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Desmond Rebellions.엘리자베스 1세 치세인 1569~73년과 1579~83년에 아일랜드 남부 먼스터에서 발발한 대규모 반란. 데스몬드 백작 가문을 중심으로 뭉친 게일인이 먼스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던 잉글랜드 당국에 대항해 봉기하면서 벌어진 반란으로, 초기에는 잉글랜드 군주로부터 자주권을 확보하려는 봉건 영주의 열망으로 촉발되었지만, 개신교를 전파하려는 잉글랜드 당국과 가톨릭을 고수하려는 게일인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먼스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데스몬드 백작 가문은 반란이 진압되면서 몰락했고, 수많은 아일랜드인이 피살당했으며, 잉글랜드 정착민들이 먼스터에 대규모로 이주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의 아일랜드 식민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2. 제1차 데스몬드 반란(1569~1573)
제1차 데스몬드 반란 First Desmond Rebellion | |||
기간 | |||
1569년 6월 ~ 1573년 2월 23일 | |||
장소 | |||
아일랜드 왕국 먼스터 | |||
원인 | |||
잉글랜드 왕국의 먼스터 통제 강화 시도에 대한 데스몬드 백작 가문의 반발.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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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병력 | |||
4,500명 | 미상 | ||
결과 | |||
반란 진압. 그러나 잉글랜드 당국의 실책으로 제2차 데스몬드 반란 발발. |
2.1. 배경
아일랜드 남부, 즉 먼스터와 렌스터 남부 지역은 2세기 동안 오몽드 백작위를 꿰찬 버틀러 가문과 데스몬드 백작위를 꿰찬 피츠제럴드 가문에 의해 지배되었다. 두 가문은 잉글랜드 정부에 연공 금을 바치고 충성을 서약하는 대가로 더블린을 중심으로 아일랜드 동부 해안 지대를 직할 통치하는 잉글랜드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자체 군대를 모집하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관습을 혼합한 자체 법률을 시행하는 등 자치권을 누렸다.그러나 헨리 8세가 1541년 대대로 아일랜드 총독을 독점하며 반(半) 독립 상태였던 킬데어 가문을 소환, 숙청하고 아일랜드 반란을 평정한 뒤 더블린 의회에서 아일랜드의 왕 칭호를 받으면서 아일랜드 왕국이 성립된 이래, 잉글랜드 정부는 아일랜드섬 전체에 걸쳐 권력을 확장하려 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이에 맞서 잉글랜드의 통제에 들어간 페일 일대를 종종 습격해 큰 피해를 줬고, 더블린에서 왕을 대신해 아일랜드를 통치하던 총독들은 이들의 습격을 막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1565년 아일랜드 총독 헨리 시드니는 얼스터에서 페일 일대를 심각하게 약탈한 오닐 씨족의 수장 셰인 오닐을 추격한 끝에 1567년 엔트림의 맥도넬 씨족을 사주해 셰인 오닐을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헨리 시드니는 아일랜드 남부의 권력자인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 사이에 분쟁을 조장했다. 안 그래도 서로에게 경쟁의식을 품었던 피츠제럴드 가문과 버틀러 가문은 헨리 시드니의 부추김에 넘어가 전쟁을 단행해 1565년 워터포드의 애페인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봉신들이 주군인 자신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인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두 가문의 수장을 런던으로 불러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게 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친족이었던 토머스 버틀러는 사면받았지만,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그의 형제 데스몬드의 존은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데스몬드 백작령의 군대는 백작의 사촌인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에게 넘어갔다. 피츠모리스는 형제들을 체포한 당국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고, 사병을 해산하라는 당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 헨리 시드니와 피터 케어우가 게일인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잉글랜드 이주민들에게 분배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자, 게일인 씨족들은 이에 반감을 품었다. 피츠모리스 본인은 코크 주에 있는 케리커리히에서 소유한 영지를 잉글랜드 이주민들에게 빼앗겼다. 또한 피츠모리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반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아 엘리자베스 1세가 선임한 개신교 총독들을 적대시했다. 그리고 버틀러 가문이 데스몬드 가문을 제치고 아일랜드 남부에서 절대 권력을 손에 쥐는 걸 막기로 하고, 잉글랜드군과 오몽드 백작에 대항한 반란을 조직했다. 여기에 캐셀의 가톨릭 대주교인 모리스 맥기본을 스페인 제국으로 비밀리에 파견해 펠리페 2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첫 번째 데스몬드 반란이 발발했다.
2.2. 경과
1569년 6월, 피츠모리스는 코크 주 남쪽에 있는 잉글랜드 정착지 케리커리히(Kerrycurihy)를 습격했다. 그 후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도시와 지역 영주들을 공격해 피해를 줬다. 그해 7월, 피츠모리스는 4,5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의 거주지인 킬케니를 포위했다. 아일랜드 총독 헨리 시드니는 이에 대응해 잉글랜드군 600명을 동원해 더블린에서 남쪽으로 진군했고, 400명은 바다를 통해 코크 주에 상륙하게 했다. 한편, 토머스 버틀러는 자신의 거주지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에서 돌아와 버틀러 가문 인사들과 일부 게일인 씨족을 동원했다.킬케니를 공략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피츠모리스는 잉글랜드군과 오몽드 백작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직면했다. 오몽드 백작, 헨리 시드니, 그리고 먼스터 주지사로 선임된 험프리 길버트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해 피츠모리스의 동맹 세력이 보유한 영지를 파괴했다. 각 영주들이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후퇴해야 했기 때문에, 피츠모리스의 군대는 와해했다. 월터 롤리의 이부형제였던 험프리 길버트는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살해하고 진지 입구에 잘린 머리를 세워놓음으로써 게일인에게 공포심을 심어줬다.
헨리 시드니는 피츠모리스를 케리주 산악지대로 몰아놓았지만, 피츠모리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잉글랜드군과 오몽드 백작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1570년까지 피츠모리스의 동맹 세력 대부분이 헨리 시드니에게 항복했지만, 그는 3년간 유격전을 꿋꿋이 전개했다. 1571년 2월, 먼스터 주지사로 새로 임명된 존 페로는 병사 700명을 이끌고 1년 넘게 피츠모리스를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 피츠모리스는 1571년 킨세일 인근에서 잉글랜드 선박을 나포하고 킬말록 마을을 불태우는 등 몇 차례 소규모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1573년 초, 잉글랜드군의 끈질긴 추격과 식량난에 시달린 병사들이 계속 이탈한 결과, 피츠모리스에게 남은 병력은 100명 미만에 불과했다. 결국 피츠모리스는 1573년 2월 23일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귀순했다. 그러나 1574년에 영지를 몰수당했고, 1575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동생 존은 런던 탑에서 풀려난 뒤, 황폐해진 영토를 재건하고 주민들을 다스리면서 잉글랜드에 복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2.3. 결과
반란을 진압한 뒤, 잉글랜드 정부는 데스몬드 가문의 군대를 기병 20명으로 제한했고, 소작농들은 병역을 제공하거나 병사를 숙소로 제공하는 대신 소작료를 지급해야 했다.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오몽드 백작은 데스몬드 가문의 영지 상당수를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받아내면서 잉글랜드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잉글랜드 정부가 반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강경책을 단행하면서, 게일인들은 깊은 반감을 품었다. 1576년 먼스터 주지사로 부임한 윌리엄 드루리는 피츠모리스에게 가담했던 아일랜드 용병들을 추적해 약 700명을 집단 처형했다. 또한 아일랜드의 관습법인 브레혼 법, 아일랜드 복식, 음유시, 그리고 사병 유지와 같은 게일인 관습은 불법화되었고, 잉글랜드 주민들이 먼스터로 대거 이주해 데스몬드 가문의 옛 영지에 정착해서 아일랜드 지주들을 위협했다. 이에 분노한 게일인들은 나중에 피츠모리스가 아일랜드로 돌아와 반란을 선동했을 때 기꺼이 가담했다.
3. 제2차 데스몬드 반란(1579~1583)
제2차 데스몬드 반란 Second Desmond Rebellion | |||
기간 | |||
1579년 7월 18일 ~ 1583년 11월 11일 | |||
장소 | |||
아일랜드 왕국 먼스터와 렌스터 | |||
원인 | |||
잉글랜드 왕국의 게일인 문화 억압과 잉글랜드인 이주 정책, 개신교 전파에 대한 게일인 영주들의 반발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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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제임스 유스터스 | 윌리엄 펠럼 윌리엄 스탠리 | ||
결과 | |||
잉글랜드 왕국의 승리. 먼스터 인구의 1/3 사망. |
3.1. 배경
1575년 프랑스로 망명한 피츠모리스는 자신을 몰락시킨 아일랜드 행정부에 강한 반감을 품고, 새로운 반란을 위한 지원을 얻으려 애썼다.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 궁정에 자주 드나들며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을 수호하고 싶으니 군사 지원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맞서기 위해서는 잉글랜드 왕국과 협조해야 한다고 여겼기에 그를 도와줄 생각이 없었고, 펠리페 2세는 그를 호의적으로 대하긴 했지만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을 쏟아붓는 상황에서 아일랜드에 별도의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이에 피츠모리스는 교황령에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피츠모리스는 교황령에서 잉글랜드에서 로마로 망명한 윌리엄 앨런, 니콜라스 샌더스 등 가톨릭 사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잉글랜드 모험가 토머스 스터클리 선장과 함께 그레고리오 13세의 사생아이며 소라 공작, 아키노, 아르체, 아르피노, 비놀라 후작인 자코모 본콤파니를 아일랜드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다.
1578년 3월, 교황으로부터 보병을 지원받은 토머스 스터클리는 로마 치비타베키아에서 병사 1,000명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출항했다. 이 병력에는 사면받은 노상강도, 총사, 그리고 피사노의 헤라클레스와 볼로냐의 세바스티아노 디 산 주세페를 포함한 몇몇 전문 장교들이 있었다. 스페인의 카디스 항구에서 아일랜드인 몇 명을 추가했고, 펠리페 2세에게 리스본으로 가서 더 좋은 배를 확보하고 피츠모리스와 만나게 했다. 그러나 스터클리는 세바스티앙 1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모로코 원정에 가담했다가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세바스티앙 1세와 함께 전사했다.
스터클리가 전사하면서 아일랜드 원정이 좌절되었지만, 피츠모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니콜라스 샌더스 등과 함께 로마로 돌아와서 그레고리오 13세의 허가를 받아 새로운 원정대를 구상했다. 1579년 6월 초, 피츠모리스는 스페인 갈리시아의 코루냐에서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군대로 구성된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출항했다. 함대는 피츠모리스의 선박과 스페인 샬롭(Shallop)으로 구성되었으며, 마태오 데 오비에도와 니콜라스 샌더스가 교황의 위임장을 들고 가세했다.
원정군은 영국 해협을 항해하던 중 잉글랜드 선박 2척을 나포했고, 7월 16일에 딩글 항구에 도착했다. 이틀 후 인근의 스머윅 항구에 정박했고, 철기 시대에 건설된 곶 요새인 던 안 오이르(Dún an Óir: 금의 요새)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니콜라스 샌더스는 딩글에서 교황의 깃발을 들고 행진했고, 피츠모리스는 그레고리오 13세의 서한으로 인가된 성전을 선포했다. 여기에 스페인군 100명을 태운 갤리선 2척이 7월 25일에 반군에 가담했다. 이리하여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이 발발했다.
3.2. 경과
3.2.1. 반란의 확산
당시 아일랜드에 상륙한 피츠모리스의 병력은 수백 명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8월 1일,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가 가세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는 피츠모리스처럼 군인이었고, 그의 친척들과 잉글랜드 당국에 불만을 품은 게일인 용병들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존이 반란에 가담한 후, 반란군에 가담한 이들이 대거 늘어났다. 존과 그의 동생인 이모칼리의 총독 제임스 피츠먼드 피츠제럴드는 트랄리의 한 선술집에서 잉글랜드 관리 헨리 다벨스와 아서 카터를 암살함으로써 반란에 가담했음을 알렸다.피츠모리스와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는 소수의 유럽 대륙군과 수천 명의 아일랜드 원주민을 포함해 3,000명이 넘는 병력을 지휘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스머윅에 상륙한지 나흘 후인 1579년 7월 29일에 잉글랜드 제독 윌리엄 윈터가 반란군 함선을 나포하고 해로를 차단하면서, 유럽 대륙에서 증원군이 추가로 올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한편,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는 잉글랜드에 대항한 반란에 가담하길 꺼렸고,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했다. 그러나 그에게 모인 인원은 60명뿐이었다. 이는 피츠제럴드 가문과 그 동맹 세력 대부분이 반란에 동조했음을 시사한다.
반란군 일부는 아일랜드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소수는 새넌 강 남쪽 기슭(케리 주 북부)에 있는 캐리거포일 성으로 진군했는데, 이곳은 데스몬드 백작의 거처였다. 또한 피츠모리스는 직접 코노트로 진군해서 그곳에서 반란군을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1579년 8월 18일, 그는 티퍼레리 주의 털스 수도원에서 서원을 하러 갔다가 사촌인 테오발드 버크의 군대의 습격을 받았다. 전투 도중 가슴의 움푹 들어간 부위에 총을 맞았지만, 피츠모리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테오발드 버크와 그의 형제 윌리엄 버크에게 검을 휘둘러 두 사람 모두 사살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친구들에게 사후에 자기 머리를 베어 숨김으로써 적군이 자신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가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피츠모리스의 머리는 숨겨졌지만, 몸통은 어느 나무 아래에 숨겨졌다가 한 사냥꾼에게 발견되어 킬말록 마을로 옮겨진 뒤, 몇 주 동안 교수대에 못 박혀 있다가 머스킷 총격으로 산산이 조각났다. 그 후 반란군은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의 지휘를 받았다.
반란군은 먼스터 남부를 장악했고, 아일랜드 내 잉글랜드군은 이를 탈환할 병력이 부족했다. 잉글랜드 총독 윌리엄 드루리는 600명을 이끌고 리머릭으로 진군했고, 그곳에서 니콜라스 말비와 1,100명의 잉글랜드군과 합세했다. 그러나 드루리는 곧 건강이 악화하여 병사했고, 니콜라스 말비가 잉글랜드군 지휘를 대신 맡았다. 10월 말, 말비는 데스몬드 가문의 영토로 진군해 그곳의 시골들을 파괴하고, 데스몬드 백작에게 애스키튼 성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데스몬드 백작은 말비가 무력으로 성을 점령하려 하자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아일랜드 대법관 윌리엄 펠럼은 데스몬드 백작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데스몬드 백작은 결국 반란에 가담하기로 했다. 1579년 11월 3일, 데스몬드 백작과 그의 추종자들은 요할 마을을 약탈하고, 잉글랜드군 수비대를 학살하고, 잉글랜드 관리를 교수형에 처하고, 마을을 약탈하고, 민간인들을 학대했다. 뒤이어 코크 시를 봉쇄했으며, 케리 산맥 등지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편, 맥카시 가문의 수장인 맥카시 모르도 반란에 가담한다고 선언하고 킨세일을 약탈했다.
3.2.2. 잉글랜드 왕국의 반격과 렌스터의 반란
1580년 초, 아일랜드로 파견된 잉글랜드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윌리엄 펠럼과 조지 케어우는 잉글랜드를 꿋꿋이 지지한 아일랜드 영주인 제3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와 함께 병력을 규합한 후 먼스터로 진군했고, 리머릭 주, 코크 주, 케리 주 북부에 걸친 데스몬드 가문 영지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그곳에 사는 민간인을 살육했다. 이러한 전술은 데스몬드 백작 가문의 추종자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인적 피해를 줘 반란에서 이탈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잉글랜드군에는 잉글랜드 본토에서 온 이들뿐만 아니라 오몽드 백작 가문과 카버리의 맥카시 리 가문이 파견한 아일랜드군이 가담했으며, 제3대 타이론 백작 휴 오닐도 얼스터에 있는 자기 영지를 지키기 위해 반란군과 독자적으로 싸웠다.1580년 3월, 잉글랜드군은 섀넌 강 어귀에 있는 캐리거포일 성을 포위했다. 6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윌리엄 펠럼은 윌리엄 윈터가 이끄는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캐리거포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 뒤, 그곳에 주둔한 반란군 수비대를 학살했다.(케리거포일 공방전) 이제 그들은 북쪽에서 반란군을 차단하고 외국군이 먼스터의 주요 항구인 리머릭에 상륙하는 것을 막았다. 그 후 다른 데스몬드 가문 요새들도 빠르게 함락되었다. 애스키턴 성은 스페인 수비대가 성벽을 폭파하면서 버려졌고, 뉴캐슬 웨스트, 발리로건, 래스킬, 벨리더프 수비대는 곧 항복했다. 맥카시 모르 등 반란에 가담했던 많은 영주도 잉글랜드가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했다고 판단하고 항복했다.
이제 먼스터의 반란이 곧 진압되는 듯하던 1580년 7월, 클로우 산맥을 기반으로 삼던 피아흐 맥휴 오바인이 아일랜드 동부의 렌스터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마바나(Kavanagh), 오툴스(O'Tooles), 오무어스(O'Moores)를 포함한 지역 영주 및 씨족 지도자들의 연합을 결성했는데, 이중 다수는 이미 수년 동안 잉글랜드 수비대와 여러 차례 충돌했다. 반란군은 잉글랜드 통치에 대한 상징적인 거부의 의미로 잉글랜드가 정복하기 이전에 렌스터에서 왕을 칭한 조상을 둔 크레온 맥머러프 카바나흐를 렌스터의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오바인은 페일의 잉글랜드 출신 영주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앙심을 간직해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에 불만을 느꼈던 제3대 볼팅글래스 자작 제임스 유스터스와 합류했다.
1580년 8월,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와 니콜라스 샌더스는 라오이스에서 볼팅글래스 자작과 회동하여 잉글랜드군과 공동으로 맞서 싸우는 걸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러나 배로 계곡 지역에서의 제한적인 협력을 제외하고는 공동 전략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지만 더블린에서 군림하던 잉글랜드 관료와 주민들은 더블린에서 멀지 않은 렌스터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에 몹시 불안해했다. 이에 잉글랜드 정부는 아일랜드의 새 총독으로 부임한 제14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아서 그레이에게 2,000명을 맡겨 렌스터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1580년 8월 25일, 아서 그레이 휘하의 잉글랜드군은 위클로 산맥 중심부에 있는 글랜말루어로 쳐들어가서 반란군을 섬멸하려 했지만, 협곡에 너무 깊숙이 들어갔다가 오바인과 발팅글래스 자작 군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글렌말루어 전투) 아일랜드 측 기록에 따르면 800명 이상이 전사했다고 하며, 잉글랜드 측 기록에 따르면 360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윌리엄 스탠리가 아서 그레이의 지시에 따라 렌스터의 페일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후 오바인과 그의 동맹군은 아일랜드 동부와 남동부의 잉글랜드 정착지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지만, 글렌말루어 전투의 승리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대규모 반란에 분노한 잉글랜드 관리들은 웩스포드와 같은 잉글랜드의 확고한 지배를 받는 주민 중 다수를 반역 혐의로 교수형에 처했다. 처형된 사람 중에는 캐셀의 가톨릭 대주교인 더못 오헐리와 더블린 시장의 아내인 마거릿 볼이 포함되었다. 더못 오헐리와 마거릿 볼 모두 훗날 순교자로서 가톨릭 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3.2.3. 스페인과 교황군의 상륙과 스머윅 공방전
1580년 9월 10일,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 제독[1]이 지휘하는 스페인 함대가 세바스티아노 디 산 주세페(Sebastiano di San Giuseppe)가 지휘하는 스페인 및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교황군 600명이 딩글 반도의 스머윅에 상륙하게 했다. 이곳은 전년도에 피츠모리스가 상륙했던 곳과 같은 지점이었다. 이들은 펠리페 2세가 반란군을 돕기 위해 파견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비용을 지급하고 구매한 무기 수천 개를 지녔다. 데스몬드 백작, 볼팅글래스 자작,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는 교황군과 합류하려 했지만, 오몽드 백작과 아서 그레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이들을 막아섰고, 리처드 빙엄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이 교황군 함선을 스머윅 만에서 봉쇄했다. 이에 세바스티아노는 던 안 오이르 요새에 병력을 강화하고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1580년 10월 7일, 아서 그레이는 4,000 병사를 이끌고 스머윅으로 진군해 수비대를 포위했다. 교황군은 딩글 반도 끝자락에 고립되어 한쪽으로는 브랜던 산, 다른 한쪽으로는 규모가 훨씬 큰 잉글랜드군에 차단되었다. 육상과 해상 모두 차단당한 데다, 잉글랜드군이 해사에서 중포를 동원하여 던 안 오이르 요새를 향해 포격을 퍼부으면서 처지가 고달파졌다. 결국 세바스티아노는 사흘 만인 1580년 10월 10일에 신변의 안전과 전리품 상당 부분을 뇌물로 받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은 다음 날 요새에 입성했고, 아서 그레이의 지시에 따라 이탈리아와 스페인 용병 전원을 학살하고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 이 학살에 관여한 이 중에는 잉글랜드 탐험가 월터 롤리도 있었다. 그는 훗날 제임스 1세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을 때 이 사건에 관해서도 기소되었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어서 받들었을 뿐이다."라고 항변했지만, 스스로 무죄를 입증하지는 못했다.
3.2.4. 반란의 종식
교황군이 섬멸된 뒤에도, 반란군은 유격전을 전개하며 전쟁을 2년 더 끌었다. 반란군은 잉글랜드에 복종하는 마을과 도시를 연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잉글랜드군은 이에 보복하고자 아일랜드인 농경지를 황폐화하고, 가축을 죽이거나 빼앗았으며, 집을 파괴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에서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해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1582년 중반, 먼스터 헌정원장으로서 반란군에 적극적으로 맞섰던 워럼 세인트 레거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지난 6개월 동안 먼스터에서만 3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했고, 코크 시에서도 수백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여왕은 1582년 여름에 아서 그레이를 과도한 잔혹 행위를 이유로 총독직에서 해임했다.반란군은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스머윅 공방전 이후 해외 원조가 끊기면서 점점 소모되었다. 피츠모리스와 함께 아일랜드에 상륙한 뒤 열성적으로 반란을 선동했던 가톨릭 사제 니콜라스 샌더스는 아일랜드 남서부에서 2년간 추격대를 피해 숨어지내다가 1581년 봄에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그 후 반란에 가담한 인사 중 다수가 주동자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사면이 내려지자 하나둘씩 항복했고, 볼팅글래스 자작은 1581년 8월 프랑스로 도피했다. 피아흐 맥휴 오바인은 1581년 4월 거짓으로 항복했다가 다시 약탈을 지속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582년 9월에 항복하여 렌스터 반란을 종식했다.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는 잉글랜드 왕실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잉글랜드군의 추격을 받았다. 그는 남은 가문 인사들과 함께 케리와 티퍼레리 산맥에서 은거하며 유격전을 벌였다. 1583년,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가 왕실군 지휘를 맡았다. 그는 아서 그레이 등 이전 잉글랜드 사령관들과는 달리 초토화 전술을 자제하고 외교로 반란군을 회유하기로 했다. 그의 군대는 반란군은 코크 주 서부와 케리 주로 봉쇄했고, 데스몬드 백작의 가까운 친척들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다. 1583년 6월 14일,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는 보병 24명과 기병 4명만 자기 휘하에 남자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1583년 11월, 데스몬드 백작과 추종자들은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딩글반도 캐슬드럼의 모리아티 가문의 재산을 약탈하고 가축을 강탈했으며, 가문의 수장 오웬 모리아티의 여동생을 강간했다. 이에 분노한 모리아티 가문의 병사들은 데스몬드 백작을 추격했다. 그 결과 11월 11일, 케리 주 트랄리 인근의 슬리브 미시 산맥의 글렌긴티에서 모리아티 가문 병사들이 데스몬드 백작을 습격해 살해했다. 오웬 모리아티는 데스몬드 백작의 수급을 런던에 보내는 대가로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1,000파운드의 은화를 받았고, 데스몬드 백작의 시신은 코크 시 성벽에 전시되었다. 이리하여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이 종식되었다.
3.3. 결과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은 먼스터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먼스터는 반란 기간과 이후 수년간 흑사병과 기근으로 고통받았고, 농경지는 황무지로 변모했다. 현대 학자들은 먼스터 인구의 1/3이 전쟁과 이에 따른 질병과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데스몬드 백작 가문은 무너졌고, 그들의 영지는 추종자들의 땅과 함께 몰수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에서 몰려온 이주민들이 먼스터 각지에 정착하고 농장을 세웠다.반란을 어렵사리 진압한 잉글랜드 정부는 스페인 제국과 교황령이 아일랜드에 군대를 파견한 것에 경각심을 품고, 아일랜드섬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 잉글랜드 관리들을 아일랜드 전역에 파견하고 개신교 설교자들을 뒤따라 보냈다. 이에 아일랜드 영주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위기감을 느꼈고, 잉글랜드에 이대로 잠식되느니 맞서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길 희망했다. 그 결과 1593년,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 잉글랜드가 치른 최대 규모의 전쟁인 9년 전쟁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