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42:39

성경/논란/역사 기록과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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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사 시대와의 관계3. 초고대 문명설?4. 실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비 에스테르5. 페르시아 역사 기록과의 모순6. 바빌론에 있던 기간7. 메사 석비8. 다윗의 궁궐9. 예수의 출생10. 지형의 오류11. 로마 제국에는 유월절마다 유대인 죄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12. 바리새인이 악의 축?13. 평화로운 유대?

1. 개요

역사기록과 상충되는 성경 구절들의 예시이다.

2. 선사 시대와의 관계

창세기 시대는 최소 청동기~철기 시대를 다루고 있는 것 같다. 마치 구석기~신석기를 거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천지 창조에 소요된 6일을 실제 6일 단위로 보지 않는 여러 관점도 존재한다. 문자적으로는 오류라고 할 수 있으나 신화적, 비유적으로 볼 땐 어찌저찌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 실제 6일이 아니라 예를 들어 6억년이라고 해도 말이 안된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셋째 날에 식물을 창조했고 넷째 날에 태양을 창조했다는데 수 억년 동안 태양 없이 식물들이 살았다는게 된다. 다만 식물 이전에 빛은 있긴 했다.

3. 초고대 문명설?

아직도 성경 속의 내용들이 모두 실제로 있었다고 믿는 극단적인 문자주의자들[1] 가운데 일부는 성경이 아득히 먼 옛날의 초고대문명에 대한 흔적을 언급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그 근거가 매우 빈약한데, 기껏해야 욥기의 레비아탄이나 베헤모스가 선사 시대에 살던 공룡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억지를 쓰는 정도에서 그친다.[2]

오히려 구약성경에는 사르곤, 함무라비 같이 유대와 가까운데다 역사적으로 그 존재가 확인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위대한 군주들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다.

또한 괴베클리 테페아틀란티스 같이 그 존재가 확인되거나 아니면 다른 지역의 문헌에 언급된 진짜 초고대문명설에 관한 내용 역시 성경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덧붙여 구약성경 저자들의 천문학에 관련된 지식 수준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보다 훨씬 빈약한데, 이미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알고 있었던 '지구가 둥글다'라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구약성경에서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묘사하는 '땅끝', '땅의 네 귀퉁이' 같은 구절들이 수두룩하게 언급되기 때문이다.

4. 실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비 에스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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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페르시아 역사 기록과의 모순

역대기하의 저자는 페르시아의 제3대 왕 다리우스 1세 때의 사건을 제1대 키루스 2세(고레스)왕 때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 제1년이었다. 야훼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리고 그것을 적은 칙서를 전국에 돌렸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나는 그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 계시기를 비는 바이다. 그 하느님은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계시는 분이시니, 유다인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성전을 짓도록 하여주어라. 원주민들은, 여기저기 몸 붙여 살다가 아직 살아남은 유다인이 있거든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에 가져다 바치도록 자원 예물도 들려 보내고 과 세간과 가축도 주어서 보내어라."
에즈라 1장 1~4절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 제1년이었다. 야훼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아래와 같은 칙령을 내리고 그것을 적은 칙서를 전국에 돌렸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그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하시기를 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돌아가라."
역대기하 36장 22~23절

기원전 586년,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수많은 히브리인을 잡아간다. 이 사건을 바빌론 유수라 한다. 이후 중앙 아시아와 중동 지방은 페르시아 제국으로 통일된다. 자연히, 히브리 포로들도 페르시아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은 키루스 2세(기원전 558~529년)가 세우고, 그 아들 캄비세스왕(기원전 529~521년) 때에 크게 발전하고, 캄비세스가 암살된 후 왕위를 차지한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1~486년) 때 전성기를 이룬다. 전성기를 이룬 다리우스 1세는 국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장려하면서도, 피정복 민족의 풍습과 종교를 인정하고, 바빌론으로 잡혀온 히브리인들을 돌려보내는 너그러움을 보였으며 전 국토를 민족에 따라 20개의 주(州)로 나누어 총독을 두고, 다시 '왕의 눈', '왕의 귀'라는 감찰사를 배치하여 총독을 감독케 하는 '중앙 집권 정치'를 폈던 강력한 군주였다.

헌데 위의 역대하의 기술을 보면 알겠지만, 성경페르시아의 제3대 왕 다리우스 1세 때의 사건을 제1대 키루스 2세(고레스)왕 때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건 마치, 조선의 국왕 이성계한글을 반포했다라고 기술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키루스 2세도 정복한 이민족들에게 매우 관대한 정책을 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있어, 히브리인들의 귀국을 허용한 것이 키루스 2세 시대가 맞다는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당대의 기록이 더 많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확정할 수 없는 문제다.

역으로 다니엘의 저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을 키루스 2세가 아니라 메대 사람 다리우스라고 하여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메대 사람 다리우스라는 인물은 다니엘서 이외에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 그 정체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다리우스 1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바빌론 왕 벨사살[3]은 그날 밤으로 살해되었고, 나라는 메대 왕 다리우스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다리우스는 육십이 세였다.
다니엘 5장 30절~6장 1절

6. 바빌론에 있던 기간

70년을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50년 만에 바빌론이 망한다.

7. 메사 석비

열왕기하에 나오는 이스라엘 연합군vs모압 전쟁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나 이스라엘과 모압 중 어느 쪽이 이기는지가 다르게 나오고 그 외 세부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모압이 독립에 성공했다는 결론은 같다.

8. 다윗의 궁궐

열왕기상 10장에 의하면 다윗의 도읍에는 "은이 돌과 같이 많았다"고 하며, 다윗의 궁궐의 찬란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서 발굴이 된, 다윗의 궁으로 추정되는 궁궐은 일명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Large Stone Structure 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구조물을 발굴한 고고학자 Eilat Mazar에 의하면 현재까지 발굴된 이 건물의 벽의 한 변은 약 2.5~3m 두께로 동서로 30m에 이른다. 발굴 팀들은 다윗의 도성을 하나의 마을 규모로 추정한다. 마을은 10헥타르 정도의 4천 명 정도 거주를 하는 지역이였다. 베를린의 이집트 전문학자 Rolf Krauss는 "지방 둥우리"라고 말한다. 이 다윗 궁의 유적의 경우 부족 국가설을 주장하는 사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즉, '추장의 저택' 정도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가능한 규모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결과로는 성서의 사아라임으로 확인이 된 곳이 고고학자 Yosef Garfinkel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는데 발굴이 된 유적과 그 곳에서 발견이 된 유물이 해석되면서 기원전 10세기경 다윗의 유다 왕국이 어느 정도의 중앙 집권화된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작은 소왕국의 군주 수준이지 성서에 나온 것처럼 레반트 전 지역에 세력을 뻗친 맹주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성서에서 악인으로 단죄한 북이스라엘 왕 오므리, 아합 시대에 가서야 이스라엘이 레반트 지역 소왕국들의 맹주 수준으로 올라서고 번영을 누렸고 유다 왕국은 이스라엘의 속국이었다는 것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져 있다. 심지어 최근 연구 결과로는 다윗은 마치 아서 왕처럼 일개 부족장 수준의 인물이었는데 후대에 전설속의 대왕으로 추앙된 것으로 보고 있다.

9. 예수의 출생

예수의 탄생 시기에 대한 묘사와 실제 역사가 일치하지 않는다. 부모인 나자렛의 요셉성모 마리아가 인구 조사를 위해 본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예수가 태어났다고 알려진 시기에는 그 같은 인구조사가 없었고, 인구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향으로 돌아가서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4]

루카 복음서에서는 시리아총독이 된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인구조사를 할 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 어법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을 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호구 조사가 이루어진 때는 서기 6년으로, 마태오 복음서예수헤로데 대왕 치하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4년에 이미 죽어 있었다.

또한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헤롯이 벹 레헴(=베들레헴)의 아기를 학살했고 그것이 예레미야 31장의 예언의 성취라고 나와있는데, 헤롯의 벹 레헴 아기 학살은 당대에 다른 교차검증될 기록도 없고, 헤롯이 그걸 할 권력까지는 없었으며 시간 여유도 없었다. 신약의 구약 해석 몇 개는 신약 신도들 중 일부가 구약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라 생각될 걸 끼워넣은 게 있는데, 적어도 일부는 역사학적으로 근거가 없음이 밝혀지고 있다. 유대교를 믿는 현대 이스라엘인들이 기독교측에 반감을 품는 반유대적 해석이 몇 개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대목이다.[5]

루카 복음서는 '유대 임금 헤로데 때에(1장 5절)'(적어도 기원전 4년 이전) 세례자 요한예수가 6개월 간격으로 기적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했는데, 예수인구조사 때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대략 10년 동안을 임신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조금 더 자세히 보자. 루카에 따르면 예수는 아우구스투스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적에 호적 조사를 실시한 해(서기 6년)에 태어났으며, 마태오에 따르면 헤로데 대왕이 죽고 아들 헤로데(헤로데 안티파스)가 왕위에 오른 해(기원전 4년)에 이집트에서 돌아왔다고 나오는데,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로데 대왕의 말기에서 '헤로데 대왕이 죽을 때 까지의 총독은 바루스'이며 그 전의 총독은 '사투르니누스'였다고 한다. 퀴리니우스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퀴리니우스는 언제적 총독이며, 누가가 말하는 호적 조사는 언제 있었던 일일까? 역사가 요세푸스는 퀴리니우스가 호적 조사를 행하게 된 이유를 자세히 적어놓았고 이를 통해 호적 조사가 일어난 시기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헤로데 아켈라오가 망명 중일 때의 일을 해결하러 온 것인데,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이것은 최소한 서기 6년 이후의 일이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로데 대왕의 말기에서 헤로데 대왕이 죽을 때까지의 총독은 바루스이며 그 전의 총독은 사투르니누스였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퀴리니우스가 기원전 6년 즈음에 연임해서 끼어들었을 여지가 없다.

따라서 루카와 마태오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역사에서는 서기 6년경에 일어난 호구 조사를 예수의 부모는 예수를 낳기 직전 겪고, 예수는 기원전 4년에 이미 죽은 헤로데 대왕 치세에 태어났다는 것이 된다.

물론 이와 별개로 학계에서 예수 자체는 실존 인물로 여겨짐은 사실이다. 예수/역사 참조. 예수 신화설은 그저 유사 역사학에 불과하다.[6] 그러나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의 출생뿐 아니라, 로마에서 유월절에 유대인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에 대한 어떠한 다른 역사 기록도 없음에도 해당 관례가 있었다는 주장, 그리고 복음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지형이 실제 유대 지형과 차이가 있다는 점 등, 복음서와 당대 역사 기록과의 모순이 분명히 존재함을 미루어 볼 때,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모델이 된 인물은 틀림없이 실존했을 것이나 복음서가 그 실존 인물 예수를 왜곡 없이 그대로 담아내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는 있다.

애초에 학계에서는 "복음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모델이 되는 인물이 실존했다고 보는 입장이지, 복음서의 묘사대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기적을 부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신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실존했다고 보는 게 아니다. 게다가 바르 코크바의 예를 보면 알겠지만, 당대 이스라엘에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와 같이 메시아를 자청하는 인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10. 지형의 오류

복음서의 설명과 실제 지형에 차이가 있다.
그 뒤 예수께서는 티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마르코 복음서 7장 31절

그런데 시돈은 데카폴리스와 정반대 방향에 있을 뿐 아니라, 1세기에는 시돈에서 갈릴래아로 가는 길이 없었다. 띠로에서 곧바로 갈릴래아로 가는 길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게라사 지방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셨을 때에,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매어둘 수가 없었다. 쇠사슬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번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두었지만, 그는 번번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밤이나 낮이나 항상 묘지와 산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하였다.

그는 멀찍이서 예수를 보자 곧 달려가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예수께서 악령을 보시기만 하면 "더러운 악령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 하고 명령하시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군대[7]라고 합니다. 수효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마침 그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 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악령들은 예수께 "저희를 저 돼지들에게 보내어 그 속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의 2,000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을 내리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마르코 복음서 5장 1~13절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마귀 들린 사람 둘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갑자기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하고 소리질렀다.

마침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돼지 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들은 예수께 "당신이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들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마귀들은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온통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 떨어져 물속에 빠져 죽었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읍내로 달려가서,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사람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읍내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러 나와서, 예수를 보고는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태오 복음서 8장 28~34절

애꿏은 돼지 떼가 죽어서 생긴 생명 윤리적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게라사(오늘날의 제라시)는 바다에서 동남쪽으로 50km나 떨어져 있다. 게라사에서 예수가 내쫓은 악령들이 들어간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서 몰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가다라로 기록되어 있기에, 마르코 복음서에 나온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가다라 지방을 필사하면서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고대 히브리어에는 호수와 바다를 구분하지 않고 '얌'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성경에서도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성경은 원어와 문화를 동시에 보아야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한글 번역본 한권만으로 단정 할 수 없음을 말씀드린다.

현재는 갈릴리 호수 동쪽의 쿠르시 유적지를 게라사로 보고 있으며, 실제 성지순례객들은 쿠르시를 성경 속 게라사로 알고 찾아간다. 돼지를 기르는 것이 금지된 유대인이 돼지를 길렀기 때문에 돼지 주인에게 벌을 내리는 의미라고 한다.

게다가 마태오 복음서에는 마귀 들린 사람'둘'이라고 되어 있는데 마르코 복음서에는 1명이라 되어 있다.

11. 로마 제국에는 유월절마다 유대인 죄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신약을 보면, 복음서 말미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유대 총독이었다던 본시오 빌라도가 바로 그다. 복음서의 기록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서로 그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긴 해도, 예수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록들이다. 또한 여기에는 다음의 기록들도 덧붙여져 있다. 유월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본시오 빌라도가 죄인 바라빠예수를 놓고 둘 중에 누구를 풀어줄지, 유대인 군중들에게 물었다는 것.

함께 복음서의 기록들을 확인해 보자.
명절이 되면 총독은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빌라도는 모여든 군중에게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바라빠라는 예수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 하고 물었다. 빌라도예수가 군중에게 끌려온 것이 그들의 시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마태오 복음서 27장 15~18절
명절 때마다 총독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때에 반란을 일으키다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갇혀 있던 폭도들 가운데 바라빠라는 사람이 있었다. 군중은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전례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달라고 요구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유다인의 왕을 놓아달라는 것이냐?"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대사제들이 예수를 시기한 나머지 자기에게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15장 6~10절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 생각이다." (17절은 없음. 아마 이 부분에서 본시오 빌라도가 죄수를 놓아주는 유월절의 관례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자 온 무리가 일제히 "그 사람은 죽이고 바라빠를 놓아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바라빠는 그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까지 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다. 빌라도예수를 놓아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그 뜻을 밝혔으나 그들은 굽히지 않고 "십자가형이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빌라도는 3번째로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에 처할 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 생각이다." 하고 말하였으나, 무리들은 더욱 악을 써가며 예수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질렀다. 마침내 그들의 고함 소리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선언한 다음,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바라빠는 그들의 요구대로 놓아주고 예수는 그들 마음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루카 복음서 23장 16~25절
빌라도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 유다인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악을 쓰며 "그자는 안 됩니다. 바라빠를 놓아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바라빠는 강도였다.
요한 복음서 18장 38~40절

그런데 여기엔 매우 중대한 문제가 있다. 해마다 유월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이 독특한 관례의 근거나 선례를 복음서사도행전의 짤막한 구절을 제외한 신약 및 구약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그것이 로마 제국의 관행이었음을 말하는 성경 외의 증거 자료도 전혀 없다. 이런 관행은 요세푸스의 <유대사>에도 1줄도 나오질 않는다. 타키투스, 플리니, 수에토니우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까지, 당시의 저작가와 역사가들의 저술에서도 이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힌트가 있다면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본시오 빌라도의 말일 것이다. 빌라도는 위에서 보다시피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주곤 했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즉, 로마 제국 총독과 피통치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생긴 관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관행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복속된 뒤에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그나마 말은 되는데, 일각에서는 구약 성경에 유대인들이 매년 유월절에 자신들의 죄수를 석방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아니다라곤 하지만, 구약 시기와 신약 시기에는 무려 오백 년 넘는 간극이 있고 당연히 이스라엘 사회는 오백 년 동안 어떤 관행은 없어지고 어떤 관행은 새로 생겼다. 그러니 로마 제국으로 옮겨오면서 새로 생겼을 개연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억지가 된다.

더군다나 복음서에 따르면 바라빠는 민란을 꾸미던 중에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된 자였다. (마르코 복음서 15:6) 당시 로마 제국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과 바르 코크바의 반란의 예를 보면 잘 알겠지만, 특히 반체제와 관련된 소요를 엄중하게 처벌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 제국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마다, 민란을 꾸며서[8] 체포된 바라빠와 같은 유대인 죄수들을 놓아 주었다는 것은 실로 비상식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이단시하고 굉장한 위험 인물 보고 여러 대중들이 그 종교 지도자들의 편에 섰다는 점으로 봤을 땐 또 그럴듯하기도 하다. 실질적인 위협보다도 종교의 중요성을 앞세워 예수를 치명적인 인물로 본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여러 가짜 예수들이 넘쳐났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이라면 말이다.[9]

12. 바리새인이 악의 축?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의 적대 세력으로 바리새인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예수한테 꼬박꼬박 시비를 걸거나 율법에 어긋나느냐 아니냐는 주제를 놓고 트집을 잡다가 예수의 말에 논파당하고 찌그러지는 한심한 악역으로 묘사된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까지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어리석은 위선자' 내지는 '보수적인 꼰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져 있으며 특히 진보파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 기득권층이나 보수파 기독교인을 바리새인에 비유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하지만 예수 생전의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은 결코 부정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의 지배에 협조적인 사두개인, 로마의 지배에 반항적인 바리새인, 로마의 지배에 더욱 적극적으로 항거한 카나이[10], 그리고 사막으로 도피해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은거하던 에세네파 등 크게 4가지의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 유대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집단은 사두개인이었다. 이 사두개인은 유대의 대제사장을 비롯한 상류 계층이었고 로마에 협조적인 대가로 부와 권력을 누렸지만 그만큼 로마의 지배를 증오하던 유대 민중들의 미움을 받았다. 반면 바리새인은 주로 상공업자나 농민 같은 민중들이 지지하던 세력이었고 이들은 로마의 지배에 저항했기 때문에 그만큼 유대 사회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성경은 바리새인을 그 당시 예수에게 적대적이었던 유대 사회의 보편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다. 다시말해, 성경은 그때의 바리새인에 대한 유대 사회의 관점을 서술한 문장이 없으며 오직 기독교적 관점만으로 바리새인을 악역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이 악의 축이라는 해석은 기독교 편향적인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그 기독교가 유대교를 제치고 이후 세계에 훨씬 큰 영향을 끼쳤기에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들에게조차 바리새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졌을 뿐이다.

덧붙여, 앞서 서술한 진보파 기독교인들이 보수파 기독교인을 바리새인에 비유하는 현상 역시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서술했듯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민중의 질타를 받은 사두개인은 고작 2번에 걸쳐 언급될 만큼 존재감이 거의 없다.[11] 반대로 바리새인은 신약성경 곳곳에서 줄줄이 그것도 악역으로 나올 만큼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즉, 오늘날 진보파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주장하는 '예수가 민중의 편에 서서 유대를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다'는 민중 신학이나 해방신학이 맞는다면 로마의 지배에 저항했던 바리새인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사두개인을 부정적으로 그리면서 그들을 맹렬히 질타했어야 옳은데, 정작 신약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부분을 놓고 벌어진 논란 중에서 "신약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사실 당시 유대의 상황에 대해서 잘 몰랐거나, 아니면 바리새인을 혐오했기 때문에 일부러 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란 주장도 있다.

13. 평화로운 유대?

하나의 유일신만 섬기는 유대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는 로마의 지배를 증오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실제로 로마를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로마의 지원을 받아 유대의 왕이었던 헤로데 대왕이 죽자, 유대 곳곳에서 로마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추종자들만 10만 명이 넘는다고 할 만큼 규모도 컸다. 그리고 예수 살아생전에도 열심당(젤롯)이라고 하여 로마인과 로마에 협조하는 유대인들을 단검으로 찔러 죽이고 달아나는 유대인들의 테러가 잇달아 벌어졌고, 로마는 그런 유대인들의 저항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등 유대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 같이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다.[12]

헌데 신약성경에서는 그러한 유대 지역의 살벌한 분위기가 전혀 묘사되지 않았고, 오히려 유대가 마치 유대인과 로마인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역인 것처럼 그려진다. 그래서 이 부분을 두고 일부 성경학자들은 "지금 남아있는 신약성경은 로마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헌이라서 로마인들이 보기에 불편할 내용들은 넣지 않거나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 같은 경우는 로마의 지배를 증오한 이집트인들을 위해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고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로마인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며 달아나는 장면이 삽입되었다.

[1] 한국 개신교 신자들의 약 86%가 성서무오설을 믿는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있을 만큼 한국 기독교가 워낙 원리주의적이라서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꽤나 많다.[2] 사실 레비아탄이나 베히모스는 공룡이 아니라 가나안 신화에 나오는 로탄 같은 환상종들에서 유래되었다. 왜냐하면 욥기에서 레비아탄은 입에서 불을 뿜는다고 하는데 입에서 불을 뿜는 생명체는 이제껏 발견된 바가 없으며 당연히 불 뿜는 공룡도 없다.[3] 벨사자르. 실제로는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왕태자로 페르시아군에 맞서기 위해 출진한 부왕을 대리해 대리청정 중이었다.[4] 고대 국가에서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은, 세금을 거두고, 노동력 동원을 하기 위해서다. 본적지나 고향 따위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고, 필요하면 추가로 기록하면 된다.[5] 이와 같은 사항은 단순히 어느 일각의 주장이 아니라, 다름아닌 개신교계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던이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이라는 저서에서 밝힌 역사적 분석 내용이다.[6] 역사학자인 폴 존슨은 예수의 실존을 부인하는 것은 진지한 학자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바 있다.[7] 원문에는 로마 군단을 일컫는 레기온.[8] 일각에선 바라빠열심당원이라고까지 추측한다.[9] 다만 복음서가 묘사하는대로 적어도 예수는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딱히 반체제 활동을 한 바가 없다. 예수 생전에 예수의 활동으로 인해 가장 큰 경제적 타격과 위신 추락을 경험한 측은 다름아닌 성전을 장악한 짜독파 유대인들이었다.[10] 사도 시몬의 예수에 귀의하기 이전 소속이기도 하다.[11] 물론 이들도 예수의 논파에 바로 퇴장하는 역할로 등장하며 긍정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았다.[12] 실제로 예수가 죽고 나서 벌어진 유대-로마 전쟁으로 무려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로마군에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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