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관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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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1. 개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삼국은 3국의 국어가 실질적으로 동일 언어(세르보크로아트어)로 분류될 정도로 유사하지만, 종교/종파 간의 차이로 서로 구분되는 민족 정체성을 지녔다.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문서 참조. 삼국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에 전쟁과 학살을 겪은 것은 물론 영토 분쟁으로 인해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2. 역사적 관계
2.1. 전근대
슬라브족의 이동 과정에서 옛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 판노니아 분지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정착한 슬라브인들이 남슬라브인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달마티아 일대에 정착하여 베네치아 공화국 등 가톨릭 세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남슬라브인은 가톨릭을 믿고 로마자를 사용하는 크로아티아인, 산악지대에 고립되어 보스니아 교회라는 소수종파를 믿던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이슬람을 믿고 아랍 문자를 사용하던 보슈냐크인, 그리고 동로마 제국, 불가리아 제1제국과 가까웠고,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서도 정교회를 고수했던 세르비아인, 몬테네그로인으로 분화되었다.[1]2.2.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치닫을 무렵, 크로아티아인은 800여 년 동안 이어온 헝가리 왕국과의 동군연합을 끝내고 분리독립을 결정했으나, 당시 이탈리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 반도를 지키기 위해 세르비아에 합류했고, 세르비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보슈나크인까지 끌어들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웠다.유고슬라비아 왕국 내 지역적 언어 차이는 종교 경계선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보스니아 또는 크로아티아 지역 거주 세르비아인들은 중부 세르비아에 거주하는 여타 정교회 세르비아인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아니라 인근의 크로아티아 가톨릭교도들이나 무슬림 주민들과 같은 방언을 사용했다. 한 편 세르비아인 인구는 유고 왕국의 43% 정도로 우위에 있었으나, 북부의 크로아티아인들과 슬로베니아인들이 평균적으로 세르비아인들에 비해 부유하였다. 왕국의 주도권을 꽉 잡기를 원했던 세르비아인과 동등한 주권을 원했던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갈등이 내내 지속되었고, 대공황 이후 파시즘의 여파가 크로아티아인에게 영향을 주면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의 갈등은 손쓰기 어려운 정도까지 격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점령을 당했고,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계 친나치 조직인 우스타샤와 세르비아계 극우 조직인 체트니크 그리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서로 편을 갈라 나누어 싸웠다. 나치 독일은 여기에 더해 보슈냐크인들을 반강제로 제13무장산악사단으로 동원하였으나, 호응은 시원치 않았다.
사실 우스타샤 신화도 다소 과장된 것이 당시 크로아티아 내에서 파시즘에 호응하고 적극적으로 우스타샤를 창설한 사람들은 이탈리아 일대의 파시즘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2차대전 당시 벌어진 제노사이드는 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처럼 이웃 마을 주민들이 갑자기 살인마로 돌변한 것이 아니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인들이 섞여살던 지역 외부에서 온 군인들이 화풀이로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는 경우가 주가 되었다.[2] 세르비아계 무장조직 체트니크의 경우 세르비아 왕실 복원이 우선이었고, 반면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은 농민의 생계 문제를 우선하고 민족 갈등은 뒤로 제끼면서 유고슬라비아 주민 전반의 호응을 얻었다. 비교하자면 러시아 내전 당시 이런저런 러시아 백군 집단들이 결국 농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서 볼셰비키나 혹은 네스토르 마흐노가 이끄는 무정부주의 집단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그나마 구 러시아 제국 농민들이 좋게 보았던 네스토르 마흐노의 무정부주의 세력 역시 붕괴하면서 결국 차악으로 볼셰비키를 선택한 것과도 유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공산 정권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삼국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었다. 티토 시절에는 티토의 개인적인 리더십으로 분열을 억누를 수 있었지만, 티토 사후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슈냐크인의 민족 갈등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고작 1년 전 1990년 조사에서 유고슬라비아 국민 중 7%만이 유고 연방이 해체될 것이라고 예상했고, 62%는 자국민이 유고 국민이라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직장에서 인종 간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는 64%가 좋거나 아주 만족스럽다고 답했고 12%만이 나쁘다 혹은 아주 나쁘다라고 대답했다. 유고슬라비아인 대다수는 유고 내전의 당사자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들부터 왜 갑자기 자신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폭력적으로 변하게 되었는지 놀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당 통계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었는데, 지역 간 차이를 간과했던 것이다. 해변 관광지가 많았던 크로아티아나 북부의 슬로베니아 일대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지방이었고, 상당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이탈리아 등으로 이주노동자 혹은 관광객으로 오고갔다. 반면 코소보 일대의 알바니아인들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고, 알바니아인들과 세르비아인 민족주의 사이의 충돌 과정에서 과거 튀르키예 식민 지배의 트라우마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알바니아인들에게 향했던 세르비아인들과 몬테네그로인들의 증오는 서서히 보슈냐크인들로도 향하게 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일어나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가 충돌하는 장소가 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을 우스타샤의 만행과 관련한 트라우마와 결부지어 잔혹하게 진압하려 하였다. 이후 갈등이 보슈냐크인과 세르비아인 사이로도 다시 번지면서 보스니아 전쟁이라는 최악의 비극을 낳았다. 유고슬라비아가 완전히 해체된 지금도 삼국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갈등이 존재한다.#
3. 문화 교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남슬라브족이 세운 국가였고 세르보크로아트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만큼 대중음악계에서는 교류가 잦은 편이다. 현재까지도 활동중인 음악가나 그룹 중에서도 유고슬라비아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한 경우가 상당히 많으며 이들의 음악은 구 유고 연방 국가들 사이에서 나쁜 감정 없이 잘 받아들여지는 편이다.4. 관련 문서
- 세르비아/외교
- 크로아티아/외교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외교
- 유고슬라비아
- 세르비아/경제
- 크로아티아/경제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경제
- 세르비아인 / 크로아티아인 / 보슈냐크인
- 세르보크로아트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5. 외부 링크
[1] 하지만 이런 민족 분류는 칼같이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근대 발칸반도에서 자급자족하던 농민들은 외부와의 교류가 무척 제한되어 있었고, 대부분 문맹이다보니 이슬람 교리와 기독교 교리를 구분하지 못해서 두 가지 이상의 종교 교리를 동시에 믿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크로아티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단위체를 유지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역시 스렘 지역에 세르비아인이 섞여 살아 구분이 불가능했다.[2] 유사 사례로 나치 독일로부터 홀로코스트 동참을 요구받은 여러 남유럽, 중유럽 국가들도 자국 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나 강제이주는 주저하였지만, 대신 자신들이 새로 소련 등으로부터 점령한 영토 내 유대인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고 해서 무자비하게 학살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