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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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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colbgcolor=#bf1400> 경희궁 광명전
慶熙宮 光明殿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1가길 (추정)
건축시기 1617년 ~ 1620년 사이 (창건) / 철훼시기 미상 (1868년 이후)
1. 개요2. 이름3. 용도4. 역사5. 여담

[clearfix]

1. 개요

경희궁에 있었던 전각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2. 이름

'광명(光明)' 뜻은 '밝은(明) 빛(光)' 또는 '밝게(明) 빛난다(光)'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건물로 덕수궁 함녕전정문 광명문(光明門)이 있다.

3. 용도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주로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열었던 격 높은 건물이었던 듯 하다. 1782년(정조 6년) 6월 13일 자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대내(大內)의 크게 이름난 전각'이라 했으며 1783년(정조 7년) 1월 12일 자 기사에는 내정전(內正殿), 즉 내전에서 가장 으뜸가는 전각이라 했다. 6개월 뒤 기사에서는 조하를 받는 대내의 정전으로 인정전[1], 명정전[2]과 비슷하며 다르지 않다고 했다.

정조의 작품들을 모은 문집 《홍재전서》에 수록된 〈경희궁지〉에는 내전에서 하연을 받는 곳으로 적혀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곳을 빈전과 동뢰연[3] 및 기타 연회 장소로 사용했다는 기사가 있다. 빈전으로 쓴 때는 인목왕후# 선의왕후의 국상 때였고#, 동뢰연 장소로 활용한 때는 숙종 - 인원왕후, 경종 - 선의왕후#, 문조(효명세자) - 신정왕후#, 헌종 - 효정왕후# 가례 때였다.

이밖에도 현종대왕대비였던 인조장렬왕후에게 존호를 추가해 올리는 의식을 여기서 열었고#, 영조 때는 영희전에 있던 세조 어진#, 헌종 때는 준원전[4]에 있던 태조 어진을 광명전으로 옮겨와 베껴 그렸다.# 《궁궐지》 - 〈광명전조 - 광명전기〉에는 숙종과 영조가 이곳에서 크고 작은 연회를 여러 번 열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1836년(헌종 2년)에 종묘를 넓혀지을 때에는 역대 임금왕비신주를 이 곳과 장락전에 나누어 모셨다.#

4. 역사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5] 지었다. 이후 1693년(숙종 19년)에 수리했다.

1727년(영조 3년) 3월에[6] 부속 건물 첨선당에서 불이 났으나# 광명전은 무사했다. 그러나 정조 초반에 건물이 무너져 고쳐지었다.#

고종 재위 초반인 1860년대 후반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근거는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다만, 1868년(고종 5년)에 광명전 동쪽 담장이 무너져 수축할 것을 경희궁 입직 위장 박진예가 아뢴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아 저 때 까지는 남아있었던 듯 하다.

5. 여담

  •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광명전에 있었을 때, 작은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이부자리에 또아리를 친 일이 있었다. 이를 본 궁인들마다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명성왕후는 "이곳은 산이랑 가까우니 뱀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해칠 필요 없다."며 궁인들을 안심시키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지 말라했다.#

[1] 창덕궁정전.[2] 창경궁의 정전.[3] 同牢宴. 가례 때 신랑신부가 교배례를 마친 뒤 술잔을 나누고 음식을 먹던 연회.[4] 濬源殿. 함경남도 영흥군에 있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5]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6] 음력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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