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 |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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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咸和帝명군이 되어보세! 4부의 등장인물.
원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국가인 후송(大宋)의 제9대 황제. 휘는 조심창.
1813년생으로 헌종(獻宗) 영강제 조형윤과 태후 송씨의 아들이자 조형윤의 유일한 적자이다.
2. 작중 행적
성품이 어리석고 무능하여 부황에게 폐태자될 뻔했으나 모친 송씨가 부황을 암살하여 23세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 후에도 국정은 다 모친에게 맡기고는 주지육림에만 빠져,[1] 황제로서 하는 일이라고는 며칠에 한 번 편전에 나와 도장만 찍어주는 것밖에는 없는 암군이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온 나라가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도 국정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고 주지육림에 몰두하면서 나라 상황도 송태후의 탓으로 돌려서 그녀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무려 10년이 넘게 이따위 식으로 사는 모습을 본 송태후는 자신이 저런 한심한 아들을 낳았고 즉위시켰다는 것을 자책하고 차라리 조심원을 지지했어야 한다고 후회한다.일을 안 하지만 하면 안 되는 일을 딱히 벌이지도 않는 게으름뱅이 스타일이라 임칙서는 송태후가 권력을 장악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전권을 받아 국가를 대신 운영하며 나라가 무난하게 굴러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송태후가 자신의 딸인 영화공주를 대한 황태자 이창의 후궁으로 보내려는 것에 대해 "대한과 전쟁을 하면 대한군이 후송의 도시를 불태우고 대한과 우호를 맺으면 대한이 후송의 재물을 쓸어가니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는 말을 남긴 거 보면 정말로 금치산자 수준으로 멍청하거나 무능한 건 아니고 그냥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게으른 것이다.[2]
가뭄에 콩 나듯 한번씩은 국정에 흥미를 보이며 직접 나서기도 하는데, 정말 아주아주 가끔가다 한번 있는 일이라 큰 의미는 없다. 그 드문 사례가 섬라 관련. 무슨 변덕이었는지 서류를 봤다가 대국의 자존심이 있지 번국을 포기할 수 없다고 임칙서를 압박해서 협상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미 대한과 외교 관계 개선을 해둔 뒤라서 어찌어찌 섬라의 지배권을 대한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받아가는데 성공하면서 어쩌다가 외교에 일조했다.
여색에 몰두하며 700명이 넘는 후궁을 두고 후궁이 아닌 궁녀는 4000명 정도 존재하며 80여 명에 달하는 자식을 보았지만[3] 전부 서자로 황후 진씨 사이에서 본 적자는 없고, 그렇다고 서자 중 하나를 골라 황태자로 책봉하지도 않는 상태라 후계 구도가 불안하다. 주위에서는 잇따른 요청을 무릅쓰고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는 걸 보고 함화제가 폐위당할 것을 우려해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웃긴 건 중국사에서는 이보다 스케일이 큰 엽색 행각 사례가 있어서 재석은 조예, 사마염, 만력제보다 스케일이 작네(...)라고 생각했고, 군주가 일 잘 하면 700명이든 7000명이든 무슨 상관이냐며 함화제가 일을 안 하고 암군 노릇을 하고 있는 것만 깠다.
결국 송태후의 인내심도 재위 17년차가 되자 한계를 맞이하여, 월왕 조심원과 손을 잡고 함화제를 폐위하고 함화제의 7남인 제왕 조경환을 다음 황제로 옹립시킬 것을 결심한다. 당시 송태후의 나이도 60이 넘어서 여러모로 한계였기 때문.
이복동생이 자신을 끌어내리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침전인 승화전에 들이닥치자, 순순히 선위 교서에 도장을 찍어준다. 자신이 낳은 자식들 중에 대한 태황 흥선제(재석)처럼 명군의 자질을 가진 황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태자 책봉을 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다음 황제로 옹립될 조경환이 똑똑하긴 하나 야비하고 편협한 인간임을 경고한다. 이후 송태후가 그래도 친아들인 그를 차마 죽이거나 유배 보낼 수 없어 명목상 상황으로서 후궁에 유폐시키고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3. 떡밥
"잘하고 있군. 일이란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시키면 되는 것이지. 아우도 알겠는가? 일은 하고 싶어 싶어 하고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맡으면 되는 일이지, 굳이 군주라는 이유로 별 흥미도 없는 일에 매달릴 거 없다는 뜻일세. 아우도 이제 여생을 편히 좀 지내게."
마치 환갑이 이미 넘은 늙은이 같은 말이었다.[4]
폐위되기 직전 조심원과 독대하면서 남긴 의미심장한 발언 때문에 사실 이 인간도 빙의자임이 거의 확실한 광덕제와 마찬가지로 빙의자였고, 미래 지식을 활용해 나라를 발전시켜 보려 했으나 이미 재석이 수백 년 전부터 작업질을 해놓는 바람에 뭘 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라 그냥 달관하고 황제로서 실컷 즐기다 가려는 거 아니냐는 추측이 생겼다. 광덕제 역시 "귀찮은 업무같은 건 신하들한테 일임하면 된다"며 함화제와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재석에게 한 적이 있다.마치 환갑이 이미 넘은 늙은이 같은 말이었다.[4]
한국 웹소설의 나위살 주인공들이 입으로는 나위살을 외치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의 또는 타의로 갈려나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중국 웹소설의 나위살 주인공은 문자 그대로 극한의 마이웨이를 밟는 경향이 있는데 함화제가 정말로 중국인 빙환트가 맞다면 함화제의 극단적인 나위살 성향은 그런 중국 웹소설 주인공의 경향성에서 따온 것일 수도 있다. 광덕제는 나위살을 외치면서도 정말 필요한 일은 재석을 부려서라도 거의 다 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더더욱 두드러진다.
황제는 안남에 대해 매우 안 좋은 인식을 드러냈다. 조심원이 보내준 안남 미인 네 명은 괜찮았다고 평하면서도 안남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서는 무척 좋지 않게 보았다. (중략) 안남인들을 평소에 접한 일도 없었을 황제가 대체 어디에서 이런 편견을 습득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함화제는 다른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번국을 늘리는 일 하나만큼은 유독 크게 관심을 보였다.
만사에 관심 없는 사람이 유독 안남 문제에는 적극 개입했고 안남에 대해서 강한 편견을 내비치는데 현대 중국인이 베트남에 갖는 사고 방식을 생각하면 이 행보가 자연스러워진다. 중국-베트남 관계는 그리스-튀르키예 관계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가능한, 서로 진심으로 혐오하는 사이기 때문. 중국인 시선에서 베트남은 한무제 시절부터 속국에 베트남전 때 도와줬더니 통일하자마자 뒤통수치고 전쟁으로 중국을 패퇴시킨 배은망덕한 놈이고, 베트남인 입장에서 중국은 고대부터 사사건건 간섭에 침략을 일삼더니 기어이 탱크 앞세워 쳐들어오고 스프래틀리 군도에서 직접적인 영토 분쟁 중인 가장 큰 안보 위협이다."제왕이라. 똑똑하기는 해도 본성이 야비하고 편협한 놈일 텐데···. 모후께서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시군. 그따위 녀석을 다음 황제로 꼽으시다니. 하기야 짐을 부황의 후계자로 세우신 데서부터 모후의 안목이 심히 뛰어나다는 사실은 알 수 있겠지만."
"폐하께서 진작에 태자를 책봉해 후사를 확실히 하셨다면 이럴 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왜 여러 친왕 중 재능을 갖춘 이를 골라 태자로 책봉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제가 될 재능을 갖춘 놈이 하나도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아직 어린 녀석 중에 행여나 괜찮은 놈이 있지 않을까 해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네. 모후께서 재촉한다고 해서 아무나 태자로 책봉했으면, 그저 오늘 같은 날이 더 빨리 왔을 뿐이었겠지."
"자질을 갖춘 황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게으름뱅이거나, 멍청하거나, 몸이 약하거나, 말만 많거나, 귀가 막혔거나, 아까 자네가 다음 황제가 될 거라고 했던 제왕 그놈처럼 음흉하고 욕심만 많거나··· 하여간 완벽한 군주의 재목이라고 할 만한 놈이 없었네. 그래서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지. 모후께서는 한의 광덕제를 거론하시면서 태자에게 모든 정사를 일임한 뒤 나는 놀면 된다는 식으로도 유혹하셨는데, 선조께서 물려주신 이 나라를 말아먹을 게 분명한 놈들에게 이 중대한 자리를 물려줄 수는 없었네."
수많은 자식을 낳고 자기 아들들의 기질과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것을 보아 함화제의 엽색 행각은 단순히 색을 밝혀서가 아니라 20세기가 실로 환란한 난세가 될 것임을 알고 있어 미래의 환난을 이겨낼 만한 아들이 나올 때까지 가챠를 돌리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면 송태후나 임칙서 같은 당대인들과 후계자 선정에 대한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5] 자식만 80명이 넘는다는 언급을 보면 안남 명명제가 78명의 아들을 가졌듯이 아들을 많이 가지다 보면 광덕제가 그랬듯이 쓸 만한 아들 하나쯤 나올 거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폐하께서 진작에 태자를 책봉해 후사를 확실히 하셨다면 이럴 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왜 여러 친왕 중 재능을 갖춘 이를 골라 태자로 책봉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제가 될 재능을 갖춘 놈이 하나도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아직 어린 녀석 중에 행여나 괜찮은 놈이 있지 않을까 해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네. 모후께서 재촉한다고 해서 아무나 태자로 책봉했으면, 그저 오늘 같은 날이 더 빨리 왔을 뿐이었겠지."
"자질을 갖춘 황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게으름뱅이거나, 멍청하거나, 몸이 약하거나, 말만 많거나, 귀가 막혔거나, 아까 자네가 다음 황제가 될 거라고 했던 제왕 그놈처럼 음흉하고 욕심만 많거나··· 하여간 완벽한 군주의 재목이라고 할 만한 놈이 없었네. 그래서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지. 모후께서는 한의 광덕제를 거론하시면서 태자에게 모든 정사를 일임한 뒤 나는 놀면 된다는 식으로도 유혹하셨는데, 선조께서 물려주신 이 나라를 말아먹을 게 분명한 놈들에게 이 중대한 자리를 물려줄 수는 없었네."
4. 기타
독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평이 나쁘지는 않은 인간인데 2부의 만력제보다는 훨씬 낫지 않냐(...)는 평을 듣기 때문. 파업황제 만력제와 달리 어쨌든 도장을 찍어 주기는 하고,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기는 해도 송휘종처럼 국가 재정을 파탄내는 수준까지는 안 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대 송나라 백성들도 함화제의 처신을 까기는 해도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을 하지는 않았다.[1] 그나마 유부녀는 건드리지 않는 등 선은 지킨다.[2] 이 때문인지 몰라도 적통 공주를 타국에 후궁으로 넘긴 굴욕적인 상황임에도 신료들은 송태후보다 함화제를 더 깠다고 한다.[3] 죽은 자식까지 포함해도 100명은 안 된다고 하는데, 이 분야의 본좌급인 안남 완씨 왕조에는 못 미친다.[4] 당시 함화제의 나이는 40세 전후였다.[5] 20세기는 그야말로 혼란기로, 유능한 군주의 노력만으로 해결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군주정이었다가 폐위당하거나 공화정화된 나라의 마지막 군주들을 보면 유능한데 시대가 너무 미쳐돌아가서 못 버티고 나가리된 인물이 더 많고, 이 때문에 공화정화된 뒤에 더 헬게이트가 열린 나라도 많다. 당연하지만 중국도 예외는 아니라서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뒤 중국이 완전히 평화로워진 것은 1970년대 말로,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마오쩌둥이 삽질을 안 했으면 20년은 더 빨랐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