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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튜어트(초대 모레이 백작)

<colbgcolor=#0065bd><colcolor=#ffffff>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1st Earl of Moray
파일:James_Stewart_Earl_of_Moray.jpg
이름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출생 1531년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 1570년 1월 23일 (향년 38~39세)
스코틀랜드 왕국 린리스고
배우자 크리스티나 스튜어트(1549년 혹은 1550년 약혼)
아그네스 키스(1562년 결혼)
자녀 엘리자베스, 애너벨, 마거릿
아버지 제임스 5세
어머니 마거릿 어스킨
직위 초대 모레이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제임스 5세사생아이자 메리 여왕의 이복오빠. 스코틀랜드에서 개신교가톨릭보다 우월한 입지를 점하는 데 일조했으며, 메리 여왕과 여러 차례 갈등을 벌인 끝에 단리 경 암살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던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과 결혼한 메리 여왕을 축출하고 단리 경과 메리 여왕의 1살짜리 아들 제임스 6세를 왕위에 올린 뒤 섭정을 맡았다. 이후 메리 여왕의 복위를 꾀한 반란군과 맞서다 암살당했다.

2. 생애

1531년경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와 제5대 어스킨 경 존 어스킨의 딸이며 스코틀랜드 궁정 관료인 로클레븐의 로버트 더글러스의 부인인 마거릿 어스킨의 사생아로 출생했다. 1536년 8월 31일, 탄탈론과 그 주변 영지를 수여하는 왕실 헌장을 받았으며, 1538년 파이프 섬 세인트앤드루스 수도원장으로 선임되어 그곳에서 수입을 충당했다. 제임스 5세의 또 다른 사생아 아들이자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동명이인으로, 켈소와 메멜로즈의 훈장관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는 1542년 아버지 제임스 5세가 사망했을 당시 세인트앤드루스에 있는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1543년, 이복여동생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대신해 스코틀랜드의 섭정을 맡은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은 그렌지의 영주 제스 커콜디를 보내 두 제임스를 데려와서 린리스고 궁전에 기거하도록 했고, 제임스는 나중에 로버트 더글러스 경의 인도하에 로클레븐 성으로 이주했다.

그 후 성년이 된 제임스는 마리 드 기즈 왕대비의 통치 기간에 그녀의 정책을 지지했고, 그 대가로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여러 수도원에서 수입을 얻었다. 그러다가 1550년대 후반 존 녹스의 설교에 감화되어 개신교개종했다. 1559년 스코틀랜드에서 개신교 신자들의 봉기가 발발하자, 그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마리 드 기즈의 요청을 받은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어 반란군을 몰아붙이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른 반란군 지도자인 제4대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 5대 글렌케언 공작 알렉산더 커닝햄과 함께 마리 드 기즈 측 협상자로 나선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제4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과 접견해 리스에서 협상한 끝에 7월 24일 휴전 초안을 마련했다. 조항은 7월 25일 귀족들에 의해 서명되었으며, 앙리 클루탱, 헌틀리 백작, 아란 백작은 마리 드 기즈를 대신하여 서명했다. 리스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주들은 마리 드 기즈 왕대비의 뜻에 따라 에든버러를 떠난다.
2. 영주들은 조폐국에서 압수한 주화를 로버트 리처드슨에게 반환하고, 홀리루드 궁전을 '관리인'(제임스 발푸어)에게 넘기고, 루스벤 경과 피타로의 존 위샤트를 인질로 남겨둔다.
3. 의회는 종교 문제를 제외하고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2세 , 섭정 왕대비 마리 드 기즈, 그리고 법률에 모든 복종을 바친다.
4. 의회는 성직자나 그들의 재산, 그리고 임명을 침해하지 않는다.
5. 군주는 교회나 수도원에 대해 어떠한 무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6. 에든버러는 자체 종교 형태를 선택하고 사용해야 하며, 주민들은 1월 10일까지 양심에 따라 믿을 종교를 선택한다.
7. 섭정 왕대비는 개신교 설교자들과 그들의 소유물을 해쳐서는 안 된다. 각자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프랑스 후속 부대가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자, 제임스를 비롯한 반란 귀족들은 리스 협정 위반을 주장하며 재차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잉글랜드 왕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군과 마리 왕대비를 여전히 따르는 적과 대적했다. 1560년 2월 27일, 제임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반군 귀족들과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간의 협약이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 요충지인 베릭에서 체결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정복할 의도가 있다고 간주하고,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2. 엘리자베스 1세는 최대한 빨리 군대를 파견해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돕는다.
3.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요새는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파괴되거나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에게 넘긴다.
4.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군을 돕는다.
5. 잉글랜드의 모든 적은 곧 스코틀랜드의 적이다.
6. 메리 여왕의 결혼으로 인한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연합은 인정되지 않는다.
7. 스코틀랜드는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침공할 때 잉글랜드를 돕는다.
8. 제5대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은 잉글랜드가 아일랜드 북부를 통치하는 데 도움을 준다.
9. 스코틀랜드인은 조약의 완수를 보장하기 위해 잉글랜드 정부에 인질을 보낸다.
10. 인질이 보내진 후 노퍽 공작과 아란 백작의 서명하에 조약이 확정되며, 메리 여왕은 조약의 이행을 보증할 때까지 통치를 행사하지 못한다.

그 후 잉글랜드의 지원하에 반격을 가한 끝에, 1560년 7월 7일 개신교 반란군은 프랑스 및 가톨릭 귀족, 성직자들과 에든버러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 모두 철수하고, 개신교 영주들은 종교의 자유를 약속받았다. 반란을 이끈 주역이었던 제임스의 영향력은 무척 강했고,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재상인 윌리엄 세실은 제임스가 메리 여왕이 프랑스에 있는 틈을 타 스코틀랜드 왕위를 찬탈하려 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대다수 귀족은 메리 여왕이 프랑스에서 복귀해서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그대로 군림하길 희망했지 새 국왕을 세우는 걸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1561년, 메리 여왕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복잡한 정세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조국으로 돌아온 후 왕실 행정 주도권을 제임스와 그의 동료인 윌리엄 메이틀랜드에게 맡겼다. 두 사람은 '온건 개신교' 세력의 지도자였으며, 잉글랜드와의 화해를 꾸준히 지지했다. 그는 1561년부터 1563년까지 호국경을 맡아 정세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만 존 녹스를 포함한 급진 개신교도들은 존 녹스 를 포함한 급진 개신교도들은 국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1562년, 제4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이 스코틀랜드 각지를 순방 중이던 메리 여왕이 인버네스 성에 입성하는 걸 거부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정부는 헌틀리 백작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거부당하자 반역자로 규탄했고, 제임스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진해 그해 10월 벤코리 인근 코리치 언덕에서 헌틀리 백작의 군대를 격파했다. 헌틀리 백작은 패배 후 생포되자마자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헌틀리 백작의 영지는 1563년 5월 의회에 의해 몰수되었다. 제임스는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공로로 스코틀랜드 북부를 관장하는 모레이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 후 그는 교회 수입을 교회와 국가 간 분배하는 절차에 관한 법령을 제정해, 새로운 교회 위계질서의 토대를 마련하려 했다.

1565년 7월 29일, 메리 여왕과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가 갑작스럽게 결혼했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애인인 초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 메리 여왕이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단리 경이 자신의 신하인데 자신에게 허락받지도 않고 결혼한 점을 문제 삼으며 결혼에 반대했지만, 메리 여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신교 영주들은 이 결합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메리 여왕이 개신교 신자와 결혼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막 뿌리 내린 개신교 위주의 질서가 확립되길 바랐다. 그러나 이제 가톨릭 신자인 두 부부가 결혼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도 가톨릭 신자일 게 자명했고, 그러면 스코틀랜드 개신교의 입지는 위축될 가능성이 컸다. 제임스는 "단리 경이 어리고 어리석다"라며 결혼을 반대했지만, 메리 여왕은 이를 듣지 않고 이복 오빠를 유폐했다.

이에 제임스는 탈출한 뒤 추종자들을 규합한 뒤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고 1565년 8월에 반란을 일으켰다.(체이스어바웃 레이드) 잉글랜드 정부는 반란군에 10,000 파운드의 거금을 지원했고, 샤텔로 공작 제임스 해밀턴도 가세했다. 제임스는 메리가 병력을 이끌고 해밀턴에서 반란군을 추격하는 틈을 타 1,000명에서 1,200명 사이의 병사를 이끌고 에든버러시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든버러성 수비대가 성문을 열어주길 거부하고 대포를 쐈으며, 시민들도 반란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제임스는 덤프리스로 후퇴했다. 메리 여왕은 제4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아들인 조지 고든을 제5대 헌틀리 백작에 선임하고 영지를 돌려줬고, 조지 고든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반란 진압에 앞장섰다. 제임스는 로버트 맬빌을 잉글랜드에 파견해 병력 지원을 요청했지만, 잉글랜드의 지원이 도착하기 전에 메리 여왕의 추종자들이 먼저 공격해 오자 전의를 상실하고 잉글랜드의 국경 도시인 뉴캐슬로 도주했다.

그 후 잉글랜드에서 망명 생활하던 제임스는 1566년 메리 여왕의 궁정 음악가인 다비드 리치오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후, 리치오를 살해하고 자신을 꼭두각시로 삼으려는 급진적인 개신교 영주들에 맞서 지원을 얻으려는 메리 여왕의 요청에 따라 돌아온 뒤, 사면을 받고 정부에 복귀했다. 그 후 단리 경과 메리 여왕의 갈등이 심화한 끝에 1567년 2월 10일 단리 경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일설에 따르면, 이 암살 사건에 제임스가 개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의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 후 단리 경 암살에 깊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돌던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이 1567년 여름 메리 여왕을 '납치'한 후 결혼해 버리자, 제임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귀족이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카베리 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메리 여왕을 체포했으며, 보스웰 백작은 해외로 망명했다. 그해 7월 24일, 메리 여왕은 이제 1살 된 갓난 아들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겠다는 문서에 서명했고, 제임스는 1567년 8월 22일 어린 제임스 6세의 섭정으로 선포되었다.

새 섭정은 화해 정책을 추진해 메리 여왕의 전복에 가담했던 사람 중 가능한 한 많은 귀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1568년 5월 2일, 폐위된 메리 여왕이 로클레번 성내 감옥에서 탈출했다. 이후 모레이 백작이 권력을 자기 측근들과 함께 독차지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샤텔로 공작 제임스 해밀턴, 제5대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 등이 메리 여왕 편을 들어 반기를 들었다. 이에 제임스는 토벌에 나섰고, 1568년 5월 13일 랭사이드 전투에서 아치볼드 캠벨이 이끄는 메리 여왕의 군대를 격파했다.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로 도주한 뒤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잉글랜드 여왕은 중재에 동의했고, 1568년 10월에 단리 경의 암살과 그에 따른 메리 여왕의 전복 상황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제임스는 소위 보석함 편지를 증거로 제시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여왕을 폐위한 행위의 합법성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잉글랜드 측은 제임스의 정부를 인정하고, 그에게 상당한 규모의 차관을 제공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는 여전히 폐위된 메리 여왕을 지지하는 영향력 있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했다. 제임스는 이들을 토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568년 6월 10일 덤프리스에서 군대를 집결한 뒤 공세를 개시해, 존 플레밍 경의 보그홀, 스커링, 크로포드, 샌콰, 켄뮤어, 호덤 등 메리 여왕 지지자들의 근거지를 잇달아 점령했다. 뒤이어 로크마벤 성을 재점령하고, 피블스를 거쳐 애든버러로 돌아가기 전에 로크우드와 로크하우스를 점령했다.

1569년 3월, 제임스는 홈 경, 세스퍼드 성, 페르니허스트 성, 버클루크의 스코틀랜드인, 그리고 병사 4,000명과 함께 켈소에서 리즈데일로 와서 잉글랜드 국경 수비대장 존 포스터 경과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지역 지도자들과의 협상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자, 제임스는 리즈데일의 농장을 불태웠고, 맨저튼에 머물렀다가 화약으로 집을 폭파한 후 제드버러로 돌아갔다.

1569년 6월, 제임스는 브레친 북쪽으로 가서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이 보낸 인질을 받아들였다. 그는 던노타 성에서 "과거에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을 바로잡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신중한 결심으로, 섭정으로서 북부 지역에 적절한 인격으로 도착했으며, 관용과 온건함을 베풀 의도"라고 선언했다. 이후 에버딘에서 헌틀리 백작과 만나 직접 회담을 했고, 1569년 6월 4일 인버네스에서 케이스네스 백작과 서덜랜드 백작, 그리고 로바트 경과 함께 하이랜드아일랜드의 추장들을 만났다.

1570년 1월 19일 목요일, 제임스는 스털링성에서 잉글랜드 외교관 헨리 게이츠 경과 베릭 원수 윌리엄 드루리 경을 그레이트 홀에서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에든버러에서 그들 및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만나 잉글랜드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스코틀랜드로 도망친 인사들을 넘기는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1월 23일 린리스고의 큰길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이동하던 중, 이복 여동생 메리를 지지했고 랭사이드 전투 때 메리 여왕을 위해 싸웠다가 생포된 적이 있었던 보스웰 호 출신의 제임스 해밀턴이 그의 삼촌인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존 해밀턴의 집 창문에서 화승총을 발사해 제임스를 사살했다. 제임스는 총기에 의해 암살된 최초의 정부 수반으로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제임스의 유해는 리스로 운송된 후 홀리루스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1570년 2월 14일, 그는 에든버러의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 있는 세인트 앤서니 통로에 묻혔다. 당시 그의 장례식에 백작과 영주 7명이 참여해 그의 유해를 옮겼다. 존 녹스는 평소에 고인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장례식 설교를 벌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이번 장례식만은 장례식 설교를 시행하는 걸 받아들였다. 또한 그를 기리는 황동 조각품이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 세워졌다.

한편, 제임스를 암살한 제임스 해밀턴은 친족들의 영역으로 피신한 뒤 해외로 망명해 프랑스로 이주한 뒤 위그노 전쟁에 참여해 기즈 가문을 위해 일하다가 1581년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뒤 행적이 묘연해졌다. 제임스 해밀턴을 자기 집에 들였던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존 해밀턴은 던버튼에서 체포된 후 섭정 암살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스털링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3. 가족

  • 크리스티나 스튜어트(1548 ~ 1580): 제4대 부컨 여백작. 아버지 존 스튜어트가 1547년 핑키 전투에서 전사해 할아버지인 제3대 부컨 백작 존 스튜어트보다 먼저 사망한 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컨 여백작이 되었다. 1549년에서 1550년 경 2살의 어린 나이로 제임스 스튜어트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제임스는 후술하는 아그네스 키스와 1562년에 결혼했다. 이후 크리스티나는 제임스의 이부동생인 로버트 더글라스[1]와 재혼했고 로버트는 아내의 직위에 따라 부컨 백작이 되었다.
  • 아그네스 키스(1540 ~ 1588): 제4대 마르샬 백작 윌리엄 키스의 딸.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1565 ~ 1591): 제2대 모레이 여백작. 초대 둔 경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 자격으로 제2대 모레이 백작이 된 제임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영지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 헌틀리 백작 가문과 대립했다. 그러나 제임스 6세를 암살하고 왕위를 탈취하려는 제5대 보스웰 백작 프랜시스 스튜어트와 동맹을 맺었다가, 프랜시스 스튜어트가 왕에게 숙청되어 은거 생활을 할 때 프랜시스를 숨겨준 것으로 의심받아 왕에게 소환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어머니 마거릿 캠벨이 소유한 파이프 해안의 집인 도니브리슬로 이동했다가, 1592년 2월 7일 제6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부하들의 습격으로 피살당했다. 그의 어머니 마거릿 캠벨은 아들의 유해를 왕 앞에 보여서 복수해달라고 요청한 뒤, 아들의 시체를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 전시하고 그를 묻기를 거부했으며, 그의 상처를 보여주는 피투성이의 '복수 초상화'를 의뢰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시체는 5년간 대중에게 전시되다가, 제임스 6세가 그의 아들인 제3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명령한 뒤에야 매장되었다.
    • 애너벨 스튜어트(? ~ 1572년 이전)
    • 마거릿 스튜어트(1569 ~ 1586): 제9대 에롤 백작 프랜시스 헤이의 부인.


[1] 제임스 스튜어트의 친모 마거릿 얼스킨이 로클레븐의 로버트 더글라스 경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