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0 23:09:06

틱꽝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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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소신공양3. 영향4. 기타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ich_Quang_Duc.png
Thích Quảng Ðức[1] (釋廣德/석광덕[2])
1897년 ~ 1963년 6월 11일

베트남고승. 베트남 불교 단체에 의하면 7살에 출가했고 이후로 1932년까지 수행을 거듭하다가 1932년에 안남불교회가 성립되면서 베트남 중부와 남부 일대를 돌아다니며 포교와 사찰 재건에 힘을 썼다고 한다. 이후로 캄보디아로 유학 가서 상좌부 불교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 지배 체제에서 벗어난 후로는 남베트남에 머무르면서 사찰 재건 및 포교, 신도 교화에 힘을 쓰면서 남베트남 불교계의 거목이 되었다.

그러나 바오다이를 내쫓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이 불교 탄압 정책과 독재 정치를 펴기 시작했고 친인척들이 대규모로 비리를 저지르면서 남베트남의 형세가 다시 막장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교 탄압 정책에 맞서서 저항하던 승려들을 무차별 진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틱꽝득은 이에 맞서서 소신공양을 하기로 결심했고 1963년 6월 11일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시위가 있었던 당시에 틱꽝득 스님이 주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서 사이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소신공양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사진과 영상이 특보에 호외, 속보를 타고 전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로 일파만파 전파되었다.[3] 소신공양 당시 67세(세는 나이), 법랍[4] 47년이었다.

2. 소신공양

  •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 충격적일 수 있으므로 클릭 시 주의[5] 사진과 영상이 전 세계로 보도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신공양의 사례일 것이다. 해당 소신공양 장면을 촬영한 미국의 사진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맬컴 브라운(Malcolm Browne)은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 틱꽝득의 소신공양 영상 충격적일 수 있으므로 클릭 시 주의(성인 인증 필요) - 1963년에 개봉한 쇼큐멘터리 몬도 카네 2의 한 장면이다. 재연으로, 실제 영상이 아니다. 실제 사진과도 디테일 상의 차이가 있다.

정권에 저항한 분신자살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끝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틱꽝득의 행동은 종교적인 열망을 기반으로 했기에 가능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 최고 순위가 작열통(몸이 불에 탈 때 느끼는 고통)인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견딘다는 사실은 인간을 초월한 인내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다. 문지방에 발가락 끝을 부딪혔을 때에도 저절로 비명이 나오고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온몸이 지글지글 불타고 있는 상태에서 신음 한 번을 내지 않고 얼굴을 태연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신공양을 감행하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해야 하며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6]이라는 말을 남겼다. 동영상을 보면 소신공양 중에 불길이 거세지자 쓰러질 듯이 앞으로 기울어졌지만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고 다시 가부좌 자세로 정좌하며 결국은 뒤로 쓰러진다. 이건 정말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낳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근육은 구부리는 근육이 펴는 근육보다 많기 때문에 소사체는 근육들이 수축해서 자연스레 안으로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7] 표현조차 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어마어마한 의지로 최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펴고 열반했다. 이 엄청난 광경에 경찰들도 넋을 잃고 멍하게 서서 스님을 바라보았고 주위의 승려들은 틱꽝득에게 일제히 절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려들을 감시하고 있던 경찰들도 같이 그에게 절을 올렸다.

Google에 틱꽝득을 검색하면 당시의 상황을 찍은 모습이 여러 나온다.(불에 탄 시신의 흑백 사진이므로 주의)

소신공양이 끝난 후 그의 법체는 다시 한번 소각로에 넣어져 8시간 동안 화장(火葬) 되지만 그의 심장은 전혀 타지 않았다고 하며[8] 이후 남베트남 정부에서 파견된 비밀경찰이 황산을 뿌려 훼손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며[9] 금속 용기에 구리줄로 봉인하여 스웨덴 은행에 맡겨졌다가 이후 하노이 국립 은행에서 소장 중이라고 한다.

3. 영향

이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덕분에 원래도 이미지가 안 좋아지고 있던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을 그때까지 지원하고 있던 미국은 부패 정권을 돕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됨으로 베트남 개입의 명분이 약해졌다. 그리고 인구의 90%에 달하는 불교를 탄압하며 어그로를 끌던 응오딘지엠 정권에 민심은 더욱 분노하게 되어 사회 혼란은 가중되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누의 마누라 "마담 누" 쩐레쑤언[10]은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을 바베큐라고 하며 인간 이하의 고인드립을 해서 베트남 사람들의 깊은 빡침을 불렀다. 결국 그녀는 남편이 참혹하게 사살당할 때 얼른 달아나서 프랑스이탈리아 등지를 떠돌다가 갔다. 죽을 무렵에 고향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했으나 베트남 정부나 여론은 "50년 가까이 지났어도 당신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냥 해외에서 죽어라. 시체조차도 베트남에 오면 도저히 멀쩡할 수 없을 테니까."라고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로마의 한 초라한 호텔에서 쓸쓸하게 죽고 이탈리아 공동 묘지에 대충 묻혔다. 이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달렸을 영상의 댓글을 보아도 쩐레쑤언에 대한 욕설이 99%일 정도이니까 당시의 반응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한편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 정부까지 응오딘지엠 정권을 완전히 포기한다. 불과 몇 달 후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이 지엠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을 확신한 군부의 쿠데타로 붕괴했다. 아무리 미국이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국가라고 해도 이 정도로 심각한 고인드립은 용납이 안 될 정도의 대단히 질 나쁜 욕이었다. 작열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그걸 의지로 버티고 앞이 아닌 뒤로 넘어진 것은 미국인들조차 감명에 남을만 한 것인데도 그걸 두고 바베큐라고 비하했으니까.

베트남전의 시작과 끝을 각각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으로 시작하여 소녀의 절규로 끝나지 않을까. 왓치맨(영화)에서도 오프닝에서 베트남전을 상징하는 TV 영상으로 위 장면이 나왔다.

또한 이 사진은 서양의 발달된 물질 문명으로 동양을 농락할 수 있다고 여겼던 서양 세계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의 미국 패배는 이미 이 순간 결정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틱꽝득의 소신공양 이전까지 동양의 이미지는 단순히 미개하고 개화되지 않았으며 전근대적인 동네라는 인식 정도였지만 이 사건 이후 서구 지식인들은 과연 서구의 물질 문명이 동양의 정신적인 문화의 가치까지 압도할 수 있는지 본질적으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걸 두고 동양의 정신 문명이 승리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것은 일본 제국이 옥시덴탈리즘을 내세우며 정신 문명이 우월하다는 선전과는 엄연히 다르다.

어쨌든 이 사건이 있은 후인 1970년대부터 서구에는 뉴에이지와 같은 반동적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런 흐름이 이 사건과 아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세간에 떠도는 유명 어록 중에는 마틴 루터 킹이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남긴 말도 전해지고 있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 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4. 기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그리 기억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반공주의의 영향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한국의 상황상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허용하지 않았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과거에는 교과서에서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건을 베트남의 혼란상으로 서술하기까지 했다. 오늘날에도 한국의 극우에서는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을 반미, 용공 조장의 분신자살로 폄하하며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에 반미주의자들이 10년간 수많은 분신자살로 월남을 혼란하게 해서 패망하게 했다는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틱꽝득 스님에 대한 책은 없었지만 미야우치 가쓰스케가 틱꽝득에 대한 내용을 쓴 《분신》이라는 소설이 나왔다.

틱꽝득 스님의 사건을 모방한 사례가 있었다. 사이공 미국 대사관 직원의 어린 아들이 가솔린을 몸에 뿌리고 불을 낸 사건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몸에 불을 지른 만큼 심각하게 화상을 입었고 나중에는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 그랬다"라는 한 마디를 했었다.(...)

또한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에 대해서 당시 우리나라의 언론인 중에서 한 사람은 방법의 과격함과 그 내용이 정교 분리에 어긋나는 것임을 들어서 비난하였다. 링크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리 신의 모티브가 바로 틱꽝득이다.[11]

2018년 1월 7일자에 방송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영원한 심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90~2000년대 랩메탈그룹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데뷔앨범 Rage Against The Machine(앨범) 커버로 해당 사진이 쓰인 바 있다.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 외곽의 티엔 무 사원이 틱꽝득 스님이 생전에 거처하던 곳이었고, 사이공으로 갈 때에 타고 갔던 차가 전시되어 있다.


[1] 실제 발음을 들어보면 틋왕륵에 가깝게 들린다.[2] 광덕 스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승려들은 석가모니의 제자라는 뜻으로 법명 앞에 석(釋)자를 붙이는 관습이 있으며 지금도 일부 승려들은 이렇게 한다. 중국 동진시대의 고승 도안(道安, 312~385)이 증일아함경의 "출가하면 모두 석자(釋子)가 된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승려들은 모두 석(釋)자를 성처럼 써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서 유래한 오래된 관습이다.[3] 한국에도 1963년 6월 12일자 경향신문이 소식이 보도되었다.[4] 불교에서 비구계를 받은 해를 원년으로 계산한다.[5] 흑백으로 찍힌 사진을 상상력을 동원해 컬러로 구현한 사진이다.[6] 그리고 정말 이 말은 여러 의미로 예언이 되었다. 1차적으로 베트남 불교의 투쟁이 그의 소신공양으로 승리했고, 2차적으로 호치민의 베트남 공화국(북베트남)의 "투쟁"이 베트남 전쟁 승리로 "승리"하였으며, 3차적으로 그런 베트남이 개혁 개방을 하면서 종교의 탄압이 약해지면서 베트남의 종교(특히 불교와 천주교) 인구가 증가했다.[7] 이와 관련된 예제로 자해공갈죄 범죄의 경우 "뒤로 쓰러졌다"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자해공갈 피의자와 옹호자의 증언에 대하여 신빙성이 급격히 줄어든다.[8] 오늘날까지도 심장은 따로 남아 있는데 심장이 숯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전혀 타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9] 제자 승려들이 화장을 끝내려고 타지 않고 남은 심장을 염산에 녹이려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0] Trần Lệ Xuân, 1924년 4월 15일~2011년 4월 24일[11] 다만 현재는 스토리가 바뀌면서 더 이상 분신 공양으로 인해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녹서스에 맞서서 자신의 능력을 쓰다가 시력을 잃으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