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7:02:00

애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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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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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산 전투 / 애산 해전
崖山 戰鬪 / 崖山 海戰
The Battle of Yamen
<colbgcolor=#2e8b57,#251327><colcolor=#ece5b6> 시기 1279년 (송 소제 2년) 3월 19일
장소
송 애산 (중국 광둥 성 장먼시 애산진)
원인 쿠빌라이 칸의 남송 정복, 남송 부흥군 최후의 저항
교전국 <rowcolor=black>
(공세)
남송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장홍범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이항
지휘관

[[남송|
大宋
]] 소제 (송 황제)
[[남송|
大宋
]] 장세걸
[[남송|
大宋
]] 육수부
병력 몽골군: 20,000명
함선: 50척
송나라군: 200,000명
함선: 1,000척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전사자: 100,000명
결과 원나라의 승리
- 최고 지휘관 송 황제, 장세걸, 육수부 전사
- 남송의 완전한 멸망
영향 몽골의 중국 전역 지배
1. 개요2. 배경3. 전투4. 어록5. 후일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충후함으로써 전대의 자손을 기르고
(以忠厚養前代之子孫, 이충후양전대지자손)
관대함으로써 사인의 정기를 기르며
(以寬大養士人之正氣, 이관대양사인지정기)
절제함으로써 백성의 생리를 기를지어다."
(以節制養百姓之生理, 이절제양백성지생리)
-송태조 조광윤, <석각유훈>(石刻遺訓)-[1]
13세기에 몽골의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때, 그들은 유독 남송에서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남송을 공격했을 때부터 1279년 광동 애산(崖山) 전투에서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때까지, 장장 40여 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여 몽골의 몽케 칸도 남송의 합주성에서 전사했다. 장원 출신의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남송의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은 송 왕조가 300년간 사대부들을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고, 송대 문치주의에 있어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것이기도 했다.
-진정(金諍), 《중국 과거 문화사》 中-
1279년에 벌어진 원나라송나라의 최후의 결전.

이 전투에 패배하면서 남송은 완전히 멸망했다. 인류 전쟁사 중에서 가장 비장하고 장렬한 최후 중 하나로 유명하며, 1453년 동로마 제국 최후의 전투인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과 비교되기도 한다.

이 전투가 벌어진 곳은 현대의 광둥성 장먼시 애산(야먼)진이다. 영어 표현인 Yamen은 崖門의 중국어 발음 Yámén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애산진은 현재 내륙으로 약간 들어가 있는 지역이나, 당대에는 그 지역이 해안가였다. 750년 정도가 지나면서 퇴적이 계속되어 해안선이 바뀌고, 중국 내부에서도 간척을 하다보니 현재 애산진은 내륙으로 6km 정도 들어온 곳이 된 것이다.

2. 배경

1276년, 쿠빌라이 칸원나라 군대는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켰다. 공제는 항복하고 대도로 끌려갔으며, 수도가 점령당하고 황제가 항복해 포로로 잡힌 시점에서 남송은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던 송나라의 중신들과 백성 중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이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등을 중심으로 하여 남송 부흥군을 조직한다. 이들은 공종의 이복형 익왕 조하(단종)를 황제로 추대하고 저항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였으나 이미 기세가 원나라측으로 기울어버린 상황이라 남송 부흥군은 연전연패만 거듭하다 단종이 병사하고 만다.

부흥군은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단종의 동생 위왕 조병(회종)을 황제로 옹립시키며 저항을 계속했다. 장세걸육수부가 소제를 데리고 해상으로 떠났고 문천상만이 육지에 남아 각자의 역할에 따라 저항운동을 지속한다. 이 중 해군 측은 해상을 떠돌며 저항을 반복하다 중국 대륙의 최남단인 애산[2]에 정착하여 요새와 행궁을 구축하여 최후의 거점으로 삼게 된다.

장세걸과 육수부의 전략은 유목민족 전통의 약점인 해상에서 약하다는 것을 노린 계책이었지만 원나라는 장군이고 병사고 할 것 없이 한족 투항자들을 대거 모아 대규모 수군을 편성하여 애산을 침공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면서 유명무실화되었다. 그 와중에 홀로 육지에 남아 저항 활동을 지속하던 문천상마저 원나라군에 패배해 포로로 잡혀버리게 되며 이제 저항군은 애산에 갇힌 병력만 남게 되었다.

3. 전투

상술했듯 남송이 사실상 멸망한 상태임에도 애산에 임시로 세워진 남송 조정에는 각지에서 모집된 200,000명의 의병이 집결해 조씨 황실과 최후를 같이할 것을 각오했고, 조광윤에 선양한 후주의 구 황족인 시씨 가문도 남송과 명운을 함께할 것을 결의하며 송태조 조광윤 이래 300여 년간 이어져온 의리를 지키기로 맹세했다.

남송 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서로 긴밀히 묶고 배에 진흙을 바르는 등 화공에 대비하고 원나라측의 수군을 상대로 나름대로 치열하게 싸우며 수차례 격퇴시키는 등 분전을 했으나 내륙과는 고립되어 있다는 애산의 특성을 이용한 원수 장홍범[3]이 대놓고 애산을 포위해 걸어잠그자 남송측은 물자와 식수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굶주림과 탈수에 시달렸다.[4]

양측의 대치는 원나라 측에 이항이 부원수로 합류하면서 끝나게 된다.[5] 이항이 합류한 뒤 장홍범은 곧바로 군을 재정비했고 3월 18일 저녁, 끝을 낼 작정으로 각 함대에게 화포 사용을 금지시키는 한편[6] 함대를 자신이 이끄는 본대와 그 외 3명의 지휘관들이 이끄는 세 부대로 나눠 사방으로 포위를 지속시키게 했으며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함대를 돌격시켰다.

질병과 기아로 이미 진이 빠져있던 송의 수군은 원 함대의 대공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이들에게는 원 함대에서 쏘아올린 화살비가 쏟아졌다. 남송 병사들은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사살되거나 부상당하여 혼란에 빠지기 시작해 사실상 붕괴되었다. 배를 묶어놓은 상태로 후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원의 병사들이 송의 함대로 뛰어들어 근접 전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대규모의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수만 여명에 달하는 남송 병사들이 학살당하거나 물에 빠졌다. 절망한 남송군 수뇌부는 차례로 자살을 택하였다. 이에 장세걸은 대세가 기운 것을 깨닫고 정예병을 중군에 집중시켰으며 육수부와 송 소제를 데려오게 하였다. 최후의 돌파를 계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육수부는 배 안에서 어린 황제에게 제왕학의 개론서인 《대학》을 강론하고 있던 중, 패배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결국 어린 황제와 함께 바다에 투신하였다.[7] 황제의 어머니 양태후는 구출되었지만 그녀도 절망하여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남송 함대를 이끌던 장세걸은 끝까지 살아남아 대월로 망명해 후일을 기약하려 했으나 태풍이 불어닥쳐 남송 최후의 함대와 함께 익사했다. 원나라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바다 위에 떠오른 시체만 100,000구였다고 한다.

남중국해로 도피한 장세걸 함대가 폭풍에 침몰하고 대도로 압송된 문천상이 처형되면서 남송 부흥 운동은 종말을 맞이하였고 이로써 부흥군으로나마 끈질기게 버텨오던 남송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4. 어록

이제 사직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바, 존망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선 오랑캐들에게 사로잡혀 욕을 당하시느니, 차라리 이 노신(老臣)과 바다에 몸을 던져 순국하시어, 구천에 계신 (祖宗朝)를 뵘이, 대송(大宋)의 천자로서 떳떳한 바가 될 것입니다.
-송나라 좌승상 육수부, 몽골군에게 포위된 애산 섬 앞바다에서 마지막 천자인 소제와 함께 몸을 던질 때.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겠다!
-소제육수부에게 업힌 채 바다에 뛰어들 때 남긴 말.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연명한 바는 조씨 황실의 골육을 보전키 위해서였거니와, 이제 일이 이 지경에 이른 바 내 살아 있은들 더 무엇하겠소?
-단종의 모후 양 태후, 투신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
하늘이 대송(大宋)을 망하게 하려거든 나의 배를 모조리 바다 속에 가라앉게 하소서!
-송나라 통군 대원수 장세걸, 애산 전투 이후, 패잔 선단을 이끌고 도주하던 중 폭풍을 만난 때에. 결국 배는 모조리 가라앉고 장세걸과 송군 10만은 함께 수장되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극소수의 병사는 살아남았고, 언급이 없는 나머지 10만여 명은 도망친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내 업무를 완수했다(吾事畢矣).
-문천상, 애산 전투 이후 구속된 상태에서 원나라의 회유를 거절하고 끝까지 송의 신하로 남기를 선택해 처형당하면서 남긴 말.
검을 갈아 돌로 만든 정이 갈라지고(磨劍劍石石鼎裂),
말이 장강을 마셔 장강이 말라버렸다(飮馬長江江水竭).
우리 왕조의 100만 전포는 붉게 물들었는데(我朝百萬戰袍紅),
모조리 강남 남녀들의 피로구나(盡是江南兒女血).

-원나라 장수 장홍범이 남긴 문집인 《회양집》에서 애산 전투를 회상하며 지은 시.#

5. 후일담

애산 전투로부터 대략 60년 뒤에 몽골 제국이 사방으로 쪼개지고 나라 사정이 엉망이 된 원나라 말기, 강남의 호주(濠州)[8]에 떠돌이 가난뱅이 농부 주오사[9]라는 사람이 있었다. 주오사에게는 4남 2녀가 있었다.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전부 하찮은 집안의 농부일 뿐이니 제대로 된 이름 같은 것도 없다. 셋째가 중칠(重七)이고 넷째가 중팔(重八)이었다. 하나같이 하잘것 없던 집안에서 유달리 기인(奇人)이라고 부를 사람이 1명 있다고 치면, 바로 주오사 영감의 장인어른이었다. 중팔 형제에게는 외할아버지가 된다. 막내인 중팔에게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었을 테지만, 어머니가 가끔씩 해주는 이야기만은 어렴풋이 추억에 남아 있었다.

그 노인은 죽었을 때 나이가 99세였다.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허리가 꼿꼿했고 긴 흰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거의 50년 ~ 60년 전에 몽골에 맞선 전투에 참여했다고 했다. 당시는 몽골이 전 세계를 집어삼켰고, 최대의 적수인 남송을 유린하여 수도마저 함락하고 대충신 문천상(文天祥)도 사로잡았을 때다. 그렇다. 주오사의 장인이자 중팔의 외할아버지는 애산 전투의 생존자였다. 장세걸 휘하의 친위병으로 그를 끝까지 따랐고, 어린 황제도, 대신 육수부도 바다에 빠져 목숨을 버린것처럼 그 역시 장세걸 함대를 덮친 태풍에 휘말려 바다에 빠져 죽기만을 기다렸으나 요행히 구조를 받아 살아남았다. 그리고 온갖 고생을 겪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 날의 기억은 늙은 노인에게 있어서 평생의 자랑이었고, 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깊은 상처였다. 노인이 눈물을 머금은 채 옛일을 이야기할 때면,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은 사람들 역시 똑같이 눈물을 훔쳤다고 전해진다.

노인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둘째가 바로 주오사 영감에게 시집을 온 진씨(陳氏)였다. 그리고 후일, 이 노인의 막내 외손자인 주중팔, 다른 이름으로는 주원장으로 알려진 이 사람은 후일 강남에서 군을 일으켜 파양호 대전을 통해 명나라를 세웠고, 수십만 대군을 몰아 몽골 황금씨족이 다스리는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쳐들어가 원나라를 멸망시켰다. 애산 전투로부터 90여 년, 그 당시 끝까지 항전하던 어느 남송 한족 병사[10]의 손자가 기어이 남송을 집어삼킨 유목민족의 대제국을 거꾸러뜨리고 다시 한족의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사실 한나라도 돌이켜보면 결국 진나라가 철저하게 짓밟아 멸망시킨 초나라의 후손인 유방이 세운 나라다. 초나라 백성들의 진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워낙 컸는지 "천하에 진을 멸망시킬 한 사람이 남으면 그 사람은 초나라 사람"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사기》의 기록을 신뢰하면 전국의 60만 군사를 다 끌고 온 진나라에 맞서 초나라도 수십만에 가까운 초나라 전역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맞섰다고 하니 기록만 전해지지 않을 뿐이지 유방의 가족이나 본인(!)도 주원장의 외할아버지처럼 최후의 전투에 참여했을 수도 있다.[11] 즉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극적이도록 써서 워낙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당대의 왕조를 무너뜨릴 사람은 결국 멸망한 전 왕조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전상삼국지평화》에서도 이런 서사의 극적인 면을 차용해서 영제와 헌제가 그렇게 된 것이 실은 한고제 유방에게 죽임당한 초나라 병사들의 원혼이라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나중에 《삼국지연의》 모종강본에서 "천하는 합하면 나누어지고 나누어지면 합해진다"라고 다듬어져서 그 유명한 《삼국지》 첫 구가 된다.

다만 진나라와 원나라는 그 존속기간이 워낙에 짧았던 탓에 이런 류의 이야기가 가능하지만 한, 당, 송, 명의 경우엔 어림도 없는 이야기. 한나라의 중간에 존속한 신나라나 송을 북송과 남송으로 나누어도 그런데 아무리 나눠도 둘 다 존속기간이 각각 150년은 되기 때문이다. 진나라와 원나라는 통일 중화제국으로서의 존속기간이 각각 15, 97년밖에 안 되기에[12] 이런 스토리가 가능한 것이다. 참고로 태평천국의 난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비슷한 역사가 반복되었다. 많은 태평천국의 패잔병들이 다시 민중들 속에 숨어들어가서 석달개 같은 태평천국의 영웅들의 무용담을 중국 민초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퍼뜨렸는데, 그 아이들 일부는 쑨원, 마오쩌둥, 주더 등으로 자라나서 신해혁명대장정을 주도하며 태평천국이 실패한 청왕조의 붕괴를 결국 이루어냈다.

장세걸은 태풍을 만나자 "하늘이 대송을 멸하려 한다면 지금 모두 물에 빠져 죽게 해달라"고 절규했었다. 결국 시세는 장세걸의 절규처럼 되었으나 하늘은 그 와중에도 기어이 한 사람을 살려, 그 사람의 후손으로 하여금 대송(大宋)을 멸망시킨 대원(大元)을 멸하게 하였다. 이것을 과연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정말로 하늘에게 뜻이 따로 있어 천명이 있다는 것인지 후세 사람으로선 알 수 없게 만든다. 출처는 《명사》(明史) 권 300 <외척전>.

물론 새 왕조가 개창될 때 정당성과 명분, 극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을 위조하거나 아예 대놓고 만들어 넣는 경우도 있으므로 어느 정도 가려들을 필요는 있지만, 홍무제의 외조부가 애산 전투 생존자라는 얘기 자체는 신빙성이 매우 높다.

우선 애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패잔병의 규모가 크게는 10만 명 가까이로 추정되는데, 13세기 후반이면 중국 인구가 1억이 채 안 되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다.[13] 이 중 10만 명이라 해도 결코 적은 수가 아닌데 그나마도 이 8,000만 명이라는 추정치는 화남, 화북을 다 합친 추정치다. 당시 남송의 강역이 화남 지방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데다가 역사적으로 화북 지방의 인구가 화남 지방의 인구보다 더 많았다는[14] 점을 감안하면, 당시 중국 화남 지방의 인구 약 3,200만 명 중 애산 전투의 패잔병들이 많게는 10만 명, 적어도 수만 명은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이 3,200만 명이라는 추산치는 '전체 인구', 즉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여성이나 노인, 어린아이들을 모두 포함한 수치니까 병사 혹은 군관으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인 청장년 남성 인구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따져본다면 당연히 1,600만 명 미만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 정도면 당시 화남 지방에 거주했던 장정들에게서 애산 전투에 참전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와도 전혀 특이할 것이 없는 비율이다.

또한 전통적으로 부계사회였던 당시의 중국에서 기왕 명분 세우기 목적으로 조작을 할 거면, 어중간하게 외조부 진씨 노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대놓고 조부 주초일이라고 날조하는 쪽이 더 나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약 주씨네 가문이 명문가라서 이런저런 기록이 많은 집안이었다면 상대적으로 조작하기 쉬운 외조부 쪽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없진 않겠으나, 주씨네 가문은 주원장 이전까진 족보 조작은커녕 가족이 죽어도 장사조차 못 지낼 정도로 한미한 농사꾼 집안이었기 때문에 기록같은 게 남아있을 리도 없었다. 당연히 외조부 대신 친조부라고 주작을 해도 누가 태클을 걸 리가 없다.

결정적으로, 《명사》는 이 아니라 이 편찬한 사서이다. 후대의 국가가 기존의 국가의 역사를 편찬하는 경우가 적지도 않으니[15]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고, 중요한 것은 청의 아이신기오로씨가 굳이 거짓부렁까지 섞어가면서 홍무제 《용비어천가》를 써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설령 '청나라가 《명사》를 쓸 무렵에는 명나라 대에서 친 뻥이 마치 정사처럼 알려져 있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기에도, 역사서를 어디서 주워들은 풍문으로 쓰는 것이 아닌 만큼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서들은 '진위여부가 의심되지만 확인할 수는 없는 기록들'에 대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이러이러해서 주작일 것으로 의심된다'는 식으로 따로 주석을 달아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명사》에선 그러한 언급은 없다. 게다가 《명사》는 실질적으로 편찬하기 시작한 시점인 삼번의 난이 진압된 이후부터 계산해도 56년, 명사관이 처음 설치된 시점부터 계산하면 110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강희제가 직접 초고를 열람하고 내용의 정확성을 강조할 정도로 정밀한 검정을 거쳐서 편찬된 사서다. 고작 확인되지 않은 저잣거리 소문 따위를 비중있게 적었을 리 없다. 또한 《명사》를 본격적으로 편찬하기 시작한 시점인 삼번의 난명나라 부흥을 명분으로 반란이 시작되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청나라 황제는 몽골의 대칸을 겸직하고 몽골 귀족들이 상당수 지배층으로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한족 부흥의 이야기를 폄하한다면 모를까 과장하고 띄워줄 이유는 없다.[16][17] 따라서 디테일이야 어찌됐건 홍무제의 외조부가 애산 전투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도 애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진린의 아들인 진구경은 애산 부근에서 청군과 교전하다가 전사했다. 진구경의 아들인 진영소(陳泳素)는 부친의 전사 소식을 접한 뒤 조선으로 망명해서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

741년 후인 2020년, 이 전투가 벌어진 곳인 홍콩 구룡반도 일대에서는 송대의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나오면서, 호만틴역, 송웡토이역 등의 지하철 공사를 제대로 방해하고 있다. 튄마선 1단계 공사 당시 이 일대에서 남송대 유물이 으리으리하게 나오면서 공사가 상당히 지연되었기 때문이었다.

6. 관련 문서


[1] 이 <석각유훈>에서 조광윤이 보살피라고 당부한 후주의 시씨 종손들, 사대부들, 일반 백성들 모두 애산에서 송나라와 조씨 황실을 보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2] 현재 광둥성 장먼 시 신후이 구 야먼 진.[3] 남송 함대를 이끈 장세걸과 친척 지간이다. 장홍범은 장세걸한테 세 번이나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한다.[4] 기록에 따르면 식량과 식수가 결국 고갈되자 마른 음식과 바닷물로 이를 때우려 했지만 당연히 제대로 될리 만무했고 구토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5] 정확히는 '이항 개인으로 인해 전세가 뒤바뀌는 것'이 아니라 안 그래도 이미 전세가 굳어가는 상황에서 공격할 때만 고민하던 중 이항이 부원수로 부임하게 되자 장홍범이 이참에 끝을 보기로 결단한 것이다. 부원수가 처음부터 따라온 것도 아니고 이 시점에서야 갑작스레 등장한 것은 지원군 겸 보급을 가져왔을 가능성도 높지만 그만큼 '이렇게까지 밀어줬으니 슬슬 끝을 봐라'라는 원나라 중앙 정부의 압박이라 볼 여지도 있다.[6] 화포를 사용하다가 남송 부흥군 측 선박 간의 연결이 풀려버리면 오히려 추격하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었다. 괜히 편하게 끝내려다 여지를 남겨줄 바에야 피해를 좀 보더라도 확실하게 끝내고자 한 것이다.[7] 애산은 홍콩 근처이기는 하지만 홍콩은 아니며, 어린 황제의 시체가 발견된 곳도 홍콩이 아니라 지금의 심천 지역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마카오 서쪽이다. 사실 말이 홍콩 근처지 110km나 떨어져 있으며 서울에서 조치원 거리이다.[8] 지금의 안후이성 추저우에 있는 펑양(凤阳)이다.[9] 朱五四, 혹은 주세진이라고 하기도 한다[10] 주원장의 외조부 진씨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때문에 《명사》에서도 '진공'(陳公)이라고만 기록하고 이름은 실전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명 건국 후인 1369년에 홍무제에 의해 양왕(揚王)으로 추봉되었다.[11] 유방은 이 전투 시점에 이미 성년이었다. 당시 진나라 왕이던 진시황제와 나이 차이도 몇 살 밖에 안 난다.[12] 전체 존속기간은 진나라는 700년, 원나라는 180년 정도.[13] 통계상으로는 5,000~6,000만 명 정도지만 추산치는 보통 약 8,000만 명 정도다. 사실 그 이전에 추산상으로는 1억 명을 넘었던 적도 있었지만, 흑사병의 창궐과 몽골의 침략 등으로 급감했다.[14] 화북이 6, 화남이 4 정도 비율이다.[15] 물론 당대의 국가가 자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경우는 수두룩하다. 당장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이 예시. 하지만 후대의 국가가 이전 국가의 역사를 다루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당《청사》 또한 청이 아니라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이 편찬했다. 한국도 다르지 않아서 삼국시대는 고려에서 다뤘고(《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는 조선에서 편찬했으며, 조선사를 편찬하는 주체는 대한민국일 것이다.[16] 애초에 황제가 직접 나서서 "정확성"을 강조했으니 편찬 과정에서 폄하든 과장이든 기록을 조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17] 사실 몽골족이 청나라 치하에서 만주족 다음으로 우대를 받은 것과 별개로, 청나라 황실은 완안진화상곽하마 등 몽골 제국의 금나라 침공에 맞서 싸운 금나라의 충신들을 높이 평가했다. 애초에 청나라가 전신으로 삼은 금나라부터가 남송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몽골 제국의 침공에 저항하다가 멸망했으므로,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은 표면상 몽골족을 우대하는 것과 별개로 옛 몽골 제국이 조상인 금나라의 여진족에게 저지른 만행을 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