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8 08:50:13

푸피에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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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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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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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니케아
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동방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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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피에누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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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렌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눔미우스 투스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298년 299년 300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비리우스 갈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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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27대 황제
푸피에누스
PUPIEN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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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
출생 168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에트루리아의 볼테라(추정) 혹은 로마 근교의 티부르(추정)
사망 238년 (향년 70세)
로마 제국 로마
재위 기간 로마 황제
238년 4월 22일 ~ 238년 7월 29일 (98일)
전임자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후임자 고르디아누스 3세
부모 아버지 :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어머니 : 클로디아 풀크라
배우자 섹티아 세테길라
자녀 티투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풀케르 막시무스[1](장남)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차남)
푸피에나 섹티아 파울리나 카테길라(딸)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1.1. 출신 가문과 가족관계2.1.2. 경력
2.2. 황제 즉위2.3. 아퀼레이아 포위전2.4. 최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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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 Augustus (165년 또는 170년 ~ 238년 6월 29일)

여섯 황제의 해에 등장한 로마의 27대 황제. 풀네임은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이며, 즉위 후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 Augustus)다.

발비누스와 함께 집권한 공동 황제로, 당대 로마인들과 헤로디아누스 등 라틴사가들은 그를 막시무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따라서 최근에는 당대 사가 중 디오보다 객관성과 사실 측면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는 헤로디아누스[2]와 같은 로마인들의 표기에 따라 그를 막시무스로 부르고, 푸피에누스를 통칭처럼 사용하는 경향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3].

'로마판 환단고기'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귀부인 양자가 된 사람이라고 기록됐지만, 현대 서양 고대사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 및 유물 발견들을 통해 이탈리아 태생의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로마 명문귀족 가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세습 원로원 귀족 출신으로 밝혀졌다.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맞서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2세기를 대표하는 명문귀족 출신의 발비누스와 함께 황제로 추대되어 막시미누스와 대결했다. 공동황제 발비누스가 문관 경험이 풍부했다면, 귀족 출신임에도 문관과 무관 경험이 두루 풍부했다고 한다. 아퀼레이아 공성전 당시, 아퀼레이아 시민들과 함께 저항했는데 동포들과의 무익한 내전에 분노한 막시미누스 부하들이 막시미누스를 암살하면서 내전을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로마 귀환 후, 발비누스와 아퀼레이아 포위전 당시의 내치 문제로 인한 갈등, 옛 막시미누스군 처리문제, 공식석상에서의 의전 문제 등을 놓고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다가 권력 분쟁을 벌였다. 따라서 얼마 안 가 이들에게 불만을 품은 병사들에게 어이없이 살해당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1.1. 출신 가문과 가족관계

푸피에누스는 165년 또는 17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태어난 장소는 알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기록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가 페르셀리나 마르첼라라는 여인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역사학계는 페르셀리나 마르첼라가 실존인물인지도 의심하고 있으며, 푸피에누스가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한 내용을 여러 가지 증거를 이유로 신뢰하지 않는다.

최근 연구들의 발표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이 당시 극소수로 줄어든 오래된 귀족 가문의 후예 중 제정 이후 뒤늦게 원로원에 재입성한 집안 출신으로 보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존 드링크워터의 발표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볼테라 출신의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유서깊은 파트리키 가문 태생의 아피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딸 클로디아 풀크라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부모 모두 제정 시대에 이르러 쇠락했다가 원로원에 재입성된 집안들로 보인다고 한다[4]. 특히, 부친의 경우에는 푸피에누스 모친과 달리 그 가세가 고향인 볼테라 인근에서 유지 정도에 머물게 된 탓에, 원로원 재입성 당시 신참자 출신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을 확률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 외의 다른 로마사 학자들의 설명에서도 푸피에누스의 공직 경험 과정, 푸피에누스 자녀들과 자녀들의 가계 등을 살펴보면 부모 모두 귀족임에도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와서야 원로원에 복귀한 집안 출신일 확률이 굉장히 높다고 한다[5]. 여러 근거 탓에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록은 설득력이 더 떨어지게 됐다.

아내 섹티아 세테길라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뒀다. 이중 장남 이름은 티투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풀케르 막시무스인데, 그는 티베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막시무스로도 알려져 있다. 푸피에누스의 장남은 푸피에누스의 어머니 가문의 성을 따랐는데, 집정관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의 사위였다. 그는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와 볼루시아 라오디케의 딸 티네이아와 결혼했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이름(푸피에누스 손자)은 루키우스 클로디우스 티네우스 푸피에누스 바수스였다. 그리고 손자의 아들, 즉 푸피에누스의 증손자 이름은 마르쿠스 티네이우스 오비니우스 카스투스 풀케르였다. 이후의 후손들 역시 대대로 클로디우스와 풀케르를 사용했는데, 장남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푸피에누스의 외가와 이름을 통해 연관성을 맺은 증거라고 한다. 그래서 현대 연구들의 결과를 토대로 학자들은 푸피에누스가 모계 가문을 이어 받았다고 본다. 한편 차남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는 아버지와 칼을 겨눈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동료까지 지냈을 정도로 원로원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였으며, 차남의 후손들 역시 장남 집안처럼 최소 4세기 이후까지 원로원 의석을 대대로 세습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또 푸피에누스의 사위 마르쿠스 울피우스 에우비오투스 레우루스 역시 원로원 귀족 태생으로 보결 집정관 경력 후 누미디아 총독을 지냈는데, 딸의 후손들 역시 원로원 의석을 계속 유지했으며 푸피에누스의 사돈 역시 원로원 귀족 태생이었다고 한다.

이런 출신 배경과 가계도 외에도 푸피에누스는 부모 중 외가쪽이 공화정을 대표한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풀케르 가문인 만큼, 부친의 성씨보다 외가의 성씨 클로디우스[6]를 사용하면서 막시무스를 불리는 이름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푸피에누스의 아들 두명과 사위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은 푸피에누스가 황제로 있다가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후에도 로마 외곽인 티부르 등지에서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2000년대 발굴된 로마 근교의 여러 유적, 유뮬들을 통해 확인됐는데, 연구들에 따르면 푸피에누스 일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주장한 내용과 달리 상당한 원로원 가문이라는 것이 확인된다고 한다. 아울러 푸피에누스 일가 중 친가는 푸피에누스의 부친이 원로원에 입성하기 전부터 이탈리아의 옛 에트루리아 지방에 위치한 볼테라 및 이 일대 토지를 소유한 집안이었는데, 이는 그의 집안이 외가처럼 이탈리아에서 오래되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힘을 쓰던 가문이었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따라서 이런 배경들을 토대로 봤을 때 푸피에누스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 대표되는, 고대 전승 기록의 주장대로 무작정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단정짓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을 잃고 있다.

2.1.2. 경력

아버지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가 에트루리아 볼테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원로원 의원이고, 외가는 그 위세가 현저히 떨어져 많이 약화됐다고 해도 파트리키를 대표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풀케르 가문 태생인 만큼 전형적인 원로원 귀족의 자제로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개의 3세기 원로원 의원들이 그렇듯, 푸피에누스 역시 222년 경력 이전까지의 경력이 미궁이다.

일단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기재된 그의 즉위 전 경력들도 의문이 상당히 많다고 평가받는 만큼, 성인이 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해 백인대장이 되었고 대대장, 정무관을 거쳤다는 주장은 일부만 사실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왜냐하면 보통의 원로원 의원 자제들은 보통 군복무를 일반 사병부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주장하는, 비티니아, 폰투스, 아카이아, 그리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총독을 맡았다는 것은 전부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대강 일치할 확률이 높다고. 어찌 되었던 간에, 이 믿을 수 없는 기록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220년대에는 변경 주둔 로마군의 지휘를 맡아 사르마티아족과 게르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푸피에누스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로마 폭도들에게 엄정한 법률 집행으로 가차없이 처벌해 시민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식자들에게 청렴하고 강직한 관료로 칭송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전승 기록은 이미 20세기 프랑스 출신의 고대 로마제국 후기사 권위자로 유명한 소르본 대학의 앙드레 차스타그놀 교수 등이 밝혔듯, 조직적으로 조작된 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황제들의 이야기도 날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기재된 푸피에누스의 모든 경력을 사실로 보면 안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차스타그놀 등 로마제정시대 라틴사 연구자들은 당시 로마의 영역과 행정체계, 법령, 관습, 발견된 비문 등을 종합해 살펴보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말하는 푸피에누스의 경력들에 대해 지극히 날조된 내용들이 곳곳에서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푸피에누스의 경력들 중 서방 속주 일대의 군경력(사르마티아게르만족을 상대로 거둔 승리)과 아시아 총독 경력 외에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내 다른 경력들은 죄다 "거짓말이 많아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출처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이탈리아 등지에서 발굴된 유적, 유물들을 통해 설득력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푸피에누스의 고대 전승상 경력 중 서기 207년 첫 집정관 직을 수행한 이후부터의 경력들과 게르마니아 일대에서의 전투, 아시아 속주 총독은 정확히 일치된 경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푸피에누스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아래에서의 집정관 경력 및 로마시장 수행 경력도 사실인데, 그는 234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 황제의 추천으로 집정관에 선출됐으며, 그해에 로마 시장에 선출되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현대학자들은 고대부터 내려온 책에서의 기록 중 일부만 인정하면서 대조하는 방법으로 푸피에누스의 즉위전 경력들을 나열해 조심히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원로원 의원 아들로 태어나 로마군 대대장을 시작으로 로마군에서 군복무를 오래 한 뒤, 원로원 입성 후 여러 선출 관직을 역임하고, 게르마니아 일대에서의 전쟁 경험 중 군을 이끌면서 사르마티아족과 게르만 부족들에게 승리를 경험했다. 그 이후 집정관 직을 지낸 후 아시아 속주 총독을 경험했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 집정관을 경험한 해에 로마 시장도 역임했다고 말한다.

이는 그와 공동황제였던 발비누스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푸피에누스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 아닌 이탈리아 원로원 귀족 출신임에도 비슷한 배경을 가진 동료 원로원 의원들과 비교해 군사업무와 행정업무 전반의 경력이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푸피에누스는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부터 급격히 줄어들던 오랜 귀족 가문 후손 출신 중 전통적인 엘리트 원로원 의원[7]였고, 즉위 전 자타가 인정하는 원로원 내의 문무를 겸비한 실력자였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런 경력과 배경들은 당시 엄청난 명문가 출신의 발비누스와 세습 원로원 귀족이면서도 실력자였던 푸피에누스가 원로원에게 공동황제로 추천받아 등극한 이유가 되는 것에 영향을 끼쳤다.

2.2. 황제 즉위

238년 3월,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맞서 싸우자며, 아프리카 속주와 로마의 동맹을 호소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록처럼 오현제의 후손이나 명문귀족 태생이 아니지만 당시 원로원이 가장 믿고 있는 원로급 원로원 중진이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집안 사람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소아시아 출신 그리스인의 후손으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달리 수백년째 로마시민권자였고,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세습 의원으로 당시 로마에서 최고 수준의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친구, 친척, 가문 일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며 근위대, 원로원, 로마서민들에게 온갖 당근을 제안하며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두 사람은 자신들의 부하들을 암살자, 선동가로 로마에 파견해,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를 비열하게 암살하고 그가 트락스에게 제거된 양 소문을 퍼뜨렸다. 따라서 로마에서는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지지하는 무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때 이들이 보낸 서한이 원로원에 도착했다. 당시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잔혹함에 불만이 상당해,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1세에게 그들이 말한 내용이 모두 맞고, 즉위 후 모든 약속을 이행해달라고 요청한 다음 이들을 황제로 승인했다. 이때 원로원은 두 황제가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막시미누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막시무스(푸피에누스)를 포함한 20명의 원로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립했다.

238년 4월,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두 황제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다. 카펠리아누스는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누미디아에 부임한 세습 원로원 의원이었는데, 대다수의 속주 총독들처럼 고르디아누스 측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승인한 원로원 선언문에 대해 불만이 상당했다. 여기에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로마에 있던 시절부터 사이가 나쁜 카펠리아누스를 죽일 놈으로 규정해, 소환을 요청하고 일방적으로 자기 부하를 보내 강제로 물러날 것을 협박한 것이 컸다. 더욱이 양 측은 푸닉 일대의 소송 업무를 함께 도맡아 처리하면서,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와 총독 휘하 군단 사령관 고르디아누스 2세가 벌인 월권 문제로 갈등이 심각한 터라 타협책은 없어 보였다. 이 결과, 카르타고 시가전이라고 불린 전투가 벌어지는데 제3군단 아우구스타를 이끈 카펠리아누스에 맞선 고르디아누스 부자 진영은 게릴라 전을 포기하고 전면전을 택해 승부가 일찌감치 끝나고 만다. 이 전투는 고르디아누스 2세가 민병대, 총독 관저 경비대로 구성된 1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저항하는 모양새였는데, 양 측의 무력 충돌 직후 고르디아누스 2세와 그를 따른 1천명은 그 자리에서 전멸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목숨을 잃었고, 시체는 실종됐으며 참전한 농장주와 민병대는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후 카르타고 시는 제3군단에게 약탈을 당해 불바다가 되고, 반란에 참가한 농장주 가족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에 부푼 고르디아누스 1세는 총독 관저 내 침실에서 여유롭게 있다가,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달받았다. 이미 협상장을 마련할 수 없는 현실에서, 좌절한 고르디아누스 1세는 매우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패배를 직감한 뒤 목을 매어 자살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오늘날의 터키 출신의 평범한 집안 태생으로, 젊은 시절부터 오랜 군경험을 거쳐 50대에야 원로원 의원이 된 뒤, 60대 초반 이후 명예로운 경력을 모두 거치고 엘라가발루스의 총애 아래 집정관까지 오른 교양인이자 최고 부자였다. 따라서 원로원은 밑바닥부터 오랜 군경력을 쌓았고 교양까지 갖춘 문무를 겸비한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2세가 "모두의 지지를 받아 막시미누스에 맞서겠다"고 주장했을 때, 로마 원로원은 그들의 서한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고 황제로 지명한 터라 카펠리아누스의 공격 소식과 이들 부자의 몰락은 원로원 전체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측에서 권력을 쥐기 위해 자신들을 속인 것을 알게 되어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따라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를 비롯한 중진 인사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대다수 의원들은 좌절해 있는 일부 동료들에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목소리를 높인 뒤 회의 소집을 명령했다.

콘코르드 신전에 소집된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소식을 접한 이후 일상적인 업무만 처리했을 뿐, 그들 자신과 공공의 안전에 대해서는 토론하기를 거부했고 겁에 질린 침묵이 한동안 좌중을 압도했다. 이때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의 의원이 동료 의원들을 무기력으로부터 일깨웠다. 그는 먼저 막시미누스가 야전군을 앞세워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조심스러운 유화책은 더이상 소용이 없다고 말한 뒤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용감하게 전장으로 나아가 '포악한 야만인'과 싸우거나 고문과 치욕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 의원을 황제로 옹립하자고 제안했다. 원로원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황제에 임명된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 황제 만세! 원로원은 그대들을 선출하여 행복합니다. 공화국 또한 그대들의 통치 아래 행복할 것입니다!"

원로원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에게 집정관 및 호민관 권한을 수여하고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와 최고 대사제라는 직분을 안겨줬다. 두 황제는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감사를 올리기 위해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갔다. 그러나 감사 의식은 로마 대중(더 정확히는 고르디아누스 일가 팬들)에게 방해받았다.

고르디아누스 1세가 서한을 보내고,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가 이들 부자 손에 암살됐을 때부터 수도장관 사비누스가 돌에 맞아 순직할 정도로 로마 시내는 이들 부자와 가문을 지지한 지지자들로 인해 치안이 엉망이었다. 그들은 두 황제 중 엄격하고 법과 원칙을 강조한 푸피에누스만은 절대 안된다며 난동을 피웠다. 이와 함께 그들은 자신들이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며 원로원이 선택한 두 황제에 더해 제 3의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오직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사람을 제3의 황제로 옹립하라고 요구했다. 또 그들은 "우린 두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며 공동황제와 호위대, 원로원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런 폭동에도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소란스러운 군중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자 몽둥이와 잔돌로 무장한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은 떼를 지어, 앞을 가로 막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양자로 입적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를 황제로 올릴 것을 요구하면서, "막시무스(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물러나라"고 소리 지르고 난폭하게 행동했다. 이미 이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가 황제로 선포될 때부터 제국의 공무원, 세금징수원, 근위대 병사들을 보이는 대로 죽여, 그 시체를 조롱하고 하수구, 테베레 강에 집어 던지고, 빚을 진 이들은 떼를 지어 채권자들을 개패듯 죽인 터라 통제불능이었다.

두 황제는 이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그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막시미누스 군대는 이미 이탈리아 북쪽 국경을 넘고 진격하고 있었다. 두 황제와 원로원은 트락스 군을 서둘러 막아야 했기에,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그래서 그들은 집에서 머물고 있던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를 카파톨리누스로 불렀다. 이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당시 13세 소년이었던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리기로 했다.

이후 두 황제는 겨우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협박과 포위에서 풀러났고, 비로서 국가 위기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때가 해를 넘긴 2월 초로, 이미 막시미누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본국 이탈리아 침공을 시작한 뒤 이탈리아 북부 최대의 항구도시 아퀼레이아 근처로 진군하고 있었다. 두 황제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이탈리아를 수호하는 문제를 떠맡았는데, 군을 이끌고 막시미누스와 직접 무력대결을 떠맡기로 한 쪽은 푸피에누스였다. 반면 발비누스는 로마에 남아서 보급을 담당하면서, 로마 치안과 곡물 수습 등 민생 안전에 힘쓰기로 했다.

2.3. 아퀼레이아 포위전

"공화국은 누구의 개인 재산도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부터 우리 공화국의 재산이 가진 로마 사람들의 공동 소유였습니다. 우리와 당신들은 (황제에게) 이 제국의 관료와 관리를 위임했습니다. 좋은 규율과 합당한 행실과 당신을 명하는 자들을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면, 좋은 것이 많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방과 도시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깃들고, 통치자들을 따를 겁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친척들과 더불어 여러분의 뜻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외국 땅에서 부상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만인 국가를 조용히 유지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
헤로디아누스, 막시무스의 아퀼레이아 입성 연설

푸피에누스는 문무 모두에서 경험이 풍부했고, 공평정대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젊을 적보다 체력이 약해졌지만, 아주 용감하고 체격은 여전히 좋아 위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로 지명받은 직후, 발비누스에게 서둘러 막시미누스의 침공을 막아야 함을 주장한 다음 촉박한 시간 속에서 이탈리아 내 방어병력을 모았다. 로마 시내에서 벌어진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자들의 선동, 혼란 문제는 발비누스가 맡기로 했고, 원로원 내 분위기는 푸피에누스를 지지하고 있던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같은 중진급들이 담당하기로 했다.

이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그는 친히 병사들을 이끌고 툴루스 메노필루스와 같은 경험 많은 동료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북이탈리아 내 병참 관리 현황을 점검했으며 아퀼레이아 입성 후에는 시민들을 불러 모아 이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후, 그는 시민들과 함께 아드리아 해를 면한 아퀼레이아 쪽에서 진영을 펼치고 방어전을 준비했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답게 지형을 파악해, 아퀼레이아를 둘러싼 7개의 도시 하수구 배출구 방어를 중심으로 도시를 감싼 얕은 바닷가와 습지를 건넜고, 이곳 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일곱 바다'라고 부르는 천혜의 방어선 중 지름길로 불리는 곳을 통과해 병력을 이동시켰다. 첫째날과 둘째날에는 남녀노소가 힘을 합쳐 공성전에 도움이 될 돌, 짚불, 낙엽을 모았고 푸피에누스는 승리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며 병사, 시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합심을 맹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야전군을 이끌고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아퀼레이아 수비군의 끈질긴 방어에 막혀 함락시키지 못했다. 주민들은 막시미누스를 따르는 로마군을 야만족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해 격렬히 저항했다. 238년 4월, 막시미누스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했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보급품 관리 문제도 실패하면서 푸피에누스의 방어전에 완전히 말리며 고전했다. 이런 이유로 막시미누스 군대는 자신들이 황제에게 사기당했다고 불만을 터트렸고, 아퀼레이아 전투가 4주가 지났을 때 이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그들은 막시미누스를 따른 결과, 자신들의 부모, 형제자매, 친척, 친구들이 본인을 로마인이 아닌 야만족을 따르는 배신자로 여겼다는 이야기에 충격에 빠졌다. 아퀼레이아와 북이탈리아 로마인들이 푸피에누스와 그를 따른 근위대, 투항한 막시미누스 진영 병사들에게 떡갈나무와 올리브 나무 잎사귀와 나뭇가지를 선물하고, 꽃잎을 행군하는 곳에 뿌리고, 응원을 해주고 격려했다. 이 모습은 트락스 진영 병사들의 멘탈을 무너뜨렸다. 따라서 트락스를 따라온 장교, 병사들은 이런 현실에 좌절해,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오랜 공성에 질려버린 제2 군단 파르티카 병사들은 막시미누스와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근위대장 아눌리누스 등을 살해했다. 이후 막시미누스와 그 아들의 머리는 제2군단 소속 병사들 손에 라벤나에서 전달됐고, 아퀼레이아 시민들은 막시미누스 일당의 머리를 확인한 뒤 성문을 활짝 열어 칼을 맞댄 옛 막시미누스 병사들을 위로한 뒤 굶주린 병사들에게 식량을 나눠줬다. 이후 이를 받아든 푸피에누스는 판노니아 속주 주둔병력과 아퀼레이아 병력을 모았고, 옛 막시미누스군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렇게 화해가 끝난 뒤, 푸피에누스는 사비와 황제 개인 국고를 털어 본인과 발비누스의 이름으로 아퀼레이아 주민, 양 병력 모두에게 보너스를 하사하고 그들을 격려했다. 이윽고 그는 국법에 따라, 양군을 로마 근교에서 해산했는데, 공성전에 참전해 싸운 병사들에게는 추가로 공을 치하하고, 많은 하사금을 지급했다. 이는 트락스를 없앤 병사들도 똑같이 적용돼 내전이 될 뻔한 상황은 금세 사라졌다.

양 병력이 평화롭게 주둔지와 이전까지 주재하던 지역으로 떠나고, 최대의 적수가 허무하게 사라지면서 푸피에누스의 치세는 안정되는 듯 했다. 푸피에누스는 국법에 따라 게르만호위대과 로마에서 함께 출발한 프라이토리아니와 귀환했는데, 민중들은 로마에 들어온 황제 일행에게 개선식을 떠올릴 만큼 열렬히 환호했다.

2.4. 최후

그러나 공동의 적 막시미누스가 사라진 뒤 마음을 놓은 탓인지, 아니면 권력을 놓고 양립할 수 없던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공동황제 두 명은 서로에게 쌓인 오해로 갈등이 생겼고, 이 틈을 노린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지지자들은 파벌을 모아 원로원과 로마 시내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지지하며 대립했다.

두 황제의 권력 투쟁에서, 먼저 싸움을 건 쪽은 발비누스였다. 애당초 두 황제는 훌륭한 경험과 오래된 귀족 출신이라는 공통분모 외에는 공통점이 적었는데, 오랜 귀족임에도 좀 더 2~3세기 원로원 귀족에 가까운 스타일의 취향과 경험을 쌓은 인사는 발비누스였고 과거 공화정, 원수정 초기의 귀족 스타일을 유지한 쪽은 푸피에누스였다. 더군다나 두 황제는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승승장구했지만, 그 결이 묘하게 달랐다. 발비누스는 카라칼라의 최측근이었고, 그가 밞아온 코스는 늘 귀족적인 이들이 차지한 자리였다. 반면 푸피에누스는 세습 원로원 의원이고, 어머니가 오래된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최고 지파인 풀케르 가문 출신임에도 부모 모두 이 시기엔 몰락귀족에 가까운 터라 자연스레 비교가 됐다.

이런 이유로 발비누스는 같은 귀족임에도 군대 경험이 많고, 좀 더 투박한 스타일의 엄격한 푸피에누스보다 자신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푸피에누스의 차남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대 동안 정규 집정관을 지냈고, 푸피에누스와 그 두 아들은 물러터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보단 트락스의 국방정책이 제국에 필요하다고 여긴 이들이라서 발비누스 파벌과는 묘한 경쟁구도였다. 설상가상 발비누스와 카라칼라때 일로 악감정이 있던 발비누스의 친척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같은 이들은 아부꾼에 가까운 발비누스보다는, 엄격하고 공평한 푸피에누스를 여러 이유로 지지했다.

이런 탓에 발비누스는 자신이 돋보여야 할 상황에서, 세습 원로원 의원이며 파트리키 출신임에도 몰락귀족인 푸피에누스만 민중들의 환호를 받는 것은 눈엣가시와 같았다. 그는 푸피에누스가 로마인들에게 국가를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는 현실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특히 그가 가장 불만을 품은 것은 푸피에누스가 자신보다 먼저 이름이 언급되고, 공문서와 승전 기념비에도 이름이 먼저 기재된 일이었다. 그래서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를 견제했는데, 같은 명문 귀족이라고 해도 자신의 혈통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푸피에누스와 그 가문을 은근슬쩍 까내렸다. 그래서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가 군인 출신이라고 무시했다고 한다.

이는 푸피에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로마 입성 직후 발비누스가 로마에 있는 동안 치안 안정조차 형편없이 한 일에 대해 불만이 상당했다. 따라서 이것만으로도 그는 상당히 화가 났는데, 비난받아야 할 발비누스가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본인과 가문을 싸잡아 까내리자 이는 그 자존심을 건들고 말았다. 엄격한 성격을 가진 그는 발비누스가 로마에서 보여준 공공질서 유지 실패를 지적했고, 이는 권력 다툼의 시작이 됐다. 따라서 막시미누스가 사라지자 칠십이 넘은 두 공동황제는 서로 권력 다툼을 벌였고, 이들의 대립은 황궁 안팎에서 매일 벌어졌다.

두 사람은 과거 공동황제들이 그러했듯, 자신이 맡은 권한의 범위를 놓고 분쟁을 벌였다. 원로원 의원들도 양 파벌로 나뉘어 대립했다. 두 황제는 제각기 다른 집무실을 사용했고 서로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가 라인 방어선 일대의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병들을 포섭해 로마로 들어온 것과,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끄는 근위대장에 푸피에누스의 먼 친척 피나리우스 발렌스가 임명된 것은 자신을 암살 내지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따라서 그는 푸피에누스를 견제하고 공격했다. 그리고 이런 대립 상황 속에 근위대 병사들은 질린 나머지 둘 다 죽여 버리기로 결의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회를 보고 있던 고르디아누스 일가 지지자들이 근위대 일부를 포섭해, 움직였다.

다행히 푸피에누스는 근위대 불만을 먼저 깨닫고 이를 달래려고 했고, 발비누스에게 게르만 호위대대를 내줄 것을 동의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발비누스는 이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푸피에누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며 자신들을 죽이러 들어온 근위대 병사들이 눈 앞에 닥칠 때까지 시비를 걸고 욕설을 퍼부었다. 따라서 238년 7월 29일 두 황제는 황궁 안에서 근위대 병사들에게 체포된 뒤, 심한 고문을 당하고 팔,다리가 잘린 상태에서 로마 시내를 끌려다니며 조롱받은 뒤 잔인하게 살해당했다.[8]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면, 238년 7월 29일,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은 로마에서 카피톨륨 행사가 한창인 틈을 타 황궁으로 침입했다. 이때 두 황제는 상대방의 상황이나 의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때 푸피에누스는 나중에 암살자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발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발비누스는 이 요청이 푸피에누스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의 일부라고 의심해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두 사람은 암살자들이 방안에 들이닥칠 때까지 쓸데없는 언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체포된 두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에게 '원로원 황제'라고 불리며 조롱받고, 황제의 의복이 벗겨진 채 로마 거리를 질질 끌려 다녔다. 이후 병사들은 자신들의 진지까지 산 채로 끌고 온 두 사람을 신나게 고문하다가 게르만족 출신 근위대가 두 사람을 구하려고 달려올 것을 우려해 그 날 전부 죽여 버렸다. 이때 두 사람의 시신은 거리에 내던져져 한동안 방치되다가 뒤늦게 원로원에 의해 수습되었다.

자기들이 옹립한 두 황제가 백주대낮에 근위대에게 잔혹하게 도륙되었으니 원로원은 위기를 직감했다. 원로원은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가 로마 평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 쉽게 못 건드리지 못 할 것이라고 판단해 즉시 움직였다. 그래서 그들은 근위대가 새 황제를 내세우기 전에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를 유일한 황제로 옹립했다. 하지만 당시 근위대 병사들은 13세밖에 안 된 소년 황제를 특별하게 여기거나 크게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군은 고르디아누스 3세를 쉽게 반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린 황제의 뒤에는 로마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와 원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3. 평가

"이것이 막시무스(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의 마지막이었다. 높은 신분과 자신들의 능력으로 권좌에 오른, 존경받는 걸출한 노년의 두 인물에게 가당치 않은 모욕적인 죽음이었다."
헤로디아누스

과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통해, 푸피에누스(막시무스)는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난 형편없는 가문 태생의 군경력자 정도로 알려지고 귀족 태생의 발비누스와 충돌했다가 살해당한 황제로 인식됐다. 하여 본인과 가문까지 대장장이 가문, 밑바닥에서 군경력으로 치고 올라온 귀족으로, 자격지심에 스스로 몰락한 황제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르러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 일가와 관련된 대대적인 유적,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동시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의 평가는 주목받고 있고 신빙성을 더해가면서, 여섯 황제의 해에 제위에 오른 6명의 황제 중 평가가 180도 바뀌게 됐다. 어떻게 보면, 그 대척점에 서있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나 고르디아누스 부자와는 다른 평가가 서서히 나오게 된 이유인데, 헤로디아누스는 막시무스(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가 비록 모욕적으로 살해당하고 제 무덤을 팠다고 해도 국가적 내전 상황에서 상당히 훌륭했으며, 이들의 죽음은 매우 모욕적이고 국가 전체적으로 불우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당대 헤로디아누스와 현대에 이르러, 푸피에누스는 4세기 작성된 믿을 수 없는 고대기록과 다르게 재평가됐다. 이유는, 그가 명문귀족 태생의 세습원로원 의원이고 오랜 군경력과 행정경력을 두루 거친 걸출한 고령의 전직집정관이라는 타이틀이 아닌, 이 인물의 용감함, 고결함, 애국심 때문이다.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쏘아올린 반 막시미누스 운동이 내전으로 치달아 로마와 이탈리아가 트락스에게 도륙날 뻔한 상황을 멈췄던 점,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과 자신들에게 냉담한 근위대로 인해 거취가 불안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점은, 그가 공동황제 발비누스와 달리 재평가받는 이유가 됐다. 여기에 더해 그는 죽기 전까지도 발비누스의 의심, 시기로 시작된 양측의 대결을 멈추고자 노력한 터라, 그 인격 역시 훌륭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암살 후 벌어진 여섯 황제의 해 당시 황제 중 그 평가가 꽤 훌륭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위기를 극복했음에도 발비누스의 도발에 넘어가 갈등을 빚었고 권력다툼을 벌여 238년 모욕적으로 명을 단축하고 말았다. 더욱이 그 다음으로 즉위한 이는 제국의 내란을 키운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정통성으로 삼아 뒤를 이은, 고르디아누스 3세라서 사후에는 '원로원 황제'라고 조롱받고 죽어간 것 이상으로 본인과 가문 전체가 싸잡아 비난받고 4세기에는 신상정보까지 위조된 굴욕을 겪게 됐다.

[1] 티베리우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풀케르 막시무스로도 알려져 있다.[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고르디아누스 3세 시대까지 로마제국의 중앙, 지방 관료(중하위직)를 지낸 인물로, 수사학자도 지냈던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이다. 고향은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 관료이자 학자 출신임에도 친원로원 내지 반황제적 입장에서 서술하지 않은데다 로마와 동방 일대에서 경험한 일을 일기처럼 기술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로마 원로원과 관료층이 사용하는 황제들의 표기 등에 따라 황제들의 업무, 명령 및 표기를 기록했는데, 현대에 이르러 유물, 유적, 비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사료의 가치가 상당히 높아져 주목받고 있다.[3] 이는 서양 고대 라틴사 학계와 미국 문헌협회, 더 나아가 19세기부터 고전 라틴어 표기와 로마인들의 표기를 존중한 영향도 크다. 따라서 2012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로마사 저서로 대표되는 현대 연구들에서는 이전의 칼리굴라가 2000년대 이후 로마인들의 통칭을 존중해 가이우스로 불리고 있는 것처럼, 아예 막시무스로 표기하고 있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4] 실제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대표하는 풀케르 집안은 아우구스투스 시절, 당시 가문의 수장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등이 간통죄 등의 혐의를 뒤집어 쓰고 숙청되면서, 그 대단한 위세가 크게 꺾이게 됐다.[5]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가 서로 견제 중일 당시, 공동황제 발비누스는 이런 이유를 근거로 자신의 가문이 더 훌륭하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푸피에누스를 까내렸다.[6]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시조 아피 클라우디우스 시절부터 au와 o를 혼용 병기하며 사용해, 클라우디우스와 클로디우스를 동시에 쓰기도 했다.[7] 과거 공화정 시대의 원로원 의원들과 제정 초중반기때의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트라야누스 같이 즉위 전부터 오랜 기간 변방에서 군 경력을 쌓았던 사람들을 말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이런 경력을 거친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들이 원로원 내에서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8] 이때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의 근위대장에 올랐던 피나리우스 발렌스 역시 소식이 끊긴 것으로 보아, 병사들이 황궁으로 처들어가기 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