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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상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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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르키나파소 제5대 대통령
토마 상카라
Thomas Sankara
파일:68FAA70C-DDB8-4013-BE6E-16172135787B_w1597_n_r1_st.jpg
본명 토마 이지도르 노엘 상카라
(Thomas Isidore Noël Sankara)[1]
출생 1949년 12월 21일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야코
사망 1987년 10월 15일 (향년 37세[2])
부르키나파소 와가두구
정당 아프리카 독립당
최종 계급 부르키나파소군 공군 대위
배우자 마리암 상카라 (1953년생)
자녀 2명
서명 파일:Signature_of_Thomas_Sankara.png

1. 개요2. 생애
2.1. 출생부터 집권 전까지의 삶2.2. 대통령 취임 후의 행보2.3. 사망
3. 논란4. 사후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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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Vous ne pouvez pas accomplir des changements fondamentaux sans une certaine dose de folie. Dans ce cas précis, cela vient de l’anticonformisme, du courage de tourner le dos aux vieilles formules, du courage d’inventer le futur. Il a fallu les fous d’hier pour que nous soyons capables d’agir avec une extrême clarté aujourd’hui. Je veux être un de ces fous. Nous devons inventer le futur. »
"미치지 않고서는 근본적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반체제주의, 구시대의 낡은 유물을 폐기하는 용기, 미래를 창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제의 미친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늘의 빛으로 행동하라고 한다. 나는 미친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가 미래를 창조해야 하므로."
« Il nous fallait donner un sens aux révoltes grondantes des masses urbaines désœuvrées, frustrées et fatiguées de voir circuler les limousines des élites aliénées qui se succédaient à la tête de l’État et qui ne leur offraient rien d’autre que les fausses solutions pensées et conçues par les cerveaux des autres. Il nous fallait donner une âme idéologique aux justes luttes de nos masses populaires mobilisées contre l’impérialisme monstrueux. »
"국가의 고위직을 연달아 점유하면서 국민에게는 다른 곳에서 빌려온 가짜 해결책 말고는 보여준 것이 없는 엘리트들이 리무진을 타고 떵떵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데 지치고 격노한 대중의 폭발하려는 반발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괴물같은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들고 일어난 수많은 대중의 정당한 투쟁에 영혼이 되는 하나의 이념을 부여해야 합니다."
« Nous voudrions que notre parole s’élargisse à tous ceux qui souffrent dans leur chair, tous ceux qui sont bafoués dans leur dignité d’homme par un minorité d’hommes ou par un système qui les écrase. Permettez, vous qui m’écoutez, que je le dise : je ne parle pas seulement au nom du Burkina Faso tant aimé mais également au nom de tous ceux qui ont mal quelque part. »
"우리는 이 말이 현세에 고통 받는 모든 이에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억압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혹은 시스템에 의해서 자기 존엄성을 무시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입니다. 저는 단지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부르키나파소 국민의 이름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고통을 겪고 있을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1984년 10월 4일 유엔총회 연설문 발췌. 전문, 녹음본

부르키나파소의 5대 대통령. 아프리카의 미완의 개혁가로 평가받는다. 비록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탄자니아줄리어스 니에레레 못지 않은 아프리카의 위대한 지도자로 아직까지 일컬어진다.

2. 생애

2.1. 출생부터 집권 전까지의 삶

1949년 12월 21일에 오트볼타[3] 파소레 도(Province du Passoré) 야코(Yako)에서 헌병의 장남으로 출생한 그는 중등교육까지 마친 후 가톨릭 사제가 되라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17살에 와가두구에 있는 카디오고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19살에 공군에 입대해 공수부대의 장교가 되었고 1974년에는 주변국 말리와의 국경 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자국에서 일약 전쟁영웅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딱딱한 인물은 아니라서 수도 와가두구에서 이름난 밴드[4]의 기타리스트였고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젊은이였다.

그는 오트볼타 정치권의 심각한 부정부패빈부격차,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여성, 황폐해지는 자연환경과 사회 전반을 보고 남들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1970년에 마다가스카르의 안치라베에 있는 사관학교로 연수를 갔을 때 좌익 서적을 탐독함으로써 좌경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좌익 서적을 읽고 좌경화된 그는 혁명 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오트볼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에 주목했고 군부에 '공산주의 장교 그룹(Regroupement des officiers communistes)'이라는 비밀단체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기다가 안치라베에 있을 때 농업과 역사, 군사 전략에 대한 책들을 다독하면서 나중에 사용할 통치 기법을 터득했다.

당시 오트볼타는 자고 일어나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는 불안정한 체제였다. 1980년 11월 25일 쿠데타로 집권한 사예 제르보(Saye Zerbo) 대령이 당시 공군 대위였던 그를 1981년 9월에 정보부 장관에 임명하면서 관직생활이 시작되었지만 개혁적인 성향의 그는 집권세력과 마찰을 빚었고 노동자 정책을 비판하며 "민중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자들에게 저주를!"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임했다.[5] 이 때도 그는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차별화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1982년 11월 7일에 군부였던 장바티스트 웨드라오고(Jean-Baptiste Ouédraogo) 소령에 의해서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대통령이 된 웨드라오고는 1983년 1월에 대중적인 지지를 받던 그를 총리로 임명했지만 그의 개혁적인 성향을 두려워한 웨드라오고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고문인 기 펜(Guy Penn)을 방문한 직후인 5월 17일에 그를 해임하고 가택연금했다. 그러자 대중들은 그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그는 1983년 8월 4일에 그의 정치적 동료인 블레즈 콩파오레와 함께 당시 차드를 방문하던 리비아무아마르 카다피의 지지를 얻고 쿠바 혁명, 가나제리 존 롤링스로부터 영감을 받은 쿠데타를 일으켜 웨드라오고를 축출하고 바로 그날에 만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오트볼타의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2. 대통령 취임 후의 행보

취임 후 그는 자신이 구상한 개혁 정책들을 추진해 나갔다. 우선 취임 1주년이던 1984년 8월 4일에 오트볼타라는 프랑스 식민 지배 잔재의 국명을 버리고 현지어인 모시어와 듈라어 표현을 조합해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를 뜻하는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로 개명했으며 이전까지 쓰이던 국기를 버리고 직접 새 국기를 만들었고[6] 기존의 국가도 버리고 〈디타녜(Ditanyè)〉라는 국가를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하기까지 했다.[7] 정부가 민중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장관용 관용차(벤츠, 르노 25)들을 전부 매각하고 당시 부르키나파소에서도 가장 값이 쌌던 경차(르노 5)로 바꾸었다.#

물론 그는 대통령 월급을 450달러로 낮추고 자동차 1대, 자전거 4대, 기타 3대, 냉장고, 고장난 냉동고만 가지고 소수의 부르키나파소인들 외에는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없다며 에어컨 사용도 거부하는 등 극도로 검소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부유한 공무원들의 봉급을 줄이고 정부 운전기사와 비행기 1등석 사용을 금지했는데 당연히 상카라 본인은 이 요구를 충실히 지켰다. 물론 그의 아이들은 일반적인 공립학교에 다녔고 아내는 일반적인 공무원이었으며 부모도 이전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는 "토마 상카라가 700만 명이다."라고 말하며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달리 공공 장소에 자신의 초상화를 전혀 걸지 않았고 오히려 조깅을 하거나 공개 행사 속에 군중 속으로 눈에 띄게 들어가는 탈권위적 면모를 보였다.

정치적으로도 참여민주주의의 논리로 민중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혁명수호위원회(CDR)를 만들고 지역 문제의 관리를 보장하고 주요 활동을 조직했는데 그는 이에 대해 "투표용지와 선거 기구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따금 선거를 조직하고 선거를 할 때마다 국민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력 등의 모든 형태의 권력이 없는 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통해 부르키나파소의 경제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행정 개혁을 통해 과감하게 전국을 30개 자치구로 나누고 각각의 자치구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자치구를 관리하게 하는 "자주관리정책"을 시행했으며 프랑스 식민지배 이후 계속 이어져 왔던 과중한 인두세를 과감하게 폐지하고 토지 재분배 정책, 그러니까 전국에 할거한 부족장들이 지배하던 토지를 몰수하여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도 실시했다.

국가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여 주택 건설을 돕기 위해 벽돌 공장을 건설하거나 도로, 우물, 저수지, 상하수도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만들었고 각 지역의 특산 수공예 산업 육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망가니즈 추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도로와 철도를 외국의 지원과 외부 자금 없이 깔면서 아프리카 국가가 외국의 도움이나 원조 없이 번영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으며[8] 특히 90%가 넘는 문맹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을 중시하였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 여러 학교가 설립되어 취학률은 6%에서 22%로 증가했으며 국가 발전에 기여할 역군들을 키우기 위해 600명의 아이들을 쿠바로 보내 의학, 공업, 농업 교육을 받게 했다.

사회정책에서도 상당한 개혁적 조치들을 단행했다. 법적으로 서아프리카 지역 최초로 매춘강제결혼, 일부다처제를 금했으며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너무도 가혹했던 풍습인 여성할례를 금지시켰고 여성의 날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특히 아프리카 지도자 중 최초로 적극적으로 여군을 모집했으며 여성을 고위공무원직에 대거 임명하여 여성 인권을 신장시켰다.

피임을 장려하고 소아마비, 수막염, 홍역을 막기 위해 어린아이들에 대한 예방접종도 대대적으로 시행했으며 그 결과 1983년부터 1985년까지 200만 명의 어린이들이 예방접종을 맞게 되어 매년 1.8만~5만 명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마을마다 병원과 약국을 세워 미신이나 그릇된 지식의 치료법 대신 근대적인 의료체계를 확립하려 했으며 에이즈의 실체를 아프리카 최초로 정부차원에서 인정하기도 했다. 덕분에 부르키나파소의 영유아 사망률은 그가 집권하면서 단 4년 만에 20.8%에서 14.5%로 감소했다.

사막화가 진행되는 황폐화된 부르키나파소의 자연환경을 복구하기 위한 재녹화 사업을 추진하며 땔감의 무절제한 사용을 줄이는 것을 장려하고 나라를 동서로 횡단하는 50km의 숲을 심으려고 했으며 7천 개의 마을 양묘장을 만들어 천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기도 했다.

그의 일련의 개혁 정책들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부르키나파소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각 자치구에 부여한 자주관리제도는 성공적이어서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부족갈등이 사라지고 토지재분배 정책도 큰 효과를 거두어서 1983년에 11억 톤에 가까웠던 곡물 생산량이 1987년에는 16억 톤으로 증가하여 부르키나파소는 집권 4년 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될 정도로 경제가 살아났다. 1986년에 부르키나파소 국민들은 1인당 하루 두 끼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 UN 식량권 특별보고관은 그를 "그는 굶주림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부르키나파소를 4년 만에 자급자족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측정한 부르키나파소의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은 1984년 1545kcal였던 것이 1986년 2042kcal로 단 2년 만에 1.32배나 성장했는데 단 2년 만에 국민 대다수가 하루 한 끼도 챙겨먹기 힘든 나라가 국민 대다수가 하루 두 끼라도 챙겨먹으며 굶지는 않을 수 있는 나라가 된 셈이니 그가 극찬을 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9] 참고자료

실제로 쿠데타 직후인 1984년에는 -1.8%를 기록했던 경제 성장률도 1985년에는 8.5%, 1986년에는 8%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부르키나파소의 GDP는 단 3년 만에 15.5억 달러에서 23.7억 달러로 크게 올랐다. 그가 외부의 지원을 모조리 거부한 채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하여 나라를 운영했단 것을 감안하면 기적 수준으로 경이로운 성과였던 셈이다.

여담으로 그는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87년 7월 29일에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 통일 기구 정상회담에서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부자와 착취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갚을 의무가 없다고 말했으며 가끔 정책적인 실패가 일어나긴 해도 아프리카의 독재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말년의 탄자니아 전 대통령 니에레레와 더불어서 공개적으로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는 시정 조치를 취했다.[10]

2.3. 사망

그러나 이런 그의 개혁정책들은 주변국의 독재자[11]에게는 위협적으로 비쳐졌다. 이들은 그의 존재로 인해서 자국에서도 개혁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들의 권좌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서도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그는 성공적인 사회주의 개혁가였고 미국은 그가 부르키나파소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에 반미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퍼뜨릴 것을 우려했다. 결국 부르키나파소 인근 국가들의 독재자들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미국 CIA는 그의 정치적 동료인 블레즈 콩파오레[12]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13]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했던지 1987년 장 지글러(Jean Ziegler)[14]를 만난 자리에서 "체 게바라는 몇 살까지 살았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15] 체 게바라 20주기 추모식에서는 "혁명가 개인을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상은 죽일 수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16]

1987년 10월 15일 CIA에 포섭된 블레즈 콩파오레는 반혁명 쿠데타를 단행했고 그는 반란 진압 도중 결국 수도 와가두구에서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가 존경했던 혁명가 체 게바라를 떠올리게 하는 최후였다. 콩파오레의 퇴진 후인 2015년 10월에 그의 유해가 발굴된 후 검시결과에 의하면 수십발의 총탄을 맞았다고 하며 심지어 콩파오레가 직접 그의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고는 콩파오레는 그의 아내와 자녀 2명에게 '상카라가 자연사했다'는 사망 증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으며 뻔뻔하게도 이 조작된 사인을 언론에 공표하기까지 했다.

블레즈 콩파오레는 그를 본인의 손으로 처형시킨 후에 대통령직에 올랐고 자신이 그의 사형을 집행하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CIA의 권고대로 그간 실행되던 개혁정책을 모조리 이전으로 되돌리고 IMF세계은행에 재가입한 후 '파탄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절박하게 필요한' 기금을 가져왔다. 이후 부르키나파소는 단 한 번도 상카라 시절의 경제와 민생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외채와 해외 자본에 종속되어 세계 최빈국으로 남아 있다. 단 4년 동안의 짧은 통치에도 경탄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니 만약 그가 장수하여 산업화에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성공했더라면 독재에 대한 비판은 둘째치더라도 부르키나파소가 세이셸 버금가는 수준의 아프리카 최선진국이나 혹은 그 정도까진 아니더래도 아프리카에서 그럭저럭 살만한 중진국으로 발돋움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3. 논란

상기한 개혁과 업적들, 오랜 벗의 손으로 살해당한 비극적인 최후, 그가 집권하던 동시대나 전후에 아프리카에는 그를 가볍게 능가하는 악독한 독재자들이 넘쳐났다는 점 때문에 많이 잊히기는 했지만 그는 생전에 국제사면위원회옥스팜, OECD에서 인권 문제로 비난을 받아 왔다. 관련 자료

그는 인민재판과 유사한 '인민혁명재판소(Tribunaux populaires de la Révolution, TPR)'를 만들어 기득권층과 반대파,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했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재판소'와 10월 혁명 당시 '재판부'에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인민혁명재판소는 1983년 10월 4일부터 전국에 설립되어 과 비슷하게 노동자와 농민이 참여하고 방청할 수 있는 법원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민혁명재판소에 부패, 탈세, 반(反) 혁명 혐의로 회부된 사람들은 변호인을 회부할 수도 없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스스로 무죄임을 입증해야 하고 라디오로 생중계되는 불공정한 재판에 시달렸다.

게다가 이 재판에는 이른바 '게으른 노동자'들이 회부된 후 무급으로 일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잦았던 반면 전직 공무원들은 가벼운 형량이 내려지거나 아예 형이 유예되기도 했다. 이 재판에는 총 700여명이 회부되었으며 국제앰네스티가 1985년 7월 31일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수감된 사람들은 전기고문, 신체를 횃불로 지지기, 신체 절단, 심지어는 '성적 학대' 등의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고 이러한 공포정치프랑스 혁명 당시의 공포정치를 연상킬 정도였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상카라 치하에서 정치적 이유로 사망한 사람은 적었다고 하는데 물론 적었다는 것뿐이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1984년 5월 27일에는 웨드라오고 정권과 관련된 26명이 쿠데타를 공모하여 1984년 5월 28일에 일으키려고 했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이들 중 디디에 티엔드레베오고(Didier Tiendrebeogo) 대령을 위시한 7명(군인 5명+민간인 2명)은 1984년 6월 11일에 약식재판을 받은 직후 바오밥나무 아래에서 총살된 후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으며 5명은 짧게는 15년에서 길게는 종신형의 장기적인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나머지 14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영언론 외에는 모든 언론이 금지되어 부르키나파소 최대 신문사였던 L'Observateur의 본사는 불타 버렸고 1991년에야 복간되었다.

이는 어찌 보면 명나라홍무제하고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홍무제도 그와 비슷하게 평민들에게는 온정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정반대로 정적들에게는 무자비한 모습을 보였다.[17]

4. 사후

공식적으로 격하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후 그의 개혁정책들은 대부분 후퇴했다. 부르키나파소는 상카라 집권 이전으로 돌아갔고[18]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웃의 코트디부아르로 나갈 정도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비록 권좌에 앉았던 시간은 4년이었고 최후에는 정치적 동반자에 의해 실각당했지만 그가 짧은 시간 보여준 여러 성과와 확실한 철학 때문에 부르키나파소를 넘어 아프리카, 그리고 아프리카를 넘어 전세계에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블레즈 콩파오레는 부정선거와 편법을 통해서 27년간 장기집권을 해 오다가 2014년 임기 연장 법안에 분노한 시민들과 군부에 의해 쫓겨났다.

2021년 그를 살해한 일당이 범행으로부터 34년 만에 재판정에 섰으나 2022년 1월 쿠데타로 재판이 중단되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5. 여담

서아프리카 일대에서는 그를 신성시하는 종파까지 나탕났다고 한다. 프랑스어 정작 그는 무신론적 사회주의자였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1] 프랑스어 인명 Thomas는 어말 자음을 생략한 [tɔ.mɑ\]로 발음한다.[2] 젊은 나이에 쿠데타로 집권해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은 라이베리아새뮤얼 케니언 도와 같다. 다만 새뮤얼 캐니언 도는 부하였던 프린스 존슨에 의해 처형되었다.[3] 부르키나파소의 옛날 이름.[4] 그의 친구였다가 훗날에 이견 다툼으로 정적이 된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가 이 밴드의 보컬이었다.[5] « Malheur à ceux qui bâillonnent le peuple ! »[6] 이 국기는 상카라가 최후를 맞이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쓰이고 있다.[7] 이 국가는 상카라가 최후를 맞이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쓰이고 있다.[8] 실제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프랑스의 경제 원조는 무려 80%나 감소했고 상카라는 IMF와 대출 계약도 맺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르키나파소 남서부의 농작물 섭취를 장려하기 위해 과일 및 채소의 수입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이는 후술하듯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9] 사실 2018년 기준 부르키나파소의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은 2737kcal로 30년 동안 1.34배 성장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콩파오레가 27년 동안 집권해야 이룰 수 있던 성과를 상카라는 단 2년 만에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박정희도 1961년부터 1973년까지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을 2141kcal에서 3058kcal로 12년 동안 1.4배로 성장시켰다는 정도(?)에 그쳤다. 물론 그것도 하루 두 끼 먹는 나라를 세 끼 먹는 나라로 바꾼 대단한 수준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상카라에 비하면 매우 더딘 수준이었다.[10] 실제로 1987년에 부르키나파소의 경제성장률은 -0.2%를 기록했는데 사실 이때쯤이면 상카라의 혁명이 너무 과열된(?) 나머지 국민들의 열정이 약해졌고 상카라의 정책으로 권력이 약해진 전통적인 족장들을 위시한 일부 국민들은 상카라 정권에 대한 좌절감을 품기도 했다.[11] 코트디부아르펠릭스 우푸에부아니, 가봉오마르 봉고, 토고냐싱베 에야데마, 말리무사 트라오레.[12] 콩파오레도 사실 상카라의 정책에 대해 못마땅해했고 상카라에게 여러 차례 철회 건의를 했으나 상카라는 수차례 무시하였고 급기야 둘은 서로 정적이 되었다.[13] 당시의 미국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었는데 반미를 기치로 내걸거나 사회주의 정권을 내세우던 제3세계 국가들에게 무력사용을 불사했으며 리비아 공습, 그레나다 침공, 니카라과의 반군 조직인 콘트라 지원 등을 지시하였다. 이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이란-콘트라 사건이다.[14] 스위스의 좌파적 사회학자로, 2007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이 큰 화제가 되면서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고 서울대학교 추천 도서에서 매년 순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한국에서의 인지도도 상당한 편이다. 이 책에도 해당 일화를 포함해 상카라의 이야기가 길게 수록되어 있다.[15] 지글러는 "39세 8개월"이라고 대답했고 상카라는 '나도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지만 그해 38세 생일을 2개월 앞두고 죽는다.[16] « En tant qu'individus les révolutionnaires peuvent être tués, mais vous ne pouvez pas tuer les idées. »[17] 다만 홍무제의 숙청은 상카라를 가볍게 능가하는 것을 넘어 그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교될 정도로 잔혹했다고 평가받는다.[18] 사실 경제 성장 자체는 콩파오레 시절에도 꾸준히 이루어진 편이었지만 상카라가 보여준 임팩트에 비하면 빈약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