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4 19:12:04

조개옥

파일:조개옥.pn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94년 9월 9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하패계 체부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
사망 1950년 7월 15일 (향년 55세)
경기도 김포군 (現 경기도 김포시)[4]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260호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47판-1면-71호
본관 순창 조씨[5]
송평(頌平)
축숭(祝嵩 또는 祝崇)
부모 아버지 조태영, 어머니 고령 박씨
형제자매 1남 1녀 중 외아들
배우자 김창기
학력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 / 학사)
서훈 1980년 대통령표창 추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군사 경력
임관 보정군관학교 (8기)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4기)
복무 국민혁명군
1924년 ~ 1940년
대한민국 육군
1947년 5월 16일 ~ 1950년 7월 15일
최종 계급 중교 (국민혁명군)
중령 (대한민국 육군)
참전 6.25 전쟁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3.1. 야인시대
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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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경찰, 군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4년 9월 9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하패계 체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6]에서 아버지 조태영(趙泰永, 1874. 7. 13 ~ 1910. 7. 14)[7]과 어머니 고령 박씨(1870. 10. 27 ~ 1930. 10. 26)[8]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태영은 충청북도 음성군 일대에서 천 석이 넘게 농사를 짓는 대지주였다고 하는데, 조개옥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후 양친이 논밭을 팔아 그의 활동자금을 돕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느라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고 한다.#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6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는데, 일본 유학시절 쑨원삼민주의 및 투철한 애국심에 감화되어 졸업 후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국민혁명군에 입대하였으며, 1917년에는 후난성에 있던 군사교육기관인 강무당(講武堂) 보병과를 수료하고 후난 제1사 제1단부(第一團部) 부관(副官)에 임명되어 복무하였다. 1920년경에는 보정군관학교 제8기 포병과에 입학하였고 1922년 보정군관학교 졸업 후 1924년부터 우페이푸·김동식 등이 거느린 화북성 독군(督軍)에 배속되어 상위(上尉)에까지 승진했다.

한편, 1923년 10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군 양성을 위해 김구를 회장으로 하는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고 중국 각지에 있는 조선인 장교들에게 조선인 청년들의 훈련알선을 시달하기 시작했는데, 1924년 6월경에는 조개옥이 있던 화북군에 채원개·조석구(趙錫九) 등 50여 명의 조선인 청년을 뤄양 강무당에 유학시키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이때부터 그 또한 국민혁명군 장교로서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면서 본격적으로 광복군 창설을 위해 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9년 펑위샹 휘하 서북군의 작전참모로 활약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으로 관동군에 밀려 국민혁명군이 중국 변방으로 쫓겨가자 그 또한 한때 외몽골 지방에서 중국군 조직의 일종인 도통서(都統署)의 장교로 관동군과 싸웠다. 1933년에는 항일독립 제3로(第三路) 사령(司令)으로 복무하였다.#

1934년부터는 황푸군관학교난징 중앙군 육군대학에서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1935년경 국민혁명군 중교(中校)로 진급했으며, 1940년경 러허성에서 항일민병대를 조직해 사령관에 취임했다가 곧 군대를 퇴직하였다.

1940년 국민혁명군에서 은퇴한 후에는 부인 김해 김씨 김창기(金昌基, 1907. 11. 21 ~ 1991. 6. 19)[9]와 함께 상업에 종사했으며, 1945년까지 상하이에서 장사를 하며 지내다가 8.15 광복 직후 귀국하였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성북지구 치안대장을 역임했다가 같은 해 이승만의 추천으로 경찰공무원에 입직하여 11월 6일 초대 경기도 경찰부장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경무국장 조병옥과 이름이 비슷한 탓에 족벌주의에 의한 낙하산 인사라는 오명을 받기도 하고[10], 쑨원이라는 명사와의 인연을 강조한 것이 도리어 중국군 중장이라는 가짜 장군의 오명을 쓰는 단초를 마련, 결국 여러 의혹을 낳은 채 11일 만인 11월 17일 사퇴했다.

경찰계를 은퇴한 후에는 군문(軍門)으로 옮겨갔는데,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가 개교하자 중국군 출신 장교들에 대한 추천권한을 위임받아 이성가, 유해준(兪海濬) 등을 1기 입교생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1947년 5월 16일 육군사관학교 4기 특별반으로 입교하여 4개월 훈련을 수료한 뒤 같은 해 9월 10일 졸업하고 임관했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1949년 대한민국 호국군 참모장에 오르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중령[11]으로 참전했다가 7월 15일 경기도 김포군(현 김포시)에서 조선인민군과 교전 중에 전사했다.

사후 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1994년 10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도 그를 기리는 위패가 봉안되었다.

3. 대중매체

3.1.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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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처



[1] 본명은 조윤식(趙潤植)이며 이 이름으로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2] 장제스의 이름인 장개석(蔣介石)에서 따온 이름으로, 다만 돌(石)보다는 옥(玉)이 낫다고 생각해서 조개옥으로 지었다고 한다.[3] 이명으로는 조중악(趙仲岳)을 썼다.[4]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같은 날 충청남도 대전부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안토당공파 28세 식(植) 항렬.[6] 원적지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이다.[7] 초명 조영태(趙永泰).[8] 박희식(朴熙植)의 딸이다.[9] 김제헌(金濟獻)의 딸이다.[10] 실제 조병옥은 한양 조씨, 조개옥은 순창 조씨여서 잘못된 소문이었다.[11] 군번 107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