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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峨嵋洞文化村[1] / Amidong Culture Village아미동 비석마을 홈페이지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2가에 있는 마을.
2. 상세
산복도로변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이다. 부산의 역사를 좀 더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네다. 지금도 일본인 공동묘지의 비석 등이 계단, 담장의 부재로 사용된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각진 모양의 상석이나 비석들은 가파른 계단의 디딤돌로 쓰이거나 옹벽 또는 집의 주춧돌 등으로 활용된 모습이 보인다. 쇼와(昭和) 같은 한자를 읽을 수 있다면 비석 주인이 몇년 며칠에 세상을 떠났는지도 그대로 알 수 있게 많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당연히 마을 이름에서 '비석'이 바로 묘비를 뜻한다. 이것 때문에 도시전설 등을 모아놓는 사이트에 관련 괴담이 자주 보인다. 묘비였던 돌을 주워와 다듬이질할 때 썼더니 "이타이, 이타이(아야, 아야)!" 하는 소리가 돌에서 들렸다는 얘기, 유골함이었던 단지를 항아리로 쓰려고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아츠이, 아츠이(뜨거워, 뜨거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거나 안에서 손이 나왔다거나. 세탁소 지하에서 밤중에 자는데 게다 소리가 들리더라, 기모노를 입은 귀신을 봤다 등등.지금은 한국에서도 화장을 많이 하지만, 과거에는 한국인은 매장, 일본인은 화장으로 뚜렷하게 나뉘었다. 따라서 조선 땅에는 화장장이 원래 없었으니 부산에 사는 일본인 주민들의 장례를 위해 아미동 지금의 천주교아파트 위치에 화장장을 만들었고, 자연히 부산의 일본인 망자는 아미동의 공동묘지에 모여들었다.
일본인들이 8.15 광복으로 갑작스럽게 조선에서 급히 나가는 바람에 무덤을 이장할 겨를이 없이 공동묘지를 남겨두고 떠난 후 5년간 비어 있다가 6.25 전쟁으로 인해 전국에서 온 피난민들로 부산의 인구가 단 1년만에 50만에서 100만으로 2배 가량 폭증하여 부산 중심부에 더 이상 집 지을 자리가 부족하였고, 결국 피난민들이 영 꺼림칙해도 궁여지책으로 비어 있는 묘지가 들어선 땅에 집을 짓고 마을을 꾸렸다. 당연히 많은 인구를 수용하려고 만든 동네가 아니다보니 인프라도 많이 열악했다고 한다. 다만 딱 하나 좋은 건 외곽동네치곤 도로가 잘 깔려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장례를 치르려면 부산 다른 데서 여기로 와야 했기 때문에 일제가 도로는 괜찮게 깔아놨다고. 그래서 가난한 피난민들은 여기서 살면서 아래쪽 원도심 중심가에서 일하는 식으로 살았다.
피란 오면서 여기에 터전을 잡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당장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처음 이곳에 올 때도, 그리고 지금도 무덤이든 비석이든 귀신이든 무서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배고픔과 추위라서 누울 자리를 가릴 처지도 아니었고 귀신 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도 익숙해지니까 역시나 무서울 건 없었다. 오히려 죽은 사람 위에 산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거처를 내어준 데 미안함과 고마움이 들어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비석 앞에 수시로 물 한 그릇, 밥 한 그릇 놓고 영혼을 위로해 주며 명절에도 제사(차례)를 같이 지내준다고 한다.
음력 7월 15일(백중)에는 인근 절에서 단체로 일본인 위령제를 지낸다. 아무리 적국 사람이었다고 해도 살아있는 일본인은 8.15 광복과 함께 모두 도망쳐서 여기 묻힌 사람들은 모두 제사도 끊겨 버린[2]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지배층도 아니고 대부분 서민으로 힘들게 살다가[3] 죽었기 때문에 동병상련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살았던 재한 일본인 중에 부라쿠민 등 하층민이 생활고를 피해 이주한 경우나 다우치 치즈코처럼 한국인 빈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위해 왔거나 가네코 후미코 및 소다 가이치 등처럼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이주한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지주나 경찰, 헌병 등의 지배층으로 온 이들을 제외하면 당대 한국인들이 하층민 출신의 일본인 이주민들을 무작정 적대하지도 않았으니 비석마을 주민들의 시각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귀국하지도 못하고 떠도는 망자들의 기구한 사연을 알고 있는 부산 향토사학자, 종교계 등 민간 차원에서 망자의 후손을 찾는 사업을 진행하다가 2019년부터는 부산 서구청에서도 직접 비석 전수조사를 시작하였다. #
2022년 12월 15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된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에 포함되었다.
2022년 1월 부산시 첫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아미동 비석마을 피란민 주거지, 부산시 첫 등록문화재로 등록
3. 관광 명소
토성역을 나오면 탐방로 안내판이 보이고 고갯마루에 마을지도가 있다. 골목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비석을 사용한 건축물 앞에는 안내판도 있다.
아미동 비석마을의 진수를 맛보려면 숨은 그림을 찾듯 비석의 자취를 찾아내는 게 흥미롭다.
감천문화마을처럼 개방성을 지닌 마을이 아니다. 삶의 골목을 거니는 게 부담스럽다면 주민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인 아미문화학습관이나 기찻집 예술체험장 등을 방문하길 권한다.
아미문화학습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3층이 입구다. 야외 데크를 지나 카페로 이어지는데 자연스레 전망대 역할을 한다. 토성동과 보수동 등 부산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진작가 최민식의 갤러리 등이 자리하고 감천문화마을도 지척이라 함께 즐길 만하다.
피란수도 부산야행 행사 시즌에는 무료 셔틀버스가 임시수도기념관에서부터 비석문화마을까지 왕복 운행하며 서구청 소속 전문해설사가 가이드로 직접 해설을 해 주며 투어 체험해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야행 행사인 만큼 낮이 아닌 밤에 비석문화마을을 체험해 볼 수 있는[4] 색다른 경험과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대에 올라가서 야경을 바라보면 부민동과 아미동 일대랑 저 멀리 자갈치시장, 남포동, 영도 일대가 다 보인다. 하지만 서구청에서 아미동 비석마을에 모노레일을 위한 주차장을 조성하기 위해 철거할 계획이라서 지금까지도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과 이주 문제로 갈등이 있다.
4. 교통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을 나오면 감천문화마을까지 이동해도 좋다.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도 되지만 버스를 타는 게 편하다.토성역 6번 출구 부산대학교병원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감천문화마을 방면 사하1-1, 서구2, 서구2-2 마을버스를 탑승해 아미골공영주차장에서 하차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