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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북부 반란 Rising of the North England | |||
기간 | |||
1569년 11월 14일 ~ 1570년 2월 15일 | |||
장소 | |||
잉글랜드 왕국 북부 | |||
원인 | |||
엘리자베스 1세를 페위하고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추대하여 잉글랜드 왕국을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는 잉글랜드 북부 영주들의 음모.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잉글랜드 북부 반란군 | 튜더 왕조 | ||
지휘관 | |||
레너드 데이커 | |||
병력 | |||
9,000명 | 22,000명 | ||
결과 | |||
반란 진압. 엘리자베스 1세의 가톨릭교도 박해 본격화. |
1. 개요
1569년 11월 14일 ~ 1570년 2월 15일, 가톨릭 성향의 잉글랜드 북부 영주들이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하고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해 잉글랜드 왕국을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기 위해 벌인 반란. 엘리자베스 1세의 가톨릭교도 박해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 반란이다.2. 배경
1558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가 사망하고 잉글랜드 국교회 성향의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인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은 교황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헨리 8세부터가 앤 불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여 처형시키고 왕비로 인정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를 사생아 취급받게 한 이상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등극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헨리 7세의 딸 마거릿 튜더의 손녀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1] 잉글랜드 여왕을 겸임해야 한다고 믿었다.이 관념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특히 인기 있었다. 잉글랜드 북부 주민들은 헨리 8세의 통치 시기 국왕의 수도원 폐쇄령과 교황청과의 관계 단절에 반발하여 은총의 순례를 일으킨 전적이 있었다. 메리 여왕의 지지자들은 1566년 그녀가 외아들 제임스 6세를 낳으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은 1567년 단리 경 암살 사건과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과의 결혼에 반발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란으로 1살 된 아들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넘긴 뒤 로크레번 성에 감금되었다가 1568년 5월 2일 로클레번 성에서 탈출한 뒤 복위를 꾀했다가 랭사이드 전투에서 이복오빠이자 제임스 6세의 섭정인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패배한 후 잉글랜드에 망명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녀를 보호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런던과도 거리가 먼 볼턴 성으로 보내 그곳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게 했다.
메리 여왕이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억류되자 잉글랜드 북부의 귀족들 사이에서 메리를 볼턴 성에서 꺼낸 뒤 잉글랜드 여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통치자이자 메리 1세의 전 남편인 펠리페 2세는 이들에게 은밀히 사절을 파견해 반란을 종용했다. 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는 엘리자베스 1세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온건하게 나오면서도 잉글랜드 국교회를 수호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스페인 사절은 그런 그에게 반란의 필요성을 이해시켰고,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메리 여왕과 결혼하고 스페인군이 잉글랜드에 상륙했을 때 호응하는 계획에 참여했다. 그는 비록 나중에 엘리자베스 1세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걸 부인했지만, 또 다른 북부 백작인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을 반란에 연루시킨 자는 바로 그였다. 찰스 네빌은 노퍽 공작의 여동생 제인 하워드의 남편이었고, 노퍽 공작의 의중에 따라 북부 봉기 음모에 가담했다.
노퍽 공작은 1569년 8월에 런던 궁정에 있었지만, 9월 22일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을 의심해 런던 탑에 가두려 한다고 의심하고 병을 핑계 삼고 낙향했다. 이후 북부 백작들에게 스페인군이 잉글랜드에 상륙하기 전에는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요청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가 병에 걸렸다는 걸 믿지 않고 귀환을 요구했고, 노퍽 공작은 10월 2일 엘리자베스 1세의 소환령에 응해 세인트 올번스에 도착했고, 스페인의 음모에 관련된 혐의를 조사한다는 이유로 런던 탑에 갇혔다. 이 때문에 노퍽 공작은 반란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3. 전개
1569년 9월,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은 북부 의회의 수장인 제3대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와 요크에서 회동했다. 서식스 백작은 두 사람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곧 두 사람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두 사람이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 대사와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11월 초, 엘리자베스 1세는 서식스 백작의 권유에 따라 두 백작에게 런던으로 소환령을 내렸지만, 두 사람은 런던에 출두하길 거부했다.11월 14일, 노섬벌랜드 백작은 시간을 끌기 위해 여왕에게 사과하고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발송했지만, 이미 그의 부하들이 음모가 발각되었다고 여기고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서 반란을 일으켰다. 11월 15일, 요크에 주둔한 왕실군 장병들이 노섬벌랜드 백작의 집으로 가서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노섬벌랜드 백작은 빠져나온 뒤 브랜스페스에 있는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의 집으로 갔다. 두 백작은 그곳에서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고 지지자를 모집하며, 스코틀랜드의 전 여왕 메리를 구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두 백작과 그들의 부하들은 많은 이웃들과 합류했고, 결국 1,700명의 기병과 4,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가 갖춰졌다. 기병들은 잘 훈련된 전사들이었지만, 보병들은 대부분 규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정잡배들이었다. 11월 16일, 반란군은 더럼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서를 불태웠다. 11월 17일, 그들은 달링턴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한 후 요크를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식스 백작이 규합한 강력한 병력이 지키는 걸 확인한 뒤 요크를 공격하지 않고 지나쳤다. 노섬벌랜드 백작은 11월 18일과 20일 사이에 리치먼드, 노샐러턴, 버러브리지를 방문하여 그곳 주민들이 반란에 가담하도록 격려했다. 11월 20일, 두 백작은 노섬벌랜드 백작부인 앤 서머셋과 함께 리폰에서 미사에 참석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의 분견대 하나가 하틀폴을 점령하여 유럽 대륙과의 통신로를 확보했고, 반란군은 스페인군이 잉글랜드에 상륙하기를 기대했다. 11월 22일, 반란군 주력은 클리퍼드 무어에 집결했다.
왕실군은 이에 대응해 메리 여왕을 코번트리로 급히 옮겼고, 엘리자베스 1세는 11월 26일 윈저 궁에서 반란 지도자들을 반역자로 엄숙하게 선포했다. 이와 동시에, 조지 보우스 경은 군대를 일으켜 바너드 성에 요새를 구축했고 , 노섬벌랜드 백작의 동생이지만 형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헨리 퍼시 경은 존 포스터 경과 함께 국경에서 군대를 모아 반란을 진압할 준비를 했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바너드 성을 향해 진군해 그곳을 지키던 조지 보우스와 대결했다. 조지 보우스는 11일 동안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수비대가 배신하는 바람에 자유를 대가로 성을 내줘야 했고, 서식스 백작과 합류했다.
이후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클리퍼드 무어로 진군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한 데다 존 포스터와 헨리 퍼시가 강력한 국경군을 이끌고 진군하자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라비로 후퇴했다. 한편, 노섬벌랜드 백작은 이와 별개로 토프클리프로 진군했고, 서식스 백작은 12월 11일 요크에서 1만 장병을 이끌고 노섬벌랜드 백작을 무찌르러 출진했으며, 클린턴 남작 에드워드 클린턴이 1만 2천 명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 노섬벌랜드 백작과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일단 연합한 뒤 스코틀랜드 국경으로 후퇴해 스코틀랜드 내 메리 여왕 지지자들의 지원을 바랐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12월 16일 헥삼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추종자들에게 스스로 알아서 살길을 도모하라고 권한 뒤 스코틀랜드로 피신하여 리즈데일에 숨었다.
한편, 제4대 데이커 남작 토머스 데이커의 형제이자 제5대 데이커 남작 조지 데이커의 숙부인 레너드 데이커는 1569년 5월 조카 조지 데이커가 사고사한 뒤 자기가 남작위를 이어받아야 했는데 남작위는 국가가 회수하고, 상속권은 조지 데이커의 세 누이 앤, 메리, 엘리자베스에게 돌아갔으며, 조지 데이커의 후견인을 맡았던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가 자신의 세 아들을 이 세 누이와 나란히 결혼시켜서 많은 재산과 영지를 모조리 가로챈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569년 북부 반란이 발발하자, 레너드 데이커는 궁정으로 향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가 반란을 일으킨 백작들과 비밀리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윈저에서 그를 만나줬다. 그는 자신을 충성스러운 신민이라고 공언하고, 엘리자베스 1세를 위해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동참하겠다고 약속하고 북부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반란군이 해산되자, 그는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레이스토크 성과 데이커 가문 소유의 여러 저택을 점거하고, 나워스 성을 요새화했으며, 3천 병력과 국경 지대 주민들, 그리고 데이커 가문 추종자들을 소집했다.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던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는 레너드가 반란군에 맞선 것을 칭찬했지만, 제9대 볼턴의 스크로프 남작 헨리 르 스크로프는 반란이 끝났는데도 나워스 성을 요새화하고 추종자들을 결집한 레너드의 의도를 의심했다. 1570년 1월 20일, 헨리 르 스크로프는 레너드에게 칼라일로 가서 국가의 상황에 대한 협의회에 참석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데이커는 자기가 학질에 걸려 움직일 수 없으며, 스크로프와 동료들이 나워스 성에서 저녁을 먹는다면 자신의 단순한 머리와 측근이 최고의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레너드가 계속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의뭉스러운 태도로 일관하자, 엘리자베스는 1570년 2월 15일 초대 헌스던 남작 헨리 케리에게 레너드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헌스던 경은 존 포스터 경과 함께 나워스 성으로 진군해 2월 20일 새벽에 도착했지만, 성이 너무 강력하게 방어되어 있어서 스크로프 경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칼라일로 이동했다. 그러자 레너드는 나워스 성에서 출진해 그들을 추격했고, 4마일간 쫓아간 끝에 켈트 강둑에 도착했다. 이후 레너드의 보병대는 '켈트 다리'에서 헌스던의 군대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헌스던은 기병대를 이끌고 레너드의 보병대 측면을 요격하여 300~400명을 사살하고 200~300명을 생포했다. 레너드는 군대가 와해하자 추적을 따돌린 뒤 역시 스코틀랜드의 리즈데일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잉글랜드 북부 봉기는 종식되었다.
4. 이후
잉글랜드 정부는 스코틀랜드로 달아난 반란 귀족들을 다시 데려오려고 했다.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는 형제 헨리 퍼시로부터 돌아와서 사면을 청원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은 친척 로버트 콘스터블 경으로부터 비슷한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감히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섬벌랜드 백작은 메리 여왕의 추종자들과 함께 있다가 1572년 제임스 6세의 섭정인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체포된 뒤 잉글랜드로 송환된 후 처형당했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도피했고, 1601년 빈곤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레너드 데이커는 브뤼셀로 망명했다가 1573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런던 탑에서 북부 반란 귀족들과의 연관성을 조사받았지만, 특별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1571년 리돌피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다시 투옥되었고, 결국 1572년 처형되었다. 그의 여동생이자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의 아내인 제인 하워드는 남편보다 군대를 모으는 데 더 많은 역할을 했고, 반란군에게 엘리자베스 1세에 단호히 맞서라고 강력히 권고한 혐의로 체포되어 남은 생애 동안 가택 연금 생활을 해야 했다. 또한 1571년 노섬벌랜드 백작과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가문의 모든 영지와 작위가 몰수되었다. 노섬벌랜드 백작령은 나중에 이전 백작의 동생이며 엘리자베스 1세에게 충성을 다한 헨리 퍼시에게 돌아갔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령은 1624년에서야 재건되어 제4대 애버게이브니 남작 헨리 네빌의 외손자인 프랜시스 페인에게 돌아갔다.
비록 반란이 쉽사리 진압되었고, 대중이 반란군에 전혀 호응하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북부에 가톨릭교도와 메리 여왕 추종자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언제라도 반란이 촉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품었다. 이 의심은 1570년 2월 교황 비오 5세가 칙서 '레그난스 인 엑셀시스(Regnans in Excelsis)'를 반포하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교황은 이 칙서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고, 그녀를 "영국의 거짓 여왕이자 범죄의 하수인"이라고 칭하며 이단으로 선포했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맹세한" 신하들을 포함하여 모든 신하가 그녀에게 충성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천명하며 엘리자베스의 명령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파문했다.
엘리자베스 1세와 측근들은 교황의 이 같은 칙서에 분개했고,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스페인군의 침공에 잉글랜드 북부의 가톨릭 신자들이 호응하는 걸 미리 방지하기 위해 철저히 억누르기로 했다. 토머스 래드클리프를 비롯한 반란 진압의 주역들은 여왕의 지시에 따라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교수형에 처했는데, 그 숫자는 최소 700여 명에 달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이 숙청의 희생자들은 "완전히 비천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공개 교수형을 피할 수 없었고,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교수형 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