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display:inline-block; color: #FFFFFF; min-width: 50%" {{{#!folding [ 음반 목록 ] | ||||
정규 1집 New Radiancy Group (1997.11.01) | 정규 2집 Race (1998.08.07) | 베스트 앨범 Season's Greetings (1998.11.01) | 베스트 앨범 Kiss In Christmas (1999.11.01) | |
정규 3집 NRG 003 (1999.11.04) | 라이브 앨범 N.R.G 2000 Live Concert In China (2000.09.06) | 정규 4집 悲 Sorrow (2001.06.05) | 라이브 앨범 1st Concert With Antonio (2001.10.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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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282B4> 왼쪽부터 노유민 • 이성진 • 천명훈[1] |
<colbgcolor=#F282B4><colcolor=#FFFFFF>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282B4> | NRG 엔알지 |
그룹명 | NRG |
엔알지 | |
장르 | 댄스, 발라드, 힙합, 유로비트 |
데뷔 | 1997년 10월 28일 (데뷔일로부터 [dday(1997-10-28)]일째, [age(1997-10-28)]주년) |
데뷔 음반 |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FFF,#191919;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F282BA" [[New Radiancy Group| New Radiancy Group ]] |
팬덤 | 천재일우 |
공식색 | 분홍색 [2] |
사이트 | | | | | [3]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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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F282B4> {{{#FFFFFF 문성훈 • 이성진 • 김환성†[5] • 노유민 • 천명훈}}}[6] |
1997년 10월 28일에 데뷔한 대한민국의 보이그룹.
1996년 이성진, 천명훈의 듀오로 데뷔한 '하모하모'[7]에 멤버[8]가 추가되면서 이름 역시 교체된 것이다. 소방차의 멤버 정원관과 김태형이 함께 프로듀싱했다. NRG의 뜻은 'New Radiancy Group' 즉, '새롭게 빛나는 찬란한 그룹'이다.[9]
2. 멤버
이성진 | 천명훈 | 노유민 | 문성훈 | 김환성† |
1977년 2월 5일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리더 메인보컬 | 1978년 4월 6일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부리더 리드보컬[10] 리드래퍼[11] 메인댄서 | 1980년 10월 12일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서브보컬 리드댄서 | 1980년 10월 15일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메인래퍼 서브보컬 | 1981년 2월 14일 ~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서브보컬 서브래퍼 막내 |
NRG는 무대에서 활발한 멤버 간의 동선 이동[12], 덤블링, 격한 안무, 미소년의 이미지[13].등으로 유명했다.[14][15]
1997년 12월,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해준 1집 <할 수 있어> 무대 클립이다. <할 수 있어> 무대 중 그나마 덜 격한 무대다.[16]
[youtube(YpFow9uUlik)
그 유명한 1집 <티파니에서 아침을> 라이브 클립. [17]
1998년 8월 7일 발표된, 2집 <사랑만들기>의 무대이다. [18] [19][20][21]
1998년 8월 7일 발표된, 2집 후속곡 <Messenger>의 라이브 클립.[22] NRG의 노래 가운데 <Messenger>의 안무가 가장 격하다.[23] 중간 간주 부분에 나오는 공중으로 붕 떴다가 떨어진 뒤 단체로 전갈 춤을 추는 장면과 천명훈의 비보잉[24], 활발한 무대 동선 등이 특징이다. NRG는 이 곡으로 중국 진출에 크게 성공하게 된다.
1998년 12월 19일 발표된, SBS 인기가요에서 해준 캐롤 앨범 Season's Greetings <우리만의 세상>의 무대 장면이다. NRG 특유의 덤블링은 없지만 여전히 쉴 틈 없는 격한 안무를 볼 수 있다.
3. 활동
자세한 내용은 NRG(아이돌)/활동 문서 참고하십시오.4. 음반 목록
자세한 내용은 NRG(아이돌)/음반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5. 팬덤
자세한 내용은 천재일우(NRG) 문서 참고하십시오.6. 수상 경력
6.1. 시상식
<rowcolor=#FFFFFF> 날짜 | 시상식 | 부문 | 작품 |
1998년 | |||
12월 6일 | KMTV 가요대전 | 인기 가수상 | 할 수 있어 |
12월 18일 | 제9회 서울가요대상 | 신인 가수상 | |
12월 27일 | SBS 가요대전 | 남자 신인상 | |
2001년 | |||
11월 23일 |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 아시안 뷰어’s 리퀘스트상 | 비(悲) |
2003년 | |||
12월 10일 |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 올해의 가수상 | Hit Song |
12월 5일 | 제18회 골든디스크상 | 본상 | |
12월 29일 | SBS 가요대전 | ||
12월 30일 | KBS 가요대상 | 청소년 부문 올해의 가수상 | |
12월 31일 | MBC 10대 가수가요제 | 10대 가수상 | |
2004년 | |||
10월 13일 | 중국 국영 중앙인민방송국 한국가수시상식 | 최고남자가수상 |
6.2. 가요 프로그램 1위
총 5회 1위 | |||
<rowcolor=#FFFFFF> 날짜 | 방송명 | 곡명 | 비고 |
2003년 | |||
3월 22일 | MBC 음악캠프 | Hit Song (5회) | 첫 1위 |
3월 22일 | KMTV 쇼! 뮤직탱크 | 1위 | |
3월 23일 | SBS 인기가요 | 뮤티즌송 | |
3월 29일 | KMTV 쇼! 뮤직탱크 | 1위 (2주 연속) | |
4월 13일 | SBS 인기가요 | 뮤티즌송 (통산 2주) |
데뷔한지 1달만에 1위 통보를 받았던 할 수 있어는 IMF로 순위제가 폐지 되었으므로 정식 1위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7. 여담
- NRG는 데뷔부터 꽃미남, 귀여운 미소년 컨셉으로 시작했고, 강한 남자 컨셉이었던 기존 1세대 아이돌과는 차별화를 두었다.[25] H.O.T., 젝스키스, 그리고 후발주자들인 god, 신화 등 다른 1세대 남성 아이돌 그룹 중에서 신화와 더불어 오랫동안 해체되지 않고 활동을 해온 케이스이며, 데뷔 6년 차의 중견 그룹이 되어서야 1위를 하는 등 나름대로 근성 있게 활동해온 그룹이다. 또한 1집이 40만장, 2집이 2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고 팬클럽 회원 수도 14만명 이상 총 음반 판매량은 정규 음반과 베스트 음반까지 합하면 124만장 이상으로 인기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중국, 대만 등에서도 기본 음반 판매량은 50만장대 유지, 특히 중국에서는 300만장 이상 판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는 H.O.T.보다 더 잘 나갔다.
- 멤버 자신들도 자기 그룹의 이름 뜻을 잘 모른다고 한다. 한 방송에서 자기 그룹 이름은 누룽지나 노른자의 약자일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댄스 음악 장르 Hi-NRG에서 따온 이름이다.
- god가 데뷔 전 역경이 많았다면 NRG는 데뷔 후에 역경을 많이 겪은 팀이다. 예능에서야 웃기는 얘기로 넘어가지만 사실 굉장히 절박하고 심각한 사건들을 겪어왔다. 무명 시절도 없었고 데뷔 때부터 인기가 많았지만 독보적이진 못했고 당시는 가요계 불공정 계약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였으며, 특히 아이돌 그룹은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너무 어린 나이에 바로 옆에서 활동했던 멤버 김환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충격을 겪었고, 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멤버들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어느 프로그램에 가도 '고생'하면 NRG가 압도적이었으며[26] 그러다 보니 NRG는 '비극적인 그룹'과 '예능 그룹'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공존하여 가진 묘한 그룹이 되었다.
- <할 수 있어>로 활동했던 1997년 S.E.S.와 함께 1위 후보에 오른 주에 IMF가 터지면서 가요 순위 프로그램이 모두 없어지고 아이돌의 복장 규정이 엄격해졌고[27] [28] 신인상을 받고 중국 진출을 성공하나 싶었지만 그나마도 불공정 계약으로 공정한 수익을 받지 못했고[29] 3집에서는 이성진과 천명훈이 탈퇴 당하고 앨범 성적은 저조했다. 여기까지는 다른 아이돌들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니 그렇다 쳐도 이듬해 막내 김환성이 사망하는 최악의 일이 발생한다. 이에 탈퇴했던 이성진과 천명훈이 다시 합류하지만 4집도 성적이 신통치 않아 팀은 벼랑 끝에 몰렸고[30] 변변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여느 실패한 아이돌들처럼 힘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기 위해[31] 이성진이 예능 프로그램과 시트콤 등에서 필사적으로 활동하면서[32] 근근히 명을 이어오다가 멤버들의 참여도가 가장 높은 5집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야말로 고생 끝의 보답을 받는다. 하지만 2005년도 이후로는 "NRG가 아이돌이었나?"할 정도로 관심에서 멀어져 예능 그룹으로 평가절하되고[33]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미지가 하락한다. 제대로 아이돌로서 재평가를 받게 된 건 거의 10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
- 말 그대로 환상, 판타지였던 다른 아이돌들에 비해 고생이 많았고 평가절하가 많이 됐다 보니 천명훈은 20세기 미소년에서도 위축된 모습을 보여 팬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20세기 미소년의 다른 멤버들은 천명훈에게 기죽을 필요가 뭐가 있냐며 격려해 주기도 했다.
- 데뷔 당시가 아이돌들의 립싱크 논란으로 인한 라이브 붐이 일었던 시기였음에 따라 라이브 무대에서 대부분 립싱크를 하지 않았다. 이 탓에 실수도 간간히 있었는데, 당대에는 오히려 가벼운 실수는 라이브의 증거/격한 안무를 생각하면 가끔 일어날 수도 있는 일 정도로 치부되긴 해서 별 말은 없었다.
- 멤버들 간의 팀워크가 꽤나 좋은 편이었다. 사실, 멤버 변화 등의 변수를 엄격하게 따지지만 않는다면[34] 공백기는 부득이하게 길었지만 해체를 겪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1세대 아이돌 중에선 신화보다도 최장수 팀이라 할 수 있다. 신화와는 데뷔일의 간극이 불과 약 5개월이다. (NRG: 1997년 10월 28일 / 신화: 1998년 3월 24일)
- 격한 안무와 함께 무대에서 매우 활발한 멤버 간의 위치 이동 또한 볼 수 있다.
- NRG 하면 덤블링이라는 이미지는 상당히 강해서, NRG 활동 당시였던 1998년에 출간된 만화 플라이 하이의 한국어판에서는 체조부 신입부원들이 물구나무 서기 연습을 하는 곳에서 상급생인 사나다 토시히코가 덤블링을 하며 잘난 체를 하자 신입생들을 봐주던 역시 상급생인 우치다 미노루가 "지가 무슨 NRG라고..."라며 마뜩찮아 하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원문 역시 아마도 아이돌을 예[35]로 들었을 것이므로 적절한 번역일 텐데, 어쨌든 당시의 NRG에 대한 이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NRG가 1위를 차지했던 5집 당시보다 IMF였음에도 무려 40만 장이 팔린 1집 활동 당시를 리즈 시절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즉, 1집 시절이 제1의 전성기라면 5집은 제2의 전성기라는 것이다.[36]
- NRG는 신화와 데뷔 연도가 비슷해서인지 신화 멤버들과 꽤나 친한 편이었다고 한다.[37][38] 참고로, H.O.T., S.E.S., 코요태 멤버들과도 친했다. NRG 멤버들과 친한 연예인.
- 2집 타이틀곡 <사랑만들기> 컨셉이 유니섹스였다. 따지고 보면 원조 유니섹스 컨셉을 한 그룹이다.
- 당시 아이돌 그룹 중 특이하게 그룹명 사이에 점을 찍는 것에 민감하지 않은 그룹이다. 음원, 음반에는 N.R.G, 그 외에는 NRG라고 적는다.
- 멤버들 모두 여동생이 없다.[39]
- 클릭비와 함께 예능 '용호상박'을 찍기도 했다.
용호상박 1 용호상박 2 용호상박 3 용호상박 4
용호상박 5 용호상박 6 용호상박 7 용호상박 8
용호상박 9 용호상박 10 용호상박 11 용호상박 12
용호상박 13 용호상박 14 용호상박 15
용호상박 16 용호상박 17 용호상박 18
- 노유민이 예능에 출연하여, 과거 NRG 시절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을 때는 한 달에 1억 5천만 원을 벌었다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천명훈이 그 말은 방송의 재미를 위해 과장된 것이라고 밝혔다.출처[40] 그도 그럴게 중국 활동은 부당계약 때문에 소속사를 포함해서 NRG 전체가 돈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소속사조차 계약에서 철저히 을이였기 때문에 소속사가 많이 떼간 것도 아니다. 그나마 음반 판매는 크게 떼먹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돈을 벌 수는 있었다.
- 2021년 5월 4일경, 갑자기 유튜브 등지에서 NRG의 음원을 들을 수 없게 되었으나, 5월 13일부터 다시 1, 2, 3집의 모든 곡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앨범 커버를 교체하기 위해 기존 음원을 내리고 새로 올린 듯. 곧 4, 5집 등의 음원도 올라올 듯 하다.
- 과거이긴[41] 하지만 NRG의 전신인 하모하모의 멤버였던 이성진과 천명훈은 예능프로에서 하모하모를 언급하면 흑역사 취급하고 쑥스러워한다. 물론 콘서트[42]에선 예능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달리 열심히 잘 부르고 4인[43]의 조합으로 인해서 더욱더 사운드적이거나 퍼포먼스적인 면에서 퀄리티가 높아진다. 사실, 상술했다시피 노유민과 문성훈은 NRG 데뷔 전 하모하모의 백댄서로 활동했다.
- 멤버 전체가 스타 초고수였다고 한다. 한창 스타가 인기를 끌던 90년대 말 연예인배 스타크래프트 리그 1999-2000 시즌에 NRG 멤버들이 나와 무패 전승 우승을 달성하며 어나더 레벨로 군림했던 것은 유명한 일이었다.[44] 노유민이 아트록스 프로가 된 것도 스타 프로계는 경쟁이 너무 심해서 틈새 시장을 파고들 생각으로 한 것이었다.
8. 관련 링크
9. 둘러보기
[1] 데뷔 20주년 컴백을 앞두고 새로이 공개된 자켓 사진. 문성훈은 당시 탈퇴 상태였다.[2] 후에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공식색도 분홍색으로 정해지자 논란이 일어났다.[3] 2017년 10월 17일에 개설되었다.[4] 2017년 10월 25일에 개설되었는데 채널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인지 구독자 수는 극히 낮으며 이전에 발매했었던 앨범들의 뮤직 비디오가 업로드되어 있다. 다만 하루 뮤직 비디오는 SBS I&M에 의해 차단되어있는 상태.[5] 2집 타이틀곡 <사랑만들기> 활동 당시 긴 앞머리를 넘기기 위해 스타일리스트가 특수 제작한 하얀 머리띠를 쓰고 다녔다. 덕분에 머리띠가 잘 어울리는 남자 아이돌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머리띠를 본 한 사람은 '머리띠를 벗는 순간 앞머리가 확 벗겨져 비명을 지를 법한 머리띠.'라고 표현했다.[6] 마찬가지로 2집 타이틀 곡 <사랑만들기> 활동 당시. 참고로 이때 천명훈은 앞머리를 넘기기 위해 테를 착용했는데 녹이 슬었고, 은으로 바꿨더니 이번엔 은이 시커멓게 변했다고, 당시 콘셉트가 세일러 문이었다고 한다.[7] 하모하모는 동남방언으로 "그래, 그래"라는 뜻이라고 방송에서 직접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8] 뮤직팩토리의 연습생 겸 백댄서였던 노유민, 문성훈 그리고 깨비깨비 해체 후 천명훈의 추천으로 영입된 김환성.[9] 사실 유럽에서 시작된 댄스 음악 장르인 하이에너지를 뜻하는 Hi-NRG에 끼워 맞춘 이름이다.[10] 이성진 다음으로 보컬 비중이 많고 이성진이 후렴을 맡는다면 천명훈은 하이라이트와 브릿지를 주로 담당한다.[11] 문성훈 탈퇴 이후 메인래퍼가 되었으나, 문성훈의 재합류로 인해 이후 그룹 활동이 재개된다면 포지션이 어떻게 될지는 불명.[12] NRG의 무대영상을 보면 동선 이동을 할 때 멤버들이 무대에서 뛰어다닌다.[13] 당시 큰 인기를 끌던 H.O.T.와 젝스키스의 경우 강한 남자 컨셉을 밀고 나갔기 때문에 다른 그룹들도 인기를 얻고자 강한 컨셉으로 나와서 NRG의 미소년 이미지는 가히 이례적이었다.[14] 실제로 <할 수 있어>, <사랑만들기>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가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말며 노래를 부르거나 뒷배경에 웬 뜬금없는 비행선이 날아다니고 멤버들이 노래에 맞춰 안무를 추는데 몸이 번쩍번쩍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할 수 있어> 뮤직비디오 <사랑만들기> 뮤직비디오[15] 다만, 2집 <Messenger>와 5집 <용서>, <하루> 뮤직비디오는 나름대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Messenger>는 두 가지 버전으로 나왔고, <용서>와 <하루>는 당시 이성진이 출연한 영화 '건달과 계란'이라는 영화를 요약하여 하나로 이어지는 스토리이다.[16] 안무가 매우 격하다.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일단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하고 중간 간주 부분과 끝에 있는 덤블링이 압권. 실제 20세기 미소년에서 춤 실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럽던 문희준이 "이게 뭐가 어렵냐"면서 춤을 췄지만, 결국 쉴 틈이 없다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은지원은 젝스키스 활동 당시 다른 그룹은 다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NRG는 덤블링 때문에 너무 힘들 것 같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의 덤블링은 실제로 당시의 은퇴한 국가대표 체조 선수에게 배웠다고 한다. 당시 음악 프로그램 무대는 급하게 만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라 덤블링을 하다가 손에 못이 박히기도 했었다고 한다. 실제로, 춤이 격하고 중간의 덤블링 때문에 라이브할 때는 핸드마이크를 놓치거나 밟아서 망가뜨리는 실수도 자주 했다. 실제 천명훈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데뷔 무대에서 마이크를 놓쳐 잡으려고 했으며 다행히도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바람에 나중엔 음악 방송 관계자들이 NRG에게 좋은 마이크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17] 1집 활동 당시 이 원곡 버전보다는 리믹스 버전으로 더 많이 활동했는데 리믹스 버전은 후에 2집에 수록되었다.[18] <사랑만들기>에 나온 그치? 맞지? NRG!라는 가사는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유명한 가사다.[19] NRG의 특징인 덤블링이 여전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할 수 있어> 때처럼 모든 무대에서 덤블링을 하지는 않았다.[20] 이건 아예 리믹스 버전으로만 활동했다. Hey Ya의 인트로 부분에 사랑만들기 리믹스 버전을 합친 것.[21] 보면 알겠지만 무대 의상이 땀복이다. 잘 빨지도 않아서 멤버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천명훈은 의상 교체를 요구하다가, 홧김에 옷을 찢어버렸고, 이로 인해 결국 강제 탈퇴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22] 간주 부분이 다른 TV 리믹스 버전으로 활동했다.[23] 아이돌의 립싱크 문제가 제기되던 시기여서 NRG는 대부분을 라이브로 했다. 이 탓에 실수도 꽤 잦았는데, 당시엔 립싱크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잘한 실수는 넘어가주던 때였다.[24] 당시 천명훈은 비보잉 유망주였다.[25] 하지만 Messenger, 구원 등 강한 전사 컨셉 또한 소화한 적이 있다.[26] 한 방송에서는 '방송을 때려치고 싶었을 것 같은 사람'으로 이미지 투표를 하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 NRG가 선정되었고 MC들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27] 실제로 당시 활동 사진을 보면 몇몇 무대에서 김환성이 가발을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28] 이때 교통사고를 겪기도 하고 덤블링을 하다가 손에 못이 박히거나 왼쪽 손목이 부러지고 척추를 다치기도 했다. <할 수 있어> 활동 중반부 영상에서 이성진을 보면 안무에서 왼손을 쓰지 못하는데 부러졌기 때문이다.[29] 당시 계약이 무대 수익금 중 9가 공연사, 1을 NRG가 갖는 불공평한 식이었다고 하며 심지어 그 1마저도 소속사와 다섯 명이서 나눠 가져야 했다.[30] 사실 추모 앨범이라서 대중적인 성공을 바라볼 수 있는 앨범은 아니었다. 다만 탈퇴했던 멤버들이 다시 돌아왔고, NRG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대중에 보여주는 데 의의가 있다.[31] 현재 1세대 남성 아이돌 중에서 지금까지 이름이 남겨진 그룹은 거의 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1군들이다. 1.5군 중에는 NRG 외에 클릭비, 더 깊게 가면 태사자와 OPPA 외에는 없다시피 하다.[32] 김환성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1년 반 만에 NRG가 예능 이미지를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멤버의 죽음으로 인한 비극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예능 위주로 활발하게 활동했기 때문. 비극 이미지를 씻어내지 못했다면 무슨 활동을 하고 어떤 노래를 내도 우울하고 애잔한 동정받는 그룹이 되어 도리어 장기적인 활동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완전히 유쾌한 그룹으로 선회한 것이 승부수가 된 것이다. 어찌 보면 현재의 레이디스 코드의 과제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레이디스 코드의 경우 멤버들이 본인 입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속사인 폴라리스엔터테인먼트가 리세와 은비 사후 사실상 레이디스 코드를 토사구팽했는지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없어졌으며 치유 3부작 또한 두 번째 앨범 이후로 아무런 소식 없이 데뷔 5주년 기념 V LIVE <CODE#R3BORN>으로 초라하게 마무리된 상태다. 그러다 보니 레이디스 코드는 NRG와 달리 밝은 이미지를 회복하지 못한 채 그대로 비극 이미지가 고착화된 감이 있다. 2021년 멤버 소정이 싱어게인에 나와 "레이디스 코드 활동을 하면서 웃어도 되나?"라는 생각을 가지며 활동해왔다고.[33] 지금이야 '자체 프로듀싱이 가능한 아이돌'하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우상이 되지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NRG는 멤버 모두가 자체 프로듀싱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별로 부각되지 못했다. 천명훈이 작곡 능력으로 주목받게 된 것도 2013년 이후의 이야기. 심지어 천명훈은 이성진과 자신이 탈퇴 후 발매된 NRG 3집에도 수록곡 <구원>과 <Dark Angel>을 작곡해 주었다.[34] 그 신화조차도 SM시절 정규 4집 활동 때 앤디가 빠져서 5인조가 된 변화가 있을 정도로, 멤버 변화는 아이돌 업계에 있어서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지만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 또한 아니다.[35] 당시 일본의 남성 아이돌의 대세였던 쟈니스 사무소 소속 가수들 상당수가 덤블링이 가능했다. TOKIO 같은 경우 NRG와 마찬가지로 멤버 전원 백덤블링이 가능하다.[36] 다만 보이그룹 중 가장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던 시기는 2003년이 맞다. 1997년~1998년 당시에는 H.O.T.의 인기 때문에 원탑 위치까지는 올라갈 수 없었다.[37] 신화는 NRG가 1집 활동 막바지 때 데뷔했다. 당시 신화랑 NRG는 숙소 생활을 했었는데 서로의 숙소가 가까워서 신화가 NRG 멤버들이 스케줄을 나가 숙소에 없으면 NRG 숙소에 잠입하여 먹을 것과 모자, 액세서리를 훔쳐갔고 NRG는 신화가 숙소에 없으면 신화 숙소를 털어갔다고 한다.[38] 실제로도 NRG 앨범 Thanks to에 신화 멤버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으며 당시 신화 앨범 Thanks to에도 NRG 멤버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후에 김환성 추모식에도 신화 멤버들이 참석했었다.[39] 여자 형제가 있지만 장남 겸 막내이거나, 아니면 2남 1녀 중 막내이며, 아예 3남 중 둘째인 경우도 있다.[40] 원문: 노유민 씨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얼마 전 한 방송에서 'NRG 시절 한 달에 1억 5천만 원씩 벌었다'고 밝혀 화제가 됐어요. // 천명훈: “유민이 때문에 자꾸 오해를 듣게 돼 죽겠어요. 당시 사장님이 유민이만 따로 챙겨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그렇게 받아본 적이 없어요. 종종 한 번씩 큰 돈을 받기도 했고 철없이 펑펑 쓰기도 했지만 유민이 말처럼 그렇게 벌진 못했어요. 방송의 재미 때문에 종종 말을 부풀리는 경우가 있는데 못 하게 말려야 돼요."[41] 예능 활동이 활발했던 2000년대 초중반[42] 2000~2001년 추모 콘서트(팡팡), 2003년 5집 콘서트(빠삐용)[43] 첫 콘서트 기준으로 이미 고인인 김환성은 제외[44] 결승전이 업타운 상대였는데, 성우의 발언에 의하면 가볍게 찍어눌렀으리라 추측된다. 참고로 003 시절이라 천명훈과 이성진은 없었는데, 천명훈은 스타를 좋아했다는 말은 있고(스갤 문체인 삼체를 대중에게 퍼트린 장본인이니 최소 스갤러임은 확실했다.), 이성진은 5집 전까지는 심각한 컴맹이라 컴퓨터를 다룰 줄 전혀 몰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