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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cupy Wall Street 월가를 점거하라 |
1. 개요
2011년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군중시위. 2011년 9월부터 뉴욕을 진앙지로 하여 일어났고 11월 30일 경찰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73일간 지속되었으며 세계적인 공조 현상을 일으켰다. 2012년까지도 계속되었으나 정확한 기간과 종결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이 시기의 시위는 자연 해산하였다.미국의 경제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계속 위축되던 상태에서 미국 정치권은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과 민주당의 상원이 타협 없이 서로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었고 금융가나 재계 인사들은 대부분 책임을 지지 않고 돈놀이나 일삼는 등 국민들에게 실망스러운 모습만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다 함께 점령하라'라는 이름의 캠페인 사이트가 현지 시각 9월 17일 "월가를 점령한다!"는 모토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위 규모가 작았지만 트위터 등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뉴욕은 물론 미국 주요 대도시로 시위가 번져나가 10월 들어 정치권에서도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국적인 시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처음 가두로 나온 이들은 아예 같은 시기에 일어난 아랍의 봄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시위는 2008년 당시엔 멀쩡했으되 유로화 사태 이후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상황이 미국보다 더 열악한 지경으로 전락한 유럽으로도 펴져나갔고 일부 아시아, 남미 지역에도 역시 확 타오르는 불처럼 번졌다가 이후 점차 사그라들어 어느새 조용히 종결됐다.
2. 촉발
시위대는 1%의 금융 거부들이 전체 부의 50%를 차지하는 현실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99%다(We are the 99%)'라는 구호를 사용했다.
2008년 세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월 스트리트의 수많은 금융 업체들이 도산 위기에 몰렸다. 미국 정부에서는 긴급경기부양을 목표로 한 양적완화정책의 일환으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세금을 투입해 재정지원정책상의 보조금을 지급하였으나 금융위기의 주범 혹은 주범에 가까운 종범들인 많은 금융회사의 경영진은 이 자금으로 경영정상화를 이루진 못하고 보너스 잔치를 하는 등의 추태를 보였다.
주가지수의 상승세가 나타나는 황소 시장(Bull Market)을 표현한 월 스트리트의 황소 조형물. 이 월 스트리트의 심볼은 황동으로 만들어져 금색을 띠고 있는데 하필 유대계 자본이 많은 월 스트리트에 구약성경 속 탐욕을 상징하는 이교도의 금송아지를 닮은 조형물이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시기적으로 아랍 민주화 운동과 겹쳐져 고양되어 있었던 시위대의 규모는 주도층이나 지도부가 없었음에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고 공개 광장에서의 총회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고 평화 행진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표출했다. 일부 월 스트리트의 직원들이 빌딩 위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며 샴페인을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어 세계인의 공분을 사고 시위는 더욱 가열차졌다.
2.1. 사진의 진상
그렇지만 이 사진(정확히는 동영상)은 증권사 건물에서 찍힌 건 아니다. 이들이 샴페인을 마신 곳은 증권사 건물이 아니라 월가 55번지인데 "Cipriani Club 55" 라는 식당이며 이들은 피로연에 참석했던 하객들이다. 또한 주식시장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장 중에 샴페인을 마시는 증권사 직원은 존재할 수 없다. 장 중에는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다.[2] 한 달에 한 번 거래하는 정도의 개인투자가도 전업투자가라면 장에서 눈을 제대로 못 떼는데 증권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일하는 직원들이 회사에서 턱시도 입고 샴페인 마시며 기다리고 있으면 업무태만으로 해고다. 그러나 여러 언론사에선 이것이 월가의 금융인들이 증권사 건물에서 시시덕대며 찍은 것처럼 오보되었다. 실제로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주식시장의 특성상 업무강도가 상당한데 거의 기계처럼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 수준이다.
다만 맨해튼의 중심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람이나 그 하객들이면 시위대가 '적'으로 규정한 상위 1% 계층일 확률이 높으므로 오히려 월급쟁이 증권사 직원보다 돈이 훨씬 많을 확률이 높다. 이들에 대한 분노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만은 아니다. 일반인들이 월가 증권사 직원들의 고액 연봉에 혹해서 그렇지 월가 증권사 직원들조차도 상위 1% 계층에게 고용돼서 일하는 도구에 가까운 존재임을 생각하면 이게 더 사실관계가 맞는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이 샴페인을 들며 시위대를 향해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는 본인들만이 알겠지만....
3. 특징
특히 이 시위는 상기한 웹 사이트,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사이트를 통해 급속도로 전파되어 소셜 네트워크의 현실적 파급력을 재확인했다. 또 '다 함께 점거하라(Occupy Together)'라는 이름의 공조 시위 사이트를 통해 일부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미국 전역 및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였다.4. 진행
- 9월 17일: 시위 시작.
- 10월 10일: 폴 크루그먼 교수가 뉴욕 타임즈에 〈패닉 현상 보이는 부자들〉(Panic of the Plutocrats)이라는 칼럼을 썼다. 이 칼럼에 따르면 이들이 온건한 시위대를 폭도로 모는 이유는 이 시위가 그들 부자들의 이익을 침해하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내 극단 보수주의 정치가들과 같이 날뛰고 있다고 한다. 출처, 원문
- 월가 시위대가 "전세계 시위의 날" 로 정한 10월 15일에는 전세계 400개 도시는 물론 서울 여의도에서도 비슷한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 10월 14일: 타임지에 따르면 11월 5일부터 '은행계좌 전환의 날'로 정하고 대형 은행에서 돈을 빼내 신용조합으로 이전할 거라고 한다. 이것을 제안한 사람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27세였던 화랑 운영자 크리스틴 크리스천이라는 여성. 이 계획에는 2만 명이 동참했으며 11월 5일은 영국의 '가이 포크스 데이'이기도 하다.
- 10월 15일: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고 각종 분석이 쏟아져나왔다. #
"우리가 언젠가 그냥 집에 가서 일 년에 한 번씩 만나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하고 추억하고 있을까, 그것만이 두렵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달라."
처음 인터넷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학생들이 참가하면서 점점 확대되었고 각 노조들의 가세로 사실상 미국 내 범진보 세력들이 총결집했다. 당시 2012년 대선을 앞둔 미국에서 이런 상황은 예사롭지만은 않았는지 재빨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시위대를 이해한다는 코멘트를 날리면서 이 시위가 미칠 여파를 정치권에서도 예의주시했다는 방증이 드러났다. 다만 시위대가 자발적으로 형성되었기에 지도부도, 구체적인 목적성도 부재하였으므로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는 분석이 있었는데 이는 적중했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면서 미국 언론이 온통 잡스 추모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월가 점령 시위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자연스레 해산하였다.
5. 정치권의 반응
5.1.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민주당 인사들도 시위를 지지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오바마도 조지 W. 부시랑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온 만큼 이걸로 민주당이 득을 보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는 분석도 공존했다. 2012년 초 오바마의 동성결혼 지지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5.2. 공화당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시위대는 다른 건 몰라도 공화당에게 매우 적대적었음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공화당 쪽에서는 이 시위가 패자들의 오락에 불과하며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배후세력이 있다는 주장을 하며 시위를 애써 폄하하려고 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미칠 듯이 까였다. 하지만 시위도 점차 사그라 들면서 자체 경선에 관심이 빠져들었고 밋 롬니가 대권 후보가 되면서 시위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었지만 알다시피 롬니는 2012년 대선에서 낙선했다.6. 각종 인물들의 반응
- 미국의 거장 만화가 프랭크 밀러와 앨런 무어는 해당 사건에 대해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졌는데 밀러는 이를 매우 비판한 반면 무어는 이를 옹호하며 밀러의 작품 300을 같이 깠다(...). 앨런 무어가 프랭크 밀러를 비판하다
코믹스 명작을 써내린 두 거장이 서로 욕했다는 것이 꽤 재밌는 점.
- 뉴욕 시장 마이클 블룸버그는 본인이 금융거래 애널리스트 출신이니만큼 역시 시위에 "월가 점령시위는 노동자의 일자리를 파괴하려고 한다."면서 부정적인 의사를 표시했지만 어디까지나 시위 초기의 일이었고 센트럴 파크에 시위대가 진주하는 것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집회의 자유를 존중했다는 의미.
-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영화 자체와는 별개로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평론가들은 놀런이 영화에서 월가 점령 시위를 말 그대로 베인과 그 테러범들이 뉴욕을 장악하고 거기에 무지하고 가난한 대중이 선동에 휩쓸려 부자들에게 억하심정을 표출하며 파괴적 행각을 일삼는 것으로 빗댔다고 평했다. 물론 놀런 감독은 "영화의 시나리오는 시위가 촉발되기 몇 달 전인 5월에 완성됐고 공식적으로 월가 점령 시위와 영화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7. 확산
인터넷을 통해 확산된 만큼 유럽에서도 영향을 받아 10월 들어서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규탄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고 15일 전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 쪽의 시위는 점진적으로 퍼져나갔고 차분하게 진행된 반면 유럽 쪽은 빠른 확산 속도를 보였고 규모나 호전성도 더 높았다. 이는 유럽 쪽은 경제 위기가 미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던 데다 근처에서 일어난 아랍권 시위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기 때문. 특히 경제 위기와 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신음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벨기에에서 벌어진 시위의 규모가 더 컸다. 상황이 안 좋았던 동네인 그리스에서 벌어진 사태는 가히 유혈사태나 다름없었다.10월 15일 한국에서도 금융사가 밀집한 여의도와 덕수궁 근처에서 공조 시위가 있었다. 이것은 2008년 촛불집회처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것은 아니었고 시민단체#에서 주도했다, 게다가 얄궂게 비가 오는 바람에 참가자도 적었다. 22일 2차 국제 행동이라는 형태로 다시 시위가 열렸는데 이때는 사회당[3]과 클리프주의자들인 다함께도 끼어들어서 반 이명박 정부 성격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되었다. 금융권 규탄 외에 국가보안법 폐지, 한미 FTA 비준 중단 등이 같이 거론됐다. 다른 나라에서의 시위도 다들 이런 식으로 그 나라의 특색에 맞게 바뀌었다.
이후에는 대한문 텐트로 알려진 쌍용자동차 노동자 부당해고 취소투쟁과 연계되어 서울광장으로 천막이 옮겨지면서 시위가 진행되었다.[4] 이때 나는 꼼수다 역시 김용민 막말사건과 즈음하여 일종의 세력 과시를 하기도 했다.
11월 FTA 시즌에 맞추어 나는 꼼수다가 수만 명의 시위를 벌이면서 월가 점령 시위와 일맥 상통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큐파이"에 대한 언급은 김근태 의장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했고 이 때문에 19대 총선에서 야권의 주요 구호이기도 했으나 이미 정치권에서 목적을 가지고 "오큐파이"가 주장된다는 것 자체가 거리가 있었고 실제 선거 결과가 야권의 패배로 드러나면서 사라진 구호가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김황식 당시 총리가 월가 시위와 FTA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 등의 국회 발언을 했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시위의 정당성은 인정하면서 의미에는 선을 긋는 온건한 해석 정도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
8. 한계
위에서도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시위 자체가 구심점이 되는 세력이나 조직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터라 조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운동으로 그칠 뿐 실제로 정치적인 영향을 얼마나 줄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적인 시각도 처음부터 많았다[5]. 거기에 응당 군중의 규모가 늘어나면 그렇듯 시위가 커지고 장기화되면서 신선함이 가시고 노숙자들이나 적절하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 시위에 끼어들어 물을 흐리는 등 전형적인 문제도 발생한 것이 자발적 동참으로 유발된 시위가 빠르게 냉각되는 데 일조한 것으로 분석된다.또 시위가 9월부터 일어났기 때문에 겨울의 한파가 다가오는 계절적 배경도 장애물이었다. 미국 동부, 북부 지방이 미국 내 시위의 주축이었는데 추위 때문에[6] 밖으로 사람들이 모일 가능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규모가 더 축소되었다. 경찰의 과격 진압 모습이 유튜브 등지에 올라오면서 다시 불이 붙을 기미를 보이고 있었고 특히 월가 중심부에서 평화적인 연좌 시위를 하는 시위대에게 모기에게 에프킬라 뿌리듯 최루가스를 분사하는 동영상이 올라오면서 조금씩 다시 시위가 불타려는 기미가 보이고 있었으나 결국 시위의 기세가 부활하거나 회광반조하지는 못했다. 결국 같은 시기의 아랍의 봄처럼 가시적인 과실을 맺진 못하고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사태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교훈을 잊고 2021년 1월 27일에 금융가들이 또 장난질을 하다가 딱 걸려서 대형사고가 터졌는데...
9. 사이트
[1] 당시 사진을 통해 우리는 1%다라는 이 시위를 반대하는 구호도 있었음이 확인된다.[2] 그나마 점심 먹을 시간이 생겨도 제대로 된 식사는 고사하고 핫도그로 때우는 게 월 스트리트를 비롯한 증권사 직원들의 일상이다.[3] 진보신당과 통합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4] 때마침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로 시장이 박원순으로 바뀌었던 게 시기적으로 적절했다.[5] 사실 이런 회의적인 시각은 월가 점령 시위 뿐아니라 서구권 대규모 대중운동의 전설적인 시발점인 68운동에서부터 한국의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특별한 조직이나 계획 없이 집결하여 탄생한 대규모 집회, 시위 전반에 적용되는 문제이기는 하다. 특별한 조직이나 구체적인 목적 없이 축제와 같은 형태로 시작되기에 단시간내에 엄청난 규모 확장이 가능하지만 이 규모와 위력이 유지되는 동안 명확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별다른 영향력 없이 흐지부지되기 쉬운 것. 한국의 촛불시위를 보더라도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통해 운동의 목적이 성취된 2004년, 2016년 촛불집회와는 달리 2008년 촛불집회는 집회측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흐르자 활력을 잃고 소멸해 버렸고 프랑스의 68운동 역시 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갔다고 할 정도였지만 드 골이 버티기 전략을 사용하자 운동의 동력이 상실되었다. 참여자들 역시 자신들의 생활이 있는 이상 집회를 한없이 유지할 수는 없고 따라서 집회의 동력이 유지되는 기간, 길어야 2~3개월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끌어내지 못하면 명확한 정치적 성과 없이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되어 참여자들은 우리도 그때는 참 순수했다고 말하며 맥주나 먹어야 된다는 것이다.(물론 명확한 정치적 성과와는 별개로 운동과 그 참여자들에 의한 문화적 영향력이 장기간에 걸쳐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있겠지만.)[6] 뉴욕의 겨울 평균 기온은 서울보다 높지만 한파가 한 번 몰아닥치면 -20℃까지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