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6:47:08

황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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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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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允吉
1536년(중종 31) ~ 1592?(선조 25)

1. 소개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1.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 영의정부사를 지낸 황희의 5대손이다. 당색은 서인이다.

2. 생애

음력 1536년 종5품 영평현령을 지낸 황징(黃懲)과 청주 한씨 한경서(韓慶瑞) 장녀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1위로 급제하고#, 1561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1563년 정6품 사간원정언(正言)을 거쳐 1567년 정5품 사헌부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정3품 황주목사(牧使)를 지내고 이어 종2품 병조참판을 지냈다.

1590년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수행원 등 200여 명을 거느리고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로 가서 당시 일본의 관백(關伯)이었던 풍신수길(豊臣秀吉) 등을 접견하였다. 1591년 봄 황윤길은 귀국하여 국정을 자세히 보고하면서 장차 일본이 반드시 침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동인이었던 통신부사(通信副使) 김성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물됨이 보잘 것 없고 준비된 군사가 없었다며 엇갈린 주장을 하여 일본 방비책에 통일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당시 조정에는 동인의 입김이 강했던지라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의견은 그대로 묵살당했다. 한편 그는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조총(鳥銃) 2자루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바쳤지만 조정에서 그것을 실용화할 계획을 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1592년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당시 황윤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하며 그에게 정2품 병조판서를 주었다.#

그 이후의 기록이 없어서 황윤길의 말년은 분명하지 않다. 그 후손인 장수 황씨 측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선조가 그를 병조판서로 제수했을 당시 미처 취임하기도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 진위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사망해서 더 이상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것이 된다. 그의 묘는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56보병사단 부대 내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8년에 향토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3. 여담

  • 통신사로 파견되었을 당시 소 요시토시가 대마도의 에서 김성일과 황윤길을 기다리게 했는데 오랫동안 오지 않아 김성일이 버럭 화를 내자 "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리 소리치면 나만 귀 아프지 않는가."라며 말렸으며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답서를 쓰지 않아 김성일이 또 화를 내자 "더이상 말싸움을 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으니 그냥 돌아가자."라며 김성일을 달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언쟁을 막았다. 이는 성격이 온화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통신정사로서 통신사와 일본 측의 마찰을 막으려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능했던 것으로 정평이 난 명재상 황희의 후손답게 중요한 순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고 뛰어난 판단력에 실리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전쟁준비 분위기를 읽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주장한 면에서 많은 대중매체나 위인전에 긍정적으로 나온다.[1]

4. 대중매체

  •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2부 일륜의 데마르카시온에서 등장. 소 요시토시가 국서를 위조해서 황윤길을 비롯한 사신들을 '새 일본 국왕을 위한 하례' 명목으로 초대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사신단을 완전히 깔봐[4] 황윤길 앞에서 "조선 사신이 이렇게 복속하러 와서 기쁘다. 함께 명나라를 치자."고 말하지만, 요시토시는 이미 국서를 날조한 경험도 있고 해서 이를 '이렇게 먼 길을 와서 수고했다'라고 곡해하여 전하고, 황윤길은 요시토시의 말을 그대로 믿고 히데요시에게 하례를 올린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회담장에 데려온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오줌을 싸는 결례를 저지르고, 히데요시는 사과하기는커녕 자기도 속대 차림에서 훈도시 차림으로 바꾸는 더 큰 결례를 저질러, 황윤길은 분노한 채 회담장을 뛰쳐나온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선조에게 '반드시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보고를 올리지만, 김성일은 '그렇게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1] 이에 반해 김성일은 전쟁대비를 반대하고, 당리를 위해 국가위기를 방치한 소인배로 부정적으로 표현되는 것과 대조적.[2]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박헌영 역.[3]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색 역.[4] 조선 사신들에게 내려진 술상도 변변한 안주 하나 없이 조그마한 술잔만 가져다 놓은 단출한 상이었다. 원 역사에서는 보통 큰 행사에서 손님을 맞을 때 대접하는 고급 증류주가 아닌, 저급한 탁주를 내놓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