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 Gerald FitzGerald, 14th Earl of Desmond | |
성명 | 제럴드 피츠제럴드 Gerald FitzGerald |
출생 | 1533년경 |
아일랜드 왕국 | |
사망 | 1583년 11월 11일 |
아일랜드 왕국 케리 주 트랄리 인근의슬리브 미시 산맥의 글렌긴티 | |
아버지 | 제13대 데스몬드 백작 제임스 피츠제럴드 |
어머니 | 모르 오캐럴 |
형제 | 존, 모리스, 호노라, 마거릿, 엘리노어, 조앤, 앨리스 |
배우자 | 조앤 피츠젤러드(1550년 결혼/1558년 사망) |
엘리노어 버틀러(1558년 결혼) | |
자녀 | 제임스, 토머스, 마거릿, 조앤, 캐서린, 앨렌, 앨리스 |
직위 |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
1. 개요
아일랜드 왕국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을 주동한 인물이다.2. 생애
1533년경 제13대 데스몬드 백작 제임스 피츠제럴드와 아일랜드의 게일인 씨족인 오캐럴 가문의 일원인 모르 오캐럴과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존, 모리스가 있었는데, 그 중 모리스는 1558년 이전에 자녀 없이 일찍 사망했다. 그리고 누이로 호노라[1], 마거릿[2], 엘리노어[3], 조앤[4], 앨리스[5]이 있었다.1541년, 아버지 제임스 피츠제럴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하려 했다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에게 굴복한 뒤, 제럴드를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냈다. 그 후 제럴드는 런던에서 교육받았고,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뒤 어린 왕과 한 궁정에서 함께 사는 안건이 고려되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1548년, 제10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의 딸이며 제9대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의 미망인인 조앤 피츠제럴드가 잉글랜드 왕실 시종인 프랜시스 브라이언과 재혼했다. 프랜시스 브라이언은 1549년 12월 27일 아일랜드 대법관에 임명되었지만, 1550년 2월 2일 클론멜 항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제럴드가 조앤 피츠제럴드와 재혼했다. 데스몬드 백작 가문과 오몽드 백작 가문은 오랜 세월 먼스터 지방의 영지 소유권을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벌이고 무력 충돌도 일삼았는데,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의 어머니 조앤이 제럴드와 결혼한 후 이 불화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1558년 아버지 제임스가 사망하자, 제럴드는 데스몬드 백작 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아일랜드 총독인 제3대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워터포드에서 잉글랜드 왕실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곧 제11대 킬데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 티르 에오게인의 왕 셰인 오닐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560년 8월, 토머스 래드클리프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오몽드 백작과 데스몬드 백작 사이의 불화가 재현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실이 법정에 출두하라고 명령했지만, 제럴드는 쉽사리 응하지 않다가 1562년 5월에서야 런던에 도착했고, 그 즉시 동생 존과 함께 체포되어 런던 탑에 구금되었다.
1564년, 제럴드와 존 형제는 런던 탑에서 풀려나 잉글랜드 왕실의 사면을 받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워터포드에 도착하여 그의 친척이자 가신인 초대 데시스 경 모리스 피츠제럴드 경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모리스는 이를 거부하고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565년 초 제럴드의 아내이자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의 어머니인 조앤 피츠제럴드가 사망한 직후, 데스몬드 백작 가문과 오몽드 백작 가문이 전쟁을 벌였다. 1565년 2월, 제럴드는 워터포드 주의 애페인에서 오몽드 백작과 전투를 벌였지만, 300명의 전사를 상실하는 참패를 맞이하고 부상당한 채 오몽드 백작에게 체포되어 클론멜로 끌려간 후 워터포드로 보내졌다. 제럴드는 아일랜드 총독 니콜라스 아놀드의 보호를 받았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봉신들이 주군인 자신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인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두 가문의 수장을 런던으로 불러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게 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친족이었던 토머스 버틀러는 사면받았지만, 제럴드와 동생 존은 체포되어 또 다시 런던 탑에 넘어갔다. 이후 데스몬드 백작령의 군대는 사촌인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에게 넘어갔다. 피츠모리스는 잉글랜드 당국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1569년부터 제1차 데스몬드 반란을 일으켰지만, 잉글랜드군의 반격으로 점점 밀리다가 병력이 100명밖에 안 남자 1573년 2월 23일 진압군에게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귀순했다. 그 후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와 동생 존은 런던 탑에서 풀려난 뒤, 황폐해진 영토를 재건하고 주민들을 다스리면서 잉글랜드에 복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573년 5월 아일랜드로 돌아가서 더블린에서 6개월간 억류되었다가 11월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로 귀환한 제럴드는 잉글랜드 당국이 자기들 법을 아일랜드인에게 강요하는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겨 아일랜드 관습법을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1579년까지는 변고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1579년 7월 해외로 망명했던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가 스페인 제국과 교황령의 지원에 힘입어 자원병 수백 명을 모아서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여기에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가세하면서, 이들은 소수의 유럽 대륙국과 아일랜드 원주민 수천 명을 포함해 3,000명이 넘는 병력을 지휘했다.
제럴드 본인은 잉글랜드에 대항한 반란에 가담하길 꺼렸고,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했다. 그러나 그에게 모인 인원은 60명뿐이었다. 이는 피츠제럴드 가문과 그 동맹 세력 대부분이 반란에 동조했음을 시사한다. 1579년 10월 말, 아일랜드 내 잉글랜드군 사령관 니콜라스 말비는 데스몬드 가문의 영토로 진군해 그곳의 시골들을 파괴하고, 데스몬드 백작에게 애스키튼 성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데스몬드 백작은 말비가 무력으로 성을 점령하려 하자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아일랜드 대법관 윌리엄 펠럼은 데스몬드 백작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데스몬드 백작은 결국 반란에 가담하기로 했다. 1579년 11월 3일, 데스몬드 백작과 그의 추종자들은 요할 마을을 약탈하고, 잉글랜드군 수비대를 학살하고, 잉글랜드 관리를 교수형에 처하고, 마을을 약탈하고, 민간인들을 학대했다. 뒤이어 코크 시를 봉쇄했으며, 케리 산맥 등지까지 세력을 뻗쳤다. 1580년 여름, 윌리엄 펠럼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의 지원을 받으며 데스몬드 백작과 그의 동맹 세력의 땅을 황폐화했다. 1581년 12월, 동생 존이 코크주 북쪽지대에서 전사했다.
이후 반란이 수그러들자, 엘리자베스 1세는 반란에 가담한 인사 중 주동자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사면을 내렸다. 이에 데스몬드 백작을 따르던 무리는 점점 이탈했다. 반면, 데스몬드 백작은 잉글랜드 왕실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추격대에게 계속 쫓겼다. 그는 남은 가문 인사들과 함께 케리와 티퍼레리 산맥에서 은거하며 유격전을 벌였다. 1583년, 제14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가 잉글랜드군 지휘를 맡았다. 그는 이전 잉글랜드 사령관들과는 달리 초토화 전술을 자제하고 외교로 반란군을 회유하기로 했다. 그의 군대는 반란군은 코크 주 서부와 케리 주로 봉쇄했고, 데스몬드 백작의 가까운 친척들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다.
데스몬드 백작은 이에 굴하지 않고 1581년부터 1583년까지 추종자들과 함께 케리주 산속에 숨은 채 유격전을 이어갔다. 그러던 1583년 11월, 데스몬드 백작과 추종자들은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딩글반도 캐슬드럼의 모리아티 가문의 재산을 약탈하고 가축을 강탈했으며, 가문의 수장 오웬 모리아티의 여동생을 강간했다. 이에 분노한 모리아티 가문의 병사들은 데스몬드 백작을 추격했다. 그 결과 11월 11일, 케리 주 트랄리 인근의 슬리브 미시 산맥의 글렌긴티에서 모리아티 가문 병사들이 데스몬드 백작을 습격해 살해했다. 오웬 모리아티는 데스몬드 백작의 수급을 런던에 보내는 대가로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1,000파운드의 은화를 받았고, 데스몬드 백작의 시신은 코크 시 성벽에 전시되었으며, 그의 작위와 영지는 왕실에 몰수된 후 아일랜드로 이주한 잉글랜드 농민과 영주들에게 넘어갔다.
3. 가족
- 조앤 피츠제럴드(? ~ 1565): 제10대 데스몬드 백작 제임스 피츠제럴드의 딸. 제9대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1496~1546)와 프랜시스 브라이언(1490~1550)의 미망인.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의 어머니.
- 엘리노어 버틀러(? ~ 1636): 초대 던보인 남작 에드먼드 버틀러의 딸.
- 제임스 피츠제럴드(1570 ~ 1601): 초대 데스몬드 백작.
- 토머스 피츠제럴드
- 캐서린 피츠제럴드: 초대 페르모이 자작 모리스 로슈와 초혼, 초대 클레어 자작 다니엘 오브라이언과 재혼.
- 제인 피츠제럴드: 더모트 오설리번 경의 부인.
- 앨렌 피츠제럴드: 로버트 크레시 경과 초혼, 제3대 던보인 남작 에드먼드 버틀러와 재혼.
- 엘리자베스 피츠제럴드
- 마거릿 피츠제럴드
- 앨리스 피츠제럴드: 켄메어 백작 가문의 조상인 발렌타인 브라운 경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