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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식(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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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065/2014/11/07/OSS505_0_99_20141107134803.jpg
이름 오성식(吳成植)
생년월일 1970년 9월 12일 ([age(1970-09-12)]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부산중앙고 - 연세대
포지션 가드
신체조건 182cm,83kg
프로입단 1995년 SBS
소속팀 상무 (군복무) (1993~1995)
SBS-안양 SBS 스타즈 (1995~1997)
창원 LG 세이커스 (1997~2002)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2002~2003)
서울 SK 나이츠 (2003~2004)
등번호 11[1], 00[2], 0[3], 1[4], 4[5]
국가대표팀 1993 자카르타 아시아선수권[6]
1994 토론토 세계선수권 /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1995 서울 아시아선수권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수상내역 1993-94 농구대잔치 신인상(실업)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
FIBA 아시아선수권 준우승 1회(95) / 3위 1회(93)
방송해설 MBC SPORTS+ (2011~2012)
종교 개신교

1. 개요2. 선수 시절
2.1. 고교 및 대학 시절2.2. 실업 및 프로 시절2.3. 국가대표
3. 은퇴 후4. 기타5.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2. 선수 시절

2.1. 고교 및 대학 시절

부산중앙고 졸업 당시 가드랭킹 1위, 전체랭킹 2위[7]로 치열한 스카우트 끝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한다. 운동 능력, 테크닉, 득점력을 고루 갖춘 가드로 연세대학교의 화려한 라인업[8]을 이끌고 당시 장신군단[9] 중앙대학교와 대학농구를 양분한다.

대학연맹전과 농구대잔치에서의 활약으로 3학년이던 1991년 고베 아시아선수권을 대비하여 당시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던 대표팀에 선발되나, 대표팀 훈련 중 허리 부상을 크게 입고 낙마한다. 이 시점부터 연세대학교의 중심은 이상민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으며, 원체 득점력도 좋았던 오성식은 부상에서 돌아온 후 2번으로 뛰는 경우가 많아졌다.

4학년 때에도 여전한 기량을 선보이며 팀을 92년 춘계연맹전 우승으로 이끌고 본인은 MVP까지 타지만, 바로 이 시점에 오성식은 유명했던 삼성전자SBS간의 스카우트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애초부터 삼성전자에서 오성식을 스카웃하려고 연세대나 오성식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기에 학교 측에서는 당연히 오성식이 삼성전자로 가는 줄 알았으나, 오성식 선수 본인이 무려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SBS행을 고집하는 바람에 당시 최희암 감독이 사표를 쓰고 (곧 복귀했다.) 연세대는 오성식의 선수 등록을 취소해 버리고 난리도 아니었다.[10] 이 바람에 오성식은 4학년 마지막 농구대잔치에 뛰지 못했다. 결국 출장 정지는 해제되었으나 연세대가 삼성전자의 눈치를 보느라 SBS로도 바로 못 가는 상황이 되었으며, 결국 오성식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상무에 입대하기로 결정한다.

2.2. 실업 및 프로 시절

93-94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상무 농구팀은 오성식을 필두로 정재근, 이창수, 표필상의 센터진에 김상식, 남경원 등 슈터를 대거 영입하여 역대 최강으로 불리웠다. 정규리그를 3위로 마감하고 (1위 연세대, 2위 기아자동차) 플레이오프 8강에서 현대전자, 4강에서 중앙대를 연파하고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올랐으나 상대는 기존의 호화멤버에 서장훈까지 입학한 정규리그 전승팀 연세대였으며, 결승전에서 3승 1패로 아쉽게 모교에 우승컵을 내주었다. 당시 결승전은 아직까지도 농구팬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며 정재근 - 서장훈의 골밑 대결[11] 만큼이나 오성식 - 이상민의 가드대결도 볼 만했다.

94-95 농구대잔치 때는 오성식을 제외한 기존 주전들이 모두 제대한 상태라 당시 사실상 오성식의 원맨팀이었다. 그러나 이상범, 김현주, 박재현, 이병률 등 무명에 가까운 선수들을 이끌고도 농구대잔치 정규리그를 6위(14팀중)까지 이끌 정도로 오성식의 기량이 특출났다. 팬들은 사실상 이 때가 오성식의 전성기였다고 이야기한다.

제대 후 SBS에 정식 입단한 오성식은 2년 전 상무를 농대 결승으로 이끌었던 멤버들[12]을 팀원으로 만나게 되어 SBS 돌풍을 예고하였다.[13] 하지만 당시 연세대, 고려대의 돌풍이 너무도 거셌고, 플레이오프에서는 기아자동차, 삼성전자의 노련미에 말려 매번 농구대잔치 결승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14] 농구대잔치 정규리그에서 다른 실업팀이나 대학팀들은 압살하면서도 고려대와 연세대 및 기아자동차에는 아예 상대도 안 되게 무너지는 한계를 보였으며, 이는 팀의 주축인 오성식과 정재근이 No.1급은 아니라는 평가를 듣게 만들었다.

1997년 KBL 출범 원년, 김동광 감독은 외인 드래프트에서 포인트 가드 제럴드 워커를 선발하여 1번을 맡기고 오성식을 2번으로 돌린다. On Ball Player 였던 오성식은 제럴드 워커 중심의 팀플레이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다음 시즌 창원 LG 세이커스로 전격 이적하면서 대학 선배였던 정재근, 이상범과 이별한다. 창원 LG에서의 첫 시즌에는 명지대 출신 루키 김태진이 깜짝 활약하면서 주전을 내주었으나, 김태진이 입대한 98-99시즌 다시 주전으로서 창원 LG를 이끌고 팀을 2년연속 플레이오프로 이끈다. 하지만 이 때도 팀의 공격은 특급외인 버나드 블런트 위주로 돌아갔고 오성식 특유의 플레이는 보여 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겨우 28세였지만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고, 00-01시즌 창원 LG가 조성원 - 에릭 이버츠 콤비의 활약 속에 창단 첫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할 당시 주전 1번이었지만 평균 출전시간은 겨우 20분이었고, 당시 김태환 감독은 오히려 조우현의 리딩 능력을 더 높이 사 조우현에게 1번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15] 00-01 시즌을 마치고 FA가 된 오성식은 연봉 1억 6천, 계약기간 3년의 조건으로 창원 LG와 재계약하나, 다음 시즌(01-02) 부터 창원 LG의 주전 1번은 완벽하게 조우현으로 넘어갔고 오성식은 박규현 등과 함께 식스맨으로 보직을 바꾼다.

02-03 시즌을 앞두고 오성식은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에 새로 부임한 최희암 감독의 요청에 따라 울산 모비스로 트레이드됐다.[16] 역시 트레이드를 통해 합류한 우지원과 함께 최희암 감독 시절 연세대의 영광을 재현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이미 전성기에서 내려온지 오래였던 오성식은 2년차 가드 전형수김태진에게도 밀려나 팀의 세 번째 포인트 가드가 되고 만다.

파일:오성식SK.jpg
03-04 시즌 개막전 오성식은 정재헌과 1:1 트레이드되어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하고, 식스맨으로 활약하다 이듬해 은퇴한다.

2.3. 국가대표

성인 국가대표팀 첫 발탁은 대학 3학년때인 1991년 고베 아시아선수권 때였다. (이때 연세대는 오성식 - 문경은 - 정재근 등 주전 3명이 차출되는 바람에 팀 전력에 큰 손실을 입고 상반기에 열린 춘계연맹전, 1991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타이틀을 모두 라이벌 중앙대에 내주고 만다.) 설레는 첫 발탁이었으나 국대 소집훈련 중 허리부상을 크게 입어 낙마하였고, 농구협회는 당시 90-91 농구대잔치 결승전에서의 폭력사태로 출장정지의 징계를 받은 허재의 징계를 해제하면서 그를 국대로 복귀시켰다.[17]

국가대표팀 데뷔무대는 1993 자카르타 아시아선수권이었다. 4강에서 중국에게 패해 최종 3위에 머문 한국은 아시아 2위까지 주어지는 세계선수권 티켓을 놓치게 되었으나, 2위였던 북한이 1차예선 최종전에서 조별순위 조작을 위해 타이완에 고의로 몰수패한 사실을 지적받아 FIBA로부터 출전권을 박탈당한 탓에 어부지리로 3위 한국이 세계선수권에 진출했다. 이후 1994 토론토 세계선수권, 1995 서울 아시아선수권, 1996 애틀랜타 올림픽까지 연속으로 출전하였는데, 대표팀 백코트에서는 부동의 주전인 강동희 - 허재 라인에 이어 이상민과 함께 두 번째 포인트 가드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상술했다시피 상무 시절까지가 본인의 전성기였고 제대후 눈에 띄게 기량이 하락하면서, 메이저 대회[18]로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이 마지막 대표팀 출전이었다. 애틀랜타 올림픽 두번째 경기 푸에르토리코 전은 나름 첫 승 제물로 삼은 팀과의 경기었고 심지어 전반을 52-51 한 점차로 리드하기까지 했는데, 엎치락뒤치락 하다 경기 막판에 스틸에 이은 원맨속공 찬스를 맞은 오성식이 노 마크 찬스임에도 갑자기 몸을 비틀어 백레이업을 시전하다 골을 놓치면서(수비 방해도 그닥 없었음에도...) TV앞에 많은 농구팬들이 탄식했고, 한국 대표팀은 결국 86-98로 역전패한다. 이후 대표팀은 7연패를 질주하며 최하위로 대회를 마무리...

3. 은퇴 후

서울 SK 나이츠창원 LG 세이커스에서 코치로 활동하였다.

SK 시절에는 김태환 감독과 김진 감독, 강양택 수석코치 그리고 김지홍 코치와 호흡을 맞추었고 LG 시절에는 강을준 감독과 김대의 수석코치와 호흡을 맞추었다.

하지만, 평가는 좋지 못했는데 두 구단의 프런트 친인사라는 비판이 따르기도 했다.

이후 2015년 KBL D리그 연합팀의 코치로 활동하였다.

4. 기타

00-01 4강 플레이오프 창원 LG - 청주 SK 전에서 연세대 3년 후배 석주일과의 충돌은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경기 중 돌파하는 청주 SK 소속 석주일을 수비하던 오성식이 공중에서 잡아채면서 석주일이 플로어에 떨어졌는데, 넘어졌다 일어난 석주일이 오성식에게 주먹을 쥐고 달려들며 쌍욕을 해대는 장면이 있었다. 황당해하는 오성식을 상대팀 서장훈이 위로하고, 석주일은 계속해서 분노에 끓어 팔딱팔딱 뛰는... 당시 석주일의 욕이 어찌나 찰졌던지 팬들이 더 당황할 정도였다. 이후 2014년 경 석주일이 본인이 진행하는 아프리카 방송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때 무릎 부상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는데, 오성식의 파울로 인해 발목인대가 거의 다 끊어져서 눈이 돌아갔다." 라고.. 하지만 별도의 사과의 제스처는 취하지 않았다.

2011년 경 MBC ESPN의 농구 해설위원으로 데뷔하였으나, 발음이 좋지 않고 경기 내용에 대한 전달력도 떨어져 그닥 인기있는 해설은 아니었으며, 2년 만에 교체된다. 김선형의 데뷔 시즌 경기에서 "제가 대학시절에 김선형 같은 플레이었습니다." 라는 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5. 관련 문서



[1] 안양 SBS 시절, 00-01 시즌~01-02 시즌 창원 LG 시절, 울산 모비스 시절[2] 97-98 시즌 창원 LG 시절[3] 98-99 시즌 창원 LG 시절[4] 99-00 시즌 창원 LG 시절[5] 서울 SK 시절[6] 국가대표로 첫 선발은 연세대학교 3학년이던 1991 고베 아시아선수권 때였으나, 대표팀 훈련 중 부상으로 낙마한 바 있다. 이 때 오성식의 대체 선수는 90-91 농구대잔치 폭력사태로 6개월 출전정지 상태였던 허재였다.[7] 1위는 휘문고의 장신센터 정경호(202cm)였다.[8] 1990년도 기준 오성식(2학년) - 이상범(3학년) - 문경은(1학년) - 정재근(3학년) - 김재훈(1학년)이 주전이었고, 이후 신입생으로 이상민이 입학한다.[9] 남경원, 김승기, 홍사붕 등이 가드진을 이끌었고 표필상(200cm), 정경호(202cm), 조동기(197cm) 등 당시로선 초장신인 센터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었다. 연세대의 더블포스트 정재근, 김재훈이 모두 193cm었던과 비교해 보면... 그러나 신장이 작은 정재근 - 김재훈의 기량 자체가 더 뛰어나다 보니 오히려 표필상 - 정경호 등에 우세한 경우가 많았다.[10] 연세대로서는 삼성전자로부터 지속적으로 금전적 지원을 받고 있는 상태였고(이 금전적 지원은 고스란히 고교생 리크루팅 비용으로 쓰였다. 서장훈이 3억, 현주엽이 4억 받고 각각 연세대와 고려대에 갔다는 말이 뜬소문이 아니었다.), 오성식이 룰을 깨 버리면 앞으로 삼성전자의 지원이 끊김은 물론, 앞으로 연세대 선수들이 삼성전자로 가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어 이러한 오버리액션을 했었다. KBL 출범 이후 전면 드래프트가 도입되면서 이런 일이 사라졌다.[11] 정재근의 서장훈을 앞에 두고 돌파후 인유어페이스를 찍었던 그 대회다.[12] 2년전인 93-94 농구대잔치 준우승을 이끌었던 상무 멤버 중 김상식(기업은행), 이창수(삼성전자)를 제외하면 모두 SBS 소속이었다. 오성식 - 정재근 - 남경원 - 표필상 - 이상범 등[13] 94-95 농대 기준 SBS의 주전은 중앙대 출신 신인 홍사붕을 제외하면 모두 93-94년도 상무 멤버였다. SBS가 1992년도에 창단하면서 당시 대학 최강이던 연세대, 중앙대 출신 졸업반들을 싹쓸이 했었는데(신생팀 창단 혜택) 이들이 2년차 때 동시에 입대해 버리면서 이렇게 되었다.[14] 94-95 농대에선 4강에서 문경은 - 김현준의 삼성전자에 1승 2패로 패퇴, 95-96 농대에선 정규리그 4위를 차지했지만 하필이면 8강에서 최강 기아자동차를 만나는 바람에 힘없이 탈락했다.[15] 덕분에 겨우 2년차였던 조우현은 00-01시즌 자신의 어시스트 커리어 하이기록(14.4득점-2.9리바-4.8어시)를 찍는다. 오성식의 기록은 5.5-2.2-4.8.[16] 1:1 트레이드 대상은 기아자동차의 프랜차이저 강동희였다!!! 지난 3년간 박수교가 이끌던 부산기아/울산 모비스팀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6위 - 9위 - 10위로 극도로 부진했고, 그 원인으로 박수교 감독의 무능함도 있었지만 팀의 주축이던 강동희김영만의 부진이 컸다.[19] 02-03 시즌을 앞두고 새로 부임한 연세대의 전설 최희암 감독은 팀의 체질개선을 시작하는데, 문제는 기존 기아자동차 출신의 전설들인 강동희, 김영만을 다 내치고 연세대 감독 시절 제자들인 오성식, 우지원으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당연히 기아자동차를 응원하던 팬들은 다 떨어져 나갔고 울산 모비스는 기아자동차와 아예 별개의 팀인 것처럼 인식되었다.[17] 90-91 농구대잔치 결승 2차전에서 현대전자 임달식 &김성욱과 기아자동차 허재 간 폭력이 일어났고 그 결과 허재, 김성욱은 6개월, 임달식은 1년 출전정지를 당한다.[18] 타이완 존스컵 및 각종 친선경기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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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특히 김영만은 부상 중에도 무리하게 계속 출전하다가 몸 상태가 최악이 되었고, 00-01시즌 대비 01-02시즌에서 평균득점이 무려 8점이 떨어졌다. (22.8 →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