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3대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 Thomas Radclyffe, 3rd Earl of Susse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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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토머스 래드클리프 Thomas Radclyffe |
출생 | 1525년경 |
잉글랜드 왕국 | |
사망 | 1583년 6월 9일 (향년 57~58세) |
잉글랜드 왕국 보어햄 | |
아버지 | 제2대 서식스 백작 헨리 래드클리프 |
어머니 | 엘리자베스 하워드 |
형제 | 헨리 |
배우자 | 엘리자베스 리오슬리, 프랜시스 시드니 |
직위 | 제3대 서식스 백작, 아일랜드 총독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아일랜드 왕국의 총독으로 활약했으며, 잉글랜드 북부 반란 진압에 크게 기여했다.2. 생애
제2대 서식스 백작 헨리 래드클리프와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딸 엘리자베스 하워드의 장남이다. 외삼촌으로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캐서린 하워드 왕비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하워드, 1513년 잉글랜드 제독으로서 브레스트 근해에서 프랑스 함대와 맞서다가 전사한 에드워드 하워드, 초대 에핑엄 남작 윌리엄 하워드 등이 있었다. 그의 고모인 엘리자베스 하워드는 앤 불린 왕비의 어머니였다.1542년 아버지가 서식스 백작 작위를 계승한 뒤 피츠월터 자작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군에서 해외 복무를 했고, 1551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6세와 프랑스의 앙리 2세의 딸 사이의 결혼을 주선하는 일을 맡았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553년 6월 16일, 그는 여러 귀족과 함께 에드워드 6세의 침실에 불려 온 뒤, 죽어가는 에드워드 6세의 강력한 명령에 따라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특허장에 서명했다. 하지만 메리 1세가 그해 7월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추종자들의 추대를 받아 군대를 일으키자 즉시 그녀 편으로 가담했고, 이 때문에 잉글랜드 여왕이 된 메리 1세의 총애를 얻었다. 여왕은 그를 고용하여 스페인 왕자 펠리페와의 결혼을 주선하게 했고, 1553년 8월에 그를 피츠월터 남작으로 선임했다.
카를 5세의 궁정에서 결혼 주선 임무를 마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피츠월터 남작은 1556년 4월 아일랜드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제11판은 당시 아일랜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명목상 잉글랜드 왕실의 지배를 받는 아일랜드에 만연한 무정부 상태는 사실상 독립적인 족장들의 분열로 분열해 총독의 임무를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잉글랜드 정치가들이 아일랜드의 상황에 대한 무지와, 반쯤 정복된 섬을 정상적인 정부 체제로 축소하기 위한 일관되고 철저한 정책을 고안하거나 실행할 수 없는 무능으로 인해, 이러한 어려움은 더 심화했다."
피츠월터 남작은 메리 여왕의 대아일랜드 정책을 그대로 집행했다. 그는 에드워드 6세의 짧은 재위 기간에 아일랜드에 개신교를 장려하려 했던 정책을 중지하고, 미들랜드 지역에 잉글랜드 정착민들의 농장을 건설했다. 하지만 그는 농장을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전에 얼스터로 원정을 떠나야 했다. 당시 얼스터는 앤트림 해안을 따라 "글린스"[1]에 정착지를 건설하던 킨타이어와 아일즈의 하이랜드 스코틀랜드인들과 얼스터에서 더 많은 영토를 장악하려는 셰인 오닐의 끊임없는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1557년 2월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제3대 서식스 백작이 된 토머스는 1557년 9월 3일 원정대를 조직해 레슬린 섬으로 진군했다. 그는 사흘간 섬에 머물면서 주민들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이후 세인 오닐과 그의 동맹인 맥도날 가문을 격파한 후, 더블린으로 돌아와 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이 의회에서 메리 1세를 아일랜드 왕국의 여왕으로 선포하고, 이단 억제법을 부활하며, 스코틀랜드인들이 아일랜드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했다. 이후 잉글랜드에 복종하지 않는 도노프 오코너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타이론 내 그의 영지를 습격해 작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여 인위적인 기근을 일으켰으며, 세인 오닐에 대한 무력을 행사했으며, 초대 던킨넌 남작 매튜 오닐을 초대 타이론 백작으로 옹립해 타이론 일대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를 강화하려 했다.
1558년 6월, 서식스 백작은 서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곳을 지배하는 오브라이언 일족의 수장은 조카인 토몬드 백작 코너 오브라이언을 자기 땅에서 쫓아내고 잉글랜드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서식스 백작은 공세를 개시해 리머릭을 함락하고 토몬드 백작을 복위시켰으며, 코너 오브라이언을 반역자로 선언했다. 1558년 가을, 스코틀랜드 주민들이 앤트림 계곡으로 계속 침입하는 걸 단호히 근절하기 위해 더블린에서 함대를 이끌고 출진해 스코틀랜드 킨타이어 반도의 캠벨타운으로 항해했다. 그는 새들, 제임스 맥도넬 또는 던니베그의 멕도널드 성, 그리고 글린네스를 포함한 성채와 농작, 가옥을 모조리 불태운 뒤 남쪽으로 이동하여 던버티와 마크리모어를 불태웠다. 이후 아란, 뷰트, 컴브레이 섬의 농장을 불태웠으며, 캐릭퍼거스에 상륙한 뒤 앤트림 해안의 스코틀랜드 정착지를 포격하고 약탈을 자행한 뒤 성탄절을 맞아 더블린으로 귀환했다.
이후 메리 1세가 병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로 이동했고, 1559년 1월 엘리자베스 1세의 대관식에 참석했고, 이듬해 7월에는 새 여왕으로부터 아일랜드 총독으로 확인받은 뒤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오닐과 맥도넬 가문 인사들과 화해하길 원했고, 그동안 그들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했던 서식스 백작은 부득이 그들과 화해해야 했다. 그러나 세인 오닐은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서식스 백작과 만나길 거부했고, 얼스터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한 후 엘리자베스 1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구했다. 서식스 백작은 이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못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세인 오닐과 협상하라는 지시를 받은 제11대 킬데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에게 총독 자리를 물려준 뒤 런던으로 가서 왕실에 충성을 서약했다. 그 후 세인 오닐의 무력 도발이 갈수록 심해지자, 엘리자베스 1세는 서식스 백작에게 아일랜드 내 잉글랜드 주둔군을 이끌고 세인 오닐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1563년 여름, 서식스 백작은 아마를 임시 본부로 삼아 아일랜드 전역을 수행했다. 그러나 몇몇 소규모 전투를 치렀고 세인 오닐의 가축을 대량으로 노획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행정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잉글랜드 왕실을 대표하여 페일 너머로 총독의 권위를 크게 확장했으며, 오팔리와 렉스에 잉글랜드 정착민을 정착시켰다. 아일랜드 대부분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를 확립하는 건 실패했지만, 토몬드와 앤트림의 글린족과 같이 토착 세력의 독립이 명목상으로도 침해받지 않던 아일랜드섬의 외곽 지역에서는 그 영향력을 발휘했다.
서식스 백작이 세인 오닐을 결정적으로 꺾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던 건 그의 정치적 수완이나 군사적 재능, 행정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병력이 부실했고,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의 측근들이 아일랜드 현지 상황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했고, 인내심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아일랜드 법무관 존 파커가 이끄는 더블린 행정부와의 갈등에 시달렸다. 존 파커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서식스 백작이 가톨릭에 동조한다고 비난했다. 서식스 백작은 메리 1세 치세 때 아일랜드에서 이단을 근절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적이 있었기에, 이러한 비난에 취약했다.
결국 1564년 5월 잉글랜드로 소환된 서식스 백작은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에 존 파커가 이끄는 행정부의 굴욕적인 조사를 견뎌야 했다. 이후 궁정에 도착한 그는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가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하는 걸 강력하게 반대했다. 1566년, 서식스 백작은 엘리자베스 1세와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 간의 혼인 동맹을 협상했지만 결렬되었다. 1568년 3월 빈에서 런던으로 귀환한 뒤 7월에 북부 의회의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서식스 백작은 잉글랜드 북부의 강력한 귀족인 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와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과 친분을 맺었고, 함께 사냥하기도 했다. 그러나 1569년 9월, 요크에서 두 사람과 회동한 서식스 백작은 그들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두 사람이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 대사와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11월 초, 엘리자베스 1세는 서식스 백작의 권유에 따라 두 백작에게 런던으로 소환령을 내렸지만, 두 사람은 런던에 출두하길 거부했다. 그 후 두 백작이 끝내 반란을 일으키자, 서식스 백작은 요크에 틀어박혀서 군대를 소집했다. 두 백작은 11월 17일 요크를 향해 진격했지만, 서식스 백작이 수비에 전념하는 걸 확인하자 요크를 공격하지 않고 지나쳤다.
서식스 백작은 충분한 병력을 모일 때까지 반란군 토벌을 미루다가 12월 11일 1만 장병을 확보하자 토프클리프로 진군한 노섬벌랜드 백작을 토벌하러 출진했으며, 클린턴 남작 에드워드 클린턴과 워릭 백작 엠브로즈 더들리가 1만 2천 명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 노섬벌랜드 백작과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일단 연합한 뒤 스코틀랜드 국경으로 후퇴해 스코틀랜드 내 메리 여왕 지지자들의 지원을 바랐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12월 16일 헥삼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추종자들에게 스스로 알아서 살길을 도모하라고 권한 뒤 스코틀랜드로 피신하여 리즈데일에 숨었다. 이후 서식스 백작은 반군을 얼른 토벌하지 않고 병력을 모으느라 시간을 끈 것과 반란에 가담한 이들을 온건하게 처분하라고 촉구한 것 때문에 많은 궁정인들의 의심을 샀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그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았다.
1570년, 그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국경지대를 황폐화했고, 덤프리스 주변 지역을 약탈하여 반군 지도자를 완전히 복종시켰다. 이후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스페인군의 침공에 잉글랜드 북부의 가톨릭 신자들이 호응하는 걸 미리 방지하기 위해 철저히 억누르기로 한 엘리자베스 1세의 지시에 따라, 반란 진압의 주역들과 함께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교수형에 처했는데, 그 숫자는 최소 700여 명에 달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이 숙청의 희생자들은 "완전히 비천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공개 교수형을 피할 수 없었고,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교수형 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1572년 7월 궁정 시종장이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가 시골을 순행할 때 자주 시종들었다. 1579년 9월 자기 저택인 뉴홀에 방문한 엘리자베스 1세를 위해 주피터 신의 연극을 공연했으며, 다음날에는 마상창시합과 '잠자는 기사의 야외극'을 공연했다. 또한 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흰 말과 망토, 그리고 사냥에서 "악천후로부터 그녀를 보호할" 승마복을 선물했다.
서식스 백작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는 초대 사우샘프턴 백작 토머스 리오슬리의 딸 엘리자베스 리오슬리였고, 두 번째는 펜허스트의 윌리엄 시드니 경의 딸 프랜시스 시드니였다. 프랜시스 시드니는 케임브리지 대학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의 창립자였다. 그는 두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남기지 못했고, 1583년 6월 9일 보어햄에서 사망한 뒤 그곳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작위와 영지는 동생인 제4대 서식스 백작 헨리 래드클리프에게 넘어갔다.
[1] 현재 앤트림 협곡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