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9:16

종이 이전의 기록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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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의 기록 매체3. 중동·북아프리카유럽의 기록 매체
3.1. 점토판3.2. 파피루스3.3. 목독3.4. 양피지3.5. 왁스 태블릿
4. 아메리카의 기록매체
4.1. 아마틀4.2. 매듭
5. 기타

1. 개요

기록매체로서의 종이의 제지술은 중국 후한시대 채륜이 기원후 105년에 발명한 것이다. 서기 3세기경에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를 이슬람권에 전파한 탈라스 전투는 751년에 있었고 이로부터 300년 뒤에 유럽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인류는 이보다 훨씬 이른 기원전 3000년 전후에 문자를 창안했고 이를 위하여 쇠붙이와 돌을 비롯하여 짐승의 뼈와 가죽, 조개껍질, 진흙, 나뭇잎, 나무가죽 등 가능한 것은 대부분 기록매체로 활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로 사용된 기록매체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종류와 형태가 다양하다.

2.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의 기록 매체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나무를 엮은 죽간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죽간은 너무 무거워서 수레 하나의 분량이 책 한 권이었으므로, '남자라면 모름지기 수레 다섯대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2.1. 귀갑

거북이 등껍질. 한자의 초기형인 갑골문이 바로 여기에 쓴 글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룩한 등 껍질을 사용한 걸로 오해하는데, 실제로는 평평한 배 껍질을 사용했다. 거북이 껍질 이외에도 소의 견갑골 등 평평한 뼈들을 많이 사용했다.

2.2. 죽간목독

파일:external/www.9610.com/hexi2.jpg
竹簡木牘
문자를 처음 상용한 초기 중국에서는 귀갑수골[1]이나 쇠붙이, 돌을 사용하여 기록을 남겼다. 그 후 기록한 내용을 다량으로 체계 있게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것이 죽간 목독이었다. 죽간이란 대나무를 쪼갠 조각을, 목독이란 나무를 작게 쪼갠 조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보다 먼저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갑골이나 금석에 새기거나 쓴 것은 글자가 하나의 물건에 부속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죽간목독을 책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다. 책()이라는 한자가 죽편이나 목편을 끈으로 묶어서 문서로 만든 모양을 따온 한자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나무와 대나무는 가장 보편적인 기록매체였으며 사용된 기간도 장구했다. 심지어 이들 종이가 널리 사용된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서사에 쓰였다. 이는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태블릿 등이 보급된 이후에도 종이가 아직도 널리 쓰이는 것과 어찌보면 유사하다. 나무와 대나무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원인은 현지조달이 가능하고 값이 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종이가 들어오고도 한참 지난 후 만들어진 통일신라의 월지 호수에서 음식의 유통기한을 표시하는 꼬리표나 한자 글씨 연습용 같은 잡다한 목적으로 쓰고 버린 나무조각이 많이 발견되었다. 또다른 장점은 원래 써 있던 내용이 필요없어지면 조각칼로 깎아서 글씨를 지우고 여러 번 다시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2]

간독이 언제부터 사용되고 언제까지 쓰였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간독의 가장 빠른 기록은 은대의 갑골문자의 문자를 보아 죽간은 상고에서부터 기원후 3, 4세기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목독의 사용은 한(漢)대의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훨씬 뒤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종이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목간과 죽간이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었다. 글쓰기 이외의 용도로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종이가 그 기능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시의 행정문서는 각급의 단계로 내려갈 때마다 내용이 추가되어야 했는데, 이를 그때그때 파일처럼 묶어 보관하기에는 간독이 편리했다. 또 호적처럼 오랜 시간 동안 일정한 양식으로 사용해온 서사물도 종이라는 새로운 서사 재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20세기 초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타림 분지의 니야 유적에서 3~4세기 중국의 목간 50매를 발견했다. 그 후 현재까지 발견된 이 시기 목간과 죽간의 수는 20만 편에 달한다.

호적 등 행정 관계 서사물 역시 이른 단계에서 종이로 이행한 것은 아니었다. 정해진 서식과 양식이 있는 까닭에 그것들은 다른 일반적인 서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적의 종이로의 이행이 비교적 빨랐던 이유는 문자 정보 이외의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호적은 하나의 서식이었고 전국적인 통일성이라는 제약이 가해졌다. 결국 죽간이나 목간이 종이로 교체되는 데에는 기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종이의 질과 양의 발전, 각 지방의 제지기술 전파 등의 문제를 극복해야만 했으며 그렇기에 7세기까지는 목간과 죽간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본다.

공자님이 을 수레 단위로 읽었네 뭐 이런 말이 있는데[3], 종이가 없던 당시에는 주로 글이 죽간이나 목간과 같은 무거운 물체[4]에 쓰였기 때문에 정말 저런 식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학자들은 문자 그대로 책을 전부 외우고 다니는 일이 많았다. 죽간에 들어가는 텍스트양이 적은 것도 한몫 했지만 많이 들고다닐 수 없으니 들고 다니는 죽간 하나만큼은 달달 외울 정도로 읽어대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유명 학자들의 책들이 현대의 책보다 더 짧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간략한 분량 속에 핵심 내용만 있는 형태 위주로 대다수 존재하게 된 것도 이것의 영향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2.3. 겸백(견직물)

縑帛

죽간목독을 널리 사용하던 선진시대에 들어 겸백(명주천)[5]을 새로운 기록매체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백서(帛書)라고 한다. 처음에는 의복의 재료인 비단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후에는 서사용 겸백을 따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백서는 글의 길고 짧음에 따라 적당히 겸백을 절단하여 서사하고 말은 권자본(두루마리) 형태로 보관할 수 있으며, 마음대로 펼쳐 나갈 수 있다. 책을 헤아리는 단위로 권을 쓰게 된 것도 이 백서에서 비롯됐다. 또 기록매체로서 겸백은 간독보다 부드럽고 가벼워 서사와 휴대가 편리할 뿐 아니라 다른 기록매체에 비해 장기간 보관도 가능하였다.

이와 같이 겸백은 여러 우수성이 있어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가장 바람직한 기록매체였다. 사실 지금도 필기기록용으로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질 좋은 소재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너무 가격이 비쌌다는 것이다. 지금도 비단은 드레스정장에나 쓰는 고급 소재인데 고대에, 그것도 종이처럼 쓰기엔 너무 귀했다. 또한 값싼 옷감을 쓰더라도 책으로 만들면 가격이 많이 나가는것은 여전했다. 게다가 당시 겸백은 생산량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기록용으로 개량한 백서가 나온 뒤에도 위 단락의 간채가 도서의 주종을 이루었다. 죽간은 보통 초고를 쓰는 데에 사용되고 겸백은 취후의 정보에 사용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태평어람(太平御覽)[6]에 기록된 바와 같이 유향이 서적을 교정할 때 먼저 죽간에다 써서 쓸데없는 문자는 삭제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부족한 곳을 보충한 후 흰 비단에 정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2.4. 패엽

貝葉

야자 잎으로 만든 기록 매체. 동남아시아 특유의 넓고 두꺼운 종려나무의 잎을 사용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3. 중동·북아프리카유럽의 기록 매체

3.1. 점토판

파일:attachment/gilgamesh-dogma80.jpg
(Clay table)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양질의 점토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 매체로 사용하였다. 사용 시기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4000~3500년경의 점토 파편이 전해 오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2, 3세기까지 주로 사용되었다. 수메르인이 쐐기 문자를 처음으로 점토판에 기록한 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4천 년 이상 사용되었고, 그 근방 민족의 문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그리스미노아 문명미케네 문명에서도 점토판을 사용하였다.

이집트 특산품인 파피루스나 양을 도축해야 얻을 수 있는 양피지보다는 훨씬 저렴하고, 글자를 새기기 편리하며 잘 말리거나 불에 구울 경우에는 보존성도 뛰어나다는[7] 장점이 있었지만 어마무시한 무게 때문에 휴대성이 매우 떨어졌고, 마르면 글씨를 쓰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3.2. 파피루스

파일:attachment/파피루스/papyrus.jpg
메소포타미아에서 점토판에 설형문자를 새기던 때에 또다른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의 나일문화권에서는 파피루스를 이용하여 기록매체로 활용하였다.[8] 파피루스는 이집트 나일가의 비옥한 삼각주에서 많이 자라던 갈대의 일종으로 학명은 'cyper papyrus'다. 오늘날 쓰고 있는 'paper, papier, papel'이란 말은 모두 파피루스에서 나온 것이다. 나중에 중국에서 종이가 전파된 후 그대로 그 이름이 쓰인 것.

종이에 가장 가까울 정도로 가볍고 필사하기도 편리하지만 이집트 특산품인지라 이집트 외 지역에서는 재배하고 만들기가 힘들어 매우 비쌌고, 습기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잘만 가공하면 실제 종이 못지 않은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중동유럽을 아울러 각광받았고 이집트의 전성기 때에는 주요 수출품으로서 매우 선호되었지만, 로마 제국 시대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를 위시로 한 쇄국정책으로 인해 파피루스의 수출이 금지되기 시작한다. 다만, 6세기 경부터는 그래도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피루스를 재배하기도 했고, 때문에 의 가죽으로 만들어서 상대적으로 값이 비쌌던 양피지 대신으로 파피루스가 엄청나게 많이 이용되었다. 심지어 유럽에 종이가 전해진 지 한참 이후 시대인 르네상스 시대 사람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쓴 저작물 중에도 파피루스로 된 종이에다 저술한 문헌이 있을 정도다.[9]

3.3. 목독

나무판에다가 기록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고, 이집트, 로대 로마에서도 존재했다. 다만 나무의 특성상 보존되기 힘들어 출토되는 양은 적었다.

3.4. 양피지

파일:external/segibak.or.kr/torah.jpg
양, 염소, 소의 가죽으로 만든 기록매체이다. 특히 생후 6주 이내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것은 독피지라고 한다. 양피지는 수세기 경부터 이집트, 팔레스타인, 페르시아 등에서 사용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에 소아시아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는 페르가몬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그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자 이집트의 프롤레미 왕은 이 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보다 발전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그 당시 널리 쓰였던 기록매체인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하였으며 페르가몬에서는 파피루스 대용으로 양피지를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내구성과 보존성이 뛰어나고 종이보다는 무겁지만 그래도 휴대할 만한 무게인 데다가 전 유럽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양을 도축해야만 얻을 수 있어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때문에 종이와 인쇄술의 전파 이전 유럽에서는 책은 부유층만 가질 수 있는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3.5. 왁스 태블릿

파일:Roma_Tablet.jpg
테두리가 있는 목판에 왁스를 채워서 굳은 것 위를 침펜(스타일러스)로 긁어서 글자를 쓴다. 점토판과 사용법이 비슷하지만, 왁스를 50도 정도의 열로 데우면 녹아서 다시 깨끗하게 백지화(?) 할 수 있다는 재활용의 편리함이 있기 때문에 고대에서 중세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이 가열해서 녹이는 과정을 클린 슬레이트, 라틴어로 타불라 라사라고 부른다. 태블릿을 뒤집어 표면이 녹는 점에 도달할 때까지 열원 위를 가볍게 몇 번 지나쳐준 다음, 다시 뒤집어 약간의 시소 운동으로 태블릿을 움직이면 전체 리셋.

현재는 태블릿 하면 태블릿 컴퓨터를 떠올리지만 태블릿 어원이 바로 이 왁스판이며 태블릿 컴퓨터에 쓰는 스타일러스 펜 역시 왁스판에 글자를 쓰는 침펜을 뜻한다. 유행은 돌고돈다더니 2천년만에 되돌아온 왁스판 유행 또한 스타일러스 펜의 뒷부분은 보통 글자나 그림을 지우는 지우개 기능이 기본 설정된 경우가 많은데, 왁스 태블릿의 침펜 역시 넓적한 칼날이 있어서 그 칼날로 글자를 도려내서 지우는 기능을 했다. 칼날을 가열하기도 했다. 심지어 '스타일러스를 거꾸로 잡다'라는 라틴어는 글자를 지운다는 뜻의 관용어이기도 했다.

왁스 태블릿의 존재를 모른다면 고대 로마 즈음의 그림이나 석상에 웬 태블릿 컴퓨터처럼 생긴 오파츠가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4. 아메리카의 기록매체

일찍이 구대륙과 고립된 아메리카는 문명의 발달이 늦었고 기록 매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메소아메리카안데스 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매체를 이용하여 기록하였다.

4.1. 아마틀

아마틀(āmatl)은 멕시코 지역에서 생산되던 목피지로, 아마테 나무의 껍질을 벗겨 넓게 펼치고 말려서 만든다. 아즈텍 제국마야 문명 등 메소아메리카의 각종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스페인 정복 이후에도 간간히 사용되다가 유럽산 종이로 바뀌었다. 메소아메리카의 제지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장 오래된 아마틀은 서기 7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굉장히 오래 전부터 사용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4.2. 매듭

남아메리카의 잉카 제국에서는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글로 적는 대신 매듭을 지어서 기록을 남겼다. 이는 키푸라 하여 여러 색깔의 노끈으로 만든 매듭을 사용했다고 한다. 주로 세금 관련 문서로 사용했다고. 잉카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밧줄을 이용하곤 했는데 이를 '결승문자'라고 한다.

5. 기타

도편추방제의 예에서 보듯 도자기 파편은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메모지였다. 폐기물 내지는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라콘이라고도 한다.

러시아고구려, 신라에서 자작나무의 흰 껍질을 얇게 벗겨서 이를 기록매체로 이용하기도 했다. 천마총천마도(혹은 기린) 그림도 이런 자작나무의 껍질에 그려진 것. 자작나무 껍질의 기름 성분 때문에 잘 썩지 않고 습기에도 강하며,[10] 자작나무의 껍질이 재생되면 또 벗겨 쓸 수 있다.

중세 서양에서도 카르타 린테아라고 하는 아마포를 기록매체로 사용한 바 있다.

금석문이라 하여 바위에 내용을 새기는 방법도 있었다. 다만 바위는 다용도로 쓰거나 많은 내용을 담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라서[11] 함무라비 법전, 석각 유훈 등 아주 중요한 내용만을 기록하는데 사용했다.[12] 사실 종이가 대중화된 오늘날 까지도 오래오래 남길 중요한 글은 머릿돌이나 비석처럼 돌에 새겨서 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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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북의 등딱지와 짐승의 뼈를 아울러 이르는 말.[2] 바로 거기에서 삭제(削除)라는 말이 나온다.[3]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즉 "남자는 다섯 수레의 책은 읽어야 한다"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이에 대해 말 그대로 다섯 수레를 말하는 것이 아닌 다독을 중시하는 것이라는 견해와, 다섯 수레라고 해봤자 지금으로 따지면 몇 권 안 되기 때문에 적어도 이만큼의 책은 읽어야 사람구실 한다는 뜻이라는 견해로 나뉜다.[4] 게다가 내용도 얼마 안 들어간다![5] 옷을 만드는 비단과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6] 처음 이름은 《태평총류(太平總類)》이며, 약해서 《어람(御覽)》이라고도 한다. 송나라 태종(太宗)의 명으로 977년에 착수하여 983년에 완성시킨 1,0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으로 유서(類書)로 분류된다.[7] 특히 화재가 일어났을 때 타 기록매체들은 소실되기 일쑤이지만 점토판은 불에 확 구워지기 때문에 오히려 보존도가 올라간다. 이건 돌을 제외한 타 기록매체가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이다.[8] 사족으로, 파피루스의 원래의 용도는 기록매체 용이 아니라, 식용이었다. 1970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쫀듸기 구워먹기가 성행했듯이,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고소하고 단맛나는 간식으로 인기가 좋았다고. 우리가 아는 파피루스 종이는 이렇게 간식으로 구워먹고 남은 파피루스로 겸사겸사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9]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에도 갈릴레이파피루스 문서가 작중에서 CERN물리학자들이 개발한 반수소 가둠 장치와 함께 소설 내용의 핵심으로 등장한다.[10] 여진족의 배나 북미 원주민들이 카누 만드는 재료가 바로 자작나무 껍질이다. 여진족 해적들은 이걸로 만든 배로 한국은 물론 일본 규슈까지 침공했다. 이 사건을 일본에서 도이(刀伊)의 입구(入寇)라고 부른다. 다만 자작나무 껍질은 그 기름 성분 때문에 불에는 겁나게 잘 탄다.[11] 예를 들어 사기자치통감 같은 것을 바위에 새기려고 해보자, 사기는 죽간 기준으로 130권 자치통감은 종이 기준으로 200권 넘는 내용인데 이를 바위에 적어 기록할 순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을 1번만 적는데 아니라 수백번이고 더 적어야 한다면?[12] 단 비석 같은 경우는 예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