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워커의 수상 및 영예 | ||||||||||||||||||||||||||||||||||||||||||||||||||||||||||||||||||||||||||||||||||||||||||||||||||||||||||||||||||||||||||||||||||||||||||||||||||||||||||||||||||||||||||||||||||||||||||||||||||||||
|
미국의 농구인 | ||
| ||
<colbgcolor=#eeeeee,#191919> 제럴드 워커 Gerald Walker | ||
출생 | 1973년 12월 28일 ([age(1973-12-28)]세)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4cm | |
종교 | 이슬람[1] | |
포지션 | 농구선수(포인트 가드/ 은퇴) | |
학력 |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1992~1996) | |
등번호 | 8[2], 3[3] | |
KBL 소속팀 | 안양 SBS 스타즈 (1997, 1998~1999) |
[clearfix]
1. 개요
KBL 초창기를 대표하는 외국인 선수로 화려한 테크닉과 엄청난 점프를 국내 팬들에게 선보였다.2. KBL 입성 전
중산층 가정의 둘째로 태어나 5살 위의 누나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했지만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천부적인 스피드를 바탕으로 미식축구팀에 입단해 와이드리시버를 막는 코너백을 맡았다. 그러다가 다시 농구부에 들어오면서 순발력과 점프력을 살린 소질을 겸비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덩크슛을 따라하다가 골대의 백보드를 깨뜨리는 무서운 괴력을 보이며 칭찬을 받았다.
이후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오클라호마 대학교 등 유명 대학 명문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집에서 가깝고 곧바로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 대학교로 진학해 신입생 때부터 팀의 주전 포인트 가드이자 주득점원으로 활약했지만 재학기간 동안 팀 성적이 별로라 NCAA 토너먼트에는 한 차례도 나서지 못했다. 그래도 USF의 레전드급 선수로서 USF 통산 득점 순위 6위[4], 야투 시도 1위, 스틸 1위 및 어시스트 3위를 기록했다.USF 역대기록 특히 3학년이던 1993-94 시즌에는 전미 스틸 2위(평균 3.9개)를 기록했는데, 같은 시즌 스틸 4위에 제이슨 키드, 5위가 케리 키틀즈(196cm, SG)였다. 워커의 대학 시절 기록을 참조하면 좋다.
대학 졸업 후, NBA 마이너 리그격인 CBA에서 뛰다가 다시 NBA 드래프트에 도전했지만 탄력과 스피드를 자랑했음에도 불구하고 40%의 필드골 성공률과 30%가 안되는 3점슛 탓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KBL 원년시즌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외국인 드래프트에 지원하여 전체 2순위[5] 안양 SBS 스타즈에 지명된다.
3. KBL 시절
1997년 원년시즌 당시 안양 SBS에는 국가대표 포인트가드 출신 오성식이 있었지만, 김동광 감독은 트라이아웃 때 보여준 워커의 어마무시한 탄력과 공격전개력을 더 높이 샀고, 오성식을 슈팅가드 자리로 밀어내면서 워커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내세웠다. 원년시즌 안양 SBS는 제럴드 워커와 센터 데이먼 존슨(196cm), 그리고 저승사자 정재근이 강력한 3각편대를 이루며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원주 나래 블루버드와 시즌 내내 3강구도를 이루었고, 시즌 막판 4연승을 달리며 정규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 4강에 직행한다.역사적인 1997년 2월 1일 KBL 출범 개막전에도 출전했다. 국내 농구에서 처음으로 용병이 뛰는 만큼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워커는 그간 NBA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현란한 개인기를 선보여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KBL 1호 어시스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6]
워커는 1997년 2월 19일 대전 현대 다이냇 전에서 KBL 출범 사상 최초의 트리플 더블(21득점-11리바-13어시)을 기록하기도 했고, 약 2주후 인천 대우 제우스 전에서는 31득점-8리바-7어시스트를 올림과 동시에 KBL 20시즌 동안 깨지지 않고 있는 가로채기 14개를 기록하며 KBL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거기에 프로농구 출범 후 첫 올스타전에서도 워커는 현란한 개인기와 덩크슛을 선보이며 초대 올스타전 MVP에 올랐고 시즌 종료 후엔 원년시즌 KBL 베스트 파이브에도 뽑히면서, 1997년 원년시즌 가장 주목받는 외국인 선수로 손꼽히게 된다.
하지만 정작 플레이오프 4강전 원주 나래와의 대결에선 상대의 집중수비에 막히면서 정규리그와 달리 부진한 플레이를 자주 보여주었고, 홈 2연전에선 매치업 상대였던 칼 레이 해리스에게 평균 35점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승 3패로 밀리는 상황에서 열린 5차전 잠실 중립경기에서, 워커는 그야말로 끔찍한 부진에 빠지면서 야투율 18%을 찍고 플레이오프 탈락의 원흉이 되고 만다. 팀의 플레이오프 탈락에도 불구하고 김동광 감독은 워커와 재계약을 원했지만, NBA에 도전하겠다는 열망이 컸던 워커는 재계약을 거부, 미국 하부리그인 USBL팀 Kansas Cagerz와 계약한다.
한 시즌을 건너뛰고 1998-99 시즌, 워커는 다시 KBL 외국인 트라이아웃을 노크하고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친정팀 안양 SBS에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2년전 아직 아마추어 티를 못 벗었던 KBL은 워커가 떠난 1년 동안 그 수준이 한껏 올라가버렸고[7] 워커는 더 이상 KBL에서 압도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개인공격력은 여전히 뛰어났고 부족했던 3점 슛 능력까지 끌어올렸지만(27.3% → 35.3%), 2년전 토종 에이스였던 정재근이 금세 노쇠해졌고 새로 영입된 슈터 김상식도 잠잠하면서, 워커가 팀내 득점/어시스트/스틸 1위에 리바운드 2위를 찍으며 맹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은 7위로 플레이오프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 안양 SBS는 두 외국인선수 워커, 데릴 프루와의 재계약을 모두 포기했고, 워커는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4. KBL 이후
KBL을 떠난 워커는 미국 하부리그와 남미 리그, 이란 리그 등을 전전하며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꾸준히 NBA 진출을 타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5. 플레이 스타일
서전트 45인치(114.3cm)라는 엄청난 탄력 덕분에 속공상황은 물론 세트오펜스에서도 덩크슛을 밥 먹듯 보여주었고, 그전까지 탄력하면 전희철, 정재근이 짱이라던 국내 농구팬들에게 멘붕에 가까운 충격을 선사했다. 거기에 화려한 드리블과 노룩 패스, 리바운드 후 코스트 투 코스트 플레이를 너무도 손쉽게 해내는 바람에,하지만 90년대 후반 당시 한국농구 시스템 상 포인트 가드인 워커가 보여주는 개인기 위주의 플레이에 정작 같은 팀 선수들이 적응하지 못했고, 워커의 한 박자 빠른 패스를 받지 못해 턴오버로 연결되는 일이 잦았다. 당시 중계진들은 경기 해설은 안하고 워커의 개인플레이를 비난하기에 바빴고, 여기에 팬들마저 동참하면서 "우리의
6. 관련 문서
[1]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되는 율법을 지켰기에 SBS 구단에서도 식단에 신경을 썼지만,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라마단은 지키지 않았다.[2] SBS 1기 시절[3] SBS 2기 시절[4] 1위는 빌 카트라이트, 워커의 바로 뒤 7위가 레전설 빌 러셀옹이다.[5] 1순위는 부산 기아에 선발된 클리프 리드[6] 개막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KBL 항목 참고.[7] 물론 외국인 선수 수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