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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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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
吐蕃 | 吐蕃國

བོད་ཆེན་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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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위치
파일:Tibetan_empire_greatest_extent_780s-790s_CE.png
618 ~ 842
<rowcolor=#fecb38>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토번 부족 티베트 분열기
<colbgcolor=#ed1c24><colcolor=#fecb38> 수도 라싸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찬보[2]
주요 찬보 송첸캄포
티송데첸
언어 티베트어
민족 티베트인
종교 티베트 불교, 뵌교, 이슬람교(소수)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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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6세기 이전 토번 왕국2.2. 전성기: 송찬간포의 집권기2.3. 정복 사업
3. 외교
3.1. 당나라와의 관계3.2. 우마이야 칼리프조, 아바스 칼리프조와의 관계
4. 멸망5. 찬보(贊普)
5.1. 역대 찬보

[clearfix]

1. 개요

송찬간포가 토번 부족을 통일한 서기 7세기부터 9세기까지 현재의 티베트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 존속했던 제국이다.

서기 4세기에 이미 토번의 선조라고 할만 한 정치 집단이 등장하여 천천히 중앙 티베트 부근에서부터 영향력을 키운 듯 보인다.

티베트 지역에서 발원했던 강족, 저족 등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중국으로 진출하여 왕조를 세웠던 탓에 남은 지역의 국가발달이 늦춰졌다. 이미 서부 일대에는 샹슝국도 있고 탕구라산맥 동부에는 숨파와 같은 부족 연맹 형태 국가가 이미 등장했다.

토번의 원류가 되는 집단은 라싸 남동의 얄룽(톨기 지방)을 기점으로 근처 여러 부족을 흡수해 세력을 불려나갔다.

2. 역사

2.1. 6세기 이전 토번 왕국

티베트의 문헌[4]에 의하면 토번 왕조의 기원은 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세기의 티베트는 뵌뽀(本波; 本敎)라는 샤머니즘이 성행했는데[5], 원시 뵌뽀를 믿는 12인이 하늘에서 내려온 소년을 어깨가마에 태워 마을로 데려와 왕으로 삼았으니, 토번왕국 최초의 임금 네치짼뽀(聶赤贊普)[6]였다고 한다.

초대 네치짼뽀로부터 7대 십치짼뽀(塞赤贊普)까지는 뵌뽀 무당의 지배를 받았는데, 교권과 왕권 사이의 갈등[7]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졌다. 기원전 2세기 경 8대 지쿰짼뽀(止貢贊普)는 군사력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무당 4명만 남기고 모두 추방해버리는 정변을 일으켰는데, 뵌뽀 종교는 티베트 사회에서 뿌리깊었기 때문에 지쿰짼뽀의 종교개혁운동정치적 숙청은 지방 호족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당시 토번의 호족이었던 로암다제(洛昻達孜)는 8대 지쿰짼뽀에게 결투 재판을 도전했고, 결투장에서 지쿰짼뽀를 살해한 뒤 왕좌를 찬탈해 토번의 9대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지쿰짼뽀의 왕비는 지쿰짼뽀의 두 아들을 데리고 로암다제의 손아귀를 탈출해 변방의 양치기로 숨어 살았는데, 꿈속에서 임신광선 비스므리한 것을 통해 아레게(阿烈杰)라는 아이를 낳았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아레게가 로암다제를 암살한 뒤, 지쿰짼뽀의 다른 두 아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점령하고 둘째 형(?)이었던 부데궁게(布德貢杰)를 왕위에 올렸다.

토번왕국의 10대 왕 부데궁게 즈음부터는 뵌뽀 무당의 권력이 약화되어 섭정 비스므리한 위치 대신 토번 임금의 조언자 역할로 격하되었으며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세월이 5백년이 흘러 5세기 28대 임금 라토토리넨짼(拉脫脫日年贊)에 이르고, 다시 세월이 흘러 6세기가 되어 31대 닥리넨세(達日年塞), 32대 남리뢴짼(囊日倫贊)의 시절이 되면 신화의 시대를 벗어나 연대 고증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토번의 32대 남리뢴짼(囊日倫贊)[8]은 약 570년 경에 즉위하게 되는데, 이 시기부터 토번은 비로소 주변 경쟁 세력들을 능가하는 국력을 갖추는가 하면 중앙 집권화에 대한 준비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지나친 확장에 대한 반발로 619년,[9] 남리송첸이 독살되고 속국들이 다시 독립한다.

2.2. 전성기: 송찬간포의 집권기

남리송첸의 아들 손챈감포(재위 617~649년 추정)가 불과 13세의 나이로 그 모든 것을 평정하고 통일 티베트의 서막을 열어 젖혔다. 633년, 손챈감포는 스키타이 계열 유목민을 평정하는 한편 티베트 일대를 통일한 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토번(吐蕃) 왕국을 건설한다.

634년, 손챈감포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교환하고 토번의 남쪽에 위치하는 네팔의 릿체비 왕조에 사자를 보내, 브리쿠티 데비(赤尊公主)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636년, 당태종에게 당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기 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자 송첸감포는 20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토욕혼을 정벌하여 멸망시켰고, 겸사겸사 백란 등의 강족 마을도 공략한 후, 송주[10]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했지만 당군에 패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당태종에게 특사 가르통첸(재임 652~667)을 보내, 금 5천 령을 납폐로서 주었고, 당나라는 토번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641년 문성공주황후로 보냈다.

파일:external/xyz.tingroom.com/1415153043-0.jpg

원래 문성공주는 손챈감포의 아들인 궁송궁첸에게 시집갔으나 아들이 낙마사고로 사망해 유목민의 형사취수제와 정략에 의해 시아버지랑 재혼했다. 사실 문성공주 자체의 혼인은 당시 당나라에게 있어 큰 사건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공주가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도 기록이 없을 정도. 안시성에서 토산을 쌓은 것으로 유명한 강하왕 이도종의 종녀(宗女)라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문성공주와 손챈감포의 결혼을 두고 누가 숙이고 들어갔느냐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11] 일단 손챈감포는 문성공주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문성공주가 '자면의 풍습'(얼굴에 적토를 바르는 풍습)을 싫어하자 이를 폐지하는 등 정성으로 대했다. 또한 친당정책을 시작해 당나라와 교역하며 인도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나 손챈감포 사후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고 만다. 사실 이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 토번 왕국의 국력은 정점에 달한 시기였고, 명신 가르통첸의 개혁과 이로 인해 강화된 가르 가문의 집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성과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 669년 안서 4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서 양국은 마침내 완전히 적대관계로 돌아서버린 것.

당나라는 당연히 반격을 가했지만, 이미 토번 왕조는 대외적인 제도 정비에 성공하고 군사력 또한 증가되어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699년 치둑송첸의 대숙청으로 가르친링이 제거되고[12] 710년 금성공주의 혼인으로 일시적으로 화평했지만[13], 715년경부터 당나라가 토번에 대공세를 가해 토번의 영향력을 점차 조금씩 줄였고, 당의 명장이었던 고선지의 원정으로 그 성과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고선지 역시 탈라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14], 안사의 난 이후 하서 및 농우, 안서 및 북정 지역의 군사들이 반란 진압에 소모되면서 당나라의 빈자리는 다시 토번이 차지하게 된다. 당나라는 토번에 매년 공물을 바치며 이들을 달래고자 했다.

2.3. 정복 사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ibetAD800.png
토번 제국의 영토. 현재 티베트 자치구 영토 4배에 육박한다.

토번의 정복 활동은 계속되어 왕국의 힘은 8세기 후반 더욱 확장되었다. 토번은 파키스탄 북부와 네팔, 인도 북부와 서벵골, 방글라데시, 중국의 간쑤성(甘肅省)과 쓰촨성(四川省) 서부 지역[15]까지 정복했다. 이후에는 안서 및 북정 지역을 빼앗는 데 성공, 실크로드를 장악라고 거대한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특히 티쏭데짼((ཁྲོ་སྲོང་ལྡེ་བརྩན) 시기에는 763년 당이 안녹산의 대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공물을 보내지 않았음을 빌미로 삼아 20만 대군을 몰아 당군과의 수차례에 걸쳐서 정면 대결을 시도, 승리를 거두며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당의 황제를 마음대로 세울 정도로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토번의 장안 점령은 토번이 이전의 최강국 당나라를 꺾고,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등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781년에는 재상 상치싱얼이 월아천 전투 대승 뒤 돈황을 점령했고 790년에는 줘치수북정도호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791년 서역 전역에서 위구르에게 패하면서 조금씩 영향력이 줄어들더니 800년대 초반부터는 남조 왕국에서도 견제를 받았다. 결정적으로 아바스 왕조와의 대결에 국력을 소모하고 당, 위구르와의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당과의 화친을 결정한 토번는 당나라와 함께 820년 협정을 맺어 국경선을 확정함으로써 서로 무력 충돌을 피하기로 했다. 이때의 확정조약은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조캉사원[16] 앞에 이 내용을 새긴 당번회맹비를 세웠다. 여담이지만 '이 비문이 세워진 날부터 토번인은 토번인의 땅에서, 당나라인은 당나라인의 땅에서 각자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라고 쓰였고 1950년 대지진으로 국경 지방의 비석이 파괴되기 전까지 이 비문은 그 역할을 훌륭히 이행하였다. 당번회맹비는 현재도 라싸에 남아있다.

3. 외교

3.1. 당나라와의 관계

토번은 줄곧 당나라와 대립을 반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인 관계만을 지속했던 것은 아니었다. 손챈감포 본인부터 당나라의 제도와 기술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아내가 당나라 공주이기도 하고… 문성공주는 티베트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다. 이 시기 율령제와 한자를 비롯한 유교 경전 등 다른 한자문헌들을 받아들인 기록도 있다. 그러나 티베트는 인도 문자 계열을 잇는 티베트 문자를 따로 만들어 활발히 씀으로써 한자, 한문 사용은 정착하지 않았고, 불교도 한역 불경이 아니라, 티베트어로 바로 번역하여 받아들여 중국 문화권과는 선을 그었다.[17]

3.2. 우마이야 칼리프조, 아바스 칼리프조와의 관계

우마이야 왕조칼리파 우마르 빈 압둘 아지즈가 당나라와 토번 제국으로 각각 사절을 파견하는데 이 중 티베트로 간 사람의 이름은 살라 빈 압둘라 하나피라고 알려져 있다.
753년(신라 경덕왕 12년) 1월 1일, 당나라 봉래궁(蓬萊宮)에서는 신년을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그런데 식장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과 일본 사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다. 누가 더 서열이 높은 자리에 서느냐를 놓고 빚어진 갈등이었다. 애초 당 조정은 서반(西班)의 서열 1위토번(吐蕃) 사신, 2위에 일본 사신을, 동반(東班)의 서열 1위에 신라 사신, 2위대식국(大食國) 사신을 배치했다. 그런데 일본 사신 대반고마려(大伴古麻呂)는 “신라는 옛날부터 일본에 조공하는 나라인데 일본 사신보다 윗자리에 서게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당 관리들에게 항의했다. 당 조정에서 누가 더 높은 대접을 받느냐를 놓고 신라와 일본 사신이 벌인 이 다툼을 '쟁장(爭長) 사건'이라고 부른다.
출처 출처2

당시 당나라에서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토번 제국을 우마이야 제국이나 압바스 제국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고 더 우대해주었다.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군이 패배한 이후에도 한동안 타림 분지 일대는 불교가 우세한 지역으로 남았는데 그 이유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패권을 두고 토번 제국과 압바스 왕조 사이의 전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801년 티베트인들은 상당수의 압바스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동부 국경으로 배치하였다 한다. 토번 제국과 압바스 제국은 중앙아시아 영토를 두고 대립을 계속하였는데, 한 쪽이 절대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호탄 일대에서는 티베트인들이 압바스 칼리프조 군대에 맞서서 영토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으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는 무슬림 군대가 812~815년부로 카불 일대의 티베트 총독에게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4. 멸망

한때 당나라와 아바스, 위구르 제국마저 벌벌떨게 만들던 토번 제국의 쇠퇴는 아이러니하게도 티베트의 정체성인 불교에서 시작되었다. 향후 티베트의 종교의 방향성을 결정짓게 되는 삼예논쟁 이후로 토번 제국의 지도자들은 티베트 불교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하면서 불교를 융성시켰다. 하지만 불교의 위상이 너무 높아 문제가 된다. 41대 왕인 랄파칸은 금강수보살의 화신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불교에 적극적이었으며 국력 또한 최고치를 달리고 있었으나 불교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비정상적으로 불교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7개 가구가 한 승려를 받들게 하는 법인 칠호양승제를 시전하는 동시에 그 일곱 가구가 한 승려의 의식주를 지원하는 것 뿐이 아니라 최고급 옷까지 바치게 하며 이 옷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게 만들어질 경우 벌을 면치 못했으며 승려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시 손가락을 자르고 승려를 삐딱하게 볼 시 눈을 뽑는 등, 불교 우대의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교답게 육식을 금하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티베트의 척박한 사정으로 육식 금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써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된다. 랄파칸의 사망 이유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엔 지병으로 죽었다는 설, 전투 도중 사망했다는 설 등도 있으나 가장 유력한 설로는 불교의 만행을 보다못한 뵌교 승려들의 암살설이 있다. 랄파칸 사 후, 불교를 탄압했던 랑다르마의 즉위로 보아 뵌교 암살설이 가장 유력하다.

랑다르마 시기 가르공열의 반란은 중국 사서에도 기록될 만큼 대단했다. 랑다르마가 찬보에 있던 시절, 상비비와 랑다르마를 위시한 주화파와 가르공열을 위시한 주전파가 대립하였고 가르공열이 결국 하서에서 탕구트, 회흘을 규합해 당을 공격하지만 당조와 토번의 연합 공격으로 인해 도망치고 만다.[18]

이후 마지막 왕인 랑다르마가 암살당하면서 실질적으로 붕괴하고 만다. 당시 그는 승려 강제 결혼, 강제 사냥, 사원 및 불경 화형식 등으로 불교를 매우 강력하게 탄압했는데 이에 반발한 한 승려가 신의 계시를 받고 티베트 전통 종교인 본교 사제처럼 검은칠을 한 흰옷을 입고 역시 검은 칠을 한 백마를 타서 당과 토번 간의 회맹비를 보던 랑다르마의 미간을 맞추어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친위대가 쫓아갔으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검은 칠이 벗겨서 흰 옷을 입은 사람과 흰 말을 탄 사람으로 변해 친위대가 알아보지 못해 성공적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랑다르마는 생전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둘은 첫 번째 부인의 아들이자 적자인 염탄과 둘째 부인의 아들 오성이었다.

그러나 죽기 전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었는데, 이 두 이복형제의 싸움이 내전으로 이어져버렸고, 300년 역사의 토번 제국의 종말을 거히게 된다. 오성의 반란은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결국 그의 무리는 제국의 서쪽 경계선인 응아리(Ngari)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지역의 귀족 자제와 결혼해 구게 왕국라다크의 기원이 된다.

염탄은 반대로 티베트의 중앙 지역인 우 지역을 갖게 되지만 제국의 힘은 결국 상실하게 되고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후 851년 사주(돈황)의 호족 장의조가 돈황 인근에서 토번군을 몰아냄으로써 귀의군을 설립한다.[19] 량주를 제외한 농우도 전체를 당에 바쳤고, 나중에 량주를 수복하게 된다.[20]

결국 이어지는 내전과 반란으로 토번 제국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티베트는 분열되고 말았다.

이후 티베트는 후계를 자처한 구게나 라다크, 각 지역별, 종파별로 후원을 받은 팍모드루파 왕조(ཕག་མོ་གྲུ་པ་), 린풍빠, 짱빠 가문 등 지역별 정치체로 이어지다가 17세기 경 달라이 라마 5세에 의해 다시 통일된다.

5. 찬보(贊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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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상 북아프리카도 포함된다. }}}}}}}}}

찬보는 토번국의 군주 칭호이다. 찬포(བཙན་པོ་, bTsan Po), 첸포(Tsenpo)라고도 한다. 용감한 남자라는 뜻. 제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달라이 라마처럼 일종의 법왕(法王) 역할을 했다.

5.1. 역대 찬보

순서 왕호 재위기간
1 송첸캄포[21] 617- 650
2 망송망첸 650-676
3 티뒤송첸 676-704
4 티데축첸 704-755
5 티송데첸[22] 755-797
6 무네첸뽀 797-798
7 티데쏭첸 798-815
8 티축데첸[23] 815-841
9 랑다르마 841-846


[1] Bod chen po. 동국대 티베트어 표기법에 따르면 '뵈첸뽀'라고 표기한다.[2] 贊普. 티베트어 བཙན་པོ(btsan po, 권력자)를 한역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챈뽀'에 가깝게 읽는다.[3] 티베트 자치구, 칭하이성, 간쑤성, 윈난성, 쓰촨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4] 자세한 출처 및 티베트 신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티베트 비밀역사 (박근형, 2013)>을 참조.[5] 지금도 티베트에서는 여러 뵌뽀 무당이 굿을 올리며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박근형, 2013)[6] 네치짼뽀란, "어깨무등으로 왕좌에 오른 임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박근형, 2013)[7] 박근형(2013)에서는 왕의 시신을 토막내 독수리에게 먹인 뒤 사자의 영혼이 독수리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다는 티베트의 전통 장례의식조차, 무당들에 의한 국왕 시해 사건 (및 증거인멸)일 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8] 혹은 남리송첸[9] 630년 즉위설도 있다.[10] 현 쓰촨성 쑹판현[11] 사실 당태종이 공주를 시집 보내기는 토번이 3번째이다. 문제는 앞선 2번은 당나라가 상위의 입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것도 당나라 우위의 결혼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12] 치둑송첸은 가르 가문과 톤미 가문을 숙청한 뒤 당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이후 704년에 톤미 가문이 도망친 남만을 공격했으나 결국 죽고 만다.[13] 이는 당이 710년 하서구곡을 넘겨준 시기였다. 토번은 이 지역을 통해 당을 마음껏 침공할 수 있었으나, 753년 가서한이 이를 탈환하고 만다.[14] 탈라스 전투 이후에도 고선지의 후임 안서절도사 봉상청이 대발률국을 공격하여 수복하고, 서역 여러 국가가 당나라에 조공하는 등 서역에 미치는 당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자치통감에는 탈라스 전투 이후에도 서역에 미치는 당의 영향력이 막강했다고 한다.[15] 안사의 난 때 하서와 농우 지역의 군대가 반란 진압에 투입된 틈을 이용해, 하서 및 농우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16] 대조사(大照寺)라고도 한다. 문성공주가 세웠다.[17] 그러나 극소수의 중국계 불교 서적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중에는 신라인으로 당에서 끗발을 날린 고승 원측(613~696)의 책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도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중국, 한국에서는 이미 소실되었고 티베트어본만 남아있다. 한국과 중국의 불교학자들이 역으로 이 책을 번역하는 상황이다.[18] 이후 중국과 티베트 측 기록이 다른데, 중국 측에서는 당조에 투항 뒤 나중에 다시 배반했으나 866년 탁발회광에게 주살당했다고 나오고 티베트 측에서는 848년 자결했다고 나온다.[19] 귀의군 절도사는 장의조 사후 사주 일대로 축소되고 만다.[20] 그러나 장의조 사후 하서 지역은 회흘인들에게 빼앗겼고, 하황 일대는 토번인들에게 다시 빼앗긴다.[21] 한자로는 송찬간포[22] 한자로는 적송덕찬[23] 혹은 렐파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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