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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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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광통교.png
<colbgcolor=#006fb9> 광통교[1]
광통교 소개 영상

1. 개요2. 이름3. 위치4. 역사5. 구조6. 교통
6.1. 지하철6.2. 버스
7. 여담

[clearfix]

1. 개요

廣通橋 / Gwangtonggyo

청계천다리이다. 조선 시대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도성 내 주요 도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였다.

청계광장을 기준으로, 청계천의 2번째 다리다.

2. 이름

'광통교(廣通橋)'는 '광통방(廣通坊)의 다리(橋)'란 뜻이다.

이외에 줄임말인 '광교(廣橋)'를 비롯하여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광충교(廣沖橋)'란 이름도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주로 '광교'로 많이 불렀다.

이중 대광통교와 북광통교의 경우, 청계천의 지류인 창동천[2]에 놓인 같은 이름의 다리와 비교되어 붙여진 이름이다.[3] 청계천은 창동천보다 북쪽에 있었고, 다리 역시 창동천의 광통교보다 규모가 컸기에 북광통교, 대광통교라 불린 것이다.

3. 위치

원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중구 남대문로를 잇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35 (서린동)와 중구 청계천로 30 (다동) 사이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래 역사 단락으로.

4. 역사

조선 태조 때 창건했으며 원래는 으로 만든 다리였다. 이후 1410년(태종 10년)에 홍수로 무너지자 돌다리로 고쳐지었다. 이때 다리 건설에 사용한 돌들은 태종계모 신덕왕후가 묻혔던 정릉에서 가져왔다.# 이는 신덕왕후에게 원한을 품었던 태종이 저지른 복수의 일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정릉에 쓰인 돌들은 무사하여 현대까지 여말선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되었다.[4]

이후 조선 시대 내내 한성의 큰 길인 육조거리(세종로)와 운종가(종로), 그리고 숭례문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광통교 일대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한성의 최대 번화가가 되었다. 다리 주변에 여러 수공업 작업장들이 들어섰고 큰 재래시장들도 생겨났다. 심지어는 거지들도 이 근처에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5]

후대 임금들도 광통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단 숭례문으로 나갈 때 반드시 이용하던 다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다리인 만큼 임금 자신이 백성들을 생각한다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도 많이 열렸고,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주는 곳이 되기도 했다.

1760년(영조 36년) 청계천을 준설할 때 영조가 직접 나와 이곳에서 공사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1762년(영조 38년)에 다리의 기초 부분을 고쳐짓고 난간을 수리했다.#

이후 큰 변화없이 있다가 1899년(광무 3년) 종로숭례문을 연결하는 전차노선이 생기면서 다리 동편에 전차선로가 깔렸다. 1910년 8월에 이 노선이 복선화되면서, 다리는 1m 정도의 콘크리트 선로 밑에 묻혔다.
파일:1953년 광통교.png
<colbgcolor=#006fb9> 1953년 광통교
그러다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도로 밑에 묻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일부 부재들이 창덕궁창경궁, 탑골공원으로 옮겨졌다.

서울특별시에서 2005년 청계천 복원사업 당시에 원 위치에 세우려 했지만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기존 광통교를 서쪽(상류 쪽)으로 150m가량 옮겨 복원했다. 그리고 원래 광통교 위치에는 광교라는 현대식 다리를 만들었다. 현재 광통교는 사람만 통행이 가능하고 차량은 불가능하다.

5. 구조

  • 길이 12.3m, 너비 14.4m, 높이 3.7m로 재질은 전부 화강암이다. 길이보다 폭이 더 넓은 것이 특징이다.

파일:광통교 석물 1.png}}} ||
파일:광통교 석물 2.png
||
<colbgcolor=#006fb9> 정동 정릉에서 옮겨 온 광통교 석물[6]
광교 아래로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나마도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어서 끼워넣었다.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반감을[7] 조선왕조가 망한 오늘날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유적. 아이러니하게도 광통교 밑에 처박힌 탓에 사람 손을 덜 타서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까지 남을 수 있었다. 건원릉 석물에서와 같은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 태극 문양 등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이전에 조선 초까지 남아있었던 도교, 불교 문화의 잔재를 느낄 수 있다.

파일:광통교 구조물.png}}} ||
<colbgcolor=#006fb9> 광통교 남쪽으로 인도를 덧댄 모습
복원한 청계천 너비와 광통교 길이가 맞지 않아서, 광통교 남쪽으로 인도를 덧대었다. 인도 난간은 정릉 석물을 본뜬 형태이다. 이 덧댄 인도 밑으로 청계천 물이 흘러가며, 광통교 본교 밑바닥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돌이 깔려 있다.

6. 교통

6.1. 지하철

6.2. 버스

7. 여담

  • 조선 시대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백성들이 다리를 밟는 '답교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 1년 내내 다리가 건강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양의 주민들은 먼저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그 다음에 청계천의 다리 위를 왔다갔다 했는데, 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통교와 수표교로 갔다고 한다. 이 답교놀이는 조선 멸망 이후 한동안 맥이 끊겼다가 1970년에 복원되었고 2009년 3월 5일에 서울시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받았다.#
  • 하루는 성종 임금이 잠행하다 광통교를 지날 때, 다리 밑에서 묵으려던 한 사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내는 "경상도 흥해[8]에서 올라온 숯장수 김희동입니다. 임금님이 어질다 하여 죽기 전 꼭 뵙고자 어렵게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을 뵈면 해삼전복도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고 했다. 이에 흐뭇했던 성종은 자신을 이 첨지라 소개한 뒤 왕을 꼭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따라온 별감에게 귀띔한 뒤 별감의 집으로 김희동을 데려갔다. 다음날 성종은 김희동에게 "왕을 만나려면 벼슬이 있어야 하니 원하는 벼슬이 있으면 말해보라" 했다. 김희동은 당황했지만 자기 고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충의라는 벼슬을 이야기했다. 사실 김희동은 이 때 반신반의 했는데 그 다음날 정말로 충의초사(忠義初仕)란 벼슬이 내려져 김희동은 궁으로 들어갔다. 가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이 첨지가 바로 그렇게 보고싶던 임금이었다. 김희동은 심하게 놀라 갖고 온 해삼과 전복을 땅에 떨어뜨리기까지 했으나 성종은 마음을 갸륵히 여겨 그것을 수라상에 올리라고 명했다.
    성군임금과 그 임금을 생각한 백성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 김두한심영을 실제로 쏜 곳이다. 정확하게는 이설 전의 광통교로, 지금의 신설 광교 자리.[9] 청계천이 바로 종로구중구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하천이고, 광통교는 그 청계천 위에 있기에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종로도 아니고 중구도 아닌' 다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관할 구역의 모호함을 이유로 종로구 경찰과 중구 경찰이 서로 책임소재를 떠넘기기에 충분했고, 이 때문에 수사가 지체될 것을 일부러 노리고 이 다리에서 쏜 것이다.[10]

파일:광통교 축소 모형.png}}} ||
<colbgcolor=#006fb9> 신한은행 광교영업부 사옥 한 켠에 있는 광통교 모형[11]
1994년 초에 조흥은행에서 옛 광통교 자리(현재 광교 자리) 바로 앞에 있는 본사 사옥 한 켠에 광통교 모형을 실제 크기보다 4분의 1로 축소한 크기로 만들어 설치했다.# 이 모형은 2005년에 실제 광통교가 복원된 후에도, 2006년에 조흥은행이 신한은행으로 흡수된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고 현재까지 남아있다.
  • 2016년부터 매년 4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매주 주말마다 〈서울밤도깨비야시장 - 청계천 타임투어마켓〉이 열린다. 전통의 흔적이 묻어나는 장소를 살려 한국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컨셉이 특징이다. 매주 토요일은 오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요일은 오후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한다. 자세한 내용은 사이트로 이동할 것.


[1] 사진 출처.[2] 倉洞川. 남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계속 흘러 무교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던 개천이다. 이름은 근처에 있던 선혜청의 곡물창고에서 유래했다.출처[3] 지금의 남대문로1가 23번지 일대에 놓였다.[4] 용의 눈물 133화에서 태종이 종묘에 태조와 함께 모실 왕비에서 신덕왕후를 내치고 친모 신의왕후를 올린 다음 신덕왕후의 릉인 정릉의 석물들을 광교를 지을 때 쓰라고 분노 어린 어명을 내리는 장면으로 묘사된다.[5] 사실 번화가는 거지들에게는 좋은 곳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그만큼 동냥 받을 확률도 높아지니까.[6] 사진 출처 - 문화재청.[7] 정확히는 외척에 대한 반감이었지만. 태종은 자신의 처가에게도 그렇고 며느리집안에 대해서까지 매우 가혹했다.[8]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일대.[9] 이외에도 드라마 〈동양극장〉과 〈야인시대〉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동양극장〉에서는 고증에는 충실하게 다루었지만, 〈야인시대〉에서 각색된 부분이 많다. 한 예로, 심영이 사건 발생 때 공연하던 극장은 중앙극장이 아닌 현재 명동예술극장인 명치좌(明治座, 메이지자)였다.실제 김두한의 증언을 심영물에 합성한 영상.[10] 다만 지적도를 들여다보면 지금의 광교는 거의 전부가 중구에 속하며, 광교 북단이 종로구와의 경계를 이룬다. 따라서 광교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날 경우 서울남대문경찰서가 책임지고 수사해야 한다.[11]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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