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5:48:18

경조(명군이 되어보세!)

대한 황실 1대조
경조 | 景祖
조선 제14대 국왕
경종 | 景宗
경종□□□□□□□□□효대왕
景宗□□□□□□□□□孝大王
경조□□□□□□□효태황
景祖□□□□□□□孝太皇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경종(景宗) → 경조(景祖)
시호 조선 □□□□□□□효대왕
(□□□□□□□孝大王)
대한 □□□□□□□효태황
(□□□□□□□孝太皇)
□□(□□)[B]
출생 1572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즉위 1608년 12월 22일 (음력 11월 16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626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D]
능묘 □릉(□陵)
재위 조선 왕세자
??[3] ~ 1608년 12월 22일
(음력 ?? ~ 1608년 11월 16일)
조선 국왕 대리청정
1588년, 1590년, 1608년
조선 국왕
1608년 12월 22일 ~ 1626년
(음력 1608년 11월 16일 ~ 16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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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colbgcolor=#ffffff,#1f2023>전주(全州)
성(𤁑)
전호 □□전(□□殿)
부모 부황 장조, 모후 의인황후
부인 인열황후 김씨(仁烈皇后 金氏),[4] 소훈 박씨 등 }}}}}}}}}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명군이 되어보세! 2부의 등장인물.

2부의 이재석이 사용하는 몸인 경성군과 의인왕후 김씨의 아들로, 2부에서 이재석의 빙의 시기가 늦은 편이라 빙의했을 때는 이미 태어나 있었다.

3부 시점에서는 고인으로 생전에 있었던 일이 언급된다. 생전에는 조선 경종대왕이었지만 사후 아들이 대한 태황(大韓太皇)으로 칭제건원하면서 경조태황으로 추존되었다.

2. 작중 행적

경성군과 중전 김씨 사이에서 낳은 세자로 재석이 빙의한 시점에 11세. 재석은 "아직 세자가 완전히 성리학적으로 머리가 굳어버리기 전에 빙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아침 세자와 대화하며 실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심어주려 노력하고 있다.

무자호란 때 친정을 나선 재석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며 역모를 부추기는 대간들을 모조리 잡아넣는다.

재석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부왕의 별다른 지시 없이도 공납의 폐해를 정확히 인지하고 대동법을 유지하도록 하는 등 실리주의적 사고방식과 유능한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세자가 요절하지 않는 한 이 세계관에서 조선의 미래는 희망찰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독자들도 "경성군에게서 어떻게 이런 아들이 나온 거냐"는 반응이 많다.[5] 세자가 야심이 대단하긴 하지만, 반역을 일으키진 않는다고 한다.
무자호란이 끝난 뒤 대리청정을 끝내고 다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상희에게 수학을, 로카넬라 신부에게 그리스어·라틴어·서양 고전을 배우고 있다. 전부 잘 배우고 있다는 걸 보면 상당한 천재인 듯하다. 다만, 당시 조선인의 한계로 명나라를 진심으로 섬기고[6] 서양인들을 오랑캐로 생각하는 모습도 보인다.

왜란이 난 뒤 재석이 친정을 가면 다시 대리청정을 맡을 예정이다.

아버지가 바뀐 게 천만다행으로 경성군 밑에서 자랐다면 능력도 못 피우고 유교 탈레반이나 성격파탄자로 자랐거나,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재석도 처음에는 세자를 자신의 후계자로만 생각했지만 세자가 자신의 교육을 잘 따라와 주자 친자식처럼 정이 많이 든 듯하다.

명나라 사신 이지충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물자 원조를 해주겠다"고 하자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우리 조선 맘이지"라고 하며 명나라를 최대한 뜯어먹을 생각을 하는 등 잔머리는 이미 재석 수준에 이르렀다. 유럽 선교사들이 평하기를 '무척 영특하고 과감하며 정치적으로 이득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젊은이'라며 네로 황제를 떠올린다.

다만 이후 재석과 상의 없이 우에스기군과 인질 교환 교섭을 시도하고 실패, 강릉 백성들이 왜적 치하에서 만족한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인증해버리고 국왕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실책을 저지른다. 상당히 유능하지만 아직 어리다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한 듯.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태도를 보이고 즉각 재석에게 보고해서 재석도 넘어가기로 한다.

이후 재석이 복귀하여 다시 정치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재석과 대화에서 이것에 대한 서운함을 대놓고 말하며 대화를 나눌 정도의 신뢰를 확보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아무리 세자래도 이 정도로 솔직한 발언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 될 수도 있지만, 재석이 세자의 권위를 챙겨주는 것은 이미 유명했고 세자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결코 용납하지 않고 대리청정도 여러 번 맡기면서 경험을 쌓아주고 했기에 이 정도의 깊은 신뢰가 생겨 이런 대화도 목숨 걱정 없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혼 후 8년간 세자빈과 첩에게서 딸을 둘 보았으나 아직 아들은 없다. 어머니 유전자를 많이 받은 듯하고, 재석이 운동도 많이 시켜서, 아버지 경성군보다 키도 커졌고 건장해져서 옛날 이장곤이 떠오를 정도라고 한다.

을미동정이 조선의 승리로 끝난 직후에 드디어 결혼 10년 만에 첫 아들을 낳는다. 처음엔 미숙한 면이 있는 왕세자였지만 이런 저런 일들을 겪다 보니 이 시점에서 재석이 '이방원 Mk-2'라고 할 정도로 숙련된 정치가가 되고 있다.

아버지 몰래 다이샨과 밀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건주위가 화북을 차지하는 것을 돕는 대가로 만주를 할양받겠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걸리기는 했지만 세자에게는 다행히도 재석은 넘어가 주었고, 이 밀약은 다이샨이 원 역사와 달리 홍타이지에게 밀려나지 않고 누르하치 사후 건주위를 홍타이지와 분할상속받은 뒤 명나라 멸망 이후 화북으로 진입해 청나라를 세울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7]

이후 나온 것에 따르면 사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경성군의 꼴통 성향을 싫어했으며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좋다면서 기뻐했다.

재석이 사망한 후 37세 나이에 즉위한다. 즉위 직후 선왕의 묘호를 종을 붙이냐 조를 붙이냐는 논쟁에 조를 붙이도록 하여 장조라는 묘호를 올렸다. 공이 크지만 종도 조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신하가 많았는데 성이 조로 결정하고 밀어붙였다.[8]

즉위한 후 싫어해도 간언을 듣기는 하던 재석과 달리 대들면 삼족을 멸해버리겠다는 태도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9] 정통성 있는 세자에서 즉위한 것도 있지만 재석이 세자의 권위를 생전부터 워낙 잘 챙겨준 탓에 권위가 드높았고, 실무도 여러 번 맡아보았으며 무엇보다 국왕에게 타국에서도 공포로 여길 강력한 군권이 있기에 재석이 죽고 난 후 자리를 순식간에 잡을 수 있었다. 재석도 왕권이 막강했지만, 본인의 업적에서 기반된 것이지만 이성의 경우는 아예 국왕의 적자인 세자에서 즉위한 케이스라 정통성이 다르며 그 아들인 이연은 아예 원손에서부터 시작해 세자를 거쳐서 즉위했기에 더욱 크다.[10]

매제인 다이샨과 밀약을 유지하며 만력제가 죽고 인간쓰레기 주상순이 황위에 올라 명나라에 농민반란이 일어나면 약속대로 건주가 화북을, 조선이 요서와 요동을 차지하자는 계획을 지속하고, 만약 건주가 배신하면 산동반도를 점령하고 건주도 쳐 없애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다만 나중에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여기까지 가지는 않았다.

7년 주기 견서사 파견을 유지하고 증기기관 사용을 철저히 비밀로 하는 등 전반적으로 장조의 유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였으며, 장조 대에 확장된 영토들의 내실을 다지고 행정 권력과 사법 권력의 분리 조치를 더 체계화하여 전문 법률가인 율관과 대송인 제도를 창설하고, 노비 소유주에게 노비세를 물리는 등 작지만 의미 있는 개혁 조치들을 지속했다.

1626년에 54세로 승하하여 경종(景宗)대왕의 묘호를 받았지만, 사후 아들 선조 건원제가 명나라 멸망 이후 칭제건원하면서 경조(景祖)태황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가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 바람에 경조 생전에는 건주가 중원 입관을 못하여 칭제건원과 요동 진출이라는 장조의 유훈은 경조의 아들 선조 대에 가서야 이뤄진다. 그 대신 평화를 누리며 장조가 크게 확장시킨 조선의 국력 배양에 전념했다고 한다.

본인이 인내심 발휘한 것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전쟁할 곳이 없었다. 만력제에게 은혜를 입은 조선이 명과 전쟁하는 패륜을 벌일 수는 없는데 명이 경조 생전에 망하지 않았고, 일본과는 우호국이 되었고, 그보다 남쪽의 필리핀은 미주와 대남도 개척도 걸음마 뗀 마당에 뻗칠 수도 없을 뿐더러 선왕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준 스페인령이었다. 코딱지 만한 유구는 이미 보호국인데 선왕의 조치를 뒤집고 일본과 우호관계까지 손상시키며 합병한다면 동의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내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덕분에 아들이 칭제건원할 수 있는 국력의 기반이 되었으니 제 역할을 다한 셈이다.

혼자서 영토를 2배 가까이 뻥튀기한 장조, 칭제건원을 한 선조에 비해 화끈한 업적은 없어서 후대에는 일반인들에겐 명군 아버지와 명군 아들 사이의 범군으로 여겨지지만, 역사학자들에게는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장조 시절에 이미 당장 확장할 만한 곳은 다 차지한 상황이고, 지나치게 빠른 확장을 했기에 경조 시기는 추가 확장보다는 새로 확보한 영토의 내실을 다지는 것에 주력할 시기였다. 장조에게서 물려받은 아시아 역사상 최강의 군대를 손에 쥐고 있었기에 무리한 영토확장 욕심을 냈을 법도 한데 그걸 참고 내치에 집중했다는 것이 오히려 대단한 부분이다.

특이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학질의 원인에 대한 논란에 관심을 갖고 죄수들로 실험을 해서 모기가 원인임을 밝혀냈다고 한다.

양응룡의 난 때 진안군이 사기당해 사온 가짜 장팔사모와 짝을 맞추기 위해 성절사를 통해 가짜 청룡언월도를 구해서 탕춘대성에 장팔사모와 함께 잘 걸어놓았다. 그 후 4부에서 김좌근이 청나라에서 사기를 당해 쌍고검을 사오면서 삼국지 세트가 완성된다.

3. 기타

시호는 원 역사의 경종(景宗)과 같지만, 나이가 임해군(1572년생)과 같고 광해군(1575년생)보다 3살 연상, 정원군(1580년생)보다 8살 연상인 데다 재위기간이 광해군~인조 초기라서 실제로는 광해군에 대응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원 역사와 동일한 묘호를 썼을 경우 정원대원군이 원종대왕으로 추존되었으므로 원종대왕이 된다.[11]

나이와 별개로 인조의 요소도 가지고 있다. 원 역사에서 문종대왕의 처는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지만 본작에서 경종의 처 김씨는 원 역사 인종의 정비인 인열왕후의 시호를 사용했고, 나이가 인조 세대였던 아들 선조 건원제와 달리 손자인 선조인 열조 연가제가 늦둥이라 인조의 손자였던 현종과 동세대이기 때문이다. 다만 경조의 아들인 건원제의 왕비가 칭제건원한 직후 사망해 황후를 새로 들여 열조 연가제를 낳았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작가가 오류를 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12]

원 역사에서 나이와 재위기간이 대응되는 광해군과 설정상 7촌 조카이다. 본작에서는 무종(연산군) 사후 무종의 아들 인종이 즉위하였고, 인종의 아들 명종이 즉위하여 1대가 더 벌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무종의 대가 단절되자 원 역사 중종이었던 진성대군의 증손자가 즉위하게 되면서 1대가 더 내려간 것이다. 설정상 경종의 증조부 창녕군은 진성대군과 원 역사 단경왕후 신씨의 아들인데, 장조와 5촌 당숙인 덕흥군의 아들들과 나이가 비슷하다는 설정이 있고 덕흥군이 중종과 42세 차이가 났음을 고려하면 창녕군과 덕흥군이 부자지간 수준으로 나이 차이가 나서 이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 광해군 : 성종-중종-덕흥대원군-선조-광해군
  • 경종 : 성종-진성대군(중종)-창녕군-은성대원군-장조-경종


[B] [D] [3] 재석 빙의 시점인 1582년 이전.[4] 좌의정을 지낸 김모의 손녀. 연배를 따져보면 1520년생인 김귀영의 손녀로 추정.[5] 작가에 의하면 중전의 유전자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모계 유전자의 승리.[6] 이건 세자 된 입장에서 부왕에게 성리학자로서 상식적인 수준의 답변을 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7] 다이샨은 이 시기에서 어머니가 죽고 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적차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몽골 귀족을 어머니로 둔 홍타이지에게 밀려난 상태였으며, 마땅한 가신단도 없는 아웃사이더 신세였다. 원 역사에서 이 때문에 홍타이지에게 밀려났던 것으로, 작중에서 인질로 보내진 것도 이런 처지 때문이었다. 만일 다이샨이 재석의 사위가 되고 세자와 밀약을맺지 않았으면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높다.[8] 실제로 신하들은 선왕 묘호를 한 끗발 낮아 보이는 걸 지지한 뒤 선왕의 아들인 새 왕이 그보다 위상 높은 묘호로 결정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부왕에 대한 효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왕의 권위를 높여야 물려받은 자신의 권위도 높아진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다. 이 때문에 효성 지극한 문종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와 사이 좋았다고 할 수 없는 광해군도 묘호에는 신경 썼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원래 조는 정말 드물게 사용한 중국과 달리 조를 지나치게 남용한 경향이 있었다.[9] 물론 그렇다고 대숙청을 벌였다거나 그런 수준은 아니다.[10] 이 차이를 단종 복권으로 비교할 수 있는데 재석은 정통성 문제 때문에 단종을 복권하고 싶어도 후폭풍 때문에 할 수가 없으며, 세자인 이성도 정통성면에서 재석보다 나아도 쉽지 않으나 손자인 이연은 단종을 복권할 수 있을 정도로 더욱 크다고 비교했다.[11] 이 경우 아들이 칭제건원했을 때 원조(元祖)가 되었을 듯하다.[12] 작중에서 선조 건원제의 두 황후의 시호는 아예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원 역사 인조와 동일할 경우 인렬황후(仁烈皇后)와 장렬황후(莊烈皇后)였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