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의 주요 수훈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0년 | |
이름 | 최민식 | |
분야 | 사진 | |
옥관문화훈장(4등급) |
<colbgcolor=#353535><colcolor=#fff> 최민식 崔敏植 │ Choi Min-shik | |
출생 | 1928년 3월 6일 |
황해도 연백군[1] | |
사망 | 2013년 2월 12일 (향년 85세) |
묘소 | 국립영천호국원 충령당(2관)-615-102 |
직업 | 사진가 |
병역 | 대한민국 육군 중사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빈첸시오) |
[clearfix]
1. 개요
카메라계의 렘브란트
- 1967년도 영국 사진연감 中
- 1967년도 영국 사진연감 中
내 사진의 절대적인 주제는 인간이다.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을 것 같은 인간의 모습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낸다.
- 최민식, 저서 사진이란 무엇인가 中
- 최민식, 저서 사진이란 무엇인가 中
대한민국의 사진가.
2. 생애
2.1. 사진가가 되기 까지
사진집 인간가족 中[작품명] |
최민식 작가가 15살이 되던 1943년, 작가의 아버지는 작가에게 손재주가 좋으니 도회지로 나가서 돈을 벌어보라고 권유했고 최민식 작가는 평안남도 진남포[4]에 있는 미츠비시 기능자 양성소에서 2년 동안 기술을 배운 후 비행기 날개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노동자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염소가스[5]를 들이마시며 일을 해야 했다. 그 때 공장의 염소가스가 어찌나 독했던지 면 작업복이 하루만에 삭아서 닳아버릴 정도였다고 한다.[6] 만약 오랫동안 일했더라면 목숨이 위험했을 지도 모르지만 하늘이 도와서인지 2년만에 해방이 찾아와 최민식 작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그림 공부를 위해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7] 집안은 가난했지만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작가는 값비싼 학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낮에는 식당에서부터 인쇄소, 제과공장 등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밤에는 미술학원 야간반을 다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3년간 병참부대의 철도대대에서 부사관으로 군복무를 하게 된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군복무를 마친 작가는 결혼을 하고 나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처남과 함께 모직공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미술에 대한 열망을 잠재울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아내와 처남에게 일본 유학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하게 된다. 다행히 아내와 처남은 작가의 일본 유학을 지지해주었고 특히 처남은 그가 일본으로 떠날 수 있도록 작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그는 1955년 일본으로의 밀항길에 오르게 된다. 어두운 새벽 영도에서 16명의 사람과 함께 작은 어선으로 일본 규슈에 도착한 작가는 규슈에서 도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최민식 작가의 일본어는 유창한 편이었지만 일본인과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기에 검문에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기차 안에서 어느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8]
도쿄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학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았고, 도쿄의 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그 식당 주인의 딸이 도쿄중앙미술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던 미술학도였고 식당 주인딸의 도움을 얻어 도쿄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입학하게 된다. 아무래도 식당에서 버는 돈만으로는 미술학원 학비를 대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는 학원 동기들과 손수레로 폐품을 모아 팔면서 돈을 버는 등의 일을 병행하면서 학비를 마련했다.
낮에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자금에 여유가 생겼던 작가는 돈이 생길 때마다 헌책방에 들러 책을 사기 시작했다. 바로 그곳에서 작가는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작가 曰 반세기 동안 사진에 미쳐 카메라를 둘러메게 만든) 작품인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사진집 <인간가족>을 만나게 된다.
2.2. 사진작가로써 민주화 이전의 삶
1957년 부산, 최민식 | 1965년 경남 언양장터, 최민식 |
인간가족을 보고 사진에 푹 빠지게 된 그는 헌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다가, 1957년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후 미국인 신부가 운영하는 고아원 '소년의 집'에서 전속 사진사로 고용되면서 본격적인 사진가로써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사진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인생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내며 부산 서민의 모습, 특히 자갈치 시장의 서민들의 모습을 사진 속에 많이 담아냈는데, 이 때문에 자갈치시장 사람들이 그에게 자갈치 아저씨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사진작가로써의 평가가 어땠는 지는 몰라도, 그는 사진작가로 살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만 했다. 팔리지 않는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었다.[9] 당장 필름과 인화지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지금에서야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지만 그 당시엔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필름은 주한미군부대의 지인을 통해서 구해야만 했고 인화지는 일본에서 밀수한 것을 사서 써야만 했다. 또 사진 실력을 키우려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며 사진기법을 공부해야만 하는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해외 사진집을 구하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국 작가들의 사진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는 제지공장 사장에게 부탁해 미국에서 수입해온 폐지를 뒤져야만 했다. 폐지를 뒤지면 제일 많이 나오는 잡지가 라이프였다고.
하지만 한 주제만을 고집해온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어서 1962년 대만 국제사진전을 시작으로 수많은 국제 사진전에서 그의 작품이 입상하게 된다. 특히 1967년 영국 사진연감에서 그에게 카메라계의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으로 시작해서 빛의 사진작가, 가장 한국적인 사진작가 등의 호평이 쏟아지게 된다.
국내에서도 1963년 제1회 동아 사진콘테스트 입상을 시작으로 다음 해 한국 국전에 입상하게 되고, 1969년 국내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968년 동아일보를 통해 그의 첫 사진집 인간' 1집이 나오게 된다.
2.2.1. 핍박과 고난
1985년 부산, 최민식 | 1985년 부산, 최민식 | 1965년 부산, 최민식 |
그의 사진은 팔리지 않는 사진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높으신 분들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 작품이었다. 한강의 기적 뒤에 숨겨진 대한민국의 어둡고 가난한 모습을 왜 자꾸 들춰내서 국제적으로 망신을 시키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최민식 작가는 작품활동을 그만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최민식 작가는 독재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시대가 오기까지 독재정권 하에서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아야만 했다.
정부는 전방위로 그를 압박해왔다. 작가가 생계유지를 위해 운영한 사진관에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손님이 뚝 끊기고 말았다.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작가였기에 중앙정보부에 셀 수도 없이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는 유럽의 7개국에서 총 20여회의 사진전을 개최하는 영광을 받았지만 정작 정부에서 여권을 주지 않아서 자신의 사진전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한밤중에 집에 쳐들어와 구둣발에 온 집안을 헤집어놓는 것은 예사였다. 때론 해외여행을 보내주겠다거나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등 정부에서는 온갖 회유책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가 평생을 지켜온 인간이라는 주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의 임인덕[10] 신부였다. 베네딕토회 소속 분도출판사의 사장이었던 그는 정부의 압력으로 출판이 어려워진 최민식 작가의 사진집 인간을 출판해주기로 하고 가난한 그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만약 베네딕토회에서 최민식 작가를 지원해준다는 것이 들키면 임인덕 신부도 위험할 수 있었기에 모든 지원은 극비로 이루어졌다.
중정에서는 그의 창작욕을 꺾기 위해 극단의 처방을 쓰기도 했다. 프랑스 문화원에서 최민식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고 최민식 작가에게 연락을 하자 작가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고른 500통의 필름을 비행기편으로 프랑스 문화원에 보내게 되는데, 돌연 수송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며 프랑스 측에서 필름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최민식 작가는 자식처럼 아꼈던 필름들을 모조리 분실하게 되는데, 훗날 밝혀진 바로는 프랑스 문화원과 중정이 결탁해서 꾸민 일이었고 그 필름들은 모조리 중앙정보부가 회수하여 폐기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행색이 꾀죄죄한데 좋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그가 간첩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그를 동네 경찰서에 신고하기도 하였다(...) [11] 추운 겨울날 한창 사진을 찍고 나서 몸을 녹이고자 들어간 다방에서 갑자기 동네 순경이 들이닥쳐 그를 끌고 가는 일은 예사였고 심지어는 그가 반평생을 살아온 부산의 자갈치시장에서조차 간첩 신고를 당해 동네 경찰서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심지어는 1967년 울릉도에서 북한 간첩이 체포되었을 때 간첩의 소지품에서 하필이면 그의 사진집이 나와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적도 있었다. 만약 사진집에 싸인이라도 있었으면 아마 큰 고초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작가도 소식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그렇게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던 그에게도 봄날이 찾아왔다. 제6공화국이 시작된 것이었다.
2.3. 민주화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1987년 부산, 최민식 | 2003년 부산, 최민식 |
민주화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한 그는 1986년부터 인도나 네팔, 유럽 등 다양한 나라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에 도전한 한편, 대한민국 사진계의 1세대이자 거장으로써 지역사회에서 정기적으로 사진 특강을 개최하거나 여러 대학에 출강을 나가는 등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기려 2000년 옥관문화훈장을 수여하였고 이어 국내 사진전에서 봉생문화상, 대한사진문화상, 백조사진문화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작품이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 민간인으로써는 최초로 2008년 국가기록원에 그의 작품 15만점을 보관하기로 결정하였고 현재는 필름에 담긴 15만점의 작품 전부를 디지털화하여 보관 중이다.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해온 결과 2010년 인간 14집을 출간하였고 모 인터뷰에서는 15, 16집에 대한 계획도 다 세워놓았다며 죽기 전에 아프리카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고 밝히는 등 사진에 대한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12]
그는 2007년에는 평생을 고집해온 필름 카메라에서 니콘 D300 DSLR로 기종을 변경하기도 하였는데, 그 동안 비싼 유지비용을 들여가며 필름 사진을 찍었던 것은 필름 사진의 품질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지만, 21세기에 와서는 디지털 카메라의 성능이 좋아졌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기 때문에 기종을 변경하게 되었다고 밝혔다.[13]
2013년 2월 12일 부산의 대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85세. 장지는 국립영천호국원이다.
최민식 작가를 기리고자,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를 대상으로 협성문화재단과 국제신문이 공동제정한 최민식 사진상을 수여한다.
3. 여담
1972년 있었던 최민식 작가의 도쿄 펜탁스 갤러리에서 조총련 사람들이 와서 작품을 꼼꼼히 보고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 가더니 사진전 방명록에 "인민 공화국 만세", "최 작가님 건투 바람", "평양에서 초청전을 하라" 등등의 글이 적혀 있어서 아니나다를까 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부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사진전에 참석을 못했기 때문에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최민식 작가는 운전면허도 따지 않았고 운전 할 줄도 모른다고 한다. 자가용이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사진활동을 위해서는 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대중교통을 타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날 자갈치시장을 돌아다니던 작가는 모델이 될 만한 귀여운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아이를 700미터쯤 떨어진 해변가로 데려 가서 여러 포즈를 시키면서 30분 동안 사진을 찍은 후에 아이를 데리고 자갈치 시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물론 소녀의 가족들은 아이가 납치라도 된 줄 알고 30분 동안 자갈치 시장을 온통 헤집고 다녔고 가족들은 당연히 최작가를 보자마자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대며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작가는 냅다 도망쳐버렸고 그 이후로는 그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청난 책벌레라고 한다. 작품은 경험과 지식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르를 불문하고 자택에 수천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실제로 생전 자택의 작업실은 책장으로 빼곡했고, 책만 보관하는 지하실이 따로 있었다.
노년에는 만나고자 하는 젊은 학생들을 굉장히 반기는 모습이었는데, 되려 지역의 사진가들은 뒤쳐진 작법을 고수하는 구시대의 인물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2012년 노환으로 인해 부산대학교 강의에서 중도 하차한 후 대체로 들어온 모 작가는 '낡은 분'이라며 디스를 시전했다. 해당 학과생들의 의견은 모르겠으나, 부전공 등으로 수강하러 간 학생들은 '휴머니즘을 찍는 방법을 배우러 갔더니 왠 전위예술가가 들어왔다'며 툴툴댔다고.
신앙심이 굉장히 싶은 가톨릭 교인이었다. 과거 독재시절 성당에서 고인의 작품이 해외에 알려질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했으며, 억압받던 시대에 도움의 손길을 많이 내밀었다고. 실제로 이야기를 해 보면 생가 인근의 대연성당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었다.
2012년 부산대학교에 강의를 나오던 당시 사용하던 사진기는 D3.
4. 관련 항목
[1] 現 황해남도 연안군[작품명] 유진 스미스의 'Walk to Paradise Garden'[3]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 de Paul) 1581년~1660년, '빈첸시오회와 라자로회' 선교회를 설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병원과 고아원을 설립한 프랑스 신부,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4] 지금의 남포시.[5] 염소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염소가스는 몸 안의 물과 결합하여 염산이 되고, 폐를 녹여 끔찍한 고통과 호흡곤란을 유발하는 사람에게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이다.[6] 그렇게 목숨 걸고 일해 받은 봉급이 겨우 쌀 1가마였다고.[7]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이산가족이 되고 만다[8]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본인과 함께 도쿄로 갔던 남자 1명을 제외하고 함께 밀항한 나머지 14명의 사람들은 전부 한국으로 강제송환 당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정말 하늘이 도운 게 아닐까 싶다.[9] 최민식 작가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장성한 그의 아들이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으러 다녔을 때 최민식 작가의 부인이 아들 카메라를 뺏으며 "너도 네 애비처럼 되려고 그러냐!" 라며 아들을 혼냈다고 한다.[10] 독일인 신부이다. 본명은 하인리히 제바스티안 로틀러. 2013년 10월 13일 사망[11] 읽으면서 인심이 각박하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사실 당시 국민들이 교육받았던 간첩 식별요령으로 놓고 봤을 때 사실 최민식 작가는 신고당할 만 했다. 옷차림이 허름하고 유행에 맞지 않는 자, 남 몰래 주요 시설물을 촬영하는 자. 그 당시 간첩 신고를 하면 받는 포상금이 3천만원이었다고 하니 주민들은 일단 신고부터 하고 보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12] 최민식 작가가 사망하였기에 유족들이 그의 미발표작들을 정리해서 인간 15집을 유고집으로 출간한다고 한다.[13] 렌즈는 주로 여행렌즈 하나만 들고 출사를 나갔다고 한다. 고수는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