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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 게바라의 평가에 대해 서술한 문서.2. 평가
간단히 말해서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인물이라는 평으로 압축할 수 있다. 묘하게도 이는 게바라가 롤모델로 삼은 마오쩌둥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평가이다.게바라는 녹색 의료, 니켈 생산, 원유 탐사, 설탕 부산물, 화학산업 등 9개의 연구·개발 기구를 설립했다. 또 회계 처리를 전산화하는 실험을 했고, 새로운 임금체계를 고안했고, 노동자의 발명 및 혁신을 장려했고, 농업 기계화를 진두지휘했고, 사회적 노동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했고, 사회적 임무로서의 노동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노동자 경영 참여를 위한 기구를 설립했다. 하지만 비록 이것들이 오늘날 쿠바의 사회·경제 구조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를 고안하고 도입한 게바라의 기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체 게바라란 인물 자체가 이런 저런 사회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 운영 구조, 정책에 대해 생각할 만큼 지성은 (일단 의사니) 당연히 있었지만, 어딜 가던 화려한 혁명 투쟁이 아닌 한 곳에 쭉 눌러 붙어 지루하고 관료제적인 입씨름이 태반인 실제 국정 운영과 정치를 할 만할 성격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곳에 오래 붙어있지 못하고 새로운 혁명, 싸움터가 있으면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닌 체 게바라의 성격은 긍정적인 면에선 특히 동시대 서구 좌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청춘 혁명가란 신화적인 인물로 떠오르는게 크게 기여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막상 정치가로선 이룬 업적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가란 사람이 훗날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얄팍한 상업주의 아이콘으로 소비되는 본인으로서도 결코 달갑지 않았을 법한 아이러니까지 초래했다.
결과론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실패하고 단명한 비운의 혁명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어, 이는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공산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세 번씩이나 영화화되었으며[1] 다방면에서 상품화가 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란은 있겠지만 프랑스의 철학자인 장폴 사르트르는 그를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제국주의와 싸우는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의 상징이 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불멸의 투쟁가로 기억되고 있다.
최소한 엘리트 지식인(의사)이었던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총을 잡고 혁명에 나선 일이나,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권력다툼이나 하고 부정부패로 재산 모아서 잘먹고 잘 살 궁리나 했던 과거 혁명지도자들의 전례에 비해, 쿠바 혁명 성공 뒤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마지막까지 혁명의 최일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고결함 만으로도 인기의 비결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잘생기고 스토리가 있어서기도 하고, 쿠바에서 떠난 것을 권력다툼에서 밀려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권력을 포기하고 쿠바 내 상류층으로 살거나 재산을 잔뜩 챙긴 뒤에 중립국으로 튀어서 평생 편하게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게 분명하다.
그가 이렇게 상품화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그가 젊어서 죽은 데다 대단한 미남이었다는 것이다. 항상 군복에 수염도 깎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눈에 뜨일 정도였다. 청년 시절 사진을 보면 어지간한 배우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꽃미남이다.[2]
또 다른 이유는 위의 별 붙은 베레모를 쓴 유명한 사진을 찍은 코르다가 그 사진에 한해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무나 그 사진을 써도 상관 없게 되었으니, 저항의 상징이자 젊은 순교자 이미지를 팔아먹으려는 전 세계 회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얼굴을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체와 전혀 상관 없는 오스트리아의 스키 회사 Fischer에서는 "스키의 혁명"이란 문구로 체의 얼굴을 써먹었고, 술은 입에 대지 않았던 체의 이름이 붙은 술도 나와 있다.[3] 스노보드 바닥에도 있고, 국내에서도 게바라를 검색 엔진에서 치면 티셔츠 등 꽤 많은 상품이 올라온다. 심지어 축구공이나 속옷에까지 쓰이는 등 상업적으로 마구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2011년에 저작권자가 저작권 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를 상업적인 아이콘으로써 이용한 서구 기업가들에 의해 그의 이미지가 과대포장되었다"며 인물에 대해 근본적인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마저도 나오는 실정. 후일 체와 함께한 최후의 게릴라였던 부스토스가 체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에게 "그걸 왜 입나"라고 물어보자 대답을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체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는 게 전 게릴라의 씁쓸한 회상이다.
결국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던 그였으나 훗날 자본주의자들에게 의해 상품화가 되어 자본주의자들이 만든 공산주의 슈퍼스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쿠바에서는 당연히 국가적인 영웅으로 우상화되고 있다. 쿠바에서는 카스트로 형제의 우상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대신 체 게바라에 대한 쿠바 시민들의 자발적인 우상화가 이뤄지고 있다.
2.1. 긍정적 평가
천식과 같은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과 고강도 노동, 게릴라전까지 감내하는 극기력은 체 게바라의 삶에 바탕이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안락한 의사의 길 대신 혁명가의 길을, 승리한 혁명사회의 각료로서 누리는 삶 대신 혁명가의 삶을 살게 하였다. 혁명가로서 종속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빈곤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 체의 이상은 라틴아메리카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소련이 국제 공산당의 중심으로서 서구 좌파 학생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스탈린이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폭로와 더불어 소련군이 무력으로 헝가리 봉기와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렸고 소련에 대한 동경도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이 때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신좌파의 발흥과 함께 그 공백을 채우고 부상한 것이 호치민, 마오쩌둥, 체 게바라,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였다.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까지 결부되어 일종의 철인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스탈린과 같은 신세로 추락하였다. 체 게바라는 여전히 혁명의 아이콘으로 기능하고 있다. 피델은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독재자로서 이제는 그 대우가 조금 미묘한 듯. 체 게바라가 혁명의 아이콘이라면 피델은 혁명의 화석이라나.
근래에 남미에서는 체 게바라가 신성시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이런 현상이 강하며 남미 신문들은 아예 대놓고 게바라의 사진에 성(聖) 체 게바라라는 설명을 달아놓기까지 한다고 한다. 남미 국가들중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에 제일 적대적인 볼리비아가 훗날 그를 성인으로 추앙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면 수백 년 뒤에 게바라가 가톨릭의 성인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도 하는데 과연? 하지만 정작 체 게바라의 측근들은 게바라가 성인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좋지 않게 보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게바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가톨릭을 믿으라 하자 거절할 정도였다.[4] 사실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도 성인 시성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치 참여 때문에 논란이 많다. 하물며 가톨릭 교회와 별 관련도 없었던 게바라가 성인으로 시성될지는 아무래도 성인에 오르는 일은 여러 모로 없을 듯 싶다. 다만 알포다에 따르면 체의 시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예수를 닮았다고 하니 종교적 추앙은 지속 가능성이 있다.
2.2. 부정적 평가
미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카스트로 평전을 썼던 로버트 E. 쿼크는 게바라가 의사면허를 턱걸이로 취득하였고, 의사로서 고정적인 수입을 받고 안정적으로 생활할만한 실력이 아니었으므로 외래진료활동을 많이 다닌 것이며, 애초에 안정적인 직장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모험이나 유흥을 즐기고, 그러한 행동의 연장으로 혁명에 가담한 것이라고 추정했다.체 게바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된 혁명 우상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비판적 평가들도 알려지고 있다. 가령 체 게바라는 기본적인 인격부터 잔인하고 사디스틱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고문하고 살육하는 것을 즐겼고, 혁명 활동을 하는 도중에도 동물을 잡아다 고문하고 살육하는 것을 즐겼다는 주장이 있다.[5]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체의 가학적인 면모는 당연히 인간에게도 나타났다고 한다. 농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겠다면서 가난한 농부들을 지주로 몰아 처형하는 걸 즐겼고, 정부군에게 밀고할지도 모른다며 일가족을 학살하기도 하였다는 것. 심지어 어린 아들이 반혁명 분자라며 체포된걸 구명하러 간 어머니 앞에서 그 아들을 처형하며 즐긴 적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비판측에서는 체를 가리켜 '막상 전투에는 무능했으며, 사치스러웠고, 겁쟁이에 기회주의자였다'고 비난한다.[6]
또한 혁명에 성공하여 쿠바 중앙은행장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무리한 국유화와 국고의 낭비로 쿠바 페소는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산업장관 시절에도 인프라 부족을 지적하는 학자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공업화 정책을 강행하다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견해에 따라서는, 노동자의 기업경영 참여와 도덕적 인센티브 장려 등 체 게바라의 경제 정책을 고평가하는 시각도 있다.[7]
2.2.1. 반대파 학살과 정치범 수용소
체 게바라는 혁명 직후 반대파 숙청과 처형을 지휘했으며, 또한 쿠바와 볼리비아, 콩고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라 카바나 노동수용소의 경우. 그는 카스트로의 지시로 쿠바의 라 카바나에 공직자들의 태업을 처벌하기 위한 노동 수용소를 세우고 소장으로 재직하였다. 라 카바나 수용소는 알려지기로는 자진해서 공직자에서 물러날 경우 형이 면제되는 방식이었고, 실제로 공직자 교화용으로 운영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보니 실제로는 정치범 수용소의 형태로 운용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상식적으로 공직을 포기하는 것과 수용소에 갇혀 죽을지도 모르는 강제 노동을 하는 것 중에 선택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선택할 것이니까. 아니면 선택권이 자유롭지 않았다거나.[8]실제로, 피델이나 체 게바라, 쿠바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상당수는 미국의 마이애미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바티스타 정권 경찰 출신으로 피델 카스트로 치하에서 반체제활동을 벌이다 테러 혐의로 체포된 아르만도 비야다레스는 옥중에서 이루어진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여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국제 캠페인으로까지 번졌던 적이 있다. 그러나 쿠바에서 석방 조건으로 '걸어서 비행기를 타고 걸어서 비행기에서 내릴 것'을 주문하자 하체 마비환자 행세를 즉각 집어치웠고, 이를 반쿠바 선전에 활용하려던 미국은 도리어 한 방 먹은 셈이 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일관된 입장은 쿠바에서는 고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쿠바에서 고문당한 여성의 사례를 기록한 인권변호사의 기고가 있다.
어쨌거나 라 카바냐 형무소는 지금도 쿠바에서 제일 유명한 형무소로 공포의 상징이다. 라 카바냐 형무소는 애초부터 식민지 시대부터 사용되던 해안 요새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한 것이다. 독립 혁명 이후에도 군사기지로 쓰였으며,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쓰였다. 위치상으로도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드 아바나의 내해 바로 건너편에 있다. 현재는 형무소나 군부대로 쓰이고 있지 않으며, 박물관이자 사적지로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형무소에서의 처형이 정식 재판을 통해 진행된 게 아니라 인민재판을 통하여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인민재판이라는 것은 법적인 절차나 법리에 따르지 않고 재판에 참여한 좌중들이 죽이라고 하면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수감인 중에서는 중죄인만 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서 수감된 자나, 아주 경미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아무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도 적잖게 있었다. 인민재판을 거치면서, 좌중들의 군중심리에 이끌려 죄가 없음에도 사형수로 몰려 처형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특히 정치범 처형은 체의 경력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데, 이들 정치범들이 주로 카스트로와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2.2.2.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활동에 대한 비판
체 게바라를 생포한 볼리비아의 가리 프라도 장군은 그의 실패 원인을 크게 3가지로 꼽았다.첫째로, 볼리비아에 반정부 활동을 하러 온 것이다. 애초에 그가 게릴라전으로 큰 성과를 거뒀던 쿠바의 경우 바티스타가 독재를 일삼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 컸기 때문에 반정부활동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경우 새롭게 들어선 군사독재정부가 도시 노동자층의 파업과 시위를 강제로 진압하고 민주화 세력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지만, 1952년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민주 정부의 혼란스럽고 성과 없는 개혁에 지친 상당수 농민들에게 있어서 나라를 안정시킬 세력으로 보였기에 농촌에서의 민심 이반이 적었다. 이는 혁명재판으로 정치깡패들을 소탕한 한국의 박정희 군사독재정부 초창기와 똑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게바라가 대체 왜 하필이면 게릴라전을 통해 혁명을 수출할 나라로 볼리비아를 선택했는가이다. 특히 게바라가 볼리비아 사정에 정통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에게 볼리비아란 여행하다가 거쳐간 곳에 불과했다. 게릴라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현지화 전략이다. 정부군보다 현지를 더 잘 알아야만 정부군보다 열등한 장비와 보급 속에서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여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볼리비아는 1950년대에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농민에게 어느 정도 토지 분배를 이미 이룩한 상태였고[9] 1964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서 반발이 거세기는 했지만 새로이 들어서 군사독재정권도 토지 개혁만은 뒤엎지 않아서 농촌 지역에서의 민심 이반이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게바라의 게릴라전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고 게바라의 볼리비아 혁명 활동을 두고 '자살 여행'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볼리비아행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의 논리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남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위치한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만들어 남아메리카 각국에 혁명을 수출하려는 계획이었다'는 말만 거듭하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성공을 해야 각국을 혁명을 수출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특징은 되려 볼리비아가 아닌 파라과이가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앞뒤가 안 맞는다. 그리고 험난한 안데스산맥의 지형 때문에 숨어서 게릴라를 벌이기 쉬워서 볼리비아를 골랐다 하여도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게, 지형 때문이라면 파라과이나 우루과이를 제외한 중남미 모든 나라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남미에서 비교적 평지 위주로 구성된 나라가 저 둘이기 때문이다.[10] 심지어 체 게바라의 원래 조국인 아르헨티나 역시 평지 저지대인 동부 지역에서는 상당히 불리할지언정 서쪽 칠레와의 국경지대나 파타고니아를 위시로 한 남부지역은 해발고도가 상당히 높고 무주지도 상당히 많아 게릴라전을 벌이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게다가 우루과이는 사투리를 비롯한 지역 방언도 똑같은 라플라타 스페인어에 기본 문화적 성향이나 사회경제적 구조도 아르헨티나랑 판박이고, 애초에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에서부터 독립시켜 준 나라인지라 민간에서 친아르헨티나 감정도 높다. 차라리 고향 옆나라인 우루과이에서 혁명 활동을 했다면 그나마 대놓고 이방인 취급은 덜 받았을 것이다.
당장 볼리비아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 볼리비아인이 싫다는 데도 총질을 해대며 혁명을 선동하는데 이걸 누가 좋아하겠는가? 자기가 좋은 일 한다는 확신에 차서 강요한다는 점에서 (그게 좋든 나쁘든) 강제 선교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해방시켜준다는 그 주체인 볼리비아 내부 인민들 본인들의 시각보다 사상적 동기가 어쨌든 간에 외부인인 본인의 시각을 우선시하는 태도이고, 체 게바라가 딱히 강력한 외세를 뒷배경으로 삼거나 애초에 쿠바가 이렇게 강력한 뒷배경이 될만한 국력도 없어서 그렇지, 여기서 한발짝만 더 나가면 바로 본인이 그리 욕하는 제국주의자들하고 딱히 차이가 없는 태도이다. 그리고 어쨌든 순수한 혁명가답게 흔히 오만한 제국주의자들이나 저지를법한 해당 나라, 사회의 내부적 자세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채 자신의 아젠다, 시각만 들이미는 짓을 막상 제국주의자들이 달고 다니는 빽도 없이 한 결과 결국 볼리비아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 때문에 좌익의 입장에서도 게바라의 노선은 극좌모험주의라고 비판받고 있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서두른 무장봉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혁명 조직도 깡그리 씨가 말랐다는 것이다.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의 리리싼이 벌인 모험주의적 봉기와 비슷한 사례로 비판 받는다.
사회주의 같은 본인이 상징한 세계 사상적 조류에 대한 포용성도 쿠바나 볼리비아는 확연히 달랐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많고 넒은 중남미 국가들이 전부 스페인어, 옛 스페인 식민지, 가톨릭 신앙이란 큰 문화역사적 틀은 공유해도 세부적으로 보면 사회적 문맥, 문화적 성향이 전부 다른게 당연한데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인식은 본인도 라틴아메리카인이면서도 오히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역사적 다양성을 간과한듯한 모습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쿠바는 옛날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최초의 식민지 중 하나이자 이베리아 반도 본국과 나머지 아메리카를 이어주는 최대 최고의 무역항으로서 외부 사상의 유입도 활발했고, 중남미치곤 각종 항만과 무역업도 일찍 발달해 이에 따른 노동운동이나 좌파 지식인들도 많았다. 특히 체 게바라가 쿠바 활동을 시작한 50년대는 카스트로 형제 본인들도 당장 스페인 갈리시아와 겨우 한두세대 떨어진 이민자들이고, 바로 한세대 이전 스페인 내전을 피해 스페인 본토 출신 좌파,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도 많이 난민으로 와서 중남미 좌파 운동사에 새로운 활력을 한창 불어넣던 시기였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사회문화적 성향 자체가 도시중심적이고 유럽 스페인 본토발 좌파 사상 조류의 영향이 지대했던건 체 게바라 본인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도시들과 쿠바나 차라리 서로 닮은 바가 있었다.
반면 같은 라틴아메리카라 하더라도 볼리비아는 사회문화적 성향, 경제 구조, 역사적 배경이란 면에서 모든 게 완전 반대라 할 만큼 심하게 달랐다. 상술한대로 쿠바는 식민지 시절부터 쌓아온 아바나 중심으로, 본인 고향인 로사리오-부에노스아이레스 일대는 19세기-20세기 아르헨티나 고도성장기 유입된 이민자들과 자본을 중심으로 이미 어느 정도 자본주의적 사회 변화와 이에 수반한 사회주의적 담론이 상당히 발전한 곳들이었지만, 볼리비아는 옛 스페인 식민지 기준으로도 산업화나 도시 발전이 전혀 안 된 곳이었다. 지금도 종종 '중남미 유일의 백인 국가'라 자뻑하는 아르헨티나와, 차라리 삼각 무역시절 끌고온 아프리카 노예 출신 흑인들은 많아도 타이노인 같은 원주민들은 초기 유럽 식민주의의 잔혹함과 질병에 첫빠따로 두들겨 맞고 비교적 일찍 전멸/흔적도 찾기 힘들만큼 동화된 쿠바와는 정 반대로 볼리비아는 옛날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도 콩키스타도르와 스페인 식민 세력이 험준한 안데스 산맥 넘어 깊게 침투를 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서 원주민들이 다수로 남은 나라이다.
차라리 식민지 시절에도 이 일대 범안데스 산맥 권역에서 그나마 다른 스페인 식민지, 스페인 본토, 그리고 나머지 세계와 접촉 창구 역할을 하며 그나마 대외무역이 발달하며 외부하고 활발하게 교류했던 지방은 옆나라 페루의 리마나[11] 에콰도르의 과야킬 정도이지, 볼리비아는 진짜 중남미 내에서도 체 게바라 본인이 대표하는 서구발 근대주의적 사상이나 사회경제적 변화하곤 영 동떨어진 오지였다는 것이다.
이러니 기본적으로 일단 민족부터 바스크&칸타브리아 북방 스페인계+아일랜드계 후손으로[12][13] 전형적인 중남미 백인이었던 체 게바라가 여전히 근근한 소규모 산자락 자영농 중심 안데스 산맥 원주민 대다수였던 볼리비아 농민들이겐 무슨 혁명 동지고 나발이고가 아니라 옛날 스페인 정복자들이나 당대 라파스의 권력자들과 비교해도 더 이질적인 외부인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나름 성공적인 토지 개혁을 이룩한 상태라 막상 볼리비아 현지 농민들은 경제적으로는 가진 건 많이 없지만 당장 생계는 보장되고, 크게 불안정하지 않은 자영농들이 태반인 상태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체 게바라는 딱 언어만 통하지[14] 나머지 다른 모든 면은 이질적이고, 공감하지도 못할 혁명이나 설파하는 이방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릴라 투쟁 와중 저지른 군사적 실수 같은 건 사실 볼리비아가 당시 중남미 나라 중에선 최악의 혁명 후보지였는데 이런 자세한 판단도 없이 불나방마냥 뛰어들었다는 근본적인 판단 오류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둘째로, 보급이나 연락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병력만 분산하여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격파당할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나 나온 스타크래프트도 어설프게 병력 분산하다 각개격파당해서 전세가 뒤집어진 경기가 적지 않은데, 체 게바라는 더 적은 병력과 더 적은 자원 그리고 더 적은 정보로 어설프게 분산을 시도했다. 그 결과 정부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흩어진 다른 게릴라 부대를 공격할 때에는 서로 연락이 닿질 않아 도와주지 못하다 궤멸되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않았다. 교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더 이상 승산이 없다면 민가에 숨어들거나, 국외로 탈출하거나 다음 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성과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교전만 하던 끝에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에 대해서는, 도망가봤자 다음 기회는 오지 못할 것이라 본 것이 아닌가 싶긴 하다.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죽을 쑤면서 그는 측근을 포함한 모든 인맥을 잃었고, 그 와중에 소련의 낙인은 지겹게도 그를 쫓아오며 현지에서의 적응을 방해하고 불화를 조장했다. 여기에 전술한 모든 문제가 합해져서, 볼리비아 혁명이 실패하고 있다는 징후가 날이 갈수록 유력해지니, 더 이상의 희망을 잃고 포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좌익 게릴라가 성공한 곳은 쿠바와 니카라과 뿐이며, 이 외에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페루에서 승리 직전까지 갔었던 바가 있다. 앞서 언급한 인종 문제 등을 고려하면, 체 게바라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은 콜롬비아로 가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1] 처음엔 오마 샤리프가 게바라 역을 맡았으며, 스티븐 소더버그가 감독한 두 번째 영화(2부로 나눠져 있다.)에서는 베니치오 델 토로가 맡았다. 델 토로는 이 역으로 2008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2] 이에 관한 일화로, 대학시절 호의를 가졌던 여학생에게 '진지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잘생겼다'는 이유로 차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급진주의 정치운동에 관심이 많던 그 여학생이 보기에 '저렇게 엄청 잘생긴 미남이 혁명이나 빈민들의 삶 같은 데 무슨 관심이나 있겠어?'라고 여겨져서 차였다는 것. 이외 비슷한 다른 일화로 68 혁명 당시 시위 대열에 참여한 대학생(여성)이 옆에서 전해주는 피켓을 받았는데 겁에 질린 노파의 얼굴이 그려진 그 피켓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옆 사람이 들고 있던 잘생긴 청년이 그려진 피켓과 바꿔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3] 코르다는 다른 상품에 그의 사진이 붙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이 술에 붙은 것만큼은 술을 절대 마시지 않은 게바라를 모욕하는 것이라면서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4] 기본적으로 게바라는 무신론자였다. 적들에게 십자가에 처박히는 것보다는 십자가에 박으려고 하는 적을 처단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5] Maria C. Werlau, <Che Guevara's Forgotten Victim>[6] Humberto Fontova, <Exposing The Real Che Guevara>[7] 헬렌 야페, <혁명의 경제학>[8] 라 카바냐 수용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헬렌 야페가 쓴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을 참고할 것.[9] 52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다음 멕시코의 제도혁명당, 조합주의, 사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도좌파적 정책을 핀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 정권의 업적이었다. 볼리비아의 50년대 토지 개혁 정책도 근본적인 사회적 불평등 해결 문제에선 소원하지만 어쨌든 토지 개혁 이전엔 인구의 5%도 안 되는 옛 식민지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출신 엔코멘데로 백인 지주들이 80% 독점하던 아시엔다 장원들을 10년에 두고 대부분 해체, 자영농들에게 분배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례에 꼽힌다.[10] 실제로 저 두 나라에서 산 구경하러 아르헨티나나 칠레로 관광가는 사람도 많다.[11] 페루는 남미에서는 제일 늦게까지 스페인 지배를 받았다. 덕분에 페루 스페인어도 비교적 스페인 본토에 가깝다. 페루도 안데스 산맥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면 원주민 문화가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볼리비아 수준으로 외부에 배타적인 수준까지는 아니다. 참고로, 체가 죽은 이후로는 리마에 아시아 문화도 많이 유입되었다. 덕분에 중남미에서 아시아 문화를 접하기 제일 쉬운 동네 중 한 곳이 리마이다. 반면 페루 내부에서도 두번째 도시인 쿠스코는 당장 도시 건축 문화유적부터 잉카 문명 시절의 문화유산이 방문객을 환영하며 역사도 식민도시가 아니라 원주민 잉카 시절부터 내려오던 것이라 리마와 반대되는 페루의 잉카적 정체성을 상징하며, 이런 인식에 기반한 지역감정도 강한 편이다.[12] 게바라 일가의 풀 성씨는 사실 Guevara y Lynch, 아버지 친가 외할머니쪽이 아일랜드계의 후손이며, 훗날 동명이인인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도 "내 아들의 피에는 아일랜드 혁명가들의 피가 흘렀다"라고 증언할 만큼 아일랜드계의 후손이란 정체성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살았다.[13] 지금까지 살아있는 체 게바라 동생 증언에 따르면 게바라 가문의 아일랜드 혈통은 그냥 지나가는 집안 혈통 수준이 아니라 체 게바라 유년기 집안 분위기와 의식 형성에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친가 린치 가문은 그냥 정체성 자체를 아일랜드계에 두었고 따라서 체 게바라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일랜드 혁명가들의 반영 투쟁 얘기 듣고 자랐었다.[14] 이것도 사실 희망적인 소리다. 지금도 볼리비아는 스페인어랑 공용으로 케추아어, 아이마라어, 과라니어 비롯한 원주민 언어 여럿이 공용국어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스페인 식민화로 인한 문화 변경을 덜 겪었다. 멕시코도 그렇고, 애초에 공공 인프라 자체가 약한 나라들이 많은 중남미권이라 사실 지금도 오지에 가면 스페인어에 미숙하거나 전혀 할 줄 모르고 모어만 할 줄 아는 원주민들이 많은데 1960년대에는 사실 체 게바라랑 기본적인 언어도 안 통했을 원주민어 화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봐야 한다. 볼리비아 내에서 그나마 스페인어를 잘하는 편인 원주민들 및 메스티소들(카스티소에 비해 원주민 혈통이 강함)조차도 자신들과 말이 통하는 쿠바인들 및 아르헨티나인들과는 살아온 환경 자체가 달라서 스페인어의 유창함과 별개로 체 게바라의 사회주의 수출을 긍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볼리비아 내에서 스페인어가 가장 유창한 사람들(카스티소 및 순혈 백인)은 지배층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피지배층의 혁명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와는 너무나도 상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