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9 19:57:52

헨리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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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1세
프랑수아 헨리 제임스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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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D6EB><colcolor=#000000>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파일:헨리 스튜어트.jpg
이름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출생 1546년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템플 뉴삼
사망 1567년 2월 10일 (향년 20~21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배우자 메리 여왕 (1565년 결혼)
자녀 제임스 6세 & 1세
아버지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어머니 레이디 마거릿 더글러스
형제 찰스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헨리 스튜어트 서명.svg
1. 소개2. 생애
2.1. 초년기2.2. 음모에 휘말리다2.3. 메리 여왕과의 결혼2.4. 불화와 파국2.5. 암살2.6. 암살의 여파
3. 가족
3.1. 조상3.2. 자녀
4. 창작물에서

1. 소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두 번째 남편이자 제임스 1세의 아버지이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으로 당시 스튜어트 왕조의 분가였던 단리의 스튜어트 가문(Stewart of Darnley) 출신이고 보통 단리 경(Lord Darnley)이라고 불린다.

2. 생애

2.1. 초년기

파일:Hans_Eworth_Henry_Stuart_Lord_Darnley.jpg
한스 이워스 작, 9세의 단리 경, 1555년.

1546년경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웨스트 라이딩의 리즈 템플 뉴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이며, 어머니는 마거릿 더글러스다. 그의 외조부모는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의 딸이자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의 미망인인 마거릿 튜더였다. 그는 부계를 통해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권이 있었고, 외할머니 마거릿 튜더를 통해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도 동시에 지녔다. 또한 레녹스 백작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2차 직위인 단리 경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545년, 아버지 매튜 스튜어트는 거친 구혼 시기 잉글랜드 편을 들었다가 스코틀랜드의 섭정을 맡은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과의 정쟁에서 밀려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아란 백작의 공세를 피해 잉글랜드로 피신했고, 레녹스 가문의 스코틀랜드 영지는 몰수당했다. 그 후 매튜 스튜어트는 잉글랜드 궁정에서 지내면서 언젠가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고 스코틀랜드로 복귀할 기회를 노렸다.

헨리는 키가 컸고, 날씬하며, 강인하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며, 승마와 무기 사용에 능숙했고, 사냥과 매사냥에 열정적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인본주의 학자들의 교육을 받았고, 아름다운 필체를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개신교 인사들에게 교육받았기 때문에 종교에 관해서는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2.2. 음모에 휘말리다

1559년,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2세와 프랑스 왕비이자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즉위를 축하했다. 1560년 12월 프랑수아 2세가 일찍 죽자, 어머니는 그를 다시 프랑스로 보내서 메리에게 눈도장을 찍어둠으로써, 그녀가 장차 재혼할 때 자기 아들을 선택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레녹스 가문의 움직임에, 잉글랜드 인사들이 경계 또는 관심을 품었다. 1559년, 파리 주재 잉글랜드 대사 니콜라스 스록모턴은 엘리자베스에게 헨리의 가정교사인 존 앨더가 "제가 아는 사람 중 잉글랜드 문제에 가장 위험한 인물입니다."라고 경고했다. 1560년 3월, 초대 패짓 남작이며 메리 1세의 측근이었다가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한 후 직위에서 물러났던 윌리엄 패짓은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면 가톨릭 신자들이 단리 경을 잉글랜드 왕위에 올릴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기록했다.

1562년 2월, 잉글랜드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가톨릭 스파이였던 프랜시스 야슬리가 체포되었다. 그는 시그넷 서기관(Clerek of the Signet, 특허장이 인장을 통해 통과하는 과정에서 중간 역할을 하는 잉글랜드 관리.)이었으며, 1549년부터 윌리엄 세실에게 고용된 뒤 세실의 충직한 비서로 활동하는 척하면서 가톨릭교도들의 음모에 가담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런던 탑에서 심문받은 끝에, 자신이 스페인 대사로부터 잉글랜드 궁정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며, 대사는 레녹스 가족과 단리 경을 위한 메시지와 토큰을 자신과 휴 앨런에게 맡겼다고 진술했다.

야슬리는 자신의 임무는 스코틀랜드 여왕과 단리 경의 결혼을 주선하는 것이었으며, 레녹스 백작부인이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영주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레녹스 백작부인 마거릿 더글러스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를 체포해 런던 탑에 가두게 했지만, 그들을 반역죄로 기소하지도 않았고, 레녹스 백작부인의 왕위 주장을 무효로 하려는 시도를 장려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이러한 조사가 자신에게도 향할 수 있다고 우려했거나, 잠재적인 상속인 수를 줄이지 않음으로써 군주제의 생존을 보존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모자는 1563년 2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단리 경과 그의 어머니는 궁정에 참석해 엘리자베스의 호의를 받았다.

2.3. 메리 여왕과의 결혼

1564년 초, 메리 여왕은 20년 만에 레녹스 백작의 작위와 영지를 회복해 주기로 했다. 그 후 메리는 엘리자베스 1세가 제안한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 레녹스 백작의 아들 단리 경 중 누구와 결혼할지 고민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로버트 더들리와 결혼한다면, 메리가 자기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여왕이 되는 걸 보장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메리는 한때 이 제안에 솔깃했지만, 로버트 더들리가 엘리자베스 1세와 공공연한 연인 관계였던 데다 첫 번째 아내 에이미 롭사트가 1560년에 의문사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로버트 더들리를 택하지 않기로 했다.

1565년 2월 3일, 엘리자베스 1세는 단리 경을 만나보고 싶다는 메리 여왕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리 경은 곧장 런던을 떠났고 2월 12일에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2월 17일, 그는 파이프에 있는 웨미스 성에서 메리 여왕과 대면했다. 메리 여왕은 그와 이전에도 몇 차례 만나봤지만, 몇 년 사이에 훌쩍 성장한 그의 모습에 호감을 품었다. 할힐의 제임스 멜빌은 "폐하께서 그를 좋게 여기셨고, 그는 그녀가 본 사람 중 가장 건강하고 균형 잡힌 장신 남성이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밝혔다.

단리 경은 던킬드에서 아버지를 잠시 방문한 뒤 2월 24일 메리 여왕과 함께 홀리루드 궁전으로 향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존 녹스의 설교를 듣고 밤에 갈리어드(Galliard: 16세기 유럽 전역에 유행한 무용과 음악의 한 형태.)를 췄다. 그 후 그는 메리 여왕과 계속 함께 했다. 1565년 5월 15일, 단리 경은 스털링 성에서 아르드마노크의 영주이자 로스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기사에 선임되었다. 여기에 메리 여왕의 이복형제 중 한 명인 초대 오크니 백작 로버트 스튜어트, 카녹의 로버트 드러먼드, 둔 성의 제임스 스튜어트, 털리바딘의 윌리엄 머레이를 포함한 남성 15명도 기사 작위를 함께 받았다.

그 후 메리 여왕은 레딩턴의 윌리엄 메이틀랜드를 런던으로 보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신이 단리 경과 결혼할 계획이라고 전하게 했다.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니콜라스 스록모턴을 에든버러로 파견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궁정 신하인 로버트 더들리가 메리와 결혼해야 한다는 자기 뜻을 다시 전하게 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은 이를 거부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단리 경을 스코틀랜드로 보낸 걸 후회하고 6월 18일에 단리 경과 그의 아버지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두 사람 모두 불응했다.

파일:Mary_Stuart_James_Darnley.jpg
단리 경과 메리 여왕.

1565년 7월 22일, 단리 경은 홀리루드 수도원에서 올버니 공작으로 선임되었고, 캐논게이트 교구에서 결혼 예식이 거행되었다. 1565년 7월 28일 애든버러 메르켓 크로스에서 스코틀랜드 (King)[1]과 여왕의 공동명의로 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선언이 반포되었다. 7월 29일, 메리 여왕의 홀리루드 사저에서 로마 가톨릭 의식에 따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다만 단리 경은 결혼식 후 메리와 함께 혼인성사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잉글랜드 외교관 토머스 랜돌프는 단리 경이 미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 후에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서 예배에 참석했다고 보고했다. 존 녹스는 결혼식 후 단리 경은 매사냥하러 간 반면 메리는 미사에 참석했다고 기록했으며, 춤과 연회가 3~4일 지속되었다고 밝혔다. 두 부부는 사촌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특별 허가가 필요했는데, 교황청은 초기엔 특별 허가를 내리기도 전에 결혼식을 거행한 걸 문제 삼았지만, 9월 25일에 특별 허가를 발표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상황에 격노했다. 그녀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자신의 궁정에서 궁정 예식에 참여하기도 했던 단리 경을 자신의 신하로 여겼고, 그렇기에 자신의 허락이 있어야만 결혼할 수 있다고 봤다. 또한 단리 경과 메리 모두 튜더 왕조의 초대 군주였던 헨리 7세의 후손으로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고, 잉글랜드 가톨릭교도들은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보다 메리를 왕위 계승자로 여겼기 때문에, 이 결혼은 엘리자베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녀는 외교관 존 탬워스를 보내 메리 여왕에게 자신의 불만을 전달했다. 메리가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자, 엘리자베스는 단리 경의 어머니인 마거릿 더글러스를 런던 탑에 투옥하라고 명령했다. 마거릿은 아들이 살해된 뒤에야 런던 탑에서 풀려났다.

한편, 메리 여왕이 단리 경과 결혼한 것은 스코틀랜드 개신교 영주들에게도 불만스러운 사안이었다. 그들은 메리 여왕이 개신교 신자와 결혼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막 뿌리 내린 개신교 위주의 질서가 확립되길 바랐다. 그러나 이제 가톨릭 신자인 두 부부가 결혼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도 가톨릭 신자일 게 자명했고, 그러면 스코틀랜드 개신교의 입지는 위축될 가능성이 컸다. 초대 모레이 백작이자 메리 여왕의 이복 오빠인 제임스 스튜어트는 "단리 경이 어리고 어리석다"라며 결혼을 반대했지만, 메리 여왕은 이를 듣지 않고 이복 오빠를 유폐했다.

이에 모레이 백작은 탈출한 뒤 추종자들을 규합한 뒤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고 1565년 8월에 반란을 일으켰다.(체이스어바웃 레이드) 잉글랜드 정부는 반란군에 10,000 파운드의 거금을 지원했고, 모레이 백작은 메리가 병력을 이끌고 해밀턴에서 반란군을 추격하는 틈을 타 1,000명에서 1,200명 사이의 병사를 이끌고 에든버러 시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든버러 성 수비대가 성문을 열어주길 거부하고 대포를 쐈으며, 시민들도 반란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모레이 백작은 덤프리스로 후퇴했다. 그 후 모레이 백작은 로버트 맬빌을 잉글랜드에 파견해 병력 지원을 요청했지만, 잉글랜드의 지원이 도착하기 전에 메리 여왕의 추종자들이 먼저 공격해 오자 전의를 상실하고 잉글랜드의 국경 도시인 뉴캐슬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반란은 진압되었고, 메리 여왕과 단리 경의 결혼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심각한 불화를 겪기 시작했다.

2.4. 불화와 파국

단리 경은 결혼 전에는 메리 여왕에게 세련된 매너와 훤칠한 외모와 신장, 그리고 다정한 태도로 일관해 그녀의 마음을 얻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안 가서, 메리 여왕은 이 남자의 실체를 깨닫고 애정을 빠르게 잃어버렸다. 단리 경은 거만하고 폭력적인 경향이 있었으며, 선술집과 매음굴을 전전하며 사치를 일삼았다. 1565년 8월, 윌리엄 세실은 두 사람이 결혼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단리 경이 너무 무례해서 레녹스 백작이 스코틀랜드 궁정에서 쫓겨났다는 보고를 스코틀랜드 정보원으로부터 전달받았다,

1565년 8월 28일, 스코틀랜드 궁정에서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에게 두 통의 외교 서한이 보내졌는데, 하나는 메리가 서명했고, 다른 하나는 단리 경이 서명했다. 이는 단리 경의 왕족 지위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1566년 2월, 프랑스 국왕 샤를 9세는 우정의 표시로 랑부예의 영주 니콜라 당제를 대사로 파견하여 단리 경을 성 미카엘 기사단에 선임했다. 메리, 단리 경, 그리고 메리 여왕의 전속 비서인 다비드 리치오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다른 7명의 무용수와 함께 값비싼 가면극에 참여하여 단리 경의 서임을 축하했다. 홀리루드 하우스 예배당에서 열린 기사 서임 의식에서, 그의 의상은 검은 벨벳과 새틴으로 보호되었고, 금색 아글릿이 수놓아진 새틴으로 제작되었으며, 프랑스 전령관에게 특전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니콜라 당제는 스코틀랜드 추밀원으로부터 성 미카엘 훈장에는 단리 경의 개인 문장만 사용하며, 배우자의 지위를 명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편, 단리 경은 메리 여왕이 다비드 리치오와 무척 친밀하게 지내는 걸 보고 분노했다. 그는 본래 다비드 리치오와 무척 친했다. 스코틀랜드 개신교 설교자 조지 뷰캐넌에 따르면, 두 사람이 어찌나 친밀했는지 리치오가 단리 경의 방, 침대, 그리고 비밀스러운 모임에 자주 초대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개신교 설교자 데이비드 캘더우드는 리치오가 단리 경의 총애를 너무 많이 받아 두 사람이 한 침대에 함께 누울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리치오는 단리 경이 메리 여왕과 결혼하는 걸 돕기도 했다. 그러나 리치오가 메리 여왕과 가까워지자, 그는 리치오를 친구가 아닌 원수로 여기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주재 프랑스 대사 폴 드 푸아의 보고에 따르면, 단리 경은 한밤중에 홀리루드 하우스의 메리 여왕 침실 벽장에서 리치오가 셔츠 위에 모피 가운만 걸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조지 뷰캐넌에 따르면, 단리 경은 메리의 침실로 통하는 보조 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문이 잠겨 있거나 빗장으로 막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제3대 루스벤 경 패트릭 루스벤은 단리 경이 살해된 후 단리 경이 메리 여왕에게 이렇게 항의한 걸 들었다고 증언했다.
제 동료 다비드가 폐하와 친분을 쌓고 신뢰를 얻은 이후로, 폐하께서는 저를 존중하지 않으셨고, 평소처럼 저를 대하거나 즐겁게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저녁 식사 전에 매일 제 방에 와서 저와 시간을 보내셨는데, 오랫동안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폐하의 방에 왔을 때도 다비드가 세 번째 "동반자"가 되어 주지 않으셨다면, 폐하께서는 저에게 거의 동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폐하께서 말씀하신 다비드와 자정 1~2시까지 카드 게임을 하시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오랫동안 당신에게서 받은 즐거움입니다.

1626년 에든버러에서 발행된 <국왕 제임스 6세의 역사와 삶>(The historie and life of King James the Sext)에 따르면, 메리 여왕의 또 다른 비서인 레딩턴의 윌리엄 메이틀랜드는 리치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질투했고, 단리 경이 여왕과 리치오가 불륜 관계라고 의심하게 만들어 리치오에게 원한을 품도록 조장했다고 한다.

파일:John_Opie_(1761-1807)_-_The_Murder_of_Rizzio_-_49_-_Guildhall_Art_Gallery.jpg
존 오피 작, <리치오의 살인>, 1787년 작.

1566년 3월 9일 토요일 저녁, 리치오는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의 여왕 만찬 실에서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메리 여왕, 아가일 백작부인 진 스튜어트, 크레이크의 로버트 비튼, 아서 어스킨과 함께 만찬회를 가졌다. 베드퍼드 백작 프랜시스와 토머스 랜돌프의 기록에 따르면, 만찬 실은 여전히 침실의 일부로 남아 있었으며, 약 12피트 정사각형의 캐비닛, 약간 낮은 휴식용 침대, 그리고 테이블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제3대 루스벤 경 패트릭 루스벤이 이끄는 개신교 귀족들이 궁전에 난입했고, 단리 경은 이들과 함께하면서 근위대가 침입자들을 저지하지 않도록 막아줬다. 그 후 리치오는 메리 여왕이 보는 앞에서 단검으로 57번이나 찔려 살해당했다. 잉글랜드 외교관 토머스 랜돌프의 보고에 따르면, 리치오의 살해는 단리 경이 메리 여왕에게 왕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단리 경은 메리 여왕 앞에서 자신이 리치오 살해 음모와 관련이 없다며, 충격으로 정신이 없었던 메리 여왕을 보호해 주는 척했다. 이에 메리는 그 말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단리 경과 단둘이서 만난 뒤 그들이 모두 위험에 처해 있으며, 암살을 주도한 자들에게 궁전의 포로로 있게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단리 경은 이에 동의했고, 경비병들이 느슨해진 틈을 타 살인이 벌어진 다음 날 자정에 궁궐에서 탈출하여 던바 성으로 피신했다. 그 후 여왕은 군대를 소집해 총 8천 명을 거느리고 에든버러로 진격했고, 암살을 주도한 자들은 도주했다. 3월 21일, 메리 여왕은 정황상 리치오 암살에 직접 가담하거나 방조했을 가능성이 있던 단리 경의 살인 혐의가 무죄라고 선언했으며, 리치오의 장례식을 정성껏 치러줬다. 3월 27일, 리치오를 살해한 뒤 잉글랜드로 도피한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와 제3대 루스벤 경 패트릭 루스벤은 윌리엄 세실에게 서신을 보내 단리 경이 리치오에 대한 "왕실 간의 다툼"과 "치명적인 증오" 때문에 살인 음모를 꾸미고 자신들을 포섭했다고 주장했다.

1566년 6월 19일, 메리 여왕과 단리 경의 아들 제임스 왕자가 에든버러 성에서 태어났다. 야사에 따르면, 이때 메리 여왕은 출산한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보기 위해 산실에 찾아온 단리 경에게 아들 제임스를 보여주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선물해 주셨다."
라고 선언했고, 곁에 있었던 다른 귀족들에게
"나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선 심정으로 고백한다. 나는 결백하니 이 아이가 왕위 계승권자라는 사실의 증인이 되어 달라."
고 말하며 누가 봐도 리치오 살인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음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에 단리 경은 두려움을 느끼고 메리 여왕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공식 기록에는 메리가 이렇게 행동했다는 내용이 없으며, 두 사람은 1566년 8월 에트릭 숲에서 메켓 저수지까지 사냥 여행을 함께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화가 여전한 건 분명했다. 단리 경은 변덕스러운 행동을 일삼아서 그를 지지하던 많은 이들에게 외면당했고, 메리에게 자신에게 왕위 계승권(Crown Matrimonial: 남자 배우자가 여왕과 동등하게 왕위를 계승하여 통치할 수 있는 권리)이 있다는 걸 확정하라고 고집해 여왕의 반감을 샀다.

1566년 12월 17일, 아기 제임스가 스털링 성에서 열린 가톨릭 의식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대부모는 샤를 9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였다. 이때 메리 여왕은 당시 관습대로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가 아이의 입에 침을 뱉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그녀가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존 해밀턴이 가톨릭 사제임에도 개신교 인사들에게 지나치게 유약하게 나오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를 "엉터리 사제"라며 불신했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 출신 궁정 신하 바스티앙 파제즈가 고안한 오락에서, 남자들은 사티로스로 분장하고 꼬리를 달고 춤을 추었다. 그런데 단리 경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방에 머물렀고, 프랑스 대사는 그가 왕의 은총을 잃었다는 걸 감지하고 그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2.5. 암살

메리 여왕은 자신에게 몹시 불손하게 굴고 거만하고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하며, 아끼던 신하 다비드 리치오를 살해하는 데 관여한 남편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고,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는 신하인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자 단리 경은 여왕의 싸늘한 태도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리치오 암살 사건 당시 공모자들을 배신하고, 메리와 함께 그들을 잡으려 했던 전적 때문에 공모자들의 반감을 샀기에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급기야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단리 경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글래스고로 도피했지만 그곳에서 매독에 걸려 쓰러져 몇 달간 은거했다.

그러던 1567년 1월, 메리 여왕이 찾아와서 단리 경을 설득해 에든버러로 돌아가게 했다. 단리 경은 이에 동의했고 건강 상태 때문에 짧은 거리를 이동하여 에든버러 성벽 안의 커크 오 필드에 들렀다. 그는 여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고, 메리 여왕은 그를 정성껏 돌봐주면서 부부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다. 1567년 2월 9일 저녁, 메리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홀리루드 궁전에서 열린 시녀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갔고, 단리 경은 커크 오 필드에서 조용히 지냈다.

파일:Kirk_o'_Field_contemporary_sketch.jpg
1567년, 한 스코틀랜드 정보원이 단리 경 암살 현장을 윌리엄 세실에게 전하기 위해 그린 그림. 현재 영국 국립 기록 보관소에 보관 중이다.

2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새벽녘, 단리 경이 머물던 숙소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 집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발은 나중에 단리 경의 침실 아래 작은 방에 놓인 두 통의 화약으로 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태에 놀란 사람들이 몰려가서 살펴본 결과, 단리 경과 그의 하인 윌리엄 테일러가 성벽 밖 과수원에서 망토, 단검, 의자, 코트에 둘러싸인 채 숨져 있었다. 단리 경은 잠옷만 입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침실에서 서둘러 도망쳤음을 암시했으며, 어디에도 상처가 없었다. 외과의들의 부검 결과, 폭발로 인한 것으로 생각되는 내부 손상이 발견되었다. 존 녹스는 시신을 검사한 외과의들이 거짓말을 했고 단리 경이 교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모든 사료는 시신에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외과의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2.6. 암살의 여파

스코틀랜드 여왕의 국서가 암살이 확실한 죽음을 당하자 당연히 스코틀랜드 전체에 파란이 일어났고 유력한 용의자 후보로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과 그의 지지자들, 특히 현장에서 신발이 발견된 더글러스의 목사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사이가 나빴던 아내 메리 여왕으로 의심이 쏠렸다. 보스웰 백작은 오랫동안 왕위를 노리는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받아왔고 최근에 메리 여왕과 부쩍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편 메리 여왕은 1566년 11월 크레이그 밀러 성에서 측근들과 함께 단리 경과 이혼하는 것을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아들 제임스 왕자를 사생아로 만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포기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그녀가 단리 경 살해를 직접 지시했거나 방조했을 거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단리 경이 살해된 후, 보스웰 백작은 에든버러에서 재판을 받았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 재판이 보스웰 백작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졸속으로 처리되었다고 여기고 불신했다. 그 후 메리 여왕은 에든버러를 떠났다가 도중에 보스웰 백작에게 '납치'되어 던바 성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결혼했지만, 이에 반발한 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카베리 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메리 여왕을 체포했으며, 보스웰 백작은 해외로 망명했다. 그 후 메리 여왕은 폐위되었고, 유아 왕자 제임스가 제임스 6세로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다.

메리 여왕이 폐위된 후, 단리 경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이 재차 열렸다. 1567년 6월 14일, 보스웰 백작의 측근이었던 윌리엄 블랙애더 대위가 처음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은 그저 구경꾼일 뿐이었다며 무죄를 호소했지만 무시당했고, 교수형에 처한 직후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끌려 나와 사지가 절단당했다. 1567년 12월, 보스웰 백작의 하인들인 볼턴의 존 헵번, 존 헤이, 윌리엄 파우리, 그리고 조지 달글리시가 재판을 받아 역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블랙애더와 같은 형벌을 받았다. 이중 조지 달글리쉬는 메리 여왕을 축출하는 반란에 가담했던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이 주고받은 편지가 담긴 보석함 편지를 전달한 바 있었지만 여지없이 처형당했고, 그의 수급은 에든버러의 네더보우 문에 놓였다.

메리 여왕은 1년 후 극적으로 탈출한 뒤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봉기했지만, 제임스 6세를 내세운 귀족들에게 밀려나자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정부는 조지 달글리쉬가 모튼 백작에게 전달한 보석함 편지를 공개해, 메리 여왕이 단리 경을 살해하는 데 관여했다는 걸 공식화했다. 이후 메리 여왕은 수십 년간 억류된 채 엘리자베스 1세를 타도하려는 가톨릭 음모에 관여했다가, 1587년 2월 8일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하려는 배빙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모튼 백작은 1581년 제임스 6세에 의해 처형되기 전에 자신이 단리 경 암살 음모를 알고 있었으며, 보스웰 백작과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단리 경 암살의 '주범'이라고 고백했다.

헨리 스튜어트와 메리 여왕의 외아들 제임스 6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사후 쉽게 잉글랜드의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할 수 있었다. 때문에 스튜어트 왕조 이후부터 하노버 왕조,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윈저 왕조까지 영국의 모든 왕조는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의 후손들이다.

단리 경은 홀리루드 수도원 공동묘지에 여러 왕족의 유해와 함께 안장되었다. 1668년 폭도들이 그곳을 습격하면서 단리 경의 두개골이 도난당했다. 1928년 영국의 생물통계학자 칼 피어슨이 영국 왕립 외과학회 박물관에 소장된 한 두개골이 단리 경의 두개골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2016년 에든버러 대학의 요청으로 그 두개골이 진짜 단리 경의 도난당한 유해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단리 경 생전의 초상화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결론이 났고, 그 두개골을 본뜬 얼굴 복원이 진행되었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colbgcolor=#fff3e4,#331c00>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Matthew Stewart, 4th Earl of Lennox)
<colbgcolor=#ffffe4,#323300> 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
(John Stewart, 3rd Earl of Lennox)
제2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Matthew Stewart, 2nd Earl of Lennox)
엘리자베스 해밀턴
(Elizabeth Hamilton)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ewart)
초대 애솔 백작 존 스튜어트
(John Stewart, 1st Earl of Atholl)
엘레노어 싱클레어
(Eleanor Sinclair)
마거릿 더글러스
(Margaret Douglas)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Archibald Douglas, 6th Earl of Angus)
앵거스의 영주 조지 더글라스
(George Douglas, Master of Angus)
엘리자베스 드루몬드
(Elizabeth Drummond)
마거릿 튜더
(Margaret Tudor)
헨리 7세
(Henry VII)
요크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York)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제임스 6세 & 1세
(James VI & I)
1566년 6월 19일 1625년 3월 27일 덴마크의 아나
슬하 3남 4녀[2]

4. 창작물에서



[1] 단리 경은 격이 높은 국서의 칭호인 'King consort'를 받았다. 격이 낮은 국서의 칭호는 'Prince consort'이다.[2] 보헤미아의 왕비 알주베타, 찰스 1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