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함대의 아일랜드 원정 영어: Fourth Spanish Armada | ||
| 시기 | ||
| 1601년 8월~1602년 3월 13일 | ||
| 장소 | ||
| 아일랜드 왕국 남서부. | ||
| 원인 | ||
| 아일랜드 반군과 연합해 아일랜드 왕국을 장악하고 잉글랜드 왕국을 공격할 발판으로 삼으려는 스페인 함대의 공세.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스페인군: 병사 4,432명, 군함 36척, 선원 2,000명. 아일랜드 반군: 7,600명. | 군인과 선원 12,000명, 갤리온 6척, 무장상선 6척. | |
| 피해 | ||
| 스페인군: 1,500명 사상, 부상, 또는 병사, 3,700명 항복, 선박 8척 포획, 침몰 또는 파괴. 아일랜드 반군: 1,200명 사망.(대부분 처형) | 200명 사상, 6,000명 병사 또는 탈영. | |
| 결과 | ||
| 잉글랜드 왕국의 승리. | ||
| 영향 | ||
| 9년 전쟁과 영국-스페인 전쟁의 종결. | ||
1. 개요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601년 8월~1602년 3월 13일, 스페인 함대가 아일랜드 반군을 지원해 아일랜드 왕국을 점거하고 잉글랜드를 공략할 교두보로 삼고자 단행한 원정. 스페인 원정군은 아일랜드에 성공적으로 상륙했지만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이는 잉글랜드군에 대적하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를 계기로 전쟁을 지속하려던 스페인 궁정의 결의가 약화했고, 이는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종결된 평화 협상으로 이어졌다.2. 배경
2차 데스몬드 반란 이래, 잉글랜드 왕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세력 확장과 통제력 강화 시도는 갈수록 심해졌다. 이에 반발한 일부 아일랜드 영주들은 1593년부터 '아일랜드 동맹'을 결성해 잉글랜드에서 임명한 아일랜드 총독과 맞섰다. 그러던 1595년, 얼스터에서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게일인 영주인 타이론 백작 휴 오닐이 아일랜드 동맹에 가담하기로 하면서, 반란 규모는 급격하게 확장했다. 타이론 백작은 개신교 확산과 잉글랜드의 통제력 강화에 반대하는 오언 맥이건과 플로렌스 매카시 등 가톨릭 신자들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토벌대를 연이어 보냈지만, 아일랜드 동맹군은 유격전을 전개하며 끈질기게 맞서 싸웠다.스페인 정부는 이러한 아일랜드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이보다 앞서, 1588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 스페인 함선들이 폭풍우를 뚫고 본국으로 가까스로 돌아갈 때 아일랜드를 거쳐 가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후 스페인 궁정에서는 아일랜드를 스페인 국왕의 잉글랜드로 가는 다리로 사용하는 안건이 진지하게 고려되었다. 개신교를 아일랜드에 포교하는 잉글랜드 당국에 반감을 품은 오언 맥이건과 제임스 아처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아일랜드인이 가톨릭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마테오 데 오비에도도 아일랜드 반란이 터진 이래로 아일랜드에 자주 방문해 반군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접촉했다.
펠리페 2세는 아일랜드에 군대를 파견할지를 놓고 고심한 끝에, 이를 단행하기로 했다. 아일랜드에 잉글랜드군을 묶어둔다면,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스페인군과 대적하는 잉글랜드군을 아일랜드 쪽으로 돌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는 1596년 10월 아일랜드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을 단행했지만, 피니스테레 곶에서 폭풍을 만나 많은 함선이 침몰하고 살아남은 함선들이 가까스로 귀환하면서 실패했다. 펠리페 2세는 이듬해에 스페인 대함대의 3차 잉글랜드 원정을 단행했지만, 또다시 폭풍에 직면해 막심한 피해를 보았고, 잉글랜드 함대가 가까스로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한 적 함선들을 소탕하면서 실패했다.
1598년 8월, 아일랜드 반군이 옐로우 포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소식을 접한 스페인 궁정은 아일랜드에 재차 주목했다. 당시 펠리페 2세는 노환으로 사망했고, 새 국왕 펠리페 3세는 통치에 전념하던 아버지와는 달리 통치력이 미숙하고 열의가 부족했기 때문에, 총신인 레르마 공작 프란시스코 고메스 데 산도발 이 로하스가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레르마 공작은 전쟁을 끝내려 했지만, 잉글랜드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여겼다. 그는 잉글랜드에게 한 방을 제대로 날려서 그들을 순종적으로 만들기로 마음먹고, 아일랜드 원정을 기획했다.
스페인은 3차례에 걸친 해상 원정이 모조리 실패하고 1596년에 파산을 선언하는 악재가 벌어졌음에도, 함대를 꾸준히 증강해 1600년 말까지 갤리온 35척, 다른 배 70척, 병사 25,000명을 모았다. 펠리페 3세는 레르마 공작의 설득을 받아들여 후안 델 아길라와 디에고 브로체로에게 상당한 양의 무기와 탄약을 갖춘 함대에 병사 6,000명을 태우고 아일랜드로 가라고 명령했다. 아길라는 일찍이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휘하에 들어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위그노 전쟁에서 활약한 숙련된 장군이었고, 1595년 카를로스 데 아메스키타 선장의 지휘 아래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 본토에 유의미한 타격을 입힌 유일한 원정인 마운트 베이 습격을 이끌었다. 그는 국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 투옥되었지만 무죄를 증명했고, 배상금으로 원정대 지휘권을 맡았다. 원정대의 목표는 아일랜드 남서부의 주요 항구인 코르크를 점령하고 나중에 더 큰 규모의 스페인군이 상륙할 때까지 그곳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벨렘에 집결한 병력은 애초 계획된 6,000명이 아닌 4,432명만 모였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1599년 여름에 안달루시아에 새로운 함대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했다. 이에 잉글랜드 정부는 정규군과 민병대를 대거 동원했고, 런던에서는 스페인군이 잉글랜드 해안에 이미 상륙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민들이 공황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은 그해 9월에야 진정되었지만, 잉글랜드는 여전히 스페인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함대를 지속적으로 파견했다. 그러던 1601년 초, 아일랜드에서의 전쟁 양상이 변화했다. 새로운 잉글랜드 사령관 찰스 블런트와 먼스터 총독 조지 케어우가 타이론 백작과 영토에서 초토화 작전을 실행해 반란군을 어느 정도 약화했다. 아일랜드의 스페인 연락책 중 한 명인 플로렌스 매카시는 체포되어 런던 탑에 보내졌고, 타이론 백작과 타르코넬 영주는 아일랜드 각지를 떠돌면서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 1601년 6월, 4,000~5,000명의 병력이 리스본에 집결하여 아일랜드를 향해 출항하려 한다는 첩보가 잉글랜드 정부에 전해졌다. 이에 추밀원은 침략에 대비하여 아일랜드에 새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3. 경과
3.1. 출항과 상륙
스페인 함대는 애초 1601년 8월 말에 출항할 예정이었지만, 역풍이 부는 바람에 며칠을 흘려보내야 했고, 9월 2일에 마침내 리스본을 출항하여 아일랜드로 향했다. 며칠간 지연되면서 스페인 선박의 상태는 좋지 않았고, 많은 병사와 선원들이 절반의 식량만 지녔다. 그럼에도 함대는 순조롭게 전진했고, 악명 높은 위험 수역인 비스케이만의 수역을 안전하게 통과했다. 이윽고 함대가 위상 섬에 접근하자, 디에고 브로체로 제독은 어느 곳에 상륙할지를 놓고 산 안드레스 호에서 회의를 열었다. 사령관들은 어디에 상륙할지에 대해 우유부단하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아길라는 도네갈 만이나 잉글랜드를 마주한 아일랜드 동부 해안 항구를 선호했지만, 브로체로는 스페인 원군과 합류하는 걸 순조롭게 하려고 아일랜드 남서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정군에 합류했던 마테오 데 오비에도를 비롯한 사제들은 앙글랜드 왕국이 아일랜드 내에 실질적으로 확보한 영토 중 하나인 먼스터에 상륙하여 공략하고 싶어 했다.장시간의 논의 끝에, 스페인 함대는 킨세일을 우선 상륙 목표로 삼고, 킨세일의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캐슬헤븐 항구를 2차 목표로 지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직후 강한 돌풍이 불면서 함대를 흩어지게 했다. 산안드레스 호에 동승한 디에고 브로체로와 아길라는 1,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코크-킨세일 지역으로 가려고 북동풍과 맞서 항해했다. 한편,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 중장은 갤리온 산 펠리페호와 다른 3척의 배와 함께 길을 잃었다. 그 배들은 700명의 정예 병력과 대부분의 보급품 및 탄약을 싣고 있었다. 주비아우르는 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바람이 약해 모두 실패했고, 도네갈 만에 도착하려는 마지막 시도도 실패했다. 일부는 대서양으로 휩쓸렸고, 탄약과 보급품을 실은 대형 수송선은 심각한 손상을 입은 채 잉글랜드 사략선에게 나포되었다.
폭풍이 지나간 후, 디에고 브로체로는 9월 18일 비교적 좋은 날씨에 남아일랜드에 도착했고, 대부분의 선박이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코크 항구에 입항하려 했지만, 바람이 바뀌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한편, 페드로 데 주바이우르는 오래도록 헤맨 끝에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엘 페롤 항구에 도착했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스페인 코르테스와 국왕을 화나게 했고, 가능한 한 빨리 아일랜드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아일랜드로 돌아갈 때 필요한 바람이 좀처럼 불어주지 않으면서 몇 달간 지체되었다.
9월 19일, 브로체로의 배들이 킨세일 항구에 도착했다. 군대와 식량이 상륙하자마자 그의 함대는 항구에 8일간 머문 후 출항했다. 스페인 상선 중 몇 척만 항구에 남았다. 스페인 군대의 두 개 중대가 진군을 시작했는데, 그중 약 1,700명이 킨세일로 향했다. 9월 22일 화요일, 원정군은 킨세일에 도착했다. 킨세일 마을에는 약 900명의 열악한 무장을 한 아일랜드 민병대가 있었고, 스페인군을 환대했다. 아길라의 원정에 동행했던 오비에도는 타이론 백작과 타르코넬 영주에게 전령을 보내 특히 절실히 필요한 기병대를 데리고 서둘러 오라고 전하게 했다. 타이론 백작은 스페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300마일을 행군하기로 했다. 또한 스페인군은 스페인 연락책 플로렌스 매카시를 찾았지만, 그가 이미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혀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플로렌스 매카시의 부재는 스페인군에게 아일랜드 인들의 지원을 조직적으로 제공받는 데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아길라는 이제 후속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며칠 후, 브로체로는 증원군을 실은 여러 척의 배를 타고 도착했다. 그들의 도착으로 아길라의 병력은 약 3,400명으로 두 배로 늘어났고, 대포를 몇 문 더 확보했다. 스페인군의 2/3는 정규군이었다. 여기에 약 1,000명의 이탈리아군과 약 200명의 아일랜드계 이주민이 함께했다. 많은 이들이 잉글랜드군에게 전투 능력을 높이 평가받는 강인한 숙련병이었다. 아길라는 이제 킨세일에 고립된 그들과 함께 머물렀고, 진영을 요새화하고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의 증원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또한 그는 만 입구에 니파크와 링커런이라는 두 개의 요새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마을 외곽의 땅을 어느 정도 장악하기 위해 '캠필'이라는 전초기지도 건설되었다.
9월 22일, 스페인군의 상륙 소식이 킬케니 에 있던 부총독 찰스 블런트에게 전해졌다. 블런트의 대응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그는 약 6,000명의 병력과 기병, 그리고 여러 대의 대포를 이른 시일에 집결했다. 충분한 보급품을 모은 후, 그는 스페인군이 올 것으로 예상했던 코크로 진격했다. 그 후 스페인군의 상륙 소식이 런던 궁정에 도착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스페인 침공에 대한 두려움은 확증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세간에서는 제임스 6세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신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인정한 후에야 지원을 보낼 의향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3.2. 킨세일 공방전
9월 29일, 잉글랜드군이 킨세일 외곽에 도착했다. 찰스 블런트는 며칠간 마을을 정찰한 후, 10월 2일부터 킨세일을 포위했다. 이후 증원군이 오이스터헤이븐을 통해 속속 도착하면서, 킨세일을 포위한 잉글랜드군의 규모는 12,000명으로 불어났다. 여기에는 아일랜드 귀족인 제4대 토몽드 백작 도노 오브라이언이 이끄는 대규모 병력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포위군 대다수는 아일랜드 징집병이어서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겨울철에는 작전 수행이 적합하지 않았다. 한편, 아일랜드 북부에서는 조지 케어우가 이끄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기병대가 타이론 백작과 타르코넬 영주를 수색했다. 그러면서 스페인군이 상륙할 때 예상했던 이점을 제거하기 위해 해안 지역의 성과 농장을 불태우고 파괴했다.10월 23일, 타이론 백작과 타르코넬 영주는 스페인군을 돕기 위한 진군을 시작했다. 두 부대는 키날미키에서 만나 휴식을 취하고 군대를 모집한 뒤 렌스터와 먼스터에서 추가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타이론 백작은 보병 2,500명과 기병 500명을, 타르코넬 영주는 보병 1,500명과 기병 300명을 거느렸다. 그들은 악천후 속에서 남하하면서, 섬을 가로지르는 잉글랜드군의 보급선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 한편, 찰스 블런트는 더블린에 있던 리처드 레베슨 제독에게 소규모 함대를 이끌고 출항해 킨세일 주변에 긴밀한 봉쇄를 구축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레베슨 제독은 6척의 함선, 즉 워스파이트호, 아미아스 프레스턴 중장이 지휘하는 갈랜드호, 디파이언스호, 스위프트슈어호, 멀린호, 논파레일호, 그리고 병사 2,000명을 태운 무장상선 6척을 이끌고 출항했다. 이들은 9월 27일 코크에 도착했지만, 남풍 때문에 출발이 지연되었다.
10월 말, 찰스 블런트가 여러 대포를 보내 링커런 요새를 포격했다. 그곳의 수비대장인 페드로 데 에레디아는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항전했지만, 성벽이 무너지자 소수의 아릴랜드 군인들이 도주했고, 본인도 약 50명의 스페인군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순찰대가 그들을 발견해 앞을 가로막자, 대부분이 항복했다. 그 사이, 킨세일에서 파견된 스페인군이 수비대를 구하려 했다. 프랜시스 로 중령은 병사 100명을 이끌고 2배에 달하는 스페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프랜시스 로의 상관인 초대 그랜디슨 자작 올리버 세인트 존 경은 스페이 장창병들이 돌격을 준비하고 있는 걸 보고 직접 머스킷 병 30명을 이끌고 로를 지원했고, 스페인군은 퇴각했다. 링커런이 항복한 후 포로들은 코크로 이송되었다.
조지 케어우는 11월 15일에 병사 1,000명과 기병 250명을 이끌고 잉글랜드군 진영에 도착했다. 이틀 후, 항구 입구를 지키던 니파크 성이 잉글랜드군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나무로 만든 공성 무기를 사용한 공격은 요새 앞에서 무너지면서 실패했고, 잉글랜드군은 후퇴했다. 아길라는 요새를 구원하려고 보트에 소규모 부대원들을 태워 파견했지만, 잉글랜드 해군의 포격에 격퇴되었다. 이틀 후, 성벽이 연이은 포격으로 무너진 뒤 리처드 스미스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공격으로 니파크 성이 함락되었고, 그곳을 지키던 33명 전원이 전사, 부상, 또는 포로가 되었다. 이제 전진 기지인 켐필이 노출되자, 아길라는 그곳을 포기하기로 했다. 캠필 요새를 장악하면서 고지대를 확보한 잉글랜드군은 여기에 대포를 배치해 킨세일에서 농성하는 적군을 향해 포격을 끊임없이 가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레베슨 제독은 출항하기까지 일주일을 기다리다가 11월 12일이 되어서야 전장에 도착했고, 킨세일 항구를 단단히 봉쇄했다.
3.3.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의 상륙
12월 1일,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는 마침내 원하던 바람이 불자 아코루냐에서 함선 10척과 알론소 데 오캄포 대위가 지휘하는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항했다. 병참 총장 페드로 로페스 데 소토도 원정군에 가담해 킨세일에서 버티는 스페인군에게 필수적인 식량, 탄약, 보급품을 가져갔다. 여정은 처음에는 순조로웠지만, 아일랜드 해안에 도착하기 직전에 강한 북풍에 밀려났다. 유니콘 호는 킨세일 인근에 도착했지만, 레베슨 제독의 봉쇄선에 발각되어 프래스턴의 가랜드호에 의해 나포되었고, 그곳에 타고 있던 스페인 병사 80명은 항복했다. 3척은 상륙하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6척은 621명의 병사만 태운 채 잉글랜드 해군의 추적을 회피해 12월 11일 캐슬헤븐 인근에 상륙했다.스페인군이 캐슬헤븐에 상륙하자, 베레헤이븐 백작 도널 캠 오설리번 베어와 엘리자베스 1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은 적이 있었던 피닌 오드리스콜 경이 스페인군을 환영하고 펠리페 3세에게 충성 서약했다. 주비아우르는 아일랜드 영주들과 조약을 맺어, 글렌 바라한 성을 넘겨받고 100명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대포 여러 문을 설치하는 등 방어를 강화했다. 그 사이 6척의 배는 캐슬헤븐의 얕은 곳에 정박했다. 주비아우르는 대규모 스페인군의 상륙에 매우 적합한 장소로 볼티모어 항구를 선정했다. 그 이유는 그곳이 완전히 외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알론도 데 오캄포가 병사 200명과 함께 출발해 볼티모어 항구 인근의 성을 접수했다. 베레헤이븐 근처의 던보이 성에는 다양한 구경의 대포 8문과 함께 사베드라 대위가 지휘하는 스페인 병사 60명이 주둔했다. 셔킨 섬의 도넬롱 성에는 대포 9문과 80명이 안드레스 데 아르베 대위의 지휘하에 주둔했으며, 소규모 병력은 볼티모어 인근의 두나시드 성으로 파견되었다.
모든 성의 방어 시설은 최신식으로 개조되었고, 대포로 무장하고 강화했다. 주비아우르는 자신과 가세한 아일랜드 영주들의 사병대에게 파이크 650개와 아르케부스 총 350개를 넘겨주고 그걸로 무장하게 했다. 또한 알론소 데 오캄포는 타이론 백작의 정예 병력 200명과 함께 육로로 타이론 백작의 본대와 합류하도록 파견되었다. 이틀 후, 찰스 블런트는 스페인 함선들이 캐슬헤븐 항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레베슨 제독에게 캐슬헤븐에 있는 스페인 함대를 섬멸하거나 최대한 괴롭혀라."라는 전갈을 보냈다. 레베슨은 이 전갈을 받은 뒤 부제독 프레스턴을 남겨서 킨세일 항구를 계속 봉쇄하게 하고, 본인은 워스파이트, 디파이언스, 스위프트슈어, 멀린과 상선 한 척과 캐러벨 한 척을 이끌고 캐슬헤븐으로 항해했다.
3.4. 캐슬헤븐 해전
12월 6일 오전 10시, 레베슨의 함대가 캐슬헤븐에 도착했다. 그러나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는 적이 온다는 걸 사전에 전해 듣고 항구 입구에 8문의 함포를 갖춘 채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췄다. 10문의 함포를 갖춘 멀린은 스페인 군의 포격을 뚫고 노를 저어 518톤급 워스파이트가 뒤따를 수 있는 수로를 만들었다. 스페인 해안 포대와 함선들의 맹렬한 포격이 이어졌고, 이 때문에 잉글랜드 함선들이 다소 피해를 보았다.양측은 오후 4시경까지 교전을 벌였다. 주비아우르의 기함 갤리온 선 마리아 프란체스카호는 대부분의 선원과 함께 침몰했다. 200톤급 시스노 카멜로는 수선 아래에 구멍이 뚫려 얕은 물에 가라앉았다.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된 프랑스의 임대선은 화재가 발생하여 침몰할 때까지 포격받았다. 특히 대형 갤리온선 디파이언스와 워스파이트의 지속적인 포격으로 인해 스페인 선박 2척이 큰 피해를 보아 운항이 힘들어졌고, 선원들은 이 선박들을 좌초시켰다. 여기에 스페인 상선 한 척이 나포되었고, 이 배 역시 곧 좌초되었다.
레베슨은 해안에 상륙하여 포대를 제거할 병력이 없었고, 그의 함선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탄약이 동났다. 여기에 스페인군은 아일랜드 보병들의 지원을 받으며 해안에서 항전했다. 이에 레베슨은 바람을 타고 바다로 철수했다. 스페인군은 이 해전에서 보유했던 전함들이 함선 1척을 제외하고 전부 파괴되거나 좌초되었고, 주비아우르는 캐슬헤븐에서 바다를 통해 킨세일로 갈 수 없게 되어 그곳에 고립되었다.
3.5. 킨세일 전투
타이론 백작과 타르코넬 영주의 아일랜드 반군은 12월의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행진했다. 그들은 조지 케어우를 피해 티퍼레리주의 슬리브 펠림 산맥을 통과했다. 킨세일 포위 공격을 이끌던 찰스 블런트는 12월 6일 두 영주가 이끄는 반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여기에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가 킨세일로 파견한 알론소 데 오캄포의 군대가 힘든 행군 끝에 타이론 백작의 군대와 합류했다. 12월 21일, 아일랜드-스페인 연하군은 스피틀 언덕에 도착했다. 당시 킨세일을 포위한 잉글랜드군은 어려움을 겪었다. 보급품은 부족했고, 차디찬 겨울 날씨로 장병들에게 타격을 입혔고, 많은 이들이 이질과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많은 아일랜드 징집병이 탈영하거나 병사하면서, 약 7,500명만이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12월 23일 새벽, 아일랜드-스페인 연합군이 킨세일 인근 아드미틴 언덕 근처에 도착했다. 리처드 티렐 휘하의 렌스터 부대 400명, 먼스터 부대 1,000명, 오캄포 휘하의 스페인군 200명, 타이론 백작 휘하의 보병 2,500명과 경기병 500명, 타르코넬 영주 휘하의 보병 1,500명과 경기병 300명으로, 총합 6,000명에 달했다. 그들의 계획은 킨세일 마을 근처 언덕에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한 뒤, 잉글랜드군이 자기들을 공격할 때 항전하면서, 킨세일 수비대가 출격해 적의 배후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일랜드군에서 이탈한 배신자가 찰스 블런트에게 이 계획을 알려줬고, 블런트는 즉시 반격 작전을 준비했다.
12월 24일, 아일랜드-스페인 연합군은 거센 폭풍우를 무릅쓰고 행진했다. 리처드 티렐이 이끄는 선봉대는 테르시오 형태로 전투에 돌입하려 했다. 타이론 백작은 길고 고된 행군 끝에 부하들을 아드마틴 언덕 정상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창병을 세우고 아르케부스에 불을 붙이며 잉글랜드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폭풍은 곧 그쳤지만, 안개와 비 때문에 킨세일에 주둔한 스페인군은 아일랜드군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출격하지 않았다.
얼마 후, 잉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타이론 백작은 아드마틴 언덕에서 밀워터 쪽으로 후퇴해 잉글랜드군을 깊숙이 유인해 킨세일의 수비대가 적의 뒤통수를 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개활지에서 이동 중인 아군이 잉글랜드군에게 습격당할 빌미를 준 실책이었다. 찰스 블런트는 리처드 윙필드 대령 휘하의 기병 300명과 보병 1,000명을 파견해 타이론 백작의 부대를 압박하여 중간 개울 위의 주요 여울 2개를 접수하라고 명령한 뒤 적을 추격했다. 아일랜드군은 적의 추격을 뿌리치며 후퇴했지만, 잉글랜드 기병대가 좌익에서 단호한 돌격을 가해 아일랜드 측면을 요격했다. 이 때문에 혼란이 발생했고, 아일랜드군은 곧 대형이 무너진 채 도주했다. 잉글랜드군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마구잡이로 살육했다. 하지만 오캄포가 지휘하는 스페인 정예병 200명은 후퇴를 거부하고 싸우다가 거의 전멸했다. 오캄포는 병사가 얼마 남지 않자 적군 깃발 기사인 존 파이크먼에게 자신의 검을 주고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전투에서 여러 개의 군기를 노획했다.
한편, 킨세일의 스페인군은 정오 무렵에 총소리를 듣고 구원군이 왔으며 잉글랜드군과 교전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그들을 돕기 위해 출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잉글랜드군이 자기들을 상대할 준비를 하는 걸 보고 멈췄다. 잉글랜드군은 노획한 스페인 깃발을 흔들며 조롱했다. 스페인군은 처음에는 소규모로 출격해 적의 대열을 공격했지만,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이후 격렬한 전투가 2시간 동안 벌어졌고, 스페인군은 적군의 첫 번째 참호를 돌파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올리버 세인트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반격으로 성벽 내부로 밀려났다. 올리버 세인트 존은 이 과정에서 다쳤다.
타이론 백작의 아일랜드군은 혼란 속에서 북쪽으로 도주했고, 잉글랜드 기병대는 적을 계속 추격해 사살하다가 습지를 만나자 물러났다. 전투가 끝날 무렵, 잉글랜드군은 아일랜드 병사 500~800명과 스페인 병사 150여 명을 사살했다. 스페인 지휘관 페드로 데 오캄포, 2명의 대위, 그리고 47명의 사병이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은 전사자 12명에 불과했고, 부상자는 36명이었다. 타르코넬 영주의 아일랜드군 후위대는 전장에 너무 늦게 도착해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타이론 백작이 패주하는 걸 보고 단념한 뒤 캐슬헤븐으로 가서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의 스페인군과 합류하기로 했다.
3.6. 스페인군의 항복
킨세일 전투 이틀 후, 타르코넬 영주는 캐슬헤븐에 도착해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에게 패전 소식을 전했다. 주비아우르는 그에게 스페인과 아일랜드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펠리페 3세에게 직접 호소해 달라고 간청했다. 12월 27일, 두 사람은 로페스 데 소토에게 지휘권을 넘긴 뒤 스코틀랜드 상선을 타고 스페인으로 출항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킨세일 포위 작전을 재개했고, 아길라는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고, 이미 많은 병사를 잃어서 승산이 거의 없다고 여겼다.아길라는 앞으로 어찌할지 논의하고자 회의를 소집했다. 일부 장성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은 평화 협상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킨세일 전투 10일 후, 아길라는 휴전을 선언하고 찰스 블런트와 만났다. 이후 오랜 논의 끝에, 그는 "명예로운 조건"으로 킨세일을 블런트에게 넘기기로 했다. 스페인군은 군기를 가지고 떠날 수 있었지만, 전쟁 중 잉글랜드군이나 네덜란드군에 맞서 무기를 들 수는 없었다. 또한 캐슬헤븐, 셔킨 섬, 두나시드, 던보이에 주둔한 다른 수비대도 철수하는 대가로, 잉글랜드 함선을 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 후 로버트 하비 대위와 조지 플라워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배를 몰고 진군해 1602년 2월 10일 캐슬헤븐에서 로페스 데 소토의 스페인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비와 소토는 저녁을 함께 먹으며 잉글랜드와 스페인 사이에 평화가 이뤄지기를 기원했다. 셰르킨 섬의 도넬롱 성과 본토의 두나시드 성도 하비의 군대에 항복했다. 조지 플라워 대위가 이끄는 또 다른 부대는 사베드라 대위가 이끄는 던보이 수비대에게 항복을 요구하려 했고, 사베드라 대위의 스페인군도 잉글랜드군이 도착하면 요새를 넘기려 했다. 그러나 역풍이 불고 질병이 창궐해서 잉글랜드군은 후퇴해야 했고, 그 사이에 아일랜드 반군 지휘관 오설리번이 던보이를 접수했다. 다만 사베드라 대위와 스페인 병사들은 잉글랜드군으로 보내졌고, 곧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조지 플라워가 던보이 성을 접수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 조지 케어우는 도노 오브라이언과 함께 4,000명에 달하는 병사를 이끌고 5월 말 던보이 성으로 진군했다. 다음 달, 그들은 던보이 성을 점령하고 대부분의 포로를 교수형에 처했다. 그 후 조지 케어우는 약 20km 떨어진 더지 섬의 작은 요새를 점령하고 더지 섬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1602년 1월 1일, 마르틴 데 라 세르다가 이끄는 보병 2개 중대와 보급품을 실은 스페인 함선 5척이 리스본을 출발해 아일랜드로 항해했다. 3척은 도중에 폭풍을 만나 갈라시아로 돌아갔지만, 2척은 2주 후 킨세일 앞바다에 도착했다. 당시 아길라는 코크의 주교궁에서 찰스 블런트와 함께 저녁 식사하고 있었다. 찰스 블런트는 잉글랜드인 11명과 스페인 선원들을 태운 캐러벨을 스페인 함선 2척에 보내 아길라가 이미 항복했다는 걸 알렸고, 스페인 함선들은 이내 돌아갔다. 스페인 궁정은 처음에는 적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여기고 다른 함대를 파견하려 했지만, 아길라가 정말로 항복했다는 게 밝혀지자 중단했다.
2월 20일, 스페인군 첫 번째 부대 1,400명이 잉글랜드 함선들을 통해 스페인에 돌아왔다. 2번째 부대 1,200명은 3월 8일에 출발했는데, 여기에는 볼티모어와 캐슬헤븐 수비대가 포함되었다. 아길라는 이들과 동행하여 라코루냐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부상자, 죽어가는 사람,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야전 병원을 세우고, 병원 운영비를 사비로 충당했다. 돌아온 이들 중 살아남아 임무에 복귀할 수 있는 이는 800명뿐이었다고 전해진다.
4. 결과
펠리페 3세는 패전 소식에 몹시 노여워했고, "가톨릭과 나의 명예를 위해" 1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대를 아일랜드로 파견하려 했다. 그러나 1602년 5월이 되자 재정과 해군 모두 열악한 상황이라서 원정을 감행하는 건 무리라는 게 분명해졌다. 게다가 페인군은 오스텐트 공방전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딴 데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여기에 잉글랜드 해군은 스페인 함대가 다시 쳐들어올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이베리아반도로 항해해 세심브라만 해전에서 적 함대에 타격을 입혔고, 페데리코 스피놀라가 오스텐트 포위군을 지원하기 위해 소규모 함대를 끌고 영국 해협을 돌파하려 하자 도버 해협 해전에서 격파했다. 결국 스페인은 다시는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를 향한 원정을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엘리자베스 1세는 초대 코크 백작 리처드 보일로부터 아일랜드에 상륙한 스페인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여기에 며칠 후에 오스텐트에서 포위된 프랜시스 베레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수비대가 스페인군의 대규모 공격을 격퇴했다는 낭보도 전해졌다. 이리하여 찰스 블런트와 프랜시스 베레는 모두 영웅으로 칭송되었는데, 특히 찰스 블런트는 인기 발라드와 시에서 언급되었으며, 리처드 베나르의 희곡 "잉글랜드의 기쁨"에서 스페인에 대한 자국의 승리를 마스크로 표현한 주제의 선두에 있었다.
스페인 궁정은 적에게 투항한 후안 델 아길라에게 진노해 군사 재판을 열기로 했다. 아길라는 가택 연금에 처했고, 그에게는 12가지 혐의가 제기되었다. 그중 주요 혐의는 식량이 킨세일 요새에 아직 남아 있었고, 킨세일을 포위한 잉글랜드군이 전염병에 시달리고 탈영병이 속출했으며, 여러 아일랜드 영주가 식량 공급할 의지가 있었는데도, 어째서 이리도 빨리 잉글랜드에 항복했냐는 것이었다. 아길라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무죄를 호소할 길이 막히자 절망에 빠진 끝에 1602년 후반 시만카스에서 병사했다. 아길라 사후, 스페인 코르테스는 아길라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로 했다.
링커런 요새의 수비대장 페드로 데 에레디아도 방어를 포기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고, 페드로 로페스 데 소토와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도 재앙의 원인으로 비난받았다. 두 사람 모두 아길라의 명확한 명령에 반하여 타이론 백작에 합류할 스페인 군인을 더 보내지 않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로페스 데 소토는 2년간 궁정에서 추방되었고,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는 아일랜드에 처음 상륙하지 못한 것과 적 함대와의 교전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3년간 감옥에 갇힌 후 1605년에 풀려났다. 킨세일 전투의 패장 페드로 데 오비에도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궁정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조사는 1605년까지 이어졌고, 법원은 실패의 원인이 전문가의 조언 부족과 자원 부족이라고 판결했다.
아일랜드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 스페인의 실권자인 레르마 공작은 이 이상의 전쟁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잉글랜드와의 평화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1603년 3월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뒤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의 새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협상은 진전되었다. 그해 6월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공식적으로 협상을 시작했고, 1604년 8월 런던 조약이 체결되면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타이론 백작은 스페인군이 항복한 후 1년간 항전하다가 1603년 3월 30일 멜리폰트 조약에 서명하면서 잉글랜드군에 귀순했다. 이로써 9년간 이어진 아일랜드에서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마운트조이 백작 찰스 블런트는 제임스 1세에 의해 군수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데번셔 백작을 역임하면서 광대한 영지를 받았다. 타이론 백작과 그의 동맹자들은 1607년 아일랜드를 완전히 떠났고,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전역을 식민지화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