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14:44:57

시이나 에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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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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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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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토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코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코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33대
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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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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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곤노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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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인 히코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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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이 케이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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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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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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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자와 겐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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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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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45대
히로타 고키
46대
아리타 하치로
47대
하야시 센주로
48대
사토 나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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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히로타 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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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키 가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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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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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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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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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기치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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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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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오카 요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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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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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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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 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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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미쓰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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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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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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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시게미쓰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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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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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야마 데쓰
67·68대
아시다 히토시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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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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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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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키무라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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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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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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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대
우노 소스케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112대
나카야마 타로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115대
무토 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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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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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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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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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140대
에다노 유키오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142대
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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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145·146대
고노 다로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150대
기시다 후미오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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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153·154대
이와야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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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에쓰사부로의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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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오노 반보쿠
3-5대
가와시마 쇼지로
6·7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대
후나다 나카
9·10대
니시무라 에이이치
11대
니카이도 스스무
12대
가네마루 신
13대
오부치 게이조
14대
야마사키 타쿠
15대
오시마 다다모리
16대
고무라 마사히코
17대
아소 다로
18대
스가 요시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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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미즈타 미키오
2대
츠카다 주이치로
3대
미키 다케오
4대
후쿠다 다케오
5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6대
후나다 나카
7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대
후쿠다 다케오
9대
다나카 가쿠에이
10대
가야 오키노리
11대
미키 다케오
12대
스토 히데오
13대
아카기 무네노리
14대
미즈타 미키오
15대
니시무라 나오미
16대
오히라 마사요시
17대
네모토 류타로
18대
미즈타 미키오
19대
코사카 젠타로
20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1대
쿠라이시 타다오
22대
미즈타 미키오
23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24대
마쓰노 라이조
25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6대
고모토 토시오
27대
에사키 마스미
28대
고모토 토시오
29대
아베 신타로
30대
다나카 로쿠스케
31대
후지오 마사유키
32대
이토 마사요시
33대
와타나베 미치오
34대
무라타 케이지로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36대
가토 무쓰키
37대
모리 요시로
38대
미쓰즈카 히로시
39대
하시모토 류타로
40대
가토 고이치
41대
야마사키 타쿠
42대
이케다 유키히코
43대
가메이 시즈카
44대
아소 다로
45대
누카가 후쿠시로
46대
요사노 가오루
47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48대
나카가와 쇼이치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50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51대
호리 고스케
52대
이시바 시게루
53대
모테기 도시미쓰
54대
아마리 아키라
55대
다카이치 사나에
56대
이나다 도모미
57대
모테기 도시미쓰
58대
기시다 후미오
59대
시모무라 하쿠분
60대
다카이치 사나에
61대
하기우다 고이치
62대
도카이 기사부로
63대
오노데라 이쓰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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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시이 미쓰지로
2대
스나다 시게마사
3대
사토 에이사쿠
4대
고노 이치로
5대
마스타니 슈지
6대
이시이 미쓰지로
7대
호리 시게루
8대
아카기 무네노리
9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1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11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2대
후쿠나가 켄지
13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14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15대
스즈키 젠코
16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7대
스즈키 젠코
18대
나다오 히로키치
19대
마쓰노 라이조
20대
에사키 마스미
21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2대
쿠라이시 타다오
23대
스즈키 젠코
24대
니카이도 스스무
25대
다나카 타츠오
26대
호소다 키치조
27대
가네마루 신
28대
미야자와 기이치
29대
아베 신타로
30대
이토 마사요시
31대
미즈노 키요시
32대
카라사와 슌지로
33대
니시오카 다케오
34대
사토 고코
35대
키베 요시아키
36대
무토 카분
37대
시오카와 마사쥬로
38대
모리 요시로
39대
후카야 다카시
40대
이케다 유키히코
41대
오자토 사다토시
42대
무라오카 카네조
43대
호리우치 미쓰오
44대
규마 후미오
45대
니와 유야
46대
니카이 도시히로
47대
사사가와 다카시
48대
타노세 료타로
49대
고이케 유리코
50대
시오노야 류
51대
호소다 히로유키
52대
노다 세이코
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호소다 히로유키
55대
다케시타 와타루
56대
가토 가쓰노부
57대
스즈키 슌이치
58대
사토 쓰토무
59대
후쿠다 다쓰오
60대
엔도 도시아키
61대
모리야마 히로시
62대
스즈키 슌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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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1기 상공대신 (1925~1943)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대
노다 우타로
3대
카타오카 나오하루
4·6대
후지사와 이쿠노스케
5대
나카하시 도쿠타로
6대
타와라 마고이치
7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8대
마에다 요네조
9대
나카지마 쿠마키치
10대
마츠모토 조지
11대
마치다 추지
12대
카와사키 타쿠키치
13대
오가와 고타로
14·18대
고도 타쿠오
15대
요시노 신지
16대
이케다 시게아키
17대
핫타 요시아키
14·18대
고도 타쿠오
19대
후지와라 긴지로
20대
고바야시 이치조
임시대리
가와다 이사오
21대
도요다 데이지로
22대
사콘지 세이조
23대
기시 노부스케
24대
도조 히데키
군수대신 (1943~1945)
초대
도조 히데키
2대
후지와라 긴지로
3대
요시다 시게루
4대
토요다 테이지로
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2기 상공대신 (1945~1949)
2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26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27대
호시시마 지로
28대
이시이 미쓰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29-30대
미즈타니 조사부로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1대
오야 신조
32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통상산업대신(1949년~2001년)
초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2·6·17대
이케다 하야토
3대
다카세 소타로
4대
요코오 시게루
5대
다카하시 류타로
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8대
오카노 키요히데
9대
아이치 기이치
10·11·12대
이시바시 단잔
13·14대
미즈타 미키오
15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6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2·6·17대
이케다 하야토
18대
이시이 미쓰지로
19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0대
사토 에이사쿠
21·22대
후쿠다 하지메
23·2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5대
미키 다케오
26·27대
칸노 와타로
19·2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9대
오히라 마사요시
30대
미야자와 기이치
31대
다나카 가쿠에이
32·33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34·36대
고모토 토시오
35대
다나카 다쓰오
34·36대
고모토 토시오
37대
에사키 마스미
38대
사사키 요시타케
38대
다나카 로쿠스케
39대
아베 신타로
41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42대
우노 소스케
43대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44대
무라타 케이지로
45대
와타나베 미치오
46·47대
타무라 하지메
48대
미쓰즈카 히로시
49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50대
마츠나가 히카루
51대
무토 가분
52대
나카오 에이치
53대
와타나베 고조
54대
모리 요시로
55대
구마가이 히로시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6대
하타 에이지로
57대
하시모토 류타로
58대
츠카하라 슌페이
59대
사토 신지
60대
호리우치 미쓰오
61대
요사노 가오루
62·63대
후카야 다카시
64대
히라누마 다케오
경제산업대신 (2001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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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히라누마 다케오
3-5대
나카가와 쇼이치
6대
니카이 도시히로
7·8대
아마리 아키라
{{{#!wiki style="margin: -16px -11px" }}}
7·8대
아마리 아키라
9·10대
니카이 도시히로
11·12대
나오시마 마사유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3대
오하타 아키히로
14대
가이에다 반리
15대
하치로 요시오
16대
에다노 유키오
17대
모테기 도시미쓰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8대
오부치 유코
19·20대
미야자와 요이치
21대
하야시 모토오
22·23대
세코 히로시게
24대
스가와라 잇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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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6대
가지야마 히로시
27·28대
하기우다 고이치
29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30대
사이토 겐
31·32대
무토 요지
}}}}}}}}}}}}

{{{#!wiki style="margin: 0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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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내각관방장관 (1947~)
초대
하야시 조지
2대
니시오 스에히로
3대
도마베치 기조
4대
사토 에이사쿠
5대
마스다 가네시치
6대
마스다 가네시치
7대
오카자키 가쓰오
8대
호리 시게루
9대
오가타 다케토라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3-15대
네모토 류타로
16·17대
이시다 히로히데
18대
아이치 기이치
19대
아카기 무네노리
20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1·22대
오히라 마사요시
23-25대
구로가네 야스미
26대
스즈키 젠코
27·28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29대
아이치 기이치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2대
기무라 도시오
33·34대
호리 시게루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6·37대
니카이도 스스무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9대
이데 이치타로
40대
소노다 스나오
41대
아베 신타로
42대
다나카 로쿠스케
43대
이토 마사요시
44대
미야자와 기이치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6대
후지나미 다카오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9대
오부치 게이조
50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51대
야마시타 도쿠오
52대
모리야마 마유미
53대
사카모토 미소지
54대
가토 고이치
55대
고노 요헤이
56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57대
구마가이 히로시
58대
이가라시 고조
59대
노사카 코켄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2대
무라오카 가네조
63대
노나카 히로무
64·65대
아오키 미키오
66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67-69대
후쿠다 야스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2대
아베 신조
73대
시오자키 야스히사
74대
요사노 가오루
75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76대
가와무라 다케오
77대
히라노 히로후미
78대
센고쿠 요시토
79대
에다노 유키오
80대
후지무라 오사무
81-83대
스가 요시히데
84대
가토 가쓰노부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7-89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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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87·88대 외무대신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27-34대 중의원 의원
시이나 에쓰사부로
椎名悦三郎 | Shiina Etsusaburo
파일:시이나 에쓰사부로.jpg
출생 1898년 1월 16일
이와테현 이사와군 미즈사와정
사망 1979년 9월 30일 (향년 81세)
학력 킨조 중학교 (졸업)
제2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학과 / 학사)
가족 차남 시이나 모토오[1], 삼촌 고토 신페이[2]
정당

의원 선수 8 (중)
의원 대수 27, 28, 29, 30, 31, 32, 33, 34
지역구 舊 이와테 2구
악력 자유민주당 부총재, 총무회장, 정무조사회장
중의원 의원 (제27-34대 / 舊 이와테현 제2구)
내각관방장관 (제2차 기시 개조 내각)
통상산업대신 (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사토 1차 개조 내각)
제87-88대 외무대신
(제3차 이케다 개조내각) - (제2차 사토 제2차 개조내각)

1. 개요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2.2. 정치 경력2.3. 외무대신 시절2.4. 자민당 부총재 시절과 시이나 재정2.5. 은퇴 및 사망
3. 소속 정당4.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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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시이나가에 양자로 입적하기 전 이름은 고토 에츠사부로 (後藤悦三郎)였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일본국 외무대신으로서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1898년 이와테현 이사와군에서 고토(後藤)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고토 히로시는 고토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 미즈사와군 촌장직을 역임했고 이와테현 현의원을 10년간 맡았다. 시이나의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유년시절을 꽤 빈곤하게 보내야했고, 당초 에츠사부로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할 계획이였고, 고등소학교 4년차에 상경해 골동품점에 거주하고 일하면서 야학을 다녔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같은 이와테 출신의 선배의 하숙처에서 생활했다.

이후 아버지의 소개로 이웃마을 가네가사키정의 대의사 시가 와타리(志賀和多利, 1874~1945)의 서생[3]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후 도쿄 치요다구의 킨죠중학교 편입시험에 합격해 3년간 재적하였고, 졸업 이후 경제 사정이 나아진 이와테현의 본가로 돌아왔다. 그뒤 제2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동시에 만철 초대 총재를 지낸 고토 신페이의 누나의 본가인 시이나가에 양자로 들어가며 이름도 고토 에츠사부로에서 시이나 에츠사부로로 바꾸게 된다.

도쿄 제국대학 재학 중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졸업 이후인 1923년 농상무성[4]에 들어갔고, 1925년에 농상무성이 농림성과 상공성으로 분리된 뒤에는 상공성(현 경제산업성)으로 자리를 옮겨 기시 노부스케 아래에서 만주국 통제 과장, 산업부 광공사장을 지냈다.

1939년 일본으로 귀국한 에츠사부로는 상공성 총무국장 신분으로 당시 군부가 장악하고 있던 기획원에서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전시경제통제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43년 군수성이 신설되자 군수성 총동원 국장과 육군 사정장관, 총동원국장을 역임했고 1945년 종전과 함께 직위에서 물러났다. 1947년 그의 상관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A급 전범 용의자로써 수감되었고, 그 밑에서 일을 했던 에츠사부로는 공직추방 명령을 받게된다. 그 뒤로 고향으로 내려와 모리오카시에 섬유공업 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하지만, 극심한 경영난으로 인해 1952년 회사가 도산하고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2.2. 정치 경력

1951년 공직추방이 해제된 시이나는 종전 직후 부터 생각하고 있던 정계 진출 시도를 하게 되고, 1953년 치러진 제26회 중의원 선거에서 이와테현 2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나 전체 6위로 낙선했다. 당초 그는 자유당의 간사장을 지내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를 찾아가 입당 및 지역구 공천을 논의했으나 승낙되지 않자 자유당 선거 대책 위원장이었던 오자와 사에키[5]를 찾아갔으나, 공교롭게도 오자와는 시이나가 출마하려 했던 이와테 2구의 중진 의원이었고, 결국 공천이 거절되자 무소속으로 도전했지만 참패했다.

2년 뒤인 1955년, 일본민주당의 간사장이 된 기시 노부스케의 초청으로 일본민주당 후보로 다시 입후보하였고, 기시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당선되었다.

기시 내각에선 경리국장과 내각관방장관을 지냈으며, 이케다 내각에선 자민당 정무 조사회장, 통상산업대신을 거쳐 1964년 외무대신에 올랐다.

2.3. 외무대신 시절

사토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을 지내면서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일본측 대표로서 대한민국과 교섭하였고, 1965년 2월 18일, 방한하였다. 한일 협상 자체는 시이나가 정계에 입문 하기 전인 1951년부터 논의되어 왔던 것이고 독도 영유권 문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나 청구권 문제, 어업 문제는 양국에서 별 문제삼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하고 있었다. 시이나는 한일기본조약 협상을 위해 한국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였을때 일본의 과거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발언하며 매스미디어를 통해 한국 여론의 진정에 기여했으나, 사회당 등 야당의 반대와 한국에서의 산발적인 시위가 잇따랐고,[6] 양국의 야당, 신문,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에 앞서 시이나에 대해 정확한 목적을 설명하지 않고 방한한것에 대해 일본 헌법 73조 위반에 해당한다는 불신임 결의안이 일본사회당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제출되었으나, 귀국 이후 해당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1966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외무대신으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5년 무역 협정과 민간 항공 협정을 협상하였다.

외무대신에서 물러난 1974년, 김대중 납치 사건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한일관계가 다시 험악해지자 그해 9월 시이나는 다나카 총리의 요청에 따라 방한하여 이 문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시이나는 박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사건 재발 방지책, 한국 수사 협력, 조총련의 반한 활동 단속 등을 약속하는 다나카의 서한을 박정희와 대한민국 정부에게 전달했다. 이 회담으로 한일 관계의 악화는 수습되어 한국 내 반일 시위는 종식되었다.

이 외에도 자민당 부총재 시절인 1973년 중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시이나를 정부 특사로 임명해 대만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 파견시켰다.

시이나는 중화민국 민의대표와의 좌담회에서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를 유지한 뒤 중일 정상화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으나, 당시 일본 외무대신인 오히라 마사요시는 대만과의 관계가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는 시이나의 뜻과 상관 없이 일본-중화민국 조약 파기와 대만-일본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2.4. 자민당 부총재 시절과 시이나 재정

1966년 자민당 총무회장에 오른 시이나는 사토 개조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에 취임했고, 1970년 가와시마 쇼지로 부총재가 급사하자 가와시마 휘하의 의원들의 추천을 받아 기존 가와시마파(교우클럽)를 흡수해, 가와시마파가 시이나파로 확장 되면서 세를 불려 나갔다.

1972년 4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후쿠다 다케오를 누르고 자민당 총재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8월, 시이나는 다나카에 의해 자민당 부총재로 기용되었다.

다나카 내각은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 정책의 실패와 금권정치에 대한 비판을 받은 뒤 책임을 지고 1974년 12월 사퇴를 표명하였으며, 다나카 가쿠에이의 후계를 둘러싸고 시이나는 대파벌의 우두머리인 오히라 마사요시와 후쿠다 다케오를 배제하고, 당내 중도 파벌에 속한 미키 다케오를 새총재로 선출하였는데, 이를 시이나 재정(椎名裁定) 이라고 한다.

시이나가 미키를 총재를 선임한 이유는 우선 시이나가 당내 개혁론자이기도 했으며, 당시 당내 요직으로 분류되는 간사장, 총무회장, 정조회장을 각각 다나카파의 니카이도 스스무,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파의 야마나카 사다노리 등 거대 파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와중에 부총재 자리만 소수 파벌인 시이나파의 영수인 시이나 본인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7]

당 내 쟁쟁한 인사들을 제치고 얼떨결에 자신이 총재로 선출된는 미키는 청천벽력이라고 중얼거렸으며, 언론들도 시이나가 총재직에 관심을 보이려는것 아니나는 것을 문제삼아 일제히 그를 비판했다.

사실 이에 관한 뒷이야기가 있는데, 다나카는 시이나에게 잠시 당권을 맡기고, 오히라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운뒤 자신의 스캔들 의혹을 풀고 총재직에 복귀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이나는 오히라를 설득하는데 총력을 다했는데 오히라가 뜻을 접지 않고 오히려 기자들에게 시이나가 총재직에 관심을 보인다고 폭로해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시이나는 다나카에게 "지금 국민들이 뿔나있는데 자꾸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라고 다나카를 거의 반협박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다나카가 한발 물러선뒤 자민당 총재인 미키 다케오가 예상대로 총리직에 선출되게 된다.

시이나는 미키 내각에서도 부총재로 있었으나 이후 정치개혁의 속도 및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커진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다나카 전 총리 및 여러 정치 인사에 대한 처분을 두고 더 강경하 개혁 드라이브를 걸려던 미키와 갈등을 빚었으며, 1976년 5월에는 다나카파, 후쿠다파등과 함께 미키 퇴진에 공감한다. 이후 미키는 1976년 12월 제34회 중원선에 자민당이 창당 후 처음으로 단독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는 패배를 거두자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시이나는 애초에 미키를 총리로 올리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미키 총리의 사퇴 이후 후쿠다 내각이 들어서면서 부총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5. 은퇴 및 사망

1976년 12월 치러진 34회 중원선은 시이나가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 1978년 1월 16일에 팔순을 맞이했다.

1978년 10월, 차기 중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밝혔고, 자신의 지역구를 차남 모토오(1930-2007)에게 지역구를 물려주었다. 이후 모토오는 중의원 의원으로 4회 당선되고, 참의원 의원으로도 2회 당선되며 2004년까지 정치활동을 한다.

노인성 결핵과 하반신 근위축증으로 인해 1979년 6월부터 입원치료를 받는다. 사망 23일전인 1979년 9월 7일에 중의원이 해산되면서 시이나의 24년 중의원 의원 임기도 막을 내린다. 의회 해산으로 인해 치러질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동년 10월 7일로 일정이 잡했다. 시이나는 의회 해산 23일 이후이자 차기 선거 일주일 전인 1979년 9월 30일, 입원중이던 도쿄 신주쿠구 게이오기주쿠대학 부속병원에서 향년 81세로 사망했다. 중의원 임기는 의회 해산으로 끝날때까지 다 채우면서 새로운 의원이 뽑히기 전이라는 절묘한 시점에 사망했다.[8]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51 - 1955 정계 입문

1955 입당


1955 - 1979 합당[9]
정계 은퇴
사망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와테 2구

[[무소속(정치)|
무소속
]]
12,823 (4.7%) 낙선 (6위)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37,947 (13.5%) 당선 (4위) 초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40,531 (14.6%) 재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48,318 (17.2%) 3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8,568 (20.4%) 당선 (2위) 4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8,652 (19.7%) 5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2,268 (18.1%) 당선 (3위) 6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1,556 (202.6%) 당선 (1위) 7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9,149 (18.2%) 당선 (4위) 8선

[1] 1930~2007, 중의원(4선), 참의원(재선) 역임[2] 1857~1929, 체신대신, 내무대신, 외무대신, 내각 철도원 총재직 역임[3] 다른 사람의 집에 하숙해 가사와 잡무를 도우면서 공부나 하적을 하는 젊은이. 주로 일본 근대시절에 성행했다.[4]농림수산성경제산업성의 전신인 중앙성청이다.[5] 오자와 이치로의 부친이다.[6] 이 당시 반대시위를 이끌었던 사람 중 한명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7] 시이나는 11월 30일 파벌 회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시이나는 파벌을 초월한 각료 인사를 단행할 것, 총재를 배출한 파벌에서 간사장을 맡지 않을 것(총간분리), 당의 정책 입안 기능을 강화할 것 등의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 다음날 재정문을 발표하면서 "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신께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총재는 청렴할 것은 물론이고 당의 체질 개선과 근대화에 몰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국민은 우리 당이 파벌 항쟁을 끝내기를 기대하고 근대 정당으로 탈피하기 위한 연찬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열정을 가진 사람을 바라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저는 새로운 총재로 정계의 장로인 미키 다케오 군이 가장 적임자라고 확신하여 이에 천거합니다." 라며 사실상 미키를 지지하였다.[8]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도 2000년 6월 2일 의회 해산과, 동년 6월 25일 차기 중의원 선거의 중간 시점인 6월 19일에 사망했다.[9] 자유당과의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