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nnon Wall, Prague
1. 개요
체코 프라하에 있는 레논 벽. Velkopřevorské náměstí, 100 00 Praha 1, 체코에 위치해 있다. 비틀즈의 존 레논의 이름을 붙였다.
2. 역사
원래 이 벽은 그냥 프라하 시내 작은 광장에 있었던 벽이었다. 바로 옆에 가톨릭 성당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성당과 광장을 구분하기 위해 세운 벽이다. 그러다가 1980년 비틀즈의 존 레논이 암살당했을 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화가와 음악인들이 프라하에 있는 벽에 초상화와 그의 노래 가사 일부를 그리면서 이후 이 벽은 존 레논, 평화, 서구 문화, 정치 투쟁 등과 관련된 주제의 그림들로 장식되기 시작했다.#존 레논의 얼굴과 존 레논의 곡의 가사를 그려 놨다. 그러다가 1988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에 힘입어 동유럽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이 벽의 의미가 바뀌기 시작했다. 제1세계 서방을 대표하는 비틀즈를 제2세계 공산주의권에서 동경한다는 의미로 이 벽이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의 근거지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 1월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폴란드 자유노조의 끝없는 항쟁에 결국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의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정부와 폴란드 계엄령 이후 폴란드 통치에 끼어든 폴란드 인민군 군부가 굴복하고 원탁회의가 성립하자, 폴란드 옆나라인 체코슬로바키아에도 바츨라프 하벨과 과거 프라하의 봄 당시 쫓겨났었던 알렉산데르 둡체크 등 인사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직접적으로 민주화 열풍이 불었다.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 위주로 구성된 민주화 시위대는 프라하 출신 뿐만 아니라 브르노, 브라티슬라바 등 다른 도시 출신들도 모아야 했기 때문에 유명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프라하의 레논 벽이 시위대 집결 장소로 써먹히기 시작했다. 21세기에는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구글 지도라는 삼신기가 있지만 저때는 1989년이다. 그래서 시위대가 모이려면 유명한 장소가 필요했는데 바로 그것이 프라하 레논 벽이었다.
1989년 3월부터 체코슬로바키아의 학생들은 교대로 레논 벽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당시 구스타우 후사크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부는 학생들을 탄압하고 레논 벽을 치우려고 했지만 학생들을 탄압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레논 벽을 치우지는 못했다. 1989년 4월 학생들이 공산정부한테 탄압당하는 것을 본 프라하의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레논 벽에 "공산당 OUT! 소련 철수!" 등을 적어 놓은 낙서를 도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공산당 소속으로 대통령이었던 구스타우 후사크는 당황하여 비밀경찰 StB와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까지 동원해 레논 벽을 철거하라고 명령했지만 민주화를 열망하는 프라하 시민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레논 벽 철거에 실패했다. 그러자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레논 벽에서 출발하여 웬체슬라스 광장(現 바츨라프 광장)으로 이어지는 인간 띠 시위 및 촛불집회 등을 하여 1989년 11월 27일 후사크 공산정부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민주화 이후 레논 벽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관련 낙서는 다시 없어지고 존 레논과 비틀즈를 추모하고 추억하며, 레논의 생전 뜻대로 세계 평화와 사랑, 그리고 여전히 독재나 식민지에 가까운 탄압으로 자유를 되찾지 못하고 있는 홍콩, 북한, 티베트, 위구르, 팔레스타인, 미얀마, 서뉴기니 등의 자유와 민주화를 논하는 내용으로 다시 도배됐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체코 민주화의 상징이자 프라하의 관광자원 중 하나로 유지되고 있다.
홍콩에도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당시 비슷한 취지로 사용되었던 레논 벽이 있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홍콩 민주화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코로나19와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중국공산당의 치안정국이 시작되며 2020년 철거되었다.
3. 사건사고
2024년 12.3 비상계엄 이후 탄핵 정국에서 매우 큰 글씨로 '윤석열 탄핵, 국힘 해산'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포착되었다. 처음 이 사진이 네티즌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조작 합성된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어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이 발견되면서 실제 사진임이 드러나자 갑론을박이 더욱 거세졌다. "꼭 저렇게 흉하게 적어놓아야 했느냐"는 의견과 "원래 저러라고 있는 벽이다"라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