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6-08-20 19:55:19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1. 주의2. 권 18
2.1. 즉위전기(卽位前紀)2.2. 원년 : 540년2.3. 2년 : 541년2.4. 3년 : 542년2.5. 4년 : 543년2.6. 5년 : 544년2.7. 6년 : 545년2.8. 7년 : 546년2.9. 8년 : 547년2.10. 9년 : 548년2.11. 10년 : 549년2.12. 11년 : 550년2.13. 12년 : 551년2.14. 13년 : 552년2.15. 14년 : 553년2.16. 15년 : 554년
3. 권 19
3.1. 16년 : 555년3.2. 17년 : 557년3.3. 18년 : 558년3.4. 21년 : 561년3.5. 22년 : 562년3.6. 23년 : 563년3.7. 26년 : 565년3.8. 28년 : 567년3.9. 30년 : 569년3.10. 31년 : 570년3.11. 32년 : 571년

일본서기
일본서기 선화기 일본서기 흥명기 일본서기 민달기

일본서기 권 18, 19 긴메이 덴노.

1. 주의

  • 일본서기의 내용은 고대 일본제국이랑 천황들의 위상을 드높히기 위해 천황중심주의적으로 기술된 사서이다. 특히 대외 외교, 국제관계 와 관련된 부분은 한국, 중국 사서들과의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서기의 내용만 보고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구나!"같은 생각을 가지지 마시길.
  • 일본어로 적힌 이름은 일본인이며, 한국어로 적혀있으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인명이다.
  • 백제인들의 이름을 보면 앞에 관직들이 보인다. 파견된 이들의 등급은 고덕 이상만이 보여진다. 16등급은 다음과 같다.
제1품 좌평(佐平) 내신좌평(內臣佐平) / 내두좌평(內頭佐平) / 내법좌평(內法佐平) /
위사좌평(衛士佐平) / 조정좌평(朝廷佐平) / 병관좌평(兵官佐平)
제2품 달솔(達率)
제3품 은솔
제4품 덕솔(德率)
제5품 한솔(扞率)
제6품 나솔(奈率)
제7품 장덕(將德)
제8품 시덕(施德)
제9품 고덕(固德)
제10품 계덕 (季德)
제11품 대덕(對德)
제12품 문독(文督)
제13품 무독(武督)
제14품 좌군(佐軍)
제15품 진무(振武)
제16품 극우(克虞)

2. 권 18

2.1. 즉위전기(卽位前紀)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天國排開廣庭天皇)는 워호도노스메라미코토(男大迹天皇)의 적자(嫡子)이다. 어머니는 타시라카노키사키(手白香皇后)라고 하는데, 덴노가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두었다. 덴노가 어릴 때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덴노께서 하타노오오스지(秦大津父)[1]라는 자를 총애하면, 커서 반드시 천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 사람을 보내어 널리 찾으니, 야마시로국(山背國) 키노코오리(紀郡)의 후사쿠사노사토(深草里)에서 찾아냈다. 성(姓)과 이름이 과연 꿈꾼 바와 같았다. 이에 매우 기뻐하며, 아직까지 없던 꿈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그대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고 물으니, (하타노오오스지는)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신(臣)이 이세(伊勢)에 가서 장사하고 돌아오는데, 산에서 두마리의 이리가 서로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과 맞딱뜨렸습니다. 곧 말에서 내려 입과 손을 씻고 기도하며, ‘너는 귀한 (神)인데 거친 행동을 즐기고 있다. 만일 사냥꾼을 만나면 잡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여, 억지로 싸움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피묻은 털을 씻어주고 놓아 보내 다같이 생명을 보전하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덴노가 말하길, “반드시 이것이 그 보답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까이에 두어 섬기게하고 총애함을 날로 새롭게하니, 크게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덴노가 즉위하자 대장성(大藏省)에 임명되었다.

4년 겨울 10월에 타케워히로쿠니오시타테노스메라미코토(武小廣國押盾天皇)가 죽었다. 황자인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는 군신에게 명하여 "나는 어리고 학식이 미천하여 아직 정사에 능하지 못하다." 야마다노 황후(山田皇后)는 모든 정무에 능통하시니 즉위하여 처리하시라 청하라"라고 하였다. 야마다노 황후는 놀라 사양하며 "첩은 은총을 입은 바가 산과 바다와 같습니다. 어려운 국정을 어찌 부녀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황자는 노인을 공경하시고 어린 자에게 인자하시며 현자에게는 예로써 대하십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셔서 일찍부터 칭송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성정이 관대하시어 힘써 주위를 안정시키신다 하십니다. 청컨대 여러 신하들은 빨리 제위에 오르시게 하여 천하에 군림하게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겨울 12년 경진삭 갑신에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가 덴노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는 천황이 대괴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황후를 높여서 황태후라 불렀다.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大連金村)와 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物部大連尾輿)를 대련으로 삼고,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蘇我 馬子宿禰)를 대신으로 삼은 것은 모두 예전과 같다.

2.2. 원년 : 540년

  • 봄 정월 15일 : 유사가 황후를 세우기를 청했다. "정비인 타케워히로쿠니오시타테노스메라미코토의 딸 이시히메(石姬)를 황후로 삼으라"라고 하였다. 황후는 2남 1녀를 낳았다. 맏이는 야타노타마카츠노오호에노미코(箭田珠勝大兄皇子)이고, 둘째는 오사타노누나쿠라노후토타마시키노미코토(譯語田渟中倉太珠敷尊)이라 하며, 막내는 카자누히노히메미코(笠縫皇女)라 한다.【또는 사타케노히메미코(狹田毛皇女)라 한다.】
  • 2월 : 백제인(百濟人) 기지부(己知部)가 투하하였다. 야마토노국(倭國) 소후노카미코호리(添上郡)의 야마무라(山村)[2]터전 살게 하니, 오늘날 야마무라의 코치후(己知部)의 선조이다.
  • 3월 : 에미시(蝦夷)와 하야토(準人)가 나란히 무리를 이끌고 귀부(歸附)하였다.
  • 가을 7월 14일 : 왜국의 시키노코오리(磯城郡) 시키시마(磯城嶋)로 도읍을 옮기고 이름을 시키시마노카나사시노미야(磯城嶋金刺宮)라 하였다.
  • 8월 : 고구려백제신라・임라[3](任那)가 함께 사신을 보내고, 아울러 공물을 바쳤다. 진인(秦人), 한인(漢人) 등 여러나라에서 투화하여 온 사람을 불러모아, 국군(國郡)에 안치하고 호적을 편성하였다. 진인(秦人)의 호수(戶數)가 총 7,053호였다. 오오쿠라노후비토(大藏掾)을 하다노도모노미야쓰코(秦伴造)로 삼았다.
  • 9월 5일 : (덴노가) 하후리츠노미야(難波祝津宮)에 행차하였다.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大連金村), 고세노오미이나모치(許勢臣稻持), 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物部大連尾輿) 등이 따라갔다. 덴노가 여러 신하에게,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신라를 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모노노베노 오오무라지 오코시 등이, “적은 군사로는 쉽게 칠 수 없습니다. 지난번 워호도노스메라미코토 6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려 임라의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네 현(縣)을 청하였는데, 오호토모 카나무라가 표에서 청한 대로 구하는 곳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新羅)의 원망이 여러 해 동안 쌓여 갔으니 가볍게 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때 오호토모 카나무라는 스미요시(住吉)의 집에 있으면서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 나아오지 않았다. 덴노는 아오미노오호토지(靑海夫人) 마가리코(勾子)를 보내 은근하게 위문하였다. 오호토모 카나무라는 두려워하여 사죄하면서, “신(臣)이 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 여러 신 등이 신이 임라를 멸망시켰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두려워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오호토모카나무라가 여러 보석으로) 장식한 을 아오미노오호토지에게 주어 후하게 접대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아오미노오호토지가 (덴노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덴노는 명령을 내려, “오랫동안 충성을 다하였으니, 여러 사람의 말을 근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드디어 허물삼지 않고 총애함이 더욱 깊었다. 이 해의 간지는 경신이다.

2.3. 2년 : 541년

  • 봄 3월 : 다섯 비(妃)를 들였다. 원비(元妃)는 (덴노의 부인인) 이시히메 황후의 동생으로 와카아야히메미코(稚綾姬皇女)라 하는데 이소노카미노미(石上皇子)를 낳았다. 다음은 황후의 동생으로 히카케노히메미코(日影皇女)라 한다.【여기서 황후의 동생이라고 함은 명확히 히노쿠마노타카타노스메라미코토(檜隈高田天皇)[4]의 딸이다. 그러나 후비로 이름이 나오고 있지만 모비(母妃)의 성과 황녀의 이름은 보이지 않으므로 어느 책에서 나온 것인지 알수가 없다. 후에 교감하는 자는 명확히 하라.】 쿠라노미코(倉皇子)를 낳았다. 다음은 소아대신도목숙녜의 딸로
  • 여름 4월 : 안라(安羅)의 차한기(次旱岐)[5] 이탄해(夷呑奚)・대불손(大不孫)・구치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 고전해(上首位 古殿奚), 졸마(卒麻)의 한기(旱岐), 산반해(散半奚)의 한기의 아들, 다라(多羅)의 하한기 이타(下旱岐 夷他), 사이기(斯二岐)의 한기의 아들, 자타(子他)의 한기 등이 임라의 일본부(日本府)의 키비노오미(吉備臣)【이름이 빠졌다】과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詔勅)을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임라의 한기들에게, “일본의 덴노가 명령한 바는 오로지 임라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임라를 다시 일으키겠는가. 어찌 각기 충성을 다하여 덴노의 마음을 받들어 펼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임라의 한기 등이, “전에 두세번 신라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도모하려는 뜻을 다시 신라에 이른다 하여도 여전히 대답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함께 사신을 보내어 덴노에게 아뢰어야 합니다. 임라를 재건하는 일은 대왕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공경하게 (왕의) 교지(敎旨)를 받드려 하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임라의 경계는 신라와 접해 있어서 탁순(卓淳)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였다【탁순등이라 함은 탁기탄(㖨己呑), 가라(加羅)를 말한다. 탁순(卓淳) 등의 나라와 같은 패망의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명왕(聖明王)은,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의 때에, 안라(安羅)가라(加羅)탁순(卓淳)의 한기(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서로 통교하여 친교를 두터이 맺어, 자제(子弟)의 나라로 여기고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신라에게 속임을 당하여 덴노를 노엽게 하고 임라를 한에 사무치게 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하부 중좌평 마로(下部 中佐平 麻鹵)[6], 성방 (城方)[7] 갑배매노(甲背昧奴)[8] 등을 보내어 가라에 나아가 임라의 일본부(日本府)에 모여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음을 두고 임라를 재건하려고 하는 일을 아침 저녁으로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덴노가 명령을 내려, ‘속히 임라(任那)를 재건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과 함께 계책을 모의하여 임라 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잘 생각하여야 한다. 또 임라의 경계에서 신라를 불러, (조칙을) 받들 것인가의 여부를 물어야겠다. 함께 사신을 보내어 덴노에 아뢰고 삼가 교시를 받들자. 만일 사자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신라가 틈을 엿보아 임라를 침략해 오면 나는 마땅히 가서 구원할 것이니 근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잘 방비하고 삼가 경계하기를 잊지 말라. 또한 그대들은 말하기를, 탁순(卓淳)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신라가 혼자 강하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탁기탄(㖨己呑)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임라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남가라(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卓淳)은 위・아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지녔는데, 군주가 혼자 항복하려고 신라에 내응하여,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살펴보니 삼국(三國)의 패망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옛적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청하여 임라와 백제를 쳤으나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는데[9], 신라가 어찌 혼자서 임라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덴노에게 의지하면 임라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 가을 7월 : 백제는 안라의 일본부(日本府)가 신라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前部 奈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나솔 선문(奈率 宣文), 중부 나솔 목례미순(中部 奈率 木眯淳), 기신 나솔(紀臣 奈率) 미마사(彌麻沙) 등을 보내【기신 나솔이라는 사람은 아마도 기신(紀臣)이 한(韓)의 여자를 얻어 낳은 자로, 백제에 머물러 나솔(奈率)이 된 사람일 것이다. 아버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모두 이와 비슷하다】,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라의 집사(執事)를 불러 임라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 일본부(安羅 日本府)의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10]가 신라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가부지비직(加不至費直)・아현이나사(阿賢移那斯)[11]・좌로 마도(佐魯麻都) 등’이라고 하였으나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은 임라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이 옛날의 한기(旱岐)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우리는 그대를 자제(子弟)로 여기고, 그대는 우리를 부형(父兄)으로 생각하며, 함께 덴노를 섬기고 함께 강적에게 항거하며,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왕실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선조가 엣날에 한기와 화친할 때의 말을 생각하면 해와 같이 밝음이 있다. 그 후 이웃과 삼가 우호를 닦아서 드디어 다른나라와 (관계가) 돈독하게 되었으니, 은혜가 골육보다 더하였다. 처음을 잘하고 끝도 좋아야 한다는 것은 과인이 항상 원하는 바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가벼이 헛된 말들을 하고 몇 해 사이에 한탄스럽게 뜻을 잃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옛날 사람들이 ‘후회막급이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이로구나. 위로 하늘에 다다르고 아래로 지하에 이르기까지 이제 신(神)에게 맹세컨대, 옛날의 허물을 고치겠으며, 하나도 숨김 없이 행할 바를 밝히겠다. 정성이 신령에 통하고 깊이 자기를 책하는 것은 역시 취할 만한 바가 있다. 듣건대 선대(先代)의 뒤를 계승한 자는 조상이 남긴 궤범을 이어받고, 선조의 업을 번성하게 하여 공훈을 이루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지금 선세(先世)의 화친한 우호를 받들고 삼가 덴노가 명령한 말에 따라, 신라에게 빼앗긴 나라인 남가라(南加羅)와 탁기탄(㖨己呑) 등을 취하여 본래대로 돌이켜 임라에 옮기고, 길이 부형(父兄)의 나라가 되어 항상 일본(日本)을 섬길 것이다. 이는 과인이 먹어도 맛이 없고 자도 자리가 편안치 못한 바이다. 지난 일을 뉘우쳐 오늘날을 경계하는 것이 힘써 생각할 바이다. 신라가 감언으로 속이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그대들은 망령되이 믿었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빠졌었다. 바야흐로 지금 임라의 경계는 신라(新羅)와 접하고 있으니, 항상 방비를 하여야 한다. 어찌 경계를 게을리할 것인가. 속이는 함정에 빠져 국가를 망하게 하며, 남에게 사로잡히게 될까 두려우니, 과인이 이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어 편안히 지낼 수 없다. 저으기 들으니 임라와 신라가 계책을 꾸미는 자리에 벌과 뱀이 괴이함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그것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대개 괴이한 조짐은 행동을 경계하는 것이며, 재난과 이변은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다. 곧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이고 조상이 징조를 보이는 것이니, 화가 이르른 다음에 후회하고, 멸망한 후에 부흥하기를 생각하여도 누가 미칠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가 나를 따라 덴노의 명령을 들으면 임라를 일으킬 수 있으니,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만약 본래의 땅을 길이 보존하고 원래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고 싶다면, 그 계략이 여기에 있으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성명왕(聖明王)이 다시 임라의 일본부에, “천황(天皇)이 명령하여,‘임라가 멸망하면 너희는 의지할 데가 없어질 것이고, 임라가 일어나면 너희는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마땅히 임라를 일으켜 세워 옛날과 같게 하여, 너희의 도움으로 삼고,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삼가 조칙을 받들고 나니 송구스러운 마음이 가슴에 가득차서,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임라를 융성시킬 것을 기약하였다. 영원히 덴노를 섬기기를 지난날과 같이 할 것이며, 먼저 앞의 일을 생각한 후에 편안히 쉴 것이다. 이제 일본부가 (덴노의) 조칙에 따라 임라(任那)를 구하면, 이는 덴노가 반드시 칭송하는 바가 될 것이며, 그대 자신도 당연히 포상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일본부의 경(卿) 등은 오랫동안 임라국에 머물러 있고, 신라의 경계와 가까이 접하고 있어서, 신라의 정세를 역시 알 것이다. (신라가) 임라를 해치고 일본을 막으려고 모의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단지 올해만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가까이는 백제를 경계하고, 멀리는 덴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신라는) 거짓으로 조정(日本)을 섬기고 거짓으로 임라와 화해했다. 이와 같이 (신라) 임라의 일본부를 기쁘게한 것은 아직 임라를 빼앗지 못했으므로 거짓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제 그 틈을 염탐하고 그 방비하지 못함을 엿보아, 한 번 군사를 일으켜 (임라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덴노가 조칙을 내려 남가라(南加羅), 탁기탄(㖨己呑)을 세우라고 권한 것은 단지 수십년 동안만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신라가 한결같이 명을 듣지 않는 것은 경들도 아는 바이다. 덴노의 조칙을 삼가 믿고 임라를 세우려고 하는 데 어찌 이와 같은가. 경들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임라국을 멸하고 덴노를 욕되게 할까 두렵다. 경(卿)들은 그것을 경계하고 남에게 속지 말라”라고 말하였다.

2.4. 3년 : 542년

  • 가을 7월 : 백제가 기신 나솔(紀臣 奈率) 미마사(彌麻沙), 중부 기솔(中部 奈率) 근련(己連)을 보내어 부한(下韓)[12] 과 임라(任那)의 정사[13]를 아뢰고, 아울러 표(表)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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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4년 : 543년

  • 여름 4월 : 백제의 기신 나솔(紀臣 奈率) 미마사(彌麻沙) 등이 물러갔다.
  • 가을 9월 :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전부 나솔(前部 奈率) 진모귀문(眞牟貴文), 호덕(護德)[14] 기주기루(己州己婁)와 물부 시덕(物部 施德) 마기모(麻奇牟) 등을 보내어, 부남(扶南)[15]의 재물과 노비(奴) 2명(2口)을 바쳤다.
  • 겨울 11월 8일 : 츠모리노무라지(津守連)을 보내어 백제에 명령하기를, “임라의 부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郡令)과 성주(城主)[16]는 일본부에 귀속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선포하여, “그대가 여러번 표(表)를 올려 꼭 임라를 세우겠다고 말한 것이 10여년이 되었다. 표에서 아뢴 바는 이와 같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대저 임라는 그대 나라의 동량(棟梁)이다. 만일 동량이 부러지면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짐의 걱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는 모름지기 빨리 세우도록 하라. 그대가 만약 빨리 임라를 세운다면,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가와치노아타이는 이미 윗글에 보인다】 등은 자연히 물러나게 될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 날 성명왕이 조칙을 듣기를 마치고 삼좌평(三佐平)과 내두(內頭) 및 여러 신하에게, “조칙이 이와 같으니, 또한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하고 두루 물었다. 삼좌평(三佐平)이, “부한(下韓)에 있는 우리 군령(郡令)과 성주(城主) 등은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일은 빨리 조칙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 12월 :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다시 앞서의 조서(詔書)를 군신(群臣)들에게 널리 보이며, “덴노의 조칙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상좌평(上佐平) 사택기루(沙宅己婁), 중좌평(中佐平) 목례마나(木麻那), 하좌평(下佐平) 목윤귀(木尹貴), 덕솔(德率) 비리막고(鼻利莫古)[17], 덕솔(德率) 동성도천(東城道天), 덕솔(德率) 목례미순(木眯淳), 덕솔(德率) 국수다(國雖多), 나솔(奈率) 연비선나(燕比善那) 등이 함께 의논하여, “신(臣)들은 품성이 아둔하고 도무지 지략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라를 세우라고 명령하셨으니, 빨리 칙언을 받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임라의 집사(執事)와 각국의 한기(旱岐)들을 소집하여 함께 계책을 모의하고 표(表)를 올려 뜻을 말하십시오. 또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 등이 여전히 안라에 있게 되면 아마도 임라는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표(表)를 올려 본처(本處)로 옮겨달라고 구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성명왕이, “군신(群臣)이 의논한 바가 심히 과인의 마음에 맞는다”하고 말하였다.
  • 이 달 (백제가) 시덕(施德) 고분(高分)을 보내어 임라의 집사(執事)와 일본부의 집사를 불렀다. 모두, “정월 초하루를 지내고 가서 듣겠다”라고 대답하였다.

2.6. 5년 : 544년

  • 봄 정월 : 백제국이 사신을 보내어 임라의 집사(執事)와 일본부(日本府)의 집사를 불렀다. 모두, “신에게 제사지낼 때가 이르렀으니 제사를 마치면 가겠다”라고 대답하였다.
  • 정월 이 달 : 백제가 또 사신을 보내어 임라의 집사(執事)와 일본부(日本府)의 집사를 불렀다 일본부와 임라가 모두 집사를 보내지 않고 지위가 낮은 사람을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가 임라국을 세울 것을 함께 모의하지 못하였다.
  • 2월 : 백제가 시덕 마무(施德 馬武), 시덕 고분욱(施德 高分屋), 시덕 사나노차주(施德 斯那奴次酒) 등을 임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일본부와 임라의 한기(旱岐) 등에게, “나는 기신 나솔 미마사(紀臣 奈率 彌麻沙), 나솔 기련(奈率 己連), 물부련 나솔 용기다(物部連 奈率 用奇多)[18]를 보내어 덴노에게 조회하고 알현하였는데, 미마사(彌麻沙) 등이 일본에서 돌아와 조서를 선포하여, ‘그대들은 거기에 있는 일본부와 함께 빨리 좋은 계획을 세워 짐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라. 너희들은 경계하여 다른 사람의 속임에 빠지지 말라’라고 하였다. 또 츠모리노무라지(津守連)가 일본에서 와서《백제본기(百濟本記)》에서는 진수련기마노궤(津守連己麻奴跪)라 하였다. 그러나 방언이므로 정확하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조칙을 전하고 임라의 정사를 물었다. 그러므로 일본부와 임라의 집사와 함께 임라의 정사를 의논하여 덴노에게 아뢰려고, 사자를 보내어 부른 것이 세 번이나 되는데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임라의 정사를 도모할 계획을 함께 의논하여 덴노에게 아뢰지 못하고 있다. 이제 츠모리노무라지(津守連)을 머무르도록 청하고, 따로 빠른 사자로써 상황을 갖추어 덴노에게 아뢰고자 한다. 3월 10일에 일본에 사자를 보내겠다. 이 사자가 도달하면 덴노는 반드시 그대들을 문책할 것이다. 그대 일본부의 경(卿)과 임라의 한기들은 각기 사자를 보내어 내가 보내는 사자와 함께 덴노가 베푸는 조서를 들으라”라고 말하였다.

    따로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와 이사나(移那斯)와 마도(麻都)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방언이므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에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대의 악행만을 들어왔다. 그대의 선조들도【《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그대의 선조 나간타갑배(那干陀甲背), 가렵직기갑배(加獵直岐甲背)’라고 하였다. 또한 ‘ 나기타갑배(那奇陀甲背), 응기기미(鷹奇岐彌)’라고도 하였는데, 방언이므로 잘 알 수 없다】 모두 간악함을 품고 거짓되이 말하였다. 위가가군(爲哥可君)【《백제본기(百濟本記)》에 위가기미(爲哥岐彌)이고 이름은 우히키(有非岐)라고 하였다】이 그 말만을 믿어 국난을 걱정하지 않으며, 내 뜻을 어기고 포악한 일을 마음대로 자행하다가, 이로 말미암아 쫓겨났으니 오로지 그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대들은 임라에 와서 살면서 항상 나쁜 짓을 행하였다. 임라가 나날이 해를 입는 것은 오로지 그대들 때문이다. 그대는 비록 하찮다고 할지 모르나, 비유컨대 작은 불이 산야를 태우고 마을로 번지는 것과 같다. 그대들이 악행을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임라는 패망할 것이고, 마침내는 바다 서쪽 여러나라의 관가로 하여금 길이 덴노의 곁에서 섬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덴노에게 아뢰어 그대들을 옮겨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도록 청하겠다. 그대 또한 가서 들으라”라고 말하였다.

    또 일본부의 경과 임라의 한기 등에게, “임라국을 세우는 일은 덴노의 위엄을 빌리지 않고서는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덴노에게 가서 군사를 청하여 임라국을 도우려 한다. 병사들의 양식은 내가 운반해야 하겠으나, 군사의 수를 아직 모르고 군량을 운반할 곳도 역시 혼자 결정하기 어렵다. 한 군데에 모여서 같이 가부(可否)를 의논하고, 그 좋은 것을 택하여 덴노에게 아뢰기를 원하나, 여러 번 불러도 그대들이 오지 않아 의논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일본부가 답하여, “임라의 집사가 부름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보내지 않았던 까닭으로 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덴노에게 아뢰기 위하여 보낸 사신이 돌아와서, ‘짐이 이카노오미(印哥臣)【방언이므로 알 수 없다】을 신라에 보내고, 츠모리노무라지(津守連)을 백제에 보내겠다. 그대는 칙을 들을 때를 기다리고, 혼자 수고로이 신라백제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합니다. 조칙이 이와 같았는데 마침 인의신(印奇臣)이 신라에 사신으로 간다는 것을 듣고, 좇아 보내어 덴노가 말씀하신 바를 물었습니다. 조칙에는 ‘일본부의 신(臣)과 임라의 집사는 신라에 가서 덴노의 칙언을 들으라’하였고, 백제에 가서 명을 들으라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후에 츠모리노무라지(津守連)이 이곳을 지날 때, ‘지금 내가 백제에 파견되는 것은 하한(下韓)에 있는 백제의 군령(郡令)・성주(城主)를 내보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직 이 말만을 들었고, 임라와 일본부가 백제에 모여서 덴노의 칙언을 들으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않았으니 임라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에 임라의 한기들이, “사신이 와서 부르므로 곧 가려고 하였으나 일본부의 경이 떠나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못했습니다. 대왕은 임라를 세우려고 자세한 것까지도 지시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기뻐함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 3월 : 백제에서 내솔(奈率) 아탁득문(阿乇得文)[19] ‧ 허세(許勢)의 나솔 가마(奈率 奇麻)[20] ‧ 물부(物部)의 내솔 기비(奈率 奇非)[21] 등을 보내어 표(表)를 올려 말하였다. “내솔 미마사(奈率 彌麻沙)‧ 내솔 기련(奈率 己連) 등이 신(臣)의 나라에 이르러 조서(詔書)[22]를 받들어 ‘너희들은 저 일본부와 함께 좋은 계책을 꾀하여 빨리 임라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니, 너희는 경계하여 저들(신라)에게 속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 츠모리노무라지(津守連)등이 신의 나라에 이르러 칙서(勅書)를 받들어 임라를 세우는 일을 물었습니다. 삼가 칙(勅)에 따라 감히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 함께 도모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어【《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우코하노오미(烏胡跛臣)을 보내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쿠하노오미(的臣)인 듯하다.】 일본부와 임라를 불렀으나 모두 대답하기를 ‘새해가 이미 왔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므로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부르니 모두 대답하기를 ‘이미 제사지낼 때가 되었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나,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불렀는데, 미천한 자를 보낸 까닭으로 함께 도모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임라가 부름에 나아오지 않은 것은 본심이 아니라, 아현이나사(阿賢移那斯)‧ 좌로 마도(佐魯 麻都)【두 사람의 이름이다. 이미 윗 문장에 보인다.】가 간교하게 속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무릇 임라는 안라를 형으로 삼아 오직 그 뜻을 좇고, 안라인(安羅人)들은 일본부를 하늘로 삼아 오직 그 뜻을 따르므로【《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안라(安羅)를 아버지로 삼고 일본부로써 근본을 삼았다고 하였다.】, 이제 이쿠하노오미(的臣) · 기비노오미(吉備臣)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 등은 모두 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의 지휘를 좇았을 따름입니다. 이나사, 마도는 비록 소가(小家)의 미천한 자이나 일본부의 정치를 오로지 제멋대로 하며 또 임라를 제압하여 (길을) 막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함께 꾀하여 덴노(天皇)에게 답변을 아뢸 수 없었으므로, 기노마궤(己麻奴跪)【아마도 츠모리노무라지(津守連)인 듯하다.】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특별히 나는 새와 같이 빠른 사신을 보내어 덴노에게 받들어 아뢰기를, ‘만일 두 사람【두 사람은 이사나(移那斯)와 마도(麻都)이다.】이 안라에 있어 간특하고 아첨하는 일을 많이 행하면 임라도 세우기 힘들 것이며, 바다 서쪽의 여러 나라[23]도 반드시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두 사람을 옮겨 그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일본부와 임라에게 조칙을 내려 임라 건설을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신이 내솔 미마사(奈率 彌麻沙)· 내솔 기련(奈率 己連) 등을 기마노궤(己麻奴跪)에게 딸려 보내어 표를 올립니다.’

    이에 조칙을 내려, ‘이쿠하노오미(的臣) 등【등이라 한 것은 吉備弟君臣·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 등을 말한다.】이 신라를 왕래한 것은 짐의 뜻이 아니다. 옛날 이키미(印支彌)【자세하지 않아 모른다.】와 아노(阿鹵) 한기(旱岐)가 있을 때 신라의 핍박을 받아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못하였는데, 백제는 길이 멀어 그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다. 이쿠하노오미 등이 신라를 왕래함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고 짐은 일찍이 들었다. 만일 이미 임라를 세웠다면 아사나와 마도는 자연히 물러났을 것이니 어찌 족히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이 조칙을 듣고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며, 신라가 천조를 속이고 칙명을 따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신라는 봄에 탁순(啄淳)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구례산(久禮山)[24] 수비병을 내쫒아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안라에 가까운 곳은 안라가 논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고, 구례산에 가까운 곳은 사라가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는데, 각각 경작하여 서로 침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사나와 마도가 남의 경계를 넘어 경작하다가 6월에 도망하였습니다. 인키미의 뒤에 온 고세노오미(許勢臣)의 때에는【《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우리가 인키미를 머무르게 한 뒤에 온 코세노오미(旣洒臣)의 때”라고 하였으나 모두 자세하지 않아 모른다.】 신라가 다시 남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안라는 신라의 핍박을 받아 농사짓지 못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신이 일찍이 듣건대 신라는 매년 봄과 가을에 군사와 무기를 많이 모아놓고 안라와 하산(荷山)[25]을 습격하고자 한다 하며, 또는 가라를 습격하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서신을 얻고서 문득 군대를 보내어 임라를 굳게 지키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자주 날랜 군사를 보내어 필요할 때마다 가서 구하였습니다. 이로써 임라가 때에 따라 농사를 짓고 신라가 감히 침범하여 핍박하지 못하였습니다. ‘백제는 길이 멀어 능히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는데, 이쿠하노오미등이 신라를 왕래하면서부터 바야흐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뢰었으니, 이는 위로는 천조를 속이는 것으로서 매우 간특한 일입니다. 사실의 명확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천조를 속이니 그 밖에도 거짓됨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이쿠하노오미등이 여전히 안라(安羅)에 거주하고 있다면 임나의 나라를 건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마땅히 일찍 물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매우 두려워 하는 것은 좌노마도(佐魯麻都)가 비록 한(韓)의 출신으로서 지위가 대련(大連)에 이르러 일본 집사의 사이에 섞여 명예롭고 권세있는 자리에 들어섰지만, 이제는 오히려 신라 나마(奈麻)의 예관(禮冠)을 썼다는 것입니다. 곧 몸과 마음으로 귀부하여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기 쉽습니다. 행한 바를 자세히 보면 도무지 두려워 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악행을 아뢰고 모두 글을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아직도 다른 나라의 관복을 입고 날마다 신라의 땅에 나아가 공(公)·사(私)의 일로 왕래하면서 도대체가 꺼려하지 않습니다. 무릇 탁국(啄國)의 멸망은 다른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탁국(啄國)의 함파한기(函跛旱岐)가 가라국(加羅國)에 두 마음을 품어 신라에 내응하고 가라(加羅)는 밖에서 싸움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망한 것입니다. 만일 함파한기로 하여금 내응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탁국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반드시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탁순(啄淳)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만일 탁순국(啄淳國)의 왕이 신라에 내응하여 적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여러 나라가 패망하게 된 화근을 살펴 보면 모두 안에서 응하여 두 마음을 품은 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제 마로(麻都) 등이 신라에 마음을 두어 드디어는 그 나라의 옷을 입고 아침 저녁으로 내왕하면서 속으로 간악한 마음을 굳혀왔습니다. 이에 임라가 이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까 두렵습니다. 임라가 만일 멸망한다면 신의 나라가 고립되어 위태할 것이니, 조알(朝謁)하고자 생각하나 어찌 다시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덴노께서는 깊이 살피시고 멀리 헤아리시어, 속히 본래 있었던 곳으로 옮기셔서 임라를 안정시키십시오.”
  • 겨울 10월 : 백제의 사신 나솔 득문(奈率 得文)‧나솔 기마(奈率 奇麻) 등이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였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겨울 10월 내솔 득문‧내솔 기마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이나사(移那斯)‧마로(麻都)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이에 대한 칙은 없었다’고 말하였다”라 하였다.】
  • 겨울 11월 :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일본부 신(臣)과 임라 집사를 불러, “덴노에게 조알하기 위하여 보낸 나솔 득문‧허세(許勢)의 나솔 기마‧물부(物部)의 나솔 가마(奇非)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제 일본부의 신하들과 임라국 집사는 마땅히 와서 칙(勅)을 듣고 함께 임라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기비노오미(吉備臣), 안라(安羅)의 하한기(下旱岐), 대불손(大不孫)과 구치유리(久取柔利),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졸마군(卒麻君)‧사이기군(斯二岐君)‧산반해군(散半奚君)의 아이, 다라(多羅)의 이수위(二首位) 흘건지(訖乾智), 자타한기(子他旱岐), 구차한기(久嗟旱岐)가 이에 백제에 나아왔다. 이 때 백제왕 성명(聖明)이 대략 조서(詔書)를 보이며, “내가 나솔 미마좌((奈率 彌麻佐)‧ 나솔 기련(奈率 己連)‧ 나솔 용기다 (奈率 用奇多) 등을 보내어 일본에 조공하였는데, (덴노가) 조칙을 내려 ‘조속히 임라를 건설하라’고 하였다. 또 츠모리노무라지(津守連)이 칙을 받들어 임라를 만드는 일을 물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대들을) 불렀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 임라를 세울 수 있겠는가. 각각 자신의 계책을 말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기비노오미(吉備臣)‧임라의 한기 등이 “무릇 임라국을 세우는 일은 오직 대왕에게 달려 있습니다. 왕을 따르고자 하니 모두 갖추어 아뢰어 (덴노의) 칙(勅)을 듣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성명왕(聖明王)이 이들에게 일러, “임라(任那)라는 나라는 우리 백제와 예로부터 자제(子弟)가 되기를 약속하였다. 이제 일본부 이키미(印岐彌)【임라에 있던 일본 신하의 이름이다.】가 이미 신라를 토벌하고 다시 장차 우리를 치려고 하며, 또 신라의 허망한 거짓말을 즐겨 듣는다. 무릇 인지미(印支彌)를 임라에 보낸 것은 본래 그 나라를 침탈하여 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자세하지 않아 모른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라는 무도하며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거스려 탁순(卓淳)을 멸망시켰다. 충직한 나라를 속히 회복코자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후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어 (일본부의 신하들과 임라의 집사를) 오게 하여 함께 은조(恩詔)를 받들어, 임라의 나라를 일으켜 맥을 잇고 옛날처럼 길이 형제가 되기를 바랬다. 가만히 듣건대 신라(新羅)‧안라(安羅) 두 나라 사이에는 큰 강이 있어 적을 방비하기 좋은 곳이라 한다. 내가 이를 차지하여 6성을 수축하려고, 삼가 덴노에게 3천 병사를 청하여 매 성마다 5백명씩 배치하고 아울러 우리 병사들이 (신라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걱정스러운 것은 구례산(久禮山)의 5성이 거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는 점이다. 탁순의 나라는 또한 다시 부흥시켜야 할 것이니, 청한 병사는 내가 옷과 식량을 지급할 것이다. 이를 덴노에게 주청하고 하는 계책이 첫째이다. 오히려 남한(南韓)에 군령(郡令)과 성주(城主)를 두는 것이 어찌 덴노를 거스려 공조(貢調)의 길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바라는 바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강적을 물리치려는 것이니, 무릇 그 흉칙한 무리들이 누구인들 부용하려고 꾀하지 않겠는가. 북쪽의 적은 강대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니, 만일 남한(南韓)에 군령(郡令)‧성주(城主)를 설치하여 방호시설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 강적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신라를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핍박하여 임나를 위로하고 휼문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해 조빙할 수 없을까 두렵다. 이를 덴노에게 주청하고자 하니 그 책략의 둘째이다. 또 기비노오미(吉備臣)‧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이나사(移那斯)‧마로(麻都)가 오히려 임라국에 있기 때문에, 덴노가 비록 조칙을 내려 임라를 세우라 하였으나 이를 시행할 수 없었다. 이 4명을 옮겨 각각 그 본읍(本邑)에 돌려보낼 것을 덴노에게 아뢰어 청하는 것이 그 계책의 셋째이다. 마땅히 일본의 신하‧임라의 한기 등과 더불어 모두 받들어 사신을 보내어 함께 덴노에게 사뢰고 은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기비노오미(吉備臣)과 한기(旱岐) 등이, “대왕(大王)이 말한 세 가지 책략은 또한 우리의 뜻과 같을 뿐입니다. 이제 돌아가 일본 대신(大臣)【임라에 있는 일본부의 대신을 일컫는다.】, 안라왕(安羅王)‧가라왕(加羅王)에게 공경히 아뢰고 모두 사신을 보내어 함께 덴노에게 주청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진실로 천년에 한번 올 정도의 기회로,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계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 12월 : 쿠시노국(越國)이 "사도노 섬(佐渡嶋)의 북쪽 미나베(御名部) 해안가에 숙신인(肅愼人)[26]이 배 한척을 타고 와 머물고 있습니다. 봄, 여름에 고기를 잡아서 식량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그 섬의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귀신이라고도 하며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섬 동쪽의 우무노사토(禹武邑) 사람이 추자(椎子)[27]를 주워서 익혀 먹으려고 재 속에 넣어 구웠습니다. 그런데 그 껍질이 두 사람으로 변해 불 위로 한 척 이상 뛰어 올라 한참 동안 서로 싸웠습니다. 우무노사토의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뜰에 두었는데, 또 전처럼 뛰어 올라 서로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가 점을 쳐 "이 동네의 사람들은 반드시 귀신에 홀릴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한바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숙신인은 세나카하노우라(波河浦)로 옮겼습니다. 나루의 신의 영위는 대단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목이 말라 그 물을 먹은 뒤 죽은 자가 반에 이르렀으며, 뼈가 바위 틈에 쌓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시하세노쿠마(肅愼隈)라고 부릅니다."라고 하였다.

2.7. 6년 : 545년

  • 봄 3월 : 카시하데노오미하스히(膳臣巴提便)[28]를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 여름 5월 : 백제가 나솔 기릉(奈率 其ㅁ)‧ 나솔 용기다(奈率 用奇多)‧ 시덕 차주(施德 次酒) 등을 보내어 표를 올렸다.
  • 가을 9월 : 백제가 중부 호덕(中部 護德) 보제(菩堤)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오(吳)나라의 재화(財貨)를 일본부의 신하와 여러 한기(旱岐)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이 달에 백제가 장육불상(丈六佛像)을 만들어 원문(願文)을 지었는데, “대개 듣건대 장육불(丈六佛)을 만들면 공덕(功德)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이제 공경히 (이를) 만드니 이 공덕으로 덴노께서 매우 훌륭한 덕(德)을 얻으시고 덴노께서 다스리시는 미야케 국(彌移居國)[29]이 모두 복(福)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늘 아래 모든 중생들이 모두 해탈하기를 원하여, 이를 만듭니다”라고 하였다.
  • 겨울 11월 : 카시하데노오미하스히가 백제로부터 돌아와, “신이 사신으로 파견되자 처자도 뒤따라 백제의 바닷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빈(濱)은 바닷가이다.】 해가 저물었으므로 머물러 숙박하였는데, 아이가 홀연히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큰 눈이 내려 새벽녘에서야 비로소 찾아나서니 호랑이 발자국이 연이어져 있었습니다. 신이 이에 칼을 차고 갑옷을 입고 찾아나서 바위 동굴에 이르렀는데, 칼을 빼어 ‘삼가 왕의 명을 받들어 뭍과 바닷길에 수고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니느라 어려웠으며, 풀섶을 깔고 가시와 함께 잤던 것은 자식을 사랑하여 아비의 업을 잇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오직 네가 위맹한 신일지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한 가지일 것이다. 어젯 밤에 아이가 없어져서 뒤쫓아 찾아 나서 이에 이르렀다.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아니하므로 원수를 갚고자 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 호랑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입을 벌려 물려고 하니, 하스히가 갑자기 왼손을 빼어 그 호랑이의 혀를 잡고 오른손으로 찔러 죽이고 가죽을 벗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이 해 고려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12월 갑오에 고려국(高麗國)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문(宮門)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細群)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세군(細群)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에 맥국(狛國)[30]향강상왕(香岡上王)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2.8. 7년 : 546년

  • 봄 정월 3일 : 백제의 사신 중부 나솔 기련(中部 奈率 己連)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에 좋은 말 70필과 배 10척을 내려 주었다.
  • 여름 6월 12일 : 백제가 중부 나솔 약엽례(中部 奈率 掠葉禮) 등을 보내어 조(調)를 바쳤다.
  • 가을 7월 : 야마토 국(倭國) 이마키노코오리(今來郡)에서 "5년 봄에 가와라노타미노아타히미야(川原民直宮)【宮은 이름이다.】 누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보다가 좋은 말을 발견하였습니다.【기이국 어부들의 지(贄)[31]를 나르는 암말의 새끼이다.】 그 말은 그림자를 보고 소리 높여 울며, 가볍게 어미의 등을 뛰어넘었습니다. 가서 사들여 여러 해 동안 길렀습니다. 성장하자 기러기처럼 날고, 처럼 뛰어 올라 무리중에서도 특히 뛰어났습니다. 마음 먹은대로 부리기 쉽고, 생각하는 대로 빨리 달렸습니다. 오호치노워카(大內丘)의 18장(丈)이나 되는 골짜기를 뛰어 넘었습니다.가와라노타미노아타히미야는 히노쿠마노사토(檜隈邑)의 사람입니다."라고 보고하였다.
  • 이 해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고려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麤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박왕狛王 )의 질병이 심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중부인과 소부인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세군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2.9. 8년 : 547년

  • 여름 4월 : 백제가 전부 덕솔 진모선문(前部 德率 眞慕宣文)‧나솔 기마(奈率 奇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리고 하부(下部)의 동성자언(東城子言)을 보내어 덕솔 문휴마나(德率 汶休麻那)[32]를 교대하게 하였다.

2.10. 9년 : 548년

  • 봄 정월 3일 : 백제의 사신 전부 덕솔 진모선문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 “청하는 구원병을 반드시 보내어 구원할 것이니, 마땅히 빨리 가서 왕에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 여름 4월 3일 : 백제가 중부 간솔 약엽례(中部 杆率 掠葉禮) 등을 보내어 “덕솔 선문(德率 宣文) 등이 칙을 받고 신(臣)의 나라에 이르러 ‘청하는 구원병을 때에 맞춰 보내겠다’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삼가 은혜로운 조칙을 받고 기쁘고 즐겁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진성(馬津城)[33]의 전투에서【정월 신축에 고려가 군대를 이끌고 마진성을 포위하였다.】 사로잡은 포로가 ‘(고려가 마진성을 공격한 것은) 안라국과 일본부가 불러 들여 벌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정으로 미루어 상황을 보더라도 진실로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밝히고자 하여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으므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공하신 덴노(可畏天皇)께서【서번(西蕃)들은 일본 덴노를 모두 황공하신 덴노(可畏天皇)이라 일컫는다.】 먼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청했던 구원병을 잠시 멈추시고 신(臣)의 보고를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칙을 내려 “법식에 따라 올린 글을 보고 근심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일본부와 안라(安羅)가 이웃의 어려움을 구하지 않은 것은 짐이 또한 매우 싫어하는 바이다. 또 그들이 몰래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짐이 명하였다면 스스로 보냈을 것이지만 명하지 아니 하였는데 어떻게 갔겠는가. 원하건대 왕은 흉금을 터놓고 안심하여 편안하게 마음을 가라 앉히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임라와 함께 지난번의 칙에 따라 힘을 다하여 모두 북쪽의 적을 막고 각각 봉토를 지키라. 짐이 마땅히 약간의 사람를 보낼 것이니 안라(安羅)가 도망한 빈 땅을 채우도록 하라”고 하였다.
  • 6월 2일 :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칙을 내려, “달솔 선문(德率 宣文)이 돌아 간 후에 잘 도착하였으며,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너희 나라는 고구려(狛賊)의 침해를 받았다고 하는데, 마땅히 임라와 함께 힘써 도모하여 전과 같이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 윤7월 12일 : 백제의 사신 약엽례(掠葉禮)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 겨울 10월 : 370명을 백제에 보내어 득이신(得爾辛)[34]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왔다.

2.11. 10년 : 549년

  • 여름 6월 7일 : 장덕 구귀(將德 久貴)‧고덕 마차문(固德 馬次文)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 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 “연나사(延那口+多斯)‧마로(麻都)가 몰래 사사로이 고려에 사신을 보낸 것은 짐이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허실을 물을 것이며, 청한 군사는 청원에 따라 멈추겠다”라고 하였다.

2.12. 11년 : 550년

  • 봄 2월 10일 :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3월 12일 신유에 일본의 사신 아비다(阿比多)가 배 세 척을 거느리고 도성(都城) 아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짐이, 시덕 구귀(施德 久貴)‧고덕 마진문(固德 馬進文) 등이 올린 표(表)의 뜻에 따라 하나하나 교시하였으니,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자세하게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대시두(大市頭)[35]가 돌아 온 뒤로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지만, 이제 다만 보고한 말을 밝히고자 하여 사신을 보낸다. 또 다시 짐이 듣건대 나솔 마무(奈率 馬武)[36] 는 왕의 아끼는 신하로서 위의 말을 받아 아래에 전하는데 왕의 마음에 매우 흡족하도록 하며 왕을 잘 보좌한다고 한다. 만일 국가가 무사하여 오랫동안 관가(官家)가 되어 길이 덴노를 받들려고 한다면 마땅히 마무(馬武)를 대사(大使)로 삼아 조공토록 하라”고 하였다. 다시 조칙을 내려 “짐이 듣건대 북쪽의 적이 강하고 사나우므로 화살 30구(具)를 내리니 한 곳 정도는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4월 1일 : 백제에 있는 일본왕의 사람(日本王人)이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4월 1일 경진에 일본 아비다가 돌아갔다”고 하였다.】 백제왕 성명(聖明)이 왕의 사람에게 “임라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고, 연나사(延那斯)‧마로(麻都)의 일은 문책할 것인지와 않을 것인지를 오로지 칙에 따르겠다”라 말하고, 고려의 노비 6구(高麗奴 6口)를 바치고, 따로 왕의 사람에게 노비 1구를 주었다.【모두 이림(爾林)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노비이다.】
  • 4월 16일 : 백제가 중부 나솔 피구근(中部 奈率 皮久斤)‧하부 시덕 작간나(下部 施德 灼干那) 등을 보내어 고구려(狛)의 포로 10구를 바쳤다.

2.13. 12년 : 551년

  • 12년 봄 3월 : 보리 씨앗 1,000곡(斛)을 백제왕에게 내려 주었다.
    • 이 해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두 나라는 신라‧임라를 말한다.】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平壤)[37]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38]

2.14. 13년 : 552년

  • 여름 4월 : (덴노의 장남이었던) 야타노타마카츠노오호에노미코(箭田珠勝大兄皇子)이 죽었다.
  • 5월 8일 : 백제‧가라‧안라가 중부 달솔 목리금돈(中部 德率 木刕今敦)‧하내부 아사비다(河內部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라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덴노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칙을 내려 “지금 백제왕‧안라왕‧가라왕이 일본부의 신하들과 함께 사신을 보내 아뢴 것을 다 들었다. 역시 임라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하나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황공하신 덴노의 영(靈)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겨울 10월 : 백제 성명왕(聖明王)【다른 이름은 성왕(聖王)이다】이 서부(西部)[39]의 희씨 달솔 노리사치계(姬氏 達率 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석가불금동상(釋迦佛金銅像) 1구(軀)와 번개[40](幡蓋) 약간, 경론(經論)[41] 약간 권을 바쳤다. 따로 표(表)를 올려 (불법(佛法)을) 유통시키고 예배하는 공덕을 찬양하여, “이 법은 여러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라도 오히려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법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복덕(福德)과 과보(果報)를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위 없는 보제(菩提)를 이루게 하니, 비유하자면 사람이 수의보(隨意寶)를 품고 있으면 필요한 바에 따라 모두 뜻대로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오묘한 법의 보배도 그러하니 기원한 것이 뜻대로 되어 부족한 바 없습니다. 또 멀리 천측(天竺)으로부터 삼한(三韓)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따르고 받들어 지녀 존경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왕 신(臣) 성명은 삼가 부신(陪臣)[42]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를 보내 황제의 나라에 받들어 전하니, 기내(畿內)에 유통하시어 부처가 ‘나의 법이 동쪽으로 흘러갈 것이다’라고 수기(授記)한 것을 이루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날 덴노는 표를 보고 뛸듯이 기뻐하며 사신에게 조칙을 내려 “짐이 예로부터 이와 같이 미묘한 법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짐이 혼자 결정할 수 없다”라 이르고,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서쪽 번국이 바친 불상은 모습이 단아하고 엄숙하다. 일찍이 전혀 없었던 것이니, 예배해야 되겠는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소가노오호키미이나메노스쿠네(蘇我大臣稻目宿禰)가 “서쪽 번국 여러 나라가 한결같이 모두 예배하는데, 풍추일본(豊秋日本)만 어찌 홀로 거스리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物部大連尾輿)‧나카토미노무라지가마코(中臣連鎌子)가 “우리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항상 천지사직(天地社稷)의 180신(神)을 제사지내고 절하여 섬긴 때문인데, 바야흐로 이제 바꾸어 번국의 신을 섬긴다면 국신(國神)의 노여움을 부를까 두렵습니다”라고 함께 아뢰었다. 덴노가 “원하는 사람인 이나매노스쿠네(稻目宿禰)에 맡겨 시험삼아 예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대신이 무릎 꿇고 받아 기뻐하며 워하리다(小墾田)의 집에 안치하고 삼가 출세간(出世間)의 업(業)을 닦아 인(因)으로 삼았으며, 무쿠하라(向原)의 집을 깨끗한 마음으로 희사하여 절로 삼았다. 그 후 나라에 돌림병이 돌아 백성들이 죽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많아졌으나 치료할 수 없었다. 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나카토미노무라지가마코가 함께 “지난날 신(臣)의 계책을 따르지 않으시더니 이렇게 병들어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오래지 않아 바로 돌이킨다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불상을) 빨리 던져 버려 삼가 후일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라 아뢰었다. 덴노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유사(有司)가 이에 불상을 나니와(難波)의 호리에(堀江)에 던져 버리고, 또 가람에 불을 놓으니, 다 타버려 남은 것이 없었다. 이 때 하늘에는 바람과 구름이 없었는데 갑자기 대전(大殿)에서 불이 났다.
  • 이 해 백제한성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新羅)의 우두방(牛頭方)·니미방(尼彌方)[43]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2.15. 14년 : 553년

  • 봄 정월 12일 : 백제가 상부(上部)의 덕솔 과야차주(德率 科野次酒)·간솔 예색돈(杆率 禮塞敦) 등을 보내 군사를 청했다.
  • 봄 정월 15일 : 백제의 사신인 중부(中部)의 간솔 목리금돈(木刕今敦)과 하내부의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 여름 5월 1일 : 하내국(河內國)이 "이즈미노코오리(泉郡)의 치누노우미(茅停海)[44]에서 불교음악이 들립니다. 음악이 번개 소리와 같으며 광채가 해의빛과 같이 빛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덴노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이케헤노아타히(溝邊直)【여기에서 단지 아타히(直)이라고만 적고 이름을 적지 않은 것은 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을 범한 것일까】에게 바다로 들어가 찾아보게 하였다. 이때 이케헤노아타히가 바다로 들어가 바다 위의 녹나무가 빛을 내면서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침내 (녹나무를) 가져다 덴노에게 바치니, 덴노가 화공에게 명하여 불상 2구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지금의 요시노노테라(吉野寺)에서 빛을 내는 장목 불상이 바로 그것이다.
  • 6월 : 우치노오미(內臣)[45]【이름은 빠져 있다】를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좋은 말 2필, 동선(同船)[46] 2척, 활 50장, 화살 50구를 주었다. 조칙을 내려 “청한 군대는 왕이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하고, 다른 조칙을 내려 “의박사(醫博士)·역박사(易博士)·역박사(曆博士)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야 한다. 지금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바로 교대할 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 복서(卜書)·역본(曆本)과 여러가지 약물(藥物)도 보내라”고 하였다.
  • 가을 7월 4일 : 쿠스노마가리노미야(樟勾宮)에 행차하였다. 소가노오호키미이나메노스쿠네(蘇我大臣稻目宿禰)가 명령을 받들어 왕진이(王辰爾)를 보내 선박세(船賦)를 세어 기록하였다. 바로 왕진이를(王辰爾)를 선장으로 삼고 성을 후네노후비토(船史)라 내려 주었으니, 오늘날 후네노무라지(船連)의 선조이다.
  • 8월 7일 : 백제가 상부(上部)의 나솔 과야신라(奈率 科野新羅)[47], 하부(下部)의 고덕 휴문대산(固德 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지난 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신 덕솔 차주(內臣 德率 次酒)·임라 대부(大夫) 등을 보내 바다 밖 여러 彌移居(みやけ: 官家)의 일을 아뢰었습니다. 엎드려 은혜로운 조칙을 기다리기를 봄에 돋은 풀이 단비를 기다리듯 하였습니다. 올해 문득 들으니 신라가 박국(狛國)과 함께 모의하여 ‘백제와 임라가 자주 일본에 나아가니, 생각컨대 군사를 빌려 우리나라를 치려는 듯하다. 이 일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라의 패망은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일본의 군대가 떠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아 일본과의 통로를 끊자’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 계획이 이와 같으니, 신 등이 이를 듣고 두려운 마음을 깊이 품었습니다. 바로 빠른 배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아룁니다. 덴노께서 빨리 전군(前軍)과 후군(後軍)을 보내 서로 이어 와서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가을까지는 바다 밖 미이거(彌移居)[48]를 굳게 지키겠습니다. 만약 지체하여 늦는다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보낸 군대가 신의 나라에 도착하면 옷과 식량은 신이 마땅히 공급할 것이고, 임라에 도착하여도 다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만약 (임라가)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신이 도와 충당하여 부족하고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이쿠하노오미(的臣)가 삼가 덴노의 조칙을 받들고 와서 신의 나라를 위로하고 일찍부터 늦게까지 쉬지 않고 모든 일에 힘썼습니다. 이 때문에 바다 밖의 번(蕃)들은 그의 훌륭함을 칭송하여 ‘틀림없이 영원히 바다 밖을 깨끗이 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죽었다 하니 깊이 추모하여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임라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덴노께서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임라를 진정시키기 바랍니다. 또 바다 밖의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한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덴노에게 받아 강한 적을 막았으니, 덴노께서 활과 말을 많이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 겨울 10월 20일 : 백제의 왕자 여창(餘昌)【명왕(明王)의 아들 위덕왕(威德王)이다】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을 향했는데, 백합(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여창(餘昌)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를 입은 자 1기(騎), 징을 꼽은 자【뇨(鐃)자는 자세하지 않다】 2기,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기 모두 합해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여창이 “성(姓)은 (고려 왕실과) 동성(同姓)이고 관위는 간솔(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고려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의 여창)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副將)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高麗王)을 동성산(東聖山)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2.16. 15년 : 554년

  • 봄 정월 9일 : 백제가 중부(中部)의 목리시덕문차(木리施德文次), 전부(前部)의 시덕 왈자분옥(施德 曰佐分屋) 등을 츠쿠시(筑紫)에 보내 내신(內臣)· 사에키노무라지(佐伯連) 등에게 묻기를 “달솔 차주(德率 次酒)·간솔 색돈(杆率 塞敦) 등이 지난해 윤달 4일에 와서 ‘신 등은【신 등은 내신(內臣)을 말한다】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말할 뿐 자세하지 않았습니다.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또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자세한 내용을) 약간이나마 들어 미리 군영(軍營)을 쌓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또 따로 ‘이제 들으니 황공하옵신 덴노의 조칙을 받들어 츠쿠시에 나와서 보내줄 군대를 살펴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기쁨은 이루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올해의 싸움은 전보다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줄 군대를 정월에 도착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에 內臣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 2월 : 백제가 하부(下部)의 간솔 장군 삼귀(杆率 將軍 三貴)와 상부(上部)의 나솔 물부오(奈率 物部烏)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달솔 동성자막고(德率 東城子莫古)를 바쳐 전에 번(番)을 섰던 나솔 동성자언(奈率 東城子言)을 교대하고, 오경박사 왕류귀(五經博士 王柳貴)로 고덕 마정안(固德 馬丁安)을 대신하고, 승려 담혜(僧 曇慧) 등 9인으로 승려 도심(道深) 등 7인을 교대하였다. 따로 명령을 받들어 역박사 시덕 왕도량(易博士 施德 王道良), 역박사 고덕 왕보손(曆博士 固德 王保孫), 의박사 나솔 왕유릉타(醫博士 奈率 王有릉陀), 채약사 시덕 반량풍 (採藥師 施德 潘量豊)·고덕 정유타(固德 丁有陀), 악인 시덕 삼근(樂人 施德 三斤)·계덕 기마차(季德 己麻次)·계덕 진노(季德 進奴)·대덕 진타(對德 進陀)를 바쳤는데, 모두 청에 따라 교대하였다.
  • 3월 1일 : 백제의 사신인 중부의 목리시덕문차(木리施德文次) 등이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갔다.
  • 여름 5월 3일 : 내신(內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나아갔다.
  • 겨울 12월 : 백제가 하부의 간솔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百濟王) 신 (臣 明)과 안라(安羅)에 있는 왜신(倭臣)들, 임라 여러 나라의 한기(旱岐)들은 아룁니다. 사라(斯羅)[49]가 무도(無道)하여 덴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구려(狛)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移居)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우치노오미(有至臣)[50]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사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덴노께서 우치노오미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의 영(領)인 물부 막기부련(物部 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51]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우치노오미(有至臣)이 데리고 온 백성 츠쿠시노모노노베노마카와사카(竹斯 物部 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덴노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단촐하게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신라(新羅)뿐이라면 우치노오미(有至臣)가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사라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츠쿠시노시마(竹斯島)[52]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毾㲪) 1령, 도끼 300구, 사로잡은 성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여창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늙은 신하(耆老)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신라국(新羅國)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53]에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은 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54]의 사마노 고도(飼馬奴 苦都)【 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에게 “고도는 천한 노비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입니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두개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55]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이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쿠라지노키미(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쿠라지(鞍橋)는 우리 말로 쿠라니(くろじ, 이득을 보다)라 한다】. 이 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일본 덴노께서 임라의 일 때문에 여러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 관가(官家)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3. 권 19

3.1. 16년 : 555년

  • 봄 2월 : 백제 왕자 여창이 왕자 혜(惠)【왕자 惠는 威德王의 아우이다】를 보내어 “성명왕이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15년에 신라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덴노가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나루[56]에서 맞이하여 위문하였다. 이에 코세노오미(許勢臣)가 왕자 혜에게 “이곳에 머물고자 하는가. 또는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라고 묻자, 왕자 혜가 “덴노의 덕에 기대고 의지하여 돌아가신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만약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셔서 병기를 많이 주신다면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제가 가고 머무르는 것은 오직 명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잠시 후에 소가노오미(蘇我臣)가 찾아와 위문하며 “성왕은 하늘의 도(道)와 땅의 이치에 통달하였고 명성(名聲)은 4방 8방에 퍼졌습니다. 길이 평안함을 지키고 바다 서쪽 번국(蕃國)을 통솔하여 천년만년 덴노를 받들어 모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 하루 아침에 멀리 승하하시어 물처럼 돌아올 수 없게 되어 묘실에 안치되리라고는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고 슬픔이 얼마나 크십니까. 무릇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슬퍼하지 않겠습니까.혹시 어떤 허물이 이러한 화를 이르게 했는가. 지금 어떤 방도로 나라를 안정시키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혜가 대답하기를 “ 저는 타고난 성품이 어리석어 큰 계책을 알지 못하니 어찌 하물며 화와 복이 말미암은 바와 나라가 존속하고 망하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소가노마에츠키미(蘇我卿)가 “ 옛날 오호하츠세 덴노(大泊瀨天皇) 때 그대의 나라가 고구려로부터 침략을 받아 위험하기가 계란(鷄卵)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했습니다. 이에 덴노가 칸츠카사노카미(神祗伯)[57]에게 명하여 공경히 신지(神祗)로부터 계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하후리(祝者)[58]가 이에 신의 말에 의탁하여 ‘나라를 세운 신을 청해 모셔와 장차 망하려는 임금을 가서 구하면 나라는 반드시 평온해지고 사람들은 잘 다스려져 편안해질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神)을 청하여 가서 구원하였으므로 사직(社稷)이 평안해졌습니다. 무릇 나라를 세운 신이란 하늘과 땅이 나뉘어 구분되고 풀과 나무가 말을 할 때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만들어 세운 신입니다. 지난번에 그대 나라에서는 (사당(祠堂)을) 돌보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지금이라도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궁(神宮)을 수리하여 신령(神靈)을 받들어 제사지내면 나라가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그대는 나의 말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 가을 7월 4일 : 소가노오호키미이나메노스쿠네(蘇我大臣稻目宿禰)와 호즈미노이와유미노오미(穗積磐弓臣)등을 보내어 길비(吉備)의 다섯 개 군에 시라이노미야케(白猪屯倉)를 두도록 하였다.
  • 8월 : 백제 여창이 여러 신하들에게 “나는 이제 돌아가신 부왕을 받들기 위하여 출가하여 수도(修道)하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전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국은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하십니까. 모름지기 도리(道理)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늙은 신하(耆老)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굳이 하고 싶으시다면 나라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여창이 “좋다”고 대답하고는 곧 나아가 신하들에게 꾀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출가시키고 번개(幡蓋)를 많이 만들어 여러가지 공덕을 행하였다고 운운하였다.

3.2. 17년 : 557년

  • 봄 정월 : 백제 왕자 혜가 돌아가기를 청하자 병기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히 상으로 물품을 내려 주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아베노오미(阿倍臣), 사에키노무라지(佐白連), 하리마노아타히(播磨直)를 보내어 치쿠시코쿠(筑紫國)의 수군(水軍)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별도로 츠쿠시노히노키미(筑紫火君)【《백제본기》에는 츠쿠시노히노키미(筑紫君)의 아들 히노나카노키미(火中君)의 아우라 한다】을 보내어 용감한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미저(彌弖)[59]【미저는 나루터 이름이다】에까지 호위하여 보내어 뱃길의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 가을 7월 6일 : 소가노오호키미이나메노스쿠네(蘇我大臣稻目宿禰)등을 키비노미치노쿠치(備前)의 코지마노코오리(兒嶋郡)에 보내어 둔창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카즈라키노야마다노아타히미츠코(葛城山田直瑞子)를 타츠카이(田令)[60]로 삼았다.【田令은 타츠카이(陀豆歌毘, 타두가비)이라 한다.】
  • 겨울 10월 : 소가노오호키미이나메노스쿠네(蘇我大臣稻目宿禰) 등을 왜국 고시군(高市郡)에 보내어 카라히토노오호무사노미야케(韓人大身狹屯倉)【한인이라 한 것은 백제이다】,코마비토노워무사노미야케(高麗人小身狹屯倉)을 두고 키노쿠니(紀國)에 아마노미야케(海部屯倉)를 두었다.【어떤 책에는 “곳곳에 있던 한인들로써 대신협둔창의 타베(田部)[61]로 삼고 고려인으로써 소신협둔창 다베를 삼았다”고 한다.이는 곧 한인, 고려인으로써 다베를 삼았던 까닭에 둔창(屯倉)이라 이름한 것이다】

3.3. 18년 : 558년

  • 봄 3월 1일 : 백제 왕자 여창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가 위덕왕이다.

3.4. 21년 : 561년

  • 가을 9월 : 신라가 미지기지 내말(彌至己知 奈末)을 보내어 조부(調賦)를 바쳤는데 평상시보다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내말이 기뻐하며 돌아가서 “조부를 바치는 사자(使者)는 나라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바인데 나의 의론(議論)은 가볍고 비천한 것이고, 사자는 백성의 운명이 달려있는 사람인데 뽑아쓰는 것은 비천하고 낮은 사람입니다. 왕정의 폐해는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바라건대 좋은 집 자제를 뽑아 사자로 삼으시고 비천한 사람을 사자로 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3.5. 22년 : 562년

  • 신라가 구례질급벌간(久禮叱及伐干)을 보내어 조부(調賦)를 바쳤다. 사빈(司賓)[62]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예우가 평상시보다 덜하였다. 급벌간(及伐干)이 분하고 한스럽게 여기며 돌아갔다.
    • 이해 다시 노저대사(奴氐大舍)를 보내어 지난번의 조부를 바쳤다. 니나와(難波)의 대군(大郡)에서 여러 번국(蕃國)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장객(掌客) 누카타베노무라지(額田部連)와 카즈라키노아타이(葛城直) 등이 백제의 아래쪽 열에 서게 하여 인도했다. 대사(大舍)가 화를 내고 돌아가 관사(館舍)에 들지 않고 배를 타고 돌아가 아나토(穴門)에 이르렀다. 이때 아나토관(穴門館)을 수리하고 있었다. 대사가 묻기를 “어떤 손님을 위하여 짓는가”라고 하자 공장(工匠) 가후치노우마카이노오비토오시카츠(河內馬飼首押勝)이 거짓으로 “서방(西方)의 무례한 짓을 문책하러 보낼 사자가 머물 숙소이다”라고 말하였다. 대사가 나라에 돌아가 그가 말한 것을 고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아라(阿羅)의 파사산(波斯山)에 성을 쌓고서 일본에 대비하였다.

3.6. 23년 : 563년

  • 봄 정월 : 신라가 임라 궁가(官家)[63]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64]]【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라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안라국(安羅國),사이기국(斯二岐國),다라국(多羅國),졸마국(卒麻國), 고지국(古嵯國), 지타국(子他國), 산반해국(散半下國) , 걸찬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 모두 열나라이다】.
  • 여름 6월 : 조칙을 내려 “신라는 서쪽의 오랑캐로 작고 보잘것 없는 나라이다. 하늘을 거스리고 예의가 없어 우리의 두터운 은혜를 져버리고 나의 관가를 깨트렸으며 나의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나의 군현(郡縣)을 멸망시켰다. 우리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미코토(氣長足姬尊)께서는 거룩하고 총명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시며 뭇 인민을 힘써 보살피시고 온 백성을 먹이고 길렀다. 신라가 궁해져가는 것을 애달피 여기시고 신라왕이 장차 목베일 것을 온전히 두었으며 신라에게 요충의 땅을 주었고 신라를 남달리 번영하게 해주시었다. 우리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미코토께서 신라에 대하여 무엇을 가볍게 대우했으며 우리 백성이 신라에 무슨 원한이 있었는가. 그러나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임나를 침공해 멸망시켰고 강한 잇빨과 갈고리 같은 손톱으로 잔인하게 백성을 죽였다. 간을 꺼내고 발목을 끊어도 마음에 흡족해하지 않고 뼈를 드러내고 주검을 태워도 혹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임라의 귀족과 백성 이하 모두는 칼을 다 쓰고 도마를 다하도록 이미 살륙당하고 젓갈(膾)로 담았는데 어찌 온 천하가 왕의 신하라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사람 곡식을 먹고 다른 사람 물을 마시면서 누가 차마 이것을 듣을 수 있겠으며 누가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태자.대신이 형제 친척에게 피눈물을 흘리고 원한을 머금고 부탁하여, 번방(蕃邦)을 지키는 임무를 맡음에 머리를 부수는 것이 발꿈치에까지 이르도록 은혜롭게 하고 대대로 前朝의 덕을 받아 후대의 지위를 맡았으니 쓸개를 마시고 창자를 꺼내어 함께 간악한 역적을 죽여 천지의 큰 아픔을 씻고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도 신하와 아들의 도리를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다고 함에 있어서랴”라고 하였다.

    이 달에 어떤 사람이 우마카히노오비토우타요리(馬飼首歌依)에 대해 "가의의 처인 아호노오미사누키(逢臣讚岐)의 안장 깔개가 이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황후의 안장이었습니다."라고 참언하였다. 이에 즉시 잡아서 히토야츠카사(廷尉)[65]에게 데려가 죄상을 엄히 물었다. 우마카히노오비토우타요리는 큰 소리로 "거짓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천재(天災)를 받을 것입니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문에 의해 땅에 쓰러져 죽었다.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궁에 화재가 일어났다. 정위는 그의 아들 모리시(守石)과 나세히(名瀨氷)【모리시와 나세히는 모두 이름이다.】을 잡아 불 속에 던지려 하면서【불에 던지는 형벌은 옛 법일 것이다.】 "내 손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다. 축(祝)의 손으로 던지는 것이다."라고 저주하였다. 저주가 끝나자 불에 던지려고 하였다. 모리시의 어머니가 "아들을 불 속에 던지면 천재가 일어날 것입니다. 청원하건데 축인(祝人)에게 주어 신노(神奴)로 삼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빌었다. 그래서 그 모친의 청에 따라 용서하여 신노로 삼았다.
  • 가을 7월 1일 :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부를 바쳤다. 그 사신이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켰다는 것을 알고 일본의 은혜를 저버린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감히 돌아가기를 청하지 못하고 마침내 머물러 본토(本土)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를) 국가의 백성과 같은 예(例)로 대우하였는데, 지금 하내국(河內國) 사라라노코호리(更荒郡) 우노노사토(盧+鳥 慈+鳥野邑) 신라인의 선조이다.

    • 이 달에 대장군 키노워마로노스쿠네(紀男麻呂宿禰)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다리(口+多唎)에서 출동하고, 부장군 카하베노오미니헤(河邊臣瓊缶)는 거증산[66]으로부터 출동하도록 하여 신라임나를 공격한 상황에 대하여 문책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임나에 도착하여 코모츠메베노오비토토미(薦集部首登弭)를 백제에 보내어 군사계책을 약속케 했다. 토토미는 처가에 묵었는데, 봉인한 서신과 활과 화살을 길에 떨어트렸다[67]. 신라가 군사계획을 모두 알고 갑자기 군사를 크게 일으켰으나 얼마 후에 패하였으므로 항복하여 귀부(歸附)하기를 빌었다. 키노워마로노스쿠네가 승리를 거두고 나서 군사를 돌려 백제의 군영에 돌아갔다. 군중에 명을 내려 “무릇 이겨도 패하는 것을 잊지 말고 편안할 때도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옛날의 훌륭한 가르침이다. 지금 처해 있는 땅은 들개와 이리와 같이 사나운 무리들과 이웃해 있으니 가볍고 소홀히 하여 변란이 일어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으랴. 하물며 또 태평한 시대에도 칼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법이니, 무릇 군자가 무기를 갖추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깊이 경계하고 이 명령을 받드는데 힘쓰라”라고 하였다. 병졸들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고 섬겼다.


    카와베노오미니에는 홀로 나아가 이곳 저곳에서 싸워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신라가 문득 흰 깃발을 들고 무기를 던져버리고 항복했는데, 카와베노오미니에는 원래 군사에 밝지 못하여 마주 대하여 흰기를 들고 헛되이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68]. 신라 장군이 “장군 카와베노오미니에(河邊臣)이 지금 항복하려고 한다”고 하고는 진군하여 역습하여 싸웠다. 매우 날쌔고 빠르게 공격하여 깨트렸는데, 맨 앞선 부대는 패한 바가 매우 많았다. 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쿠테히코(倭國造手彦)는 (이들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신라 장군이 손에 갈고리창을 쥐고 성의 해자에까지 뒤쫒아와 창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쿠테히코는 날랜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성의 해자를 뛰어 건너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라고 탄식하였다. 이에 카와베노오미니에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와 들에 급히 군영을 만들었다. 이때 병졸들은 모두 서로 속이고 업신여기며 우르러 따르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스스로 군영에 나아가 카와베노오미니에 등과 그를 따라왔던 부인 모두 사로잡았다. 이때는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장군이 카와베노오미 니에에게 “너의 목숨과 부인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아끼는가”라고 묻자 “어찌하여 한 여자를 아껴 화를 취하겠습니까. 어떤 것도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라 대답하고 첩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신라) 장군은 마침내 벌판에서 부인를 강간하였다. 부인이 후에 돌아오니, 카와베노오미니에는 부인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부인은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따르지 않고 “옛날에 당신이 저의 몸을 가볍게 팔았는데 지금 무슨 낯으로 서로 만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승락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부인은 사카모토노오미(坂本臣)의 딸인데 이름을 우에시히메(甘美媛)라 한다.

    함께 사로잡혔던 츠키노키시이키나(調吉士伊企儺)는 사람됨이 용맹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잠뱅이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일본으로 향하게 하고 “일본 장군은 내 엉덩이를 물어라”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부르짖는다(叫)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곧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소리쳤다. 비록 고통과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앞에서와 같이 소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오지코(舅子) 역시 그의 아버지를 안고서 죽었다. 이키나의 말은 이렇게 빼앗기 어려웠다. 이로 말미암아 특히 여러 장수들이 가슴 아파하는 바가 되었다. 그의 아내 오호바코(大葉子)도 역시 잡혔는데 비통하게 노래하기를 “한국(韓國)의 성(城)위에 서서 대엽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며 일본으로 향하네”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화답하기를 “한국의 성위에 서서 대엽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어 보이며 나니와로 향하네”라고 하였다.
  • 8월 : 덴노가 대장군 오호토모노무라지사데히코(大伴連狹手彦)를 보내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사데히코는 이에 백제의 꾀를 써서 고려를 쳐서 깨트렸다. 그 왕이 담을 넘어 도망하자 사데히코는 마침내 승세를 타고 왕궁에 들어가 진귀한 보물과 갖가지 재화,칠직장(七織帳),철옥(鐵屋)을 모두 얻어 돌아왔다.【옛 책에 “철옥은 고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으며 직장(織帳)은 고려왕의 내전 침실에 걸려 있다”고 한다】. 칠직장은 덴노에게 바치고 갑옷 2벌,금으로 장식한 칼 2자루,무늬를 새긴 구리종 3개, 오색번(五色幡) 2간,미녀 원(媛)【원은 이름이다】 및 그의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소가노이나메노스쿠네(蘇我稻目宿禰) 대신(大臣)에게 보내었다. 이에 대신(大臣)은 두 여자를 맞아 들여 처로 삼고 카루(輕)의 곡전(曲殿)에 살게 했다.【철옥(鐵屋)은 장안사(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오오토모노사데히코노무라지(大伴狹手彦連)가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양향(陽香)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 겨울 11월 :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물건을 바치고 아울러 조부를 바쳤다. 사신은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킨 것을 일본이 분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감히 돌아가기를 청하지 못하였다.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본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를) 백성과 같은 예(例)로 취급하였는데, 지금의 츠노쿠니(攝津國) 미시마노코호리(三嶋郡) 하니로(土+直 盧) 신라인의 선조이다.

3.7. 26년 : 565년

  • 여름 5월 : 고려인 두무리야폐(頭霧唎耶陛) 등이 쓰쿠시(筑紫)에 투하(投化)하였으므로 야마시로국(山背國)에 안치하였다. 지금의 우네하라(畝原), 나라(奈羅), 야마무라(山村)의 고구려인 선조이다.

3.8. 28년 : 567년

  • 군국(郡國)에 홍수가 나서 기근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잡아 먹었다. 인접한 군의 곡식을 가져다가 구휼하였다.

3.9. 30년 : 569년

  • 봄 정월 1일 : 조칙을 내려 “타베(田部)를 헤아려 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나이가 10여세가 되었는데도 호적에서 빠져 과역(課役)을 면제받는 사람이 많다. 마땅히 이츠(膽津)【이츠는 왕진이(王辰爾)의 조카이다.】을 보내어 백저전부(白猪田部)의 정적(丁籍)[69]을 살펴 정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 여름 4월 : 이츠가 백저전부의 정(丁)의 수를 조사하여 조에 따라 호적을 작성하였다. 드디어 전호(田戶)가 갖추어졌다. 덴노는 이츠가 적을 정비한 공을 기려 시라이노후비토(白猪史)라는 성을 내렸다. 그리고 즉시 전령(田令)에 임하고 서자(瑞子)의 부관으로 삼았다.【서자는 위에 보인다.】

3.10. 31년 : 570년

  • 봄 3월 1일 : 소가노이나메노스쿠네(蘇我稻目宿禰)가 죽었다.
  • 여름 4월 2일 : 하쓰세노시바카키노미야(泊瀨柴籬宮)에 거동하였다. 월나라 사람(越人) 강정신군대(江渟臣裙代)가 서울에 와서 “고려 사신이 바람과 파도에 시달려 배 댈곳을 잃고 헤매다가 물결 따라 떠다니던 중 홀연히 해안에 다다랐는데, 군사(郡司)가 숨겨두었으므로 제가 밝히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조칙을 내려 “내가 왕업을 이은 지 얼마 안된 때에 고려인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처음으로 월(越)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비록 물에 빠지고 떠다니는 고생은 하였지만 아직 목숨은 온전하니, 이것은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려 계책이 (다른 나라까지) 멀리 미치고, 지극한 덕이 높고 커서, 감화가 주변까지 통하여 은혜가 널리 미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담당 관서는 마땅히 야마시로국(山城國) 사가라카노고호리(相樂郡)에 객관(客館)을 세워 깨끗이 정돈하고 후한 재물로 돌보라”고 하였다.

    이달에 (덴노가) 수레를 타고 하쓰세노시바카키노미야(泊瀨柴籬宮)으로부터 이르렀다. 야마토노아야노우지노아타히아라코(東漢氏直糠兒)와 카즈라키노아타히나니와(葛城直難波)를 보내어 고려 사신을 맞이하여 불렀다.
  • 5월 : 카시하데노오미카타부코(膳臣傾子)를 월(越)에 보내어 고려 사신을 대접했다.【傾子는 카타부고(舸拕部古)라 읽는다】. (고려) 대사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카시하데노오미(膳臣)가 바로 천자의 사자(使者)인 것을 알고, 미치노키미(道君)에게 “네가 덴노가 아니라는 것은 과연 내가 의심한 대로구나. 너는 이미 카시하데노오미(膳臣)에게 엎드려 절하였으니 백성이라는 것을 더욱 알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앞서 나를 속여 조(調)를 취하여 자신이 가졌으니 마땅히 그것을 빨리 되돌려 달라. 번잡하게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카시하데노오미가 듣고서 사람을 시켜 그 조(調)를 조사하게 하여 모두 그에게 주었다. 수도에 돌아와 복명하였다.
  • 가을 7월 1일 : 고려 사신이 오후미(近江)에 도착하였다.
    • 이달에 코세노오미사루(許勢臣猿)와 키시노아카하토(吉士赤鳩)를 보냈다. 나니와진(難波津)에서 출발하여 사사나미산(狹狹波山)에서 배를 끌고와 식선(飾船)을 장식하고 이에 오후미의 북쪽 산에 가서 맞이하였다. 마침내 산 뒤쪽의 고위관에 인도하여 들이고 야마토노아야노사카노우에노아타히코마로(東漢坂上直子麻呂)와 니시코리노오비토오호이시(錦部首大石)를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 또 사가라카노무로츠미(相樂館)에서 고려 사자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3.11. 32년 : 571년

  • 봄 3월 5일 : 사카타노미미코노이라츠키미(坂田耳子郞君)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임나를 멸망시킨 사유를 물었다.
    • 이달 고려가 바친 물품과 표문을 아직 받들어 아뢰지 못하였다. 수십일이 지나도록 좋은 날을 점쳐 기다렸다.
  • 여름 4월 15일 : 덴노가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황태자는 밖에 나가 없었으므로 역마로 불러들였다. (덴노이) 누워 있는 내전에 불려 들어가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 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세워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 이 달에 덴노가 마침내 내전에서 죽었다. 이 때 나이는 알수가 없다.[70] 5월에 가후치노후루이치(河內古市)에 빈궁을 마련하였다.
  • 가을 8월 : 신라가 조문사 미실자실소(未叱子失消) 등을 보내어 빈소에서 (덴노의) 죽음을 애도했다.
    • 이달 미실자실소 등이 돌아갔다.
  • 9월 : 히노쿠마노사카히노미사자키(檜隈坂合陵)에서 장사지냈다.


[1] 하타노씨(秦氏)는 오진덴노 시기에 한반도에서 도래해 온 궁월군(弓月君)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중국계라고도 한다. 그들의 출자가 진한(辰韓) 즉 진한(秦韓)이었으므로 진씨(秦氏)라 불렸던 것이다. 이 기사는 킨메이덴노(欽明天皇)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백제계(百濟系)의 도움을 받았음을 보여준다.[2] 현재의 나라시[3] 금관국 또는 가야연맹체를 부르는 말. 임나라는 말이 가장 먼저 보이는 우리나라의 자료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陵碑)인데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단어가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6 열전6 강수전에 의하면 강수가 ‘신은 본래 임나가라 사람입니다(臣本任那加良人)’이라 적혀있는 것을 알수가 있다. 한편 봉림사지경대사비(鳳林寺眞境大師碑)에는 “俗姓新金氏 其先任那王族...遠祖興武大王”이라는 기록이 보이며, 본 항목인 긴메이 덴노 22년 봄 기사를 보면 "신라가 임라 궁가(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라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안라국(安羅國),사이기국(斯二岐國),다라국(多羅國),졸마국(卒麻國), 고지국(古嵯國), 지타국(子他國), 산반해국(散半下國) , 걸찬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 모두 열나라이다】." 한편 가야국의 명칭은 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가야(加耶)를 사용하나, 각종 저술에서는 伽倻, 伽耶, 加羅, 伽羅, 迦羅, 呵羅, 加良, 駕洛, 伽落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4] 28대 센카 덴노[5] 한기(旱岐)는 가야 소국들의 지도자를 뜻하는 말이다.[6]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직책으로 상좌평, 중좌평, 하좌평이 나타난다. 일각에서는 직책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닌, 지배귀족의 신분 서열을 표현하는 방식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7] 무관의 관직으로 추정된다.[8] 갑배는 칭호, 매노가 이름이다.[9] 일각에서는 영락 17년 전투를 말한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이 전투에서는 고구려가 상대를 개박살 내버렸기 때문에 영락 17년 전투를 말하는 거라면 이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역시나 일뽕맞은 역사서[10] 하내직. 이름이 아니라 직책 명이다.[11] 아현은 칭호, 이나사가 이름인듯 하다.[12] 원래 금관국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나 이 시기에는 이미 신라금관국이 병합된 상태이기 때문에 가야의 다른 소국들을 말하는 단어로 추정된다. 현재 섬진강 유역 혹은 경상남도 서남부 지역이라는 의견과 낙동강 유역의 신라와 안라 국경지역으로 보는 설로 나뉜다.[13] 신라에게 멸망한 남가라, 탁기탄, 탁순등의 부흥을 의미한다.[14] 백제 16관등중 9위였던 고덕을 의미[15] 인도차이나 남부 메콩강 하류에 위치해 있던 나라. 3세기에는 매우 강력한 국력을 유지해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했지만 6세기 후반 몰락했고 7세기 전반부에 멸망했다. 이 기록을 통해 백제가 인도차이나 반도와 교역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16] 백제신라를 방비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한반도 남부를 직접 관리 했다는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17] 위에 2년 7월조에는 전부 나솔 비리막고로 나온다. 덕솔이 16관등중 4등급 관직인것을 보면 2년새 진급한듯.[18] 백제관료중에서 왜계로 넘어온 사람으로 추정한다.[19] 아탁을 지명에서 유래한 백제의 복성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20] 왜인과 한인 사이에서 태어난 백제 관료. 긴메이 덴노 8년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다시 일본을 방문한다.[21] 왜인과 한인 사이에서 태어난 백제 관료.[22] 2월에 그 내용이 나와있다.[23] 백제임라를 의미.[24] 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일대로 추정.[25]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군 두곡면 하산.[26] 만주에 거주하던 숙신 출신의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27] 모밀잣밤나무의 열매.[28] 궁중의 요리사로 일하던 관료였다.[29] 백제와 임나를 말한다.[30] 고구려를 의미한는 단어로 백제쪽의 사서에서 고구려를 향해 부르는 멸칭으로 등장한다.[31] 덴노에게 바치는 특산품[32] 여기서 문휴를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씨(木氏)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로 추정하는견해도 있다.[33] 충남 예산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이다. 삼국사기에는 비슷한 시기에 독산성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기에 독산성과 같은 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현재까지는 독산성은 경기도 포천시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같은 성으로 놓지는 않는다.[34] 현재 충남 논산군.[35] 시덕 구귀의 관직명으로 추정된다.[36] 긴메이 덴노 5년에는 달솔이라는 직책으로 등장. 2등급 직책에서 6등급 직책으로 강등되었는데 아마 백제 내부에서의 문제 인듯 하다.[37] 현재의 평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 일대를 일컫는 말인 남평양을 의미한다. 아차산에서 발굴된 고구려 보루들이 이 남평양을 방어하던 시설로 보는 시각도 있다.[38] 삼국사기에는 백제본기 성왕조에는 나타나지 않고 고구려 본기와 신라본기에 짤막하게 기록되어있다.[39] 백제의 5부중 하부(下部)로 추정.[40] 불교에서 사용하는 깃발들[41] 이 기록을 통해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다. 일본 내에서는 불교의 최초 전래가 긴메이 덴노 13년(552년)설과 538년 설로 나뉜다.[42]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를 의미한다.[43] 우두방은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수 없으며 니미방은 현재의 동두천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44] 현재의 오사카만 일대.[45] 일본서기에서 주로 덴노의 측근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46] 많은 목재를 조립해 만든 선박[47] 백제계 관료로 신라가 이름이다.[48] 궁궐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도를 의미.[49] 신라를 일컫는 비칭으로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에서도 백제 사신이 양나라에가서 백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열거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기록에도 신라를 사라라고 칭하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50] 위에서 등장하는 우치노오미(內臣)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내신은 덴노의 측근을 의미한다.[51] 관산성을 의미한다[52] 현재의 九州를 말한다.[53] 현재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으로 추정한다.[54] 충청북도 보은군에 위치한 마을로 추정.[55] 보통 축자국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에서 온 장수로 추정된다.[56] 나니와진을 말한다. 현재의 오사카 일대.[57] 당시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담당한 총 책임자.[58] 신사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사람들.[59] 경상남도 남해도 일대로 추정. 弖는 현대에는 호라고 발음하지만 고대에는 저라고 발음했다.[60] 정부에서 파견한 둔창 관리 및 세금 담당자.[61] 둔전에서 경작을 하던 백성을 말한다.[62] 사신을 접대하는 관리.[63] 궁궐(=수도)을 의미한다.[64]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23년(562년)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사부사다함이 이를 평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5] 형벌을 담당하는 직위를 의미한다.[66] 전라북도 장수의 번암, 전라북도 하동 고소성 지역 중 하나로 추정된다.[67] 여담이지만 후일 미국 남북전쟁 당시 앤티텀 전투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 남군의 작전계획이 북군에게 전부 누설된 일이 있다.[68] 백기의 의미도 알지 못할 정도로 일본 장수들의 수준이 낮았다는 의미로 볼수 있다.[69] 호적[70] 다른 기록에는 81세로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