑인 Restaurant Bullerjahn (구 Ratskeller) 입구 벽에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Extra Gottingam non est vita, si est vita, non est ita" (괴팅겐 밖에는 삶이 없다. 만약 있다 해도, 여기와 같은 삶은 아니다).— 브로노프스키, 1973, 인간의 진보, p. 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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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젤리젤에 키스하는 박사학위 수여자 |
설립 초기부터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학생은 괴팅겐 시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겐젤리젤(Gänseliesel)에 키스를 하는 전통이 있다. 학교에서부터 겐젤리젤까지는 캠퍼스에 따라 도보로 20분에서 50분 정도 걸리는데, 이때 학교에서부터 박사 학위를 받게 된 학생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당사자를 수레에 태워서 끌고가주게 된다.
대학교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학생단들이 지금도 일부의 형태로 남아있다. 리스트. 근세에 괴팅겐 대학교 학생들은 학생단에 가입해 자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을 상징하는 모자나 깃발, 옷 등이 존재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현대 미국의 주요 대학 문화 중 하나인 프래터니티와 소로리티의 원조격이다 싶은데, 술집 등에서 학생단 단위로 결투를 하거나 싸움을 하고 다녀 괴팅겐 시민들과 학교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였다.[17]
여타 다른 독일 대학교처럼 학부 1학기(겨울학기)의 강의가 시작되기 그 전주 평일 5일 동안 오리엔테이션 주간(Orientierungsphase), 줄여서 O-Phase(오파제)가 있다. 이 기간동안 각 학과별로 오전에는 얌전하게 동기나 멘토, 교수와 사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학교 생활이나 커리큘럼 등을 소개해주는 한편, 오후에는 괴팅겐 시내에서 술집 탐방이나 도전과제, 팀 및 조별 게임 등을 하고 학교 건물에서는 파티와 노래방 등이 열리기 때문에 온 동네가 시끌벅쩍해진다.
매년 12월에는 중앙캠퍼스 중앙강의동(ZHG)에서 크라스마스 파티(Göttinger Nikolaus-Party)가 열렸는데, 북독일에서 가장 큰 대학파티로 유명했었다. 특히 본격적인 파티 시작 전에는 각 강의실에서 고전 흑백 크리스마스 영화 <Die Feuerzangenbowle>를 보는 것이 전통이다. 다만 코로나사태 이후로 대학 통합 크리스마스 파티는 열리지 않고 있고 대신 영화만 상영한다.
6. 동문
노벨상 수상자에서 알 수 있듯이 셀 수 없이 많은 지성들을 길러내왔다. 괴팅겐 시내에서는 학자들이 살았던 집 하나 하나마다 거주 기간과 누가 살았는지를 표시해 놓은 명패를 설치했을 정도. 괴팅겐 근처의 공동묘지에는 여러 동문들의 무덤이 있는데, 이 곳에는 노벨상 수상자들만 8명이 잠들어 있다. 현재 유기화학 분야에서 유명한 루츠 애커만이 괴팅겐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6.1. 자연과학 및 수학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에미 뇌터
- 폴 디랙
- 베른하르트 리만
-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
- 아우구스트 바이스만
- 막스 보른
- 오펜하이머
- 펠릭스 클라인
-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 엔리코 페르미
- 볼프강 파울리[19]
- 막스 폰 라우에
- 막스 플랑크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다비트 힐베르트
6.2. 법학, 경제학 및 사회 과학
6.3. 의학
7. 협력 기관
괴팅겐 캠퍼스 내에서 대학교는 다음의 독립 및 반독립 기관들과 조직적으로 및 인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베른스타인 네트워크 계산신경과학
- 유럽 신경과학 연구소 괴팅겐(ENI-G)
- 프라운호퍼 변환의학 및 약리학 연구소(ITMP)
- 프라운호퍼 표면공학 및 박막 연구소의 플라즈마 및 광자응용센터
- 독일 항공우주 센터
- 독일 신경퇴행성 질환 센터(DZNE) – 헬름홀츠 센터
- 독일 영장류 센터 – 라이프니츠 영장류 연구소
- 막스 플랑크 동역학 및 자기조직화 연구소(구 막스 플랑크 유체연구소)
- 막스 플랑크 다학제 과학 연구소 (2022년 막스 플랑크 생물물리화학 연구소와 막스 플랑크 실험의학 연구소의 합병)
- 막스 플랑크 태양계 연구소 (구 막스 플랑크 대기 연구소)
- 막스 플랑크 종교 및 민족 다양성 연구소 (구 막스 플랑크 역사 연구소)
8. 기타
- 대학교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도시전설들이 있다. 가령 중앙캠퍼스에 있는 경영학부와 신학부, 법학부의 1층 창문을 모두 열면 건물이 무너진다,[22] 괴팅겐 대학교 지하에는 사실 지하철이 있다,[23], 이탈리아 학생식당(Mensa Italia)는 실존하지 않는다[24] 등.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 겐젤리젤에 키스하면 영원히 학위를 못딴다는 미신도 존재한다.
- 학과나 기숙사 파티를 바닥에 분필로 그려서 홍보하는 경우가 잦다. 파티에 관심이 있다면 걸을 때 바닥을 유심히 보자...
- 가우스와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는 1833년 세계 최초로 전신기를 괴팅겐에 설치하여 운영한 적이 있다. 1km떨어진 천문대와 당시 물리학과 건물을 이어주게 만들었다.
본격 파이프라인.구시가지 남쪽에 가우스와 베버의 동상이 있는데 늘 누군가 가우스의 손에 맥주병을 올려놓는다
- 프랑스 여가수 바르바라와 그녀의 히트곡 '괴팅겐'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전후 1964년 독일의 괴팅겐에서 바르바라를 초청했는데, 어릴적 나치를 피해 가족이 도망다녔던 그녀는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무대에 반드시 그랜드피아노가 있어야만 공연하겠다며 조건부 허가를 하였다. 그러나 괴팅겐에 도착한 바르바라는 공연장에 그랜드피아노가 없음을 발견하고 공연을 취소하려 했으나, 괴팅겐 대학교 학생들이 직접 그랜드피아노를 무대까지 들고 왔고 이에 감동을 먹어 공연을 마치고 '괴팅겐'이라는 노래를 작곡작사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s9b6E4MnCWk
9. 관련 문서
[1] The Colours of Göttingen University 참고[2] 괴팅겐 대학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영국 왕 윌리엄 4세가 후원하여 1837년에 완공한 대강당 건물. 괴팅겐 대학교의 얼굴 마담과 같은 건물이다. 이 건물에 과거 학생 감옥으로 쓰던 방들도 있다.[3] 주립 도서관 역할도 같이 맡고 있다. 고서들을 보관 중인 구 중앙 도서관(SUB)은 구시가지에 별도로 존재한다.[4] 괴팅엔이 현지 발음에 더 가깝지만 국립국어원이 일본식 발음(ゲッティンゲン)과 같은 표기를 표준으로 정하였다.[5] 독일의 대학교 대부분은 주 정부에서 직접 관할하는 공공교육기관들이다. 최초로 공법 재단으로 전환된 대학교는 뮌헨 대학교이다.[6] 괴팅겐의 인구가 약 12만명이니 학생과 대학교 및 관련 연구소 종사자들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굉장히 높음을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대학도시라고 불리는 이유이다.[7] 지금도 니콜라이 교회는 대학교 소속으로, 대학 교회(Universitätskirche)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8] 리히텐베르크 모형, 리히텐베르크 무늬로 유명한 그 사람 맞다.[9] 카를 루트비히 지겔의 박사학위 수여를 축하하는 동료 수학자들이 함께 찍힌 사진이다. 보다시피 이때에도 이미 박사학위 수여자들을 수레에 끌고가는 전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10] 이는 많은 독일 종합 대학교들도 마찬가지이다. 공대나 음대, 미대 등은 따로 전문대학교로 분리 존재하는게 보통이다.[11] 2013년에 새로 지어진 학습센터로, 정규 수업 시간 외에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다.[12] 건물 앞에 위치한 문은 18세기 대학 승마장 건물의 현관문으로 원레 구시가지에 있었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었다. 그 중 현관문만 살아남아,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인데, 그 모습은 사진의 반대편에서 봐야 볼 수 있다.[13] 독일어와 영어 등 언어와 자잘한 컴퓨터 스킬 등을 배우고 학점을 딸 수 있는 곳이다. 언어자격증 등 각종 자격증을 취득할 수도 있다.[14] 본래 오래 전부터 신축 수준의 단계적 리모델링 계획이 있었으나, 재정문제와 코로나 등으로 미루지거나 축소되어서, 일부 기반공사만 이루어지다가 중단된지 오래되었다. 2023년부터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해 2030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15] 현재는 박물관 및 미술관 등으로 사용 중이다. 지금은 중앙캠퍼스에 대강당컴플렉스(ZHG)가 따로 있다.[16] 단 3자리 숫자 버스는 시외구간만 무료이며, 괴팅겐 시내 구간은 요금을 내야한다.[17] 대표적으로 나중에 철혈 재상으로 명성을 떨치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괴팅겐 대학교 학생 시절 술집에서 싸움질 하고 다니던 날라리였다.[18] 캠퍼스 주변보다는 주로 Ostviertel이나 Südstadt에 몰려있다.[19] 이론물리학 교수였던 보른의 조교로 약 1년간 일했다.[20] 한국 내에서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그림 형제는 단순한 동화작가들이 아니라 언어학과 낭만주의 문학의 거두들이다. 게르만 언어가 라틴어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게르만 민족의 자국 언어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업적이 있다.[21] 사학 석사, 박사[22] 실제로 창문이 건물을 한바퀴 띠처럼 두르는 구조로 생겼다.[23] 중앙캠퍼스 광장에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처럼 생긴 구조물들이 있다.[24] 학생식당들 중 접근성이 가장 떨어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