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58:27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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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출사표> 전문
2.1. <전출사표>(前出師表)2.2. <후출사표>(後出師表)
3. <후출사표> 위작설4. 창작물에서
4.1. 영상 매체4.2. 게임4.3. 만화 & 웹툰
5. 기타6. 같이 보기

1. 개요

파일:출사표.jpg
출사표, 드높아라 충신의 매운 얼이여.
삼국지연의
<출사표>()는 촉한재상 제갈량위나라를 정벌하고자 황제 유선에게 올린 표문이다.[1]

출사표라는 말 자체는 '출병할 때 그 뜻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던 글'을 뜻하는 일반명사이지만, 제갈량의 <출사표>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2] 일반적으로 문맥없이 '<출사표>'라고만 하면 제갈량의 <출사표>를 일컫는다. <전출사표>, <후출사표>의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편은 227년, 후편은 228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三國志)의 <제갈량전>(諸葛亮傳), 《문선》(文選) 등에 수록되어 있다. 훗날 지어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도 원문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전출사표>는 나라의 장래에 대한 제갈량의 걱정과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 주된 내용을 이루며, 그 진정성이 표문 전체에 절절이 녹아있어[3] 이밀의 <진정표>와 함께 표문의 교범과도 같은 존재로 꼽힌다. 옛말 중에
"<진정표>(陳情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며,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다."[4]
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5] 남조 양나라의 문학가였던 유협(劉勰)은 문장론의 체계를 세운 문예비평서이자 글쓰기 지침서인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뜻을 다하고도 문리가 잘 소통되어 표(表)의 정수를 보여준다."
라고 극찬했다. 사실 <전출사표>는 제갈량이 항상 스스로 능력을 견주었던 악의[6]의 <보연혜왕서>의 전범을 따랐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 부분은 해당 문서를 참조하자.

그러나 <후출사표>에 관해서는 후대의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다. 혹자는 제갈량의 조카이자 동오의 재상이었던 제갈각북벌의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후출사표>를 작성했다고 주장하나, 아직 학계에서 사실로 판명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후출사표> 역시 제갈량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후출사표 위작설' 항목을 참고할 것.

시간이 흘러 '출사표'라는 낱말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관용어의 하나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출사표를 던지다'라는 표현이다. 이는 '큰 시합이나 경쟁, 선거 따위에 용감히 나서겠다는 의사를 밝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사실 어원을 엄밀히 따지면 출사표는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기 때문에 감히 '던지는' 성격의 글이 아니긴 하다. 이에 대해 지적한 기사도 있다. #

아울러 <출사표>는 중국의 현 중등교과과정 국어 교과서에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등장하는 예문 중 하나이다. 8, 90년대 중국에서 출생하고 자란 사람들은 중학교 시절 최소 한 번 이상 시험 때문에 암기한 기억이 있을 것이며, 유명 사립중학교 같은 경우에는 일정 분량 이상의 암기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다 외울 때까지 집에 보내주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국 청년들은 지금도 <출사표>의 첫 구절 정도는 암송할 수 있다. 또한 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과 과정에 자주 나오는 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한국의 수험생들이 정철의 <관동별곡>을 싫어하듯이 중문과 학생들과 중국의 수험생들도 <출사표>를 싫어한다고 한다(...).[7]

2. <출사표> 전문

2.1. <전출사표>(前出師表)

번역본은 위키문헌 <전출사표>에서 가져왔으며, CC-BY-SA 라이선스#로 배포된다. 원문은 저작자가 사망한 지 1000년이 넘어 퍼블릭 도메인으로 배포된다.
臣亮言
신량언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선제창업미반 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피폐 차성위급존망지추야.
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연시위지신 불해어내 충지지사 망신어외자 개추선제지수우 욕보지어폐하야.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성의개장성청 이광선제유덕 회홍지사지기 불의망자비박 인유실의 이색충간지로야.

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궁중부중 구위일체 척벌장비[8] 불의이동.
若有作姦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 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약유작간범과급위충선자 의부유사 논기형상 이소폐하평명지리 불의편사 사내외이법야.

侍中侍郞 郭攸之費禕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 以遺陛下.
시중시랑 곽유지비의동윤등 차개량실 지려충순 시이선제간발 이유폐하.
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우이위궁중지사 사무대소 실이자지 연후시행 필능비보궐루 유소광익.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 是以衆議擧寵爲督.
장군상총[9] 성행숙균 효창군사 시용어석일 선제칭지왈능 시이중의거총위독.
愚以爲營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必能使行陳和睦 優劣得所也.
우이위영중지사 사무대소 실이자지 필능사행진화목 우열득소야.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친현신 원소인 차선한소이흥륭야.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친소인 원현신 차후한소이경퇴야.
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
선제재시 매여신론차사 미상불탄식통한어환영야.
侍中尙書長史參軍 此悉貞亮死節之臣 願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시중상서장사참군 차실정량사절지신 원폐하친지신지 즉한실지륭 가계일이대야.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신본포의 궁경어남양 구전성명어난세 불구문달어제후.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선제불이신비비 외자왕굴 삼고신어초려지중 자신이당세지사 유시감격 수허선제이구치.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爾來二十有一年矣.
후치경복 수임어패군지제 봉명어위난지간 이래이십유일년의.

先帝知臣謹愼 故臨崩 寄臣以大事也.
선제지신근신 고임붕 기신이대사야.
受命以來 夙夜憂歎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수명이래 숙야우탄 공탁부불효 이상선제지명 고오월도로 심입불모.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興復漢室 還于舊都.
금남방이정 병갑이족 당장솔삼군 북정중원 서갈노둔 양제간흉 흥부한실 환우구도.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차신소이보선제 이충폐하지직분야.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禕允之任也.
지어짐작손익 진진충언 즉유지의윤지임야.

願陛下 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원폐하 탁신이토적흥부지효 불효즉치신지죄 이고선제지령.
若無興德之言 則責攸之禕允等之慢 以彰其咎.
약무흥덕지언 즉책유지의윤등지만 이창기구.
陛下亦宜自謀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폐하역의자모 이자추선도 찰납아언 심추선제유조.

臣不勝受恩感激.
신불승수은감격.
今當遠離 臨表涕泣 不知所言.
금당원리 임표체읍 부지소언.

建興五年 平北大都督 丞相 武鄕侯 領益州牧 知內外事 諸葛亮
건흥오년 평북대도독 승상 무향후 영익주목 지내외사 제갈량
이 삼가 아뢰옵니다.[10]

선제(先帝)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11]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오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하오나 폐하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안에서 나태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무사들이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제께옵서 특별히 대우해주시던 황은을 잊지 않고 오로지 폐하께 보답코자 하는 마음 때문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들의 충언에 귀를 크게 여시어 선제의 유덕을 빛내시오며, 충의지사들의 의기를 드넓게 일으켜 주시옵소서. 스스로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셔서 그릇된 비유를 들어 대의를 잃으시면 아니되오며, 충성스레 간하는 길을 막지 마시옵소서.

또한, 궁중과 부중이 일치 단결하여 잘한 일에 상을 주고 잘못된 일에 벌을 줌에 다름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옵니다. 만일 간악한 짓을 범하여 죄 지은 자와 충량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각 부서에 맡겨 상벌을 의논하시어 폐하의 공평함과 명명백백한 다스림을 더욱 빛나게 하시옵고, 사사로움에 치우치셔서 안팎으로 법을 달리하는 일이 없게 하시옵소서.

시중 곽유지비의, 시랑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하오며 뜻과 생각이 고르고 순박하여 선제께서 발탁하시어 폐하께 남기셨사오니, 아둔한 신이 생각하건대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들에게 여쭤보신 이후에 시행하시면 필히 허술한 곳을 보완하는 데 크게 이로울 것이옵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에 밝은지라 지난 날 선제께서 상총을 시험삼아 쓰신 뒤 유능하다 말씀하시었고,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그를 도독으로 천거했사오니, 아둔한 신의 생각으로는 군중의 대·소사는 상총에게 물어 결정하시면 반드시 군사들 사이에서 화목할 것이오며,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모두 적재적소에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다할 것이옵니다.

전한 왕조가 흥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탐관오리소인배를 멀리했기 때문이오며, 후한 왕조가 무너진 것은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 때문입니다. 선제께옵서는 생전에 신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일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셨사옵니다. 시중과 상서, 장사와 참군 등은 모두 곧고 밝은 자들로 죽기로써 국가에 대한 절개를 지킬 자들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들을 가까이 두시고 믿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머지않아 한실은 다시 융성할 것이옵니다.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12]남양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시어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을 받들었사옵니다. 그 후 한실의 국운이 기울어 싸움에 패하는 어려움 가운데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하며 위난한 상황에서 명을 받들어 일을 행해온 지 어언 스물하고도 한 해가 지났사옵니다.

선제께옵서는 신이 삼가고 신중한 것을 아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탁고의 대사를 맡기셨사옵니다. 신은 선제의 유지를 받은 이래 조석으로 근심하며 혹시나 그 부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여 선제의 밝으신 뜻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끝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사옵니다. 이제 남방은 평정되었고 인마와 병기와 갑옷 역시 넉넉하니, 마땅히 삼군[13]북으로 나아가 중원을 평정시켜야 할 것이옵니다.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대한 황실을 다시 일으켜 옛 황도로 돌아가는 것만이 바로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드리는 신의 직분이옵니다. 손익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 드릴 일은 이제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몫이옵니다.

원컨대 폐하께옵서는 신에게 흉악무도한 역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킬 일을 명하시고, 만일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엄히 다스리시어 선제의 영전에 고하시옵소서. 또한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의 태만함을 책망하시어 그 허물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옵소서. 폐하께옵서도 마땅히 스스로 헤아리시어 옳고 바른 방도를 취하시고, 신하들의 바른 말을 잘 살펴 들으시어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좇으시옵소서.

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을 올림에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건흥 5년(227년) 평북대도독 승상 무향후 영익주목 지내외사 제갈량

2.2. <후출사표>(後出師表)

번역본은 위키문헌 <후출사표>에서 가져왔으며, CC-BY-SA 라이선스#로 배포된다. 원문은 저작자가 사망한 지 100년이 넘어 퍼블릭 도메인으로 배포된다.
先帝不兩立 王業不偏安 故託臣以討賊也
선제려 한적불양립 왕업불편안 고탁신이토적야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敵强也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以託臣而弗疑也
이선제지명 양신지재 고지신벌적 재약적강야 연불벌적 왕업역망 유좌이대망 집여벌지 시이탁신이불의야

臣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 思惟北征 宜先入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幷日而食 臣非不自惜也
신수명지일 침불안석 식불감미 사유북벌 의선입남 고오월도로 심입불모 병일이식 신비부자석야
顧王業不可偏安於蜀都 故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 而議者謂爲非計 今賊適疲於西 又務於東 兵法乘勞 此進趨之時也 謹陳其事如左
고왕업불가편안어촉도 고모위난이봉선제지유의 이의자위위비계 금적적피어서 우무어동 병법잉로 차진추지시야 근진기사여좌

高帝明幷日月 謀臣淵深 然涉險被創 危然後安 今陛下未及高帝 謀臣不如 而欲以長策取勝 坐定天下 此臣之未解一也
고제명병일월 모신연심 연섭험피창 위연후안 금폐하미급고제 모신불여량평 이욕이장책취승 좌정천하 차신지미해일야

劉繇王朗各據州 論安言計 動引聖人 群疑滿腹 衆難塞胸 今歲不戰 明年不征 使孫策坐大 遂幷江東此臣之未解二也
유요왕랑각거주 논안언계 동인성인 군의만복 중난새흉 금세부전 명년부정 사손책좌대 수병강동차신지미해이야

曹操智計 殊絶於人 其用兵也 彷彿 然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逼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僞定一時耳
조조지계 수절어인 기용병야 방불손오 연인어남양 험어오소 위어기련 핍어여양 기패북산 태사동관 연후위정일시이
況臣才弱 而欲以不危而定之 此臣之未解三也
황신재약 이욕이불위이정지 차신지미해삼야

曹操五攻昌覇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 而李服圖之 委任夏侯 而夏侯敗亡 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臣之未解四也
조조오공창패불하 사월소호불성 임용이복 이이복도지 위임하후 이하후패망 선제매칭조위능 유유차실 황신노하 하능필승 차신지미해사야

自臣到漢中 中間期年耳 然喪趙雲 陽群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合 鄧銅等 及曲長屯將七十餘人 突將 無前 賓 靑姜 散騎 武騎一千餘人
자신도한중 중간기년이 연상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등 급곡장둔장칠십여인 돌장 무전 빈 청강 산기 무기일천여인
此皆數十年之內 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 若復數年 則損三分之二也 當何以圖敵此臣之未解五也
차석수십년지내 소규합사방지정예 비일주지소유 약복수년 즉손삼분지이야 당하이도적차신지미해오야

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則住與行 勞費正等 而不及早圖之 欲以一州之地 與賊持久 此臣之未解六也
금민궁병피 이사불가식 사불가식 즉왕여행 노비정등 이불급조도지 욕이일주지지 여적지구 차신지미해륙야

難平者 事也 昔先帝敗軍於楚 當此之時 曹操拊手 謂天下已定 然後先帝東連吳越 西取巴蜀 擧兵北征 夏侯授首
난평자 사야 석선제패군어초 당어지사 조조부수 위천하이정 연후선제동련오월 서취파촉 거병북정 하후수수
此操之失計 而漢事將成也 然後吳更違盟 關羽毁敗 秭歸蹉跌 曹丕稱帝 凡事如是 難可逆見
차조지실계 이한사장성야 연후오갱위맹 관우훼패 자귀차질 조비칭제 범사여시 난가역견
鞠躬盡瘁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竟睹也.
국궁진췌 사이후이 지어성패리둔 비신지명소능역경도야.
선제께옵서는 "한나라역적은 서로 양립할 수 없으며, 황업(皇業)은 천하의 한 귀퉁이로만 안주할 수 없다"[14] 하시어 신에게 역적의 토벌을 당부하셨나이다. 선제께서 그 밝으심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니 역적을 벌함에 신의 재주가 얕고 역적은 강함을 아셨사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아니한다면 황업 또한 망할 터이니,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린다면 누구와 더불어 역적을 징벌하오리까. 이 때문에 신에게 탁고하시고 의심하지 않으신 것이옵니다.

신은 선제의 명을 받은 이래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사옵니다. 북쪽을 칠 생각을 하니 우선 남방부터 평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의 양식으로 이틀을 먹는 고생을 한 것은 신이 몸을 아끼지 않음이 아니라, 황업을 생각하오니 촉 땅에서 편안히 지내서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어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선제의 유지를 받든 것이옵니다. 그런데 따지기 좋아하는 무리들은 이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하나이다. 이제 역적은 마침내 서쪽에서 고달파지고, 다시 동쪽에서 오나라의 군사들과 싸워 지쳐 있사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피로할 때를 타 공격하라 하였으니[15], 지금이 바로 과감하게 나아갈 때라 사료되옵니다. 이에 신은 삼가 몇 가지를 아뢰옵나이다.

옛날에 고제께옵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고 신하들의 재주가 연못처럼 깊었으나 험난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입으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해지셨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옵서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신료들 또한 감히 장량진평같은 자가 없는데도,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좋은 계책으로만 승리하여 가만히 앉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수 없는 첫 번째 일이옵니다.

또한 유요왕랑은 각각 주와 군을 다스리며 안위와 계책을 말하면 입만 열면 성인을 운운하고 벗속에는 의심이 가득하여 여러 어려움 앞에서는 겁내고 두려워 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올해도 싸우지 않고 다음해에도 싸우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손책이 앉아서 강동을 차지하였으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일이옵니다.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 그 용병술은 손자오자를 닮았으나 남양에서 어려움에 처하고[16] 오소에서 험한 일을 겪고[17] 기련에서 위태로움에 처했으며[18] 여양에서 핍박을 당하고[19] 북산에서 거의 패배하고[20] 동관에서는 죽을 뻔한[21] 뒤에야 비로소 한때나마 거짓으로 천하를 평정했는데, 재주도 미약한 신하들이 어찌 위태로움을 겪지 아니하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일이옵니다.

조조는 다섯 번이나 창패(昌覇)[22]를 치고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였고 네 번이나 소호[23]를 건넜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복(李復)[24]을 등용하였으나 오히려 배반당하고 하후연에게 일을 맡겼으나 하후연이 패망하였사옵니다. 선제께서 항상 뛰어난 인물이라고 칭찬하신 조조조차 이렇게 실패하곤 하였는데, 하물며 신 같이 아둔한 사람이 어찌 쉽게 이기기만을 바라겠나이까.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네 번째 일이옵니다.

신이 한중에 온 지 이제 1년 남짓 되었는데, 그 동안 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 등 70여 명의 곡장과 둔장을 잃어 선봉장으로 앞장설 사람이 없사오며 종수[25], 청강[26], 산기, 무기 등 1,000여 명을 잃었사오니 이는 모두 수십 년 동안 사방에서 모아온 정예병이지 익주 한 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만약 또 다시 몇 해를 보내면 셋 중 둘을 잃게 될 터이니 그때는 무엇으로 역적을 도모하겠사옵니까.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섯 번째 일이옵니다.

바야흐로 백성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사오나 대사를 그만둘 수는 없사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지키고 있는 것이나 나아가서 싸우는 것이나 그 노고와 비용은 같은데도, 속히 도모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 주에만 머물러 역적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사오니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섯 번째 일이옵니다.

무릇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천하의 일인지라, 옛날 선제께옵서 초 땅에서 패하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천하는 평정되었다고 좋아했사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제께옵서는 동쪽의 오월과 손을 잡으시고, 서쪽으로는 파촉을 취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쳐서 하후연의 목을 베셨사옵니다. 이는 바로 조조의 실수로 한나라의 대업이 이루어지려 하였사오나 동오가 맹약을 어겨 관우를 죽이고 선제께옵서는 자귀에서 패하시오니 조비가 황제를 참칭했사옵니다. 이렇듯 일은 미리 헤아리기가 어렵사옵니다.

이제 신은 엎드려 몸을 바치고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할 뿐이오니[27], 일의 성패와 이해에 대하여서는 신이 미리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3. <후출사표> 위작설

<후출사표>는 이전부터 위서라는 얘기가 나돌았으며, 특히 동오제갈각이 범인으로 꼽혔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후출사표>는 촉한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며, 오나라의 장엄이 쓴 《묵기》(默記)라는 책에만 나온다. 훗날 《한진춘추》를 쓴 습착치 역시 제갈량의 제2차 북벌을 기록하면서 <후출사표>를 덧붙일 때 뭔가 석연치 않았는지 '<후출사표>는 《제갈량집》에는 없는 이야기인데...'라는 식으로 자신이 확인한 것을 덧붙였다. 남조 유송때의 배송지 역시 습착치의 이 의견을 그대로 실었다.
  2. 제갈각이 북벌을 준비하면서 반대파들에게 내세운 논지가 <후출사표>와 비슷하다.
  3. 황제에 대한 태도가 제갈량의 다른 언행들과 사뭇 다르다. 유선이 암군에 가깝다고는 해도, 제갈량은 유선을 언급할 때마다 총명하다, 배우기 좋아한다는 식으로 칭찬했으며, 고쳐야 할 점이 있어도 간접적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그런데 <후출사표>에서는 유독 질책이 심하다. 유선의 재능이 어쨌든 간에 "한고조만 못하시면서 가만히 계셔서야 되겠습니까?"라며 황제를 강하게 책망하는 모습은 충신 제갈량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

그 외에도 <전출사표>보다 떨어지는 문장력(중언부언하거나 억지 대구)과 지나치게 의기소침한 태도[28], <전출사표>에서는 유선에게 올리는 당부가 있었으나 <후출사표>에서는 예전 일을 자주 들먹이는 점, 조운이 졸한 연도는 229년인데 조운을 잃었다고 표현한 이 표는 228년 11월에 올린 것으로 되어있다는 점, 촉한과 별 상관도 없는 유요와 왕랑의 강동 행적을 들먹인다는 점,[* 사실 제갈량이 숙부 제갈현을 따라 잠시 유요가 있었던 예장으로 온 적은 있었다., 정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인명의 나열로 위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오나라에서 쓰였다고 보기에는 손책을 함부로 들먹인 것 아니냐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손권부터가 손책을 황제가 아닌 장사환왕으로 올리는 등 미심쩍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어디까지나 제갈량이 썼다고 가정한 위작이라면 굳이 문제될 거 없다.

물론 위작설이 있으면 이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는데, 몇 가지 근거를 대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제갈각과 장엄 간의 관계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장엄은 <열전>없이 기록된 부분도 매우 짧은데 제갈각과 함께 등장하는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2. 왕랑은 이미 223년[29]화흠, 진군, 제갈장(諸葛璋)과 함께 제갈량에게 거짓 황제놀음을 그만두고 항복하라는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제갈량은 <정의>(正議)라는 글을 지어 서신을 보낸 자들과 조위를 가루가 되도록 깠다. 내용은 제갈량의 설전 VS 위나라에 나온다. 따라서 왕랑의 과거 행적을 두고 그를 부정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마침 왕랑이 죽은 시점이 228년 11월인데 <후출사표>가 올라간 시점이 228년 11월로 되어 있기도 하다.
  3. <후출사표>에선 동오가 배반하여 관우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는 손권이 한 일이며 제갈각은 진심으로 손권에게 공경을 다하여 충성을 다했다. 아무리 교활한 제갈각이라도 (손권이) 배반했다고 쓸 수 있었을까?
  4. 사실 촉한과 관련이 없는 일은 유요와 왕랑의 일뿐이고, 먼 과거의 일만 아니라 당장 석정 전투 이후 위나라의 피해도 언급하고 있으며, 촉한의 일인 이전에 시행했던 적벽대전, 남정, 한중 공방전, 형주 공방전도 충분히 예를 들고 있다.
  5. 염지의 경우는 유비가 효정에서 패배했을 때[30] '파서 태수 염지가 여러 현의 군사 5,000명을 일으켜 결손된 병력을 보충했다'는 기록이 <촉서> -마충전-에 있어 실존 인물임이 교차검증된다. 거의 20~30년 전에 촉한의 지방관을 지낸 인물을 제갈각이 일일이 기억하고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후출사표>의 의기소침해 보이는 태도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니 자신을 낮추면서도 '성패에 상관없이 그럼에도 국궁진력하여 사이후이해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이는 <전출사표>에서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한다'는 뜻과 같다. 반면 제갈각은 자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은 안된다는 오만한 태도를 취해 두 표문 자체에서 보이는 태도가 다르다. 제갈각의 경우엔 표문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지금 내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자본을 이용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위엄에 의지한다면 어디들 간들 이기지 못하겠소?"라고 하기까지 했다. 또 <후출사표> 자체는 북송 때의 편년체 대역사서인 《자치통감》에도 일단 수록되었다. 당대 사료가 많이 남아있었던 시기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이다.

물론 오나라의 기록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후세 사람, 특히 제갈각의 윤색이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제갈각이 무조건적인 북벌의 당위성을 위해 아예 없는 걸 지어낸 게 아니라 '원래 있었던 숙부 제갈량의 표문에 자기가 손을 댔다'고 하면 <후출사표>에 대한 의문이나 그에 대한 반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된다. 당시 제갈각은 다른 사람의 반대에 '북벌이 최우선 과제'라고 반론해대고 있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후출사표>를 윤색하여 자기 논지를 강화하는데 사용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제갈각의 <후출사표> 위작 논란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위작 논란의 대상자인 조카 제갈각을 비롯한 당대의 인물들은 제갈량이 충분히 '국궁진췌 사이후이, 한적불양립'을 외칠 만한 인물이고, 대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충심을 다해 몸을 바쳐 일한 인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후출사표>는 제갈량이 쓴 것이 맞을 것'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나라에서도 그 인물의 권위를 빌려 나라의 중요 정책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점, 그것도 조카라곤 해도 평소 매우 오만한 성품이었던 제갈각이 굳이 다른 나라에서 활동한 숙부인 제갈량의 권위를 빌리려 했다는 점에서 그만큼 당대에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시대의 거물로 존경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위작 논란은 계속되겠으나 <후출사표>는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당대에 어떤 인물로 여겨졌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국궁진췌 사이후이'라는 말 자체도 지금까지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제갈량'이란 인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문장이다.

4. 창작물에서

4.1. 영상 매체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에 나온 <출사표>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에 나온 <후출사표>
영어 버전 출사표[31]
게임 <삼국지 공명전>에 나온 <출사표>
특촬물 <레전드히어로 삼국전>에 나온 <출사표>

4.2. 게임

삼국지 9에서는 이벤트로 구현되었다. 이벤트가 발동되면 촉 세력의 무장 전원이 정란과 연노를 배운다. 제갈량 북벌과 촉 멸망 시나리오에서는 이벤트가 발동된 상태로 취급하여 촉의 모든 무장이 정란과 연노를 달고 나온다.

4.3. 만화 & 웹툰

웹툰 삼국지톡에서도 나온다 다만...고전 한컴 오피스, 출사표.hwp 식으로
출사표
신이 떠난 후 모든 일은
동윤,곽유지★비의★에게 맡기소서
이 친구들이 일 제대로 못하면
목 따셔도 됩니다. ^_^v

이 따위로 메모장에 끄적인 것 마냥 부실하게 묘사해놨다.[32] 해당 회차를 본 독자들은 대폭발 했으며 댓글로 작가는 해당회차에 출사표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비난이 속출중이다.#
삼국지에서 출사표가 가진 촉한의 재상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는 뜻을 황제 유선에게 올리는 표라는 의미와 위상을 감안하면 독자들의 비난은 이상하지 않다.[33] #

5. 기타

Fate 시리즈에서는 제갈공명의 보구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레이디 라이네스의 사건부에서 발동한다.

'출사표'라는 단어는 관용어구가 되어 경기나 경쟁에 참가 의사를 밝힐 때 흔히 출사표를 던진다라고 이야기한다.

2015년 어느 몰지각한 관광객이 <전출사표> 비문에 낙서를 하는 충격과 공포사건이 일어났다. 심지어 이 인간은 <출사표> 비문뿐 아니라 다른 문화 유물도 많이 반달했다고 밝혀져 중국 안팎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

6. 같이 보기


[1] (表)란 신하가 심중을 나타내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2]서경》 <이훈>편에 기록된 이윤의 표문과 <열명>편에 나오는 부열의 글 역시 문장이나 내용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출사표>이지만, 제갈량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못했다.[3] 또 황제 유선의 적극적인 국정 참여를 독려하며, 최고 권력자로서의 모범을 보이길 권하고 있다.[4] 《문장궤범》(文章軌範)의 <출사표>에 대한 안자순(安子順)의 평론(評論)에 의하면,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를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반드시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일 것이라고까지 했다.[5] 제갈량의 <출사표>와 이밀의 <진정표>, 여기에 당나라 한유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을 더해 중국 3대 명문(名文)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의 표현과 유사하게 "<제십이랑문>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우애가 없는 자이다."라는 말도 있다. <제십이랑문>은 당나라의 한유가 조카인 한노성(韓老成)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문장으로 '십이랑'(十二郞)은 한유의 조카들 중 순서가 12번째인 한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유는 형과 나이가 많이 차이나서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는 형수 아래에서 자랐다. 숙부-조카 관계지만 사실상 형제 같은 관계였던 것이다.[6]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이며, 춘추시대관중과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7] 2007년에는 교과서에서 <출사표>를 빼야 한다는 의견까지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8] 否는 "아니다"의 뜻으로는 "부"로 읽지만 여기서와 같이 잘못, 나쁜 일(=惡)의 뜻으로는 "비"로 읽는다.[9] 向은 성으로 쓰일 때 '상'으로 읽는다.[10] 당대 중국의 풍습으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언급할 때 성을 붙이지 않았다.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춰부르는 표현이기 때문. 한국에서는 반대로 김 아무개, 박 아무개 등 이름을 생략하는게 자신을 낮춰부르는 표현이었다. 논영회에서 조조유비를 사군(使君)이라 부르면서도 자신은 조(操)라고 불러 자신을 극도로 낮춰 유비를 당황시킨 적이 있다. 문서 참조.[11] 한자로 崩殂라고 쓰며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단어다. 좀 더 자주 쓰이던 표현은 붕어(崩御)이며, 동아시아권이 대부분 왕정을 폐지해서 두 단어 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단어인데, 최근에는 1989년 쇼와 덴노가 죽었을 때 일본 언론에서 붕어(崩御)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다이쇼 시대 이후 태어난 세대의 독자들은 자국 천황의 죽음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붕어가 무슨 뜻이냐고 어색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2] 布衣, '베로 지은 옷'이라는 뜻으로, 벼슬이 없는 선비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13] 전군(全軍) 또는 대군(大軍)을 일컫는 표현이다. 과거 주나라의 군사제도에 있어, '전쟁천자는 6군(軍), 봉건 대영주(大領主)는 3군, 중영주는 2군, 소영주는 1군을 제공해야 한다'는 규정에서 유래했다.[14] 이것이 2010년 드라마 <신삼국>에서 촉한 소속 사람이라면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입이 닳도록 외치는 슬로건으로 등장하는 한적불양립, 왕업불편안이다. 한나라의 원수인 위나라를 반드시 쳐 없애야 하며, 촉한의 영토가 작기 때문에 촉한은 위나라를 쓰러뜨리지 않고 현상에 안주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아 촉한의 이데올로기를 단 한 문장으로 아우르는 명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것과 별개로 봐도 위진남북조 시대오대십국시대의 후례를 봤을 때 현실적으로도 촉한의 영토로만 고정되면 늦든 빠르든 강대국에게 멸망당하는 길밖에 없다.[15]손자병법》의 <허실>(虛實)편에 나온 내용이다.[16] 장수와의 완 전투[17] 관도대전 중 오소 습격[18] 기련은 산의 명칭으로, 간쑤성 서부와 칭하이성 동북부 경계에 위치해 있다. 다만 조조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지명인데 왜 <후출사표>에 등장하는가는 의문이다.[19] 송원교체기의 학자였던 호삼성(胡三省)은 이 부분에 대해 '원담 형제를 공격할 때를 말한다.'고 얘기했다.[20] 호삼성은 '백랑산에서 오환과 교전을 벌였을 때를 말한다.'고 얘기했다.[21] 마초와의 동관 전투[22]정사 삼국지》 <선주전>과 <후출사표>에서는 창희를 창패로 칭한다.[23] 巢湖, 안후이성 중부에 위치한 호수이며, 바로 옆에 합비(허페이시)가 위치한다. 따라서 합비를 통해 동오를 공격한 것을 일컫는 것이다.[24] 이복은 왕자복의 다른 이름이다.[25] 장수 이름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賨)은 파주(巴州)에 살던 사람들을 지칭하고, (叟)는 촉의 별칭이다.[26] 강족 병사들을 뜻함[27] 여기서 나온 말이 제갈량을 상징하는 말 중 하나인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이다. 뒷날 청나라의 명군이었던 제4대 성조 강희제가 이 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한 신하가 "제갈량의 이 말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이지, 임금이 가질 자세는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강희제는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또한 중국 총리이자 중국 현대사의 제갈량으로 불린 저우언라이의 좌우명이기도 했다.[28] '뛰어나다는 조조도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보다 못한 우리는 어쩌겠습니까?'와 같은 부정적인 표현이 자주 눈에 띈다.[29] 소열제 유비가 붕어한 바로 그 해이다.[30] 이릉대전 때의 일이다.[31]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에서 제갈량 역을 맡은 배우 왕락용(王洛勇)이 <출사표> 원문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낭독한 것이다.[32] 내용도 비의에게 비꼬는 말 들었다고 치졸하게 쓴건 덤.[33] 애당초 해당 부분은 '출사표와 오장원의 지는 별'을 그대로 썼다. 그럼에도 출사표를 부실 이하로 묘사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