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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유러피언컵 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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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RMA 1957 RMA 1958 RMA 1959 RMA 1960 RMA
1961 SLB 1962 SLB 1963 ACM 1964 INT 1965 INT
1966 RMA 1967 CEL 1968 MUN 1969 ACM 1970 FEY
1971 AJA 1972 AJA 1973 AJA 1974 BAY 1975 BAY
1976 BAY 1977 LIV 1978 LIV 1979 NFO 1980 NFO
1981 LIV 1982 AVL 1983 HSV 1984 LIV 1985 JUV
1986 CSA 1987 FCP 1988 PSV 1989 ACM 1990 ACM
1991 ZVZ 1992 FCB 1993 MRS 1994 ACM 1995 AJA
1996 JUV 1997 BVB 1998 RMA 1999 MUN 2000 RMA
2001 BAY 2002 RMA 2003 ACM 2004 FCP 2005 LIV
2006 FCB 2007 ACM 2008 MUN 2009 FCB 2010 INT
2011 FCB 2012 CHE 2013 BAY 2014 RMA 2015 FCB
2016 RMA 2017 RMA 2018 RMA 2019 LIV 2020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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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컵 결승전
1974
브뤼셀
1974-75
파리
1976
글래스고
파일:1975 유러피언컵 결승전 표지.jpg
European Cup Final Paris 1975

1. 개요2. 진출 팀
2.1. FC 바이에른 뮌헨2.2. 리즈 유나이티드 FC2.3. Road to the Final
3. 경기 내용
3.1. 전반전3.2. 후반전
4. 경기 후

[clearfix]

1. 개요

1975년 5월 28일 프랑스 파리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열린 FC 바이에른 뮌헨리즈 유나이티드 FC 간의 스무 번째 유러피언컵 결승전.

FC 바이에른 뮌헨은 유러피언컵 2연패에 도전하고, 리즈 유나이티드 FC는 클럽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치르게 된다.

우승 팀은 1974-75 시즌 유러피언컵위너스컵의 우승 팀인 디나모 키예프와 1975 UEFA 슈퍼컵 경기를 갖게 될 예정이었다.

이 경기의 주심은 프랑스 국적의 미셸 키타브지안(Michel Kitabdjian)[1]이 담당했다. 경기는 48,374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2. 진출 팀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1970~1979).svg
파일:리즈 유나이티드 FC 로고(1973~1976).svg
바이에른 뮌헨 리즈

2.1. FC 바이에른 뮌헨

1974-75 시즌초의 바이에른 뮌헨은 팀 사기가 가히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당시 디펜딩 챔피언인데다가 핵심 멤버들이 월드컵에서 우승에 성공한 것. 다만 핵심 수비수였던 파울 브라이트너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고, 선수단 대부분은 연이은 성공에 심취하여 동기부여가 상당히 떨어져 처참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때문에 바이에른 뮌헨은 해당 시즌 리그에서 10위, 포칼컵 3라운드 탈락, UEFA 슈퍼컵1. FC 마그데부르크와의 스케줄 협상에 의견이 갈려 결국 미개최, 인터컨티넨탈컵도 바이에른 뮌헨이 참가를 거부하면서 결국 무관위기라는 충격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이 이끄는 바이에른 뮌헨은 1973-74 유러피언컵 우승팀으로서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바이에른은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1라운드를 건너뛰고 2라운드부터 경기를 치렀다.

2라운드에서는 동독의 1. FC 마그데부르크를 상대로 홈에서 3-2, 원정에서 2-1로 이기며 합산 5-3으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소련의 FC 아라라트 예레반을 홈에서 2-0으로 이기고 원정에서 0-1로 패했지만 합산 2-1로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프랑스의 AS 생테티엔을 상대로 원정에서 0-0으로 비긴 후 홈에서 2-0으로 승리해 결승에 올랐다. 이처럼 바이에른은 동독을 휩쓸던 마그데부르크, 소련에서 깜짝 우승으로 돌풍을 일으키던 아라라트 예레반, 1960년대 당시 리그 1의 지배자였던 생테티엔을 모두 꺾고 결승전에 도달했다. 흥미롭게도 바이에른은 이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10위에 그치는 부진을 보이며 역대 두 번째로 저조한 리그 성적으로 우승한 팀이 되었다.[2]

2.2. 리즈 유나이티드 FC

리즈 유나이티드 FC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리버풀 FC와 함께 1960년대부터 3강 체제를 구성하고 있던 강팀이었다. 국내 축구 팬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 당시의 리즈만을 리즈 시절이라 부르며 추억하지만, 이 시기를 언급하는 축구 역사를 잘 아는 축구팬들도 많다. 이때의 리즈 유나이티드에는 당시 팀의 핵심인 잭 찰튼을 중심으로 앨런 클라크, 빌리 브렘너, 피터 로리머, 고든 맥퀸등의 선수들이 활약을 하였다.

1963-64 시즌 풋볼 리그 디비전 2에서 우승하며 1부 리그에 오자마자 1964-65 시즌 풋볼 리그 디비전 1과 FA컵에서 둘 다 졌지만, 어쨌든 동시에 우승을 할 뻔하기도 하였고, 1965-66 시즌에는 리그 2연속 준우승, 1966-67 시즌에는 인터-시티 페어스컵 준우승, 그리고 마침내 1967-68 시즌에 리그컵 우승과 인터-시티 페어스컵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인 1968-69 풋볼 리그 디비전 1에서 리즈는 그토록 염원하던 리그 우승을 드디어 이루어내었고, 1969-70 시즌에도 5년전과 마찬가지로 풋볼 리그 디비전 1 FA컵에서 동시에 준우승을 달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참가한 유러피언컵에서도 셀틱 FC을 만나 준결승에서 탈락하기전까지 24 득점 0 실점이라는 성적으로 전승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1971년에도 인터-시티 페어스컵 우승에 성공하였고, 잭 찰튼이 1973년에 은퇴할 때 까지도 리즈는 리그에서 항상 우승 경쟁을 하는 강팀이었다.

1973-74 풋볼 리그 디비전 1에서 리즈는 승점 62점으로 2위 리버풀 FC를 승점 5점 차이로 따돌려 최종 우승을 차지, 1부 리그 통산 2회 우승을 달성하였지만, 돈 레비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직책을 옮기고 감독이 3번이나 바뀌는 등 새로운 불안 요소를 갖고 있었다.

지미 암필드 감독이 이끄는 리즈 유나이티드는 1973-74 풋볼 리그 디비전 1 우승을 통해 유러피언컵에 참가했다. 1라운드에서 한창 전성기였던 스위스의 FC 취리히를 맞이하여 에서 4-1로 이기며 기분 좋게 시작하긴 했으나, 원정에서 1-2로 패하며 조금 힘들게 취리히를 합산 5-3으로 탈락시켰다.

2라운드에서는 리즈가 절치부심을 했는지, 6년 연속 리그에서 우승하고 리그 7연패를 노리고 있는데다가 전 시즌에 유러피언컵 준결승까지 진출했던 헝가리의 강호 우이페슈트 FC를 상대로 원정에서 2-1, 홈에서 3-0으로 승리하며 합산 5-1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벨기에와 안데를레흐트의 레전드 폴 반 힘스트가 버티고 있던 벨기에의 명문 RSC 안데를레흐트를 홈에서 3-0, 원정에서 1-0으로 이기며 합산 4-0으로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 상대로는 발롱도르 위너 요한 크루이프를 비롯하여 요한 네스켄스, 미겔리, 카를레스 렉사흐가 뛰고 있던 카탈루냐의 거함 FC 바르셀로나였다. 리즈는 바르샤를 상대로도 에서 2-1로 승리를 거뒀고, 원정에서 1-1로 비기며 바르셀로나마저 집으로 돌려보냈다(합산 3-2). 이처럼 리즈는 유럽의 강팀들을 연달아 물리치고 본선 참가 2회차만에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도달한 상태였다.

2.3. Road to the Final

''''''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1970~1979).svg 바이에른 뮌헨 파일:리즈 유나이티드 FC 로고(1973~1976).svg 리즈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녹아웃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 1라운드 파일:FC 취리히 로고(1969~1981).svg 취리히 5:3 4:1 (홈) 1:2 (원정)
파일:1. FC 마그데부르크 로고.svg 마그데부르크 5:3 3:2 (홈) 2:1 (원정) 2라운드 파일:우이페슈트 FC 로고(1972~1991).svg 우이페슈트 도저 5:1 2:1 (원정) 3:0 (홈)
파일:FC 아라라트 예레반 로고(1935~1991).svg 아라라트 예레반 2:1 2:0 (홈) 0:1 (원정) 준준결승 파일:RSC 안데를레흐트 로고(1933~1981).svg 안데를레흐트 4:0 3:0 (홈) 1:0 (원정)
파일:AS 생테티엔 로고(1968~1978).svg 생테티엔 2:0 0:0 (원정) 2:0 (홈) 준결승 파일:FC 바르셀로나 로고(1975~2002).svg 바르셀로나 3:2 2:1 (홈) 1:1 (원정)
4승 1무 1패 (9득점 4실점) 합계 성적 6승 1무 1패 (17득점 6실점)
◀ 1973-74 결승 ▶ 1975-76

3. 경기 내용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1974-75 유러피언컵 결승
1975년 5월 28일 수요일 19:15 (CET)
대한민국 표준시 1975년 5월 29일 목요일 03:15 (CET+8)
'''
파르크 데 프랭스 (파리)
주심: 미셸 키타브지안 (프랑스)
관중: 48,374명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1970~1979).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리즈 유나이티드 FC 로고(1973~1976).svg
바이에른 뮌헨 리즈
2 0
<rowcolor=#000,#fff> 71' 프란츠 로트
81' 게르트 뮐러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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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전반전

디펜딩 챔피언이던 바이에른 뮌헨은 이렇다할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리즈 유나이티드가 경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경기 시작 3분만에 뮌헨의 수비수 비요른 안데르손이 리즈의 미드필더 테리 요라스에게 심한 태클을 당하여 다리가 부러지고 마는 부상을 입었다.[3] 이후 제프 바이스가 안데르손과 교체되어 경기장에 들어왔지만, 그는 주전 선수가 아니었기에 뮌헨의 경기력에 큰 지장을 주게 되었다.

전반 23분, 바이에른의 주장 프란츠 베켄바워가 페널티박스 안쪽 바닥에 누워 왼팔을 짚고 있었는데, 하필 그 팔이 공과 접촉했다. 이걸 본 리즈 선수들은 페널티킥을 요구했으나, 프랑스인 주심이던 미셸 키타브지안[4]은 이를 거부했다.

또한 더 논란이 된 장면은 전반 34분에 발생했다. 앨런 클라크는 왼쪽에서 쇄도해 들어오면서 바이에른의 골키퍼 제프 마이어를 제칠 준비를 하고 있던 도중, 베켄바워가 클라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하지만 심판은 이 명백한 파울 상황에서도 리즈에게 페널티킥을 주지 않았다.

전반 37분, 울리 회네스가 부상을 입었는데, 이를 참고 뛰다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교체되고 말았다.[5] 양 팀은 전반전이 끝나갈 때까지 득점이 없었고 0-0으로 전반을 마무리했다.

3.2. 후반전

후반 62분, 빌리 브렘너가 회심의 슈팅을 날렸으나 제프 마이어가 신들린 선방으로 이를 막아냈다. 그러나 1분 후 피터 로리머가 득점에 성공하였다. 다만 빌리 브렘너가 수동적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었다는 이유로 미셸 키타브지안이 처음에는 득점을 인정했다가 부심이 깃발을 들고 베켄바워가 이를 어필하자 판정을 번복하였다. 로리머의 득점이 취소되자, 리즈의 서포터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이후 잠깐 중단되었던 경기가 다시 재개되고, 후반 71분 프란츠 로트코니 토르스텐손의 패스를 받아 역습 상황에서 선제골을 기록하였다. 10분 후인 후반 81분에는 유프 카펠만의 오른쪽 크로스를 게르트 뮐러가 마무리하며 쐐기골을 박아 바이에른 뮌헨이 리즈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하였다.

4. 경기 후

두 팀 모두 직전 시즌에 우승을 차지했던 것에 비해 각각 리그에서 10위와 9위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내고 있었다.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오른 유럽 최고의 팀이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그에서는 중위권 수준에 머무르고 만 것이다.

FC 바이에른 뮌헨은 이 우승으로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고, 다음 시즌에도 우승해 3연패의 위업을 이루게 된다. 베켄바워, 뮐러 등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은 이 시기를 통해 유럽 최고의 클럽으로 자리매김했다. 바이에른은 이 우승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볼 수 있다.

리즈 유나이티드 FC는 이 패배로 "영광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경기 중과 경기 후 리즈 팬들의 폭력 사태로 인해 UEFA로부터 4년간의 유럽 대회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았다[6]. 리즈는 이후 오랫동안 침체기에 빠져 1996년까지 주요 컵 대회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 결승전은 잉글랜드 팀들이 유럽을 지배하는 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이후 리버풀[7], 노팅엄 포레스트[8], 아스톤 빌라[9]가 연이어 유러피언컵을 차지하게 된다.
[1]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이며, 판정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2] 우승한 구단 가운데 가장 저조한 리그 성적을 거둔 구단은 아스톤 빌라 FC1981-82 유러피언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나 리그에서는 11위로 시즌을 마쳤다.[3] 울리 회네스는 "내가 본 것중 가장 심각한 파울"이라며 이 당시를 회고했다.[4] 키탑지앙이라고도 불리지만, 성씨를 보면 알수 있듯이,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이므로 키타브지안이라고 읽는다.[5] 경기 후, 회네스의 부상은 무릎인대 파열로 밝혀졌다. 회네스는 이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1979년 27세의 나이로 선수생활을 조기에 마감하게 되었다.[6] 다행히 항소가 받아들여져 2년으로 줄어들었지만, 리즈가 암흑기에 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미는 없었다[7] 1977, 1978, 1981, 1984[8] 1979, 1980[9]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