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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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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초대 국왕
신성 로마 제국 카롤루스 왕조 제5대 황제
샤를 2세
Charles II
파일:샤를 2세.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카롤루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KAROLUS IMPERATOR AUGUSTUS)[1]
별칭 대머리왕 샤를 (Charles le Chauve)
출생 823년 6월 13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사망 877년 10월 6일 (향년 54세)
브리데레벵
재위기간 신성 로마 황제, 이탈리아 국왕
875년 ~ 877년 10월 6일
서프랑크인의 왕
843년 8월 ~ 877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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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오를레앙의 에르망트루드
(842년 결혼 / 869년 사망)
프로방스의 리실드
(870년 결혼)
자녀 유디트, 루이 2세, 샤를, 카를로만, 로테르, 로트루드, 에르망트루드, 일드가르드, 로틸드
아버지 루도비쿠스 1세
어머니 바이에른의 유디트
형제 로타리우스 1세, 피핀, 아델라이드, 로트루드, 일드가르드, 루트비히 2세, 지셀라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라틴어: Karolus II (카롤루스 2세)
고대 갈로 로망스어: Karlo (카를로)[2]
프랑스어: Charles II (샤를 2세)
네덜란드어: Karel II (카럴 2세)
독일어: Karl II. (카를 2세)

서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제1대 왕으로 실질적인 프랑스 왕국의 첫 번째 국왕이었으며, 카롤루스 제국의 제5대 황제였다.

흔히 대머리 왕 샤를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현대에 남아있는 그의 상상화 혹은 생전에 묘사된 그림을 보면 대머리인 그림은 없는데, 어쩌다가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는 불명이다. 다만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그가 태어났을 때 물려받을 영지가 없어서, 즉 머리에 관을 쓰지 못해서 무관왕이라는 의미로(머리가 비었다는 의미에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다.[3]

2. 생애

823년 6월 13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프랑크 제국 황제 루도비쿠스 1세와 두 번째 황후인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날 당시 루도비쿠스 1세에게는 전 황후 에르망가르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로타리우스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 루트비히 2세 등 3명의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 그와 이복형들과는 20세에서 30세 가까운 나이차가 났으며, 모후 유디트는 루트비히 2세의 처인 바이에른의 엠므의 언니였다. 따라서 루트비히 2세는 샤를 2세의 이복형이자 이모부였다.

루도비쿠스 1세는 817년 아헨 의회에서 발표한 <제국 상속령>을 통해 장남 로타리우스 1세를 명목상 제국 전체의 지배자로 삼고, 영토의 중앙 지역을 물려주었으며, 차남 피핀에게는 아키텐, 툴루즈, 셉티마니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권한을 주고 왕의 칭호를 하사했다. 3남 루트비히 2세에게는 바이에른, 카린티아, 보헤미아 등지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권한을 주고 역시 왕의 칭호를 하사했다. 하지만 늦둥이로 태어난 샤를 2세를 위해 제국 분배 계획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829년 맏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로타리우스 1세를 이탈리아로 보내고, 일부 봉토를 샤를 2세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이에 로타리우스 1세와 피핀, 루트비히 2세 형제는 강한 불만을 품고 아버지에게 대항하려고 했다.

830년, 루도비쿠스 1세는 제국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로 하고 브르타뉴인을 향한 원정을 벌였다. 그러나 원정 준비가 한창이던 830년 4월 궁정에서 반란이 일어나 루도비쿠스 1세는 감옥에 갇혔고, 유디트 황후는 셉티마니아 공작 베른하르트와 간통한 혐의로 푸아티에 인근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로타리우스 1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제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로타리우스 1세의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이 서로 권력 쟁탈전을 일삼기만 해 민심을 잃었고, 830년 10월 네이메헨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도비쿠스 1세의 복귀가 결의되었다. 이리하여 제위에 복귀한 루도비쿠스 1세는 주모자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추방했고, 황후 유디트를 아헨으로 복귀시켰으며, 로타리우스 1세를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했다. 피핀과 루트비히 2세는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832년 아버지에게 충성을 재차 서약했다.

그러나 세 아들들은 이복동생인 샤를 2세가 아버지 루도비쿠스 1세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자신들의 영지를 갉아먹는 것에 강한 적의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고, 결국 833년 동맹을 맺고 아버지를 상대로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833년 6월 말, 루도비쿠스 1세가 이끄는 진압군과 세 아들의 반란군이 콜마르 인근의 로펠트에서 대면했다. 이때 사전에 회유된 진압군이 반란군에 모조리 투항해버리면서, 루도비쿠스 1세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후 그는 수아송 인근의 생메다르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황제복을 벗은 후 참회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유디트 황후는 이탈리아의 토르토냐로 추방되었고, 푸룸 수도원에 감금되어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834년 초 피핀과 루트비히 2세가 이번에는 로타리우스 1세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프랑크 제국 전체가 혼란에 빠지면서 감시가 소홀해지자, 루도비쿠스 1세는 생 메다르 수도원을 탈출하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생 드니 수도원에서 무기와 왕관을 확보하고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후 유디트 황후를 아헨으로 불러들였고, 838년 아키텐 왕이었던 차남 피핀 1세가 승하하자 샤를 2세에게 프리슬란트와 마스 강과 센 강 사이의 지역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루트비히 2세가 자신의 영역이 침해받았다며 반란을 일으켰고, 루도비쿠스 1세는 이를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노르드계 바이킹이 제국 곳곳을 침략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840년 6월 20일 루도비쿠스 1세가 라인 강 부근의 한 섬에서 붕어한 뒤, 로타리우스 1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제국의 휘장과 깃발을 넘긴 것을 근거삼아 프랑크 제국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는 자신들을 가신으로 부리려는 큰형의 계획에 반발했고, 결국 841년 초 로타리우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로타리우스 1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아키텐의 통치자였던 피핀 2세와 합세한 뒤 841년 6월 25일 오세르 인근의 퐁트누아에서 루트비히 2세-샤를 2세 연합군과 격돌했으나 완패했다. 로타리우스 1세는 아헨으로 퇴각한 뒤 두 형제 중 한 명과 협상하고 다른 형제를 공격해 크고 작은 성과를 거두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에 842년 2월,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상호 방위를 약속하고, 둘 다 로타리우스 1세와는 동맹 협정을 맺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공동으로 아헨을 향해 진격했다.

로타리우스 1세는 코블렌츠에서 병사들이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면서 패배한 뒤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론 강에 이르렀을 때 두 형제의 추격대에게 따라잡혔다. 이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제국을 세 부분으로 나누자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따라 842년 6월 마콩 인근의 사오네 강변에서 휴전이 성립되었고, 각 형제 당 40명씩 협상단을 꾸려서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843년 8월, 1년 2개월간 이어진 협상 끝에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다. 샤를 2세는 대서양에서 뫼즈 강까지 프랑크 제국의 서반부 일대를 통치하기로 하고, 루트비히 2세는 라인 강 동쪽의 제국 동부를 다스릴 권한이 주어졌다. 로타리우스 1세는 뫼즈 강과 라인 강 사이의 지역과 프로방스 및 이탈리아 북부 일대를 맡았다. 또한 양자는 각자의 아들에게 왕국의 상속을 보장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샤를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군주가 된 직후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영주들을 제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844년 툴루즈 백작령을 공격해 툴루즈 시를 포위했고, 셉티마니아의 베르나르도를 체포한 뒤 반역 혐의로 참수했다. 이에 아키텐의 피핀 2세가 위협을 느끼고 브르타뉴인과 동맹을 맺은 후 샤를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샤를 2세는 이들을 무찌르러 진격했지만 844년 6월 14일 아그우트 강변에서 아키텐-브르타뉴 연합군에게 참패했다.

이후 루트비히 2세 및 로타리우스 1세와 회동해 병력과 자금을 지원받고 재차 원정을 단행하려 하자, 피핀 2세는 샤를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스스로 봉신이 되기를 자처하며 아키텐을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푸아투, 앙주, 생옹제(Saintonge) 등지를 제외한 아키텐 일대의 왕으로 피핀 2세를 인정했다. 그러나 브르타뉴인들은 항복을 거부했고, 845년 11월 22일 샤를 2세가 파견한 군대를 발롱 전투에서 섬멸했다. 결국 샤를 2세는 846년 브르타뉴인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가로 평화협약을 맺어야 했다.

845년,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이끄는 바이킹이 120척의 배를 이끌고 센 강을 거슬러 이동하여 파리를 포위했다. 바이킹들은 곧 파리를 공략한 뒤 도시를 반쯤 파괴한 후 생드니로 피신한 샤를 2세에게 파리를 돌려받고 싶으면 7,000파운드의 은화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샤를 2세는 몸값을 지불했고, 바이킹들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847년, 피핀 2세가 샤를 2세를 상대로 다시 반기를 들어 보르도를 공략했다. 그는 이 전투를 자신의 동맹인 바이킹 용병대에 맡겼다. 바이킹들은 보르도를 거점으로 삼아 루아르 강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낭트를 약탈했다. 이에 아키텐 귀족과 주민들이 피핀 2세에 대한 지지를 거뒀고, 848년 아키텐 귀족들은 피핀 2세를 축출한 후 샤를 2세에게 아키텐을 바쳤다.

마인츠의 대주교이자 피핀 2세의 형제였던 샤를은 피핀 2세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아키텐 재정복에 착수했다. 여기에 바이킹 용병대를 고용한 피핀 2세가 합세했다. 이들 형제는 셉티마니아 백작 기욤과 연합하여 샤를 2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849년 기욤 백작이 바르셀로나를 공략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루에르그의 프레델로네가 툴루즈 성문을 개방하여 샤를 2세의 군대가 입성하도록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샤를 2세는 프레델로네를 툴루즈 백작에 선임했다. 한편 기욤은 바르셀로나 장악에 성공했지만 얼마 안가 카탈루냐인들의 습격으로 사로잡힌 후 처형되었다. 851년에서 852년 사이에 피핀 2세 역시 가스코뉴의 산초 2세에게 사로잡혀 샤를 2세에게 넘겨졌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샤를 2세는 산초 2세를 백작에서 공작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피핀 2세는 강제로 머리가 밀리고 수아송에 있는 생 메다르 수도원에 투옥되었다.

854년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인 루트비히 3세가 아키텐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샤를 2세를 공격하여 리모주에 이르렀다. 여기에 바이킹들은 루아르 계곡에서 푸아티에, 앙굴렘, 페리괴, 리모주, 클레르몽, 부르주 일대를 약탈했다. 피핀 2세는 상황이 혼란해진 틈을 타 수도원에서 탈출한 뒤 아키텐 귀족들을 설득해 루트비히 3세를 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도록 했다. 피핀 2세는 몇 달 동안 아키텐 전역을 장악했지만 샤를 2세가 파견한 군대에 패배해 남쪽으로 밀려났다. 샤를 2세는 아들인 샤를을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고, 이로 인해 아키텐은 북쪽의 샤를과 남쪽의 피핀 2세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856년 바이킹들이 또 센 강을 거슬러 항해하여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모든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파리를 약탈했다. 파리 시민들은 바이킹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샤를 2세의 무능에 치를 떨고, 독일인 루트비히 2세에게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여론이 이렇듯 좋지 않자, 858년 샤를 2세는 바이킹들과 싸우기 위해 루트비히 2세와 조카인 로타르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여기에 센 강 주변에 일련의 요새와 다리를 설치해 바이킹들의 통행을 막으려고 했다.

863년 로타리우스 1세의 아들인 프로방스의 샤를이 죽자, 샤를 2세는 즉시 그 땅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또다른 조카인 루도비코 2세가 먼저 프로방스에 도착하여 자기 영토로 삼았고, 일부 영지를 형제인 로타르 2세에게 넘겼다. 869년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가 승하했다. 로타르 2세는 생전에 발드라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에게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교회로부터 사생아로 간주된 아이들의 영지 상속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로타르 2세의 영지를 분할하고, 870년 메르센 조약을 체결해 분할을 확정했다. 루도비코 2세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게 두 삼촌이 자신을 무시하고 분할을 진행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교황은 랭스의 힌크마르 주교에게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를 찾아가서 루도비코 2세의 입장을 고려하라고 권하도록 했다. 그러나 힌크마르 주교는 자신의 주권자인 샤를 2세를 따르기로 하고, 교황의 바람을 무시한채 메르센 조약을 공인했다.

871년 8월 루도비코 2세가 사망했다는 소문을 접하자, 샤를 2세는 루트비히 2세와 함께 루도비코 2세의 이탈리아 왕국을 접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소문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자, 그들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875년 루도비코 2세가 두 딸만 남기고 진짜 사망하자, 샤를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건넜다. 한편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아들 카를로만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세우려 했고,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가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샤를 2세가 파비아에 무사히 도착한 뒤 그해 12월 25일, 교황 요한 8세의 주관하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자,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는 샤를 2세를 지원하는 베르가모 백작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고,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서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샤를 2세는 처남인 보소를 이탈리아에 두고, 이탈리아 총독이자 프로방스 백작으로 임명한 후 급히 갈리아로 돌아갔다. 이후 아헨과 쾰른을 공략하고 동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라인 강을 건너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샤를 2세는 듣지 않고 라인 강을 도하했다가 루트비히 2세에게 참패하고 파리로 달아났다. 루트비히 2세는 몇 달 후인 876년 8월 28일에 승하했고, 세 아들들인 카를로만, 루트비히 3세, 비만왕 카를 3세가 아버지의 영지를 분할했다. 한편 바이킹들이 센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생드니 수도원을 위협하자 샤를 2세는 은화 5,000파운드를 바치고 물러나도록 했다. 이후 서프랑크 영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그들이 대규모 영지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877년 6월 말 샤를 2세는 황후 리실드 및 소수의 가신들과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어 베르첼리에서 교황 요한 8세와 접견했다. 그 동안 카를로만은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브래너 고개를 통과하여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보소를 포함한 영주들은 바이킹들의 침략이 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속히 이탈리아로 오라는 샤를 2세의 명령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샤를 2세는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귀국하다가 877년 10월 6일 브리데레벵에서 폐질환으로 붕어했다. 사후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루이 2세가 뒤를 이어 서프랑크의 왕위에 올랐다. 한편 카를로만은 파비아 의회에서 이탈리아의 국왕이 되었다.

3. 가족 관계

  • 오를레앙의 에르망트루드(830 ~ 869): 오를레앙 백작 오도 1세의 딸.
    • 유디트(844 ~ 870): 웨식스애설울프 왕과 초혼, 웨식스의 애설볼드[4]와 재혼,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1세와 삼혼.
    • 루이 2세(846 ~ 879):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 샤를(847 ~ 866): 아키텐의 국왕.
    • 로타르(848 ~ 866): 생 제르맹 수도원장
    • 카를로만(849 ~ 878): 수아송에 있는 생 메다드 수도원장
    • 로투르데(852 ~ 912): 생 라드공드 수녀원장
    • 에르망투르드(854 ~ 877): 하스뇽 수녀원장
    • 힐데가르트(856 ~ ?): 요절
    • 기젤라(857 ~874): 요절
  • 프로방스의 리실드(840/845 ~ 910): 아르덴 변경백이자 메츠 변경백 비비누스 고르즈의 딸.
    • 로틸데(871 ~ 928): 마인 백작 로저의 부인. 남편 사후 셸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
    • 드로고(872 ~ 873): 쌍둥이. 요절.
    • 피핀(873 ~ 873): 쌍둥이. 요절.
    • 샤를(876 ~ 877): 요절.


[1] 당대에 발행된 동전에 적힌 로마식 제호[2] 842년의 스트라스부르 서약 표기[3] 군주의 별명이 후대에 의미 변화로 와전되어 전해지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 2세의 별명은 현대에 unready로 전해지지만, 이는 본래 고대 영어의 unræd가 와전된 것으로 '준비가 안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조언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었다.[4] 애설울프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