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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스록모턴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니콜라스 스록모턴
Sir Nicholas Throckmorton
파일:Sir_Nicholas_Throckmorton_from_NPG.jpg
성명 니콜라스 스록모턴
Nicholas Throckmorton
출생 1515년 또는 1516년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알세스터 인근 코튼 코트
사망 1571년 2월 12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배우자 앤 케어우 (1549년 결혼)
자녀 윌리엄, 아서, 토머스, 로버트, 니콜라스, 헨리, 앤서니, 엘리자베스
형제 로버트, 케넬름, 클레멘트, 토머스, 존, 앤서니, 조지
아버지 조지 스록모턴 경
어머니 캐서린 보
직위 프랑스 대사, 스코틀랜드 대사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마지막 국왕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 활동한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알세스터 인근 코튼 코트에서 헨리 8세 시기 워릭셔의 의원으로 활동한 조지 스록모턴 경과 초대 해로든 남작 니콜라스 보의 딸인 캐서린 보의 여덟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 왕비의 사촌이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잉글랜드의 개신교 설교자이자 역사가 존 폭스는 스록모턴이 스티븐 가디너 주교가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혔을 당시인 1551년 1월에 35세였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그는 1515년 또는 1516년생이었을 것이다. 친조카로 엘리자베스 1세를 타도하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프랜시스 스록모턴이 있었다.

스록모턴은 젊은 시절 친척 윌리엄 파와 함께 헨리 8세의 사생아이자 리치먼드와 서머셋 공작 헨리 피츠로이를 섬겼으며, 1532년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 1년간 프랑스 궁정에 머물면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헨리 피츠로이가 사망한 후, 친척인 파 가문에 들어가서 1543년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복무했다. 사촌인 캐서린 파가 헨리 8세와 결혼했을 때, 그는 궁정에서 직위를 받았다. 1544년 헨리 8세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때 불로뉴를 점령한 군대에 참가했다.

그는 캐서린 파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앤 애스큐를 감옥에서 방문했으며, 그녀의 처형을 지켜봤다. 1545년 캐서린 파의 지원에 힘입어 하원 의원에 처음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567년까지 다섯 개의 선거구에서 하원 의원직을 유지했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한 후 캐서린 파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면서, 캐서린 파의 새 남편인 토머스 시모어와 친구가 되었고, 헨리 8세 사후 캐서린 파와 함께 살았던 엘리자베스 공주와도 친하게 지냈다. 또한 개신교를 신봉한 젊은 국왕 에드워드 6세의 총애를 받았다.

1547년, 스록모턴은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핑키 전투에 참여했다. 1549년 토머스 시모어가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하려다가 체포된 뒤 처형당했고, 1550년 에드워드 시모어가 몰락했지만, 두 사람과 가까운 사이였던 그는 적절한 시기에 그들과 거리를 두었고 새로운 권력자 존 더들리에게 협조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후 1549년 왕실 궁정의 신사가 되었고, 젊은 왕의 옷을 입히고 즐겁게 해주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조폐국 재무관이라는 수익성 있는 직책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에 니콜라스 케어우의 딸이자 프랜시스 브라이언의 조카인 앤 케어우와 결혼했다.

1551년, 에드워드 6세는 스록모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스록모턴은 같은 해에 노샘프턴 후작이자 사촌인 윌리엄 파와 함께 프랑스 사절단에 동행했고, 돌아온 후에는 스코틀랜드 왕대비 마리 드 기즈가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때 그녀의 호위대에 속했다. 또한 젊은 왕이 친정을 위해 준비하는 걸 도왔으며, 인문주의 학자인 윌리엄 토머스가 정치적 논의가 담긴 문서를 에드워드 6세를 위해 준비하도록 했다. 그러던 1553년 6월 에드워드 6세의 건강이 악화해 죽음이 임박하자, 당대의 권력자 존 더들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공주의 왕위 계승을 막으려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아들 길포드 더들리와 결혼한 제인 그레이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에드워드 6세는 존 더들리의 조언에 따라 임종하기 직전에 왕위 계승법을 변경하고 제인 그레이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당시 왕의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함께 했던 스록모턴도 여러 귀족과 함께 변경된 왕위 계승법에 서명했다.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가 사망했다. 존 더들리는 왕의 죽음을 은폐하고 메리 공주를 체포하려 했다. 더들리는 무장한 가신 25명을 보유하는 걸 허용할 정도로 스록모턴을 신뢰했지만, 스록모턴은 비밀리에 메리에게 에드워드 6세의 죽음을 알리고 경고했다. 그리하여 메리는 노퍽으로 조기에 도망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추종자들을 모아서 여왕으로 즉위한 뒤 존 더들리와 맞선 끝에, 민심을 등에 업은 덕에 9일 만에 존 더들리를 물리치고 잉글랜드 여왕이 되었다. 그 후 스록모턴은 직위를 유지했고, 7월 24일 새 여왕을 위한 호위대를 소집했다. 스록모턴은 메리 여왕이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종교 개혁 정책을 취소하고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는 메리 여왕의 계획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다만 메리 여왕이 스페인의 펠리페 왕자와 결혼하는 것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메리 여왕이 펠리페 왕자와의 결혼을 고수하자, 토머스 와이엇의 난이 발발했다. 왕실군은 런던 성문에서 토머스 와이엇 더 영거의 반란군을 격파해 반란을 진압했다. 그 후 여러 인사가 반란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그중에는 스록모턴도 있었다. 검찰은 커스버트 본의 증언에 의존했고, 스록모턴은 자신을 스스로 변호했다. 10시간의 심의 끝에 배심원단은 스록모턴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여왕의 뜻에 감히 반대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감옥에 갇혔고, 스록모턴은 런던 탑에 남았다. 하지만 당국은 스록모턴에게 불리한 새로운 증거를 수집하지 못했고, 그는 1555년 1월 18일 2,000파운드의 보석금을 지급하고 석방되었다. 스록모턴의 재판은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이 재판 자료는 연구되고 논평되었다. 17세기에 스록모턴의 변호는 모범적인 변호 사례로 주목받았고, 영국 사법 제도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555년 12월, 프랑스로 망명한 헨리 더들리가 프랑스로 망명한 뒤 메리 1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공공연히 선동한 사건이 벌어진 후, 스록모턴은 공모자로 의심받았다. 또다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걸 두려워한 스록모턴은 1556년 6월 프랑스로 망명했고, 그 결과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다. 그는 해외에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고, 메리 여왕은 그를 믿고 그의 아내 앤 케어우가 남편에게 돈을 제공하는 걸 허락했다. 1557년 5월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걸 허락받은 스록모턴은 자신의 땅을 돌려받았고, 그해 여름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해 초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 함께 군대에 복무했다.

1558년 11월 메리 여왕이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새 여왕으로 즉위했다. 스록모턴은 엘리자베스 1세와 친분이 있었기에 빠르게 출세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정부 구성에 대해 조언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중 일부를 따랐다. 스록모턴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정부에서 중추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정했으며, 1560년 8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보낸 서한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평화는 "폐하의 명령과 지휘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559년 1월 프랑스 대사로 파견된 스록모턴은 6월 30일에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마상창시합에 몸소 참여했다가 치명상을 입고 며칠 만에 사망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프랑수아 2세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왕비로 뒀다. 스록모턴은 메리의 외가인 기즈 가문이 젊은 왕 부부에게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해서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 걱정된다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고했다. 1560년 기즈 가문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기즈 가문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너무도 가혹하게 진압했다. 대량 처형을 목격한 스록모턴이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포로로 잡혀서 처형된 이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용감한 대장 18명도 있었다고 한다.

스록모턴은 엘리자베스 1세와 로버트 더들리에 대한 추문이 프랑스에 퍼지는 걸 확인하고, "우리 여왕에 대해 이곳에서 제기되는 불명예스럽고 무례한 소문들"에 대해 잉글랜드 궁정에 긴급히 경고했다. 특히 로버트 더들리의 아내 에이미 롭사트가 의문사하는 사건이 발발한 후, 스록모턴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프랑스 궁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
"한 사람은 우리를 비웃고, 다른 사람은 위협하고, 다른 사람은 여왕을 모욕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하가 아내를 죽이고 공주가 그것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그와 결혼까지 하는데, 이게 무슨 종교냐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스록모턴은 메리 여왕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문장과 함께 잉글랜드 왕실 문장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또한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한 뒤 남동생 샤를 9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기즈 가문이 메리 여왕을 샤를 9세와 재혼하는 걸 추진하고 있다는 걸 잉글랜드 정부에 보고했다. 한편, 그는 메리 여왕에게 리스 공방전 이후 체결된 에든버러 조약을 비준하라고 꾸준히 설득했다. 스코틀랜드는 이 조약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잉글랜드의 합법적인 여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메리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거부했다. 윌리엄 세실은 스록모턴에게 엘리자베스가 후계자를 낳지 못할 경우 메리를 잉글랜드 왕위에 올리려는 비밀 계획을 알아냈다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스록모턴은 메리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그녀의 지혜와 왕실의 겸손함은 자신을 현명하다고 여기지 않고, 좋은 조언과 현인들의 인도를 받는 데 만족할 정도입니다. 이는 모든 왕자와 공주에게 큰 미덕이며, 그녀에게서 뛰어난 판단력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로 떠난 후, 스록모턴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프랑스 궁정에 보낸 젊은 에드워드 시모어와 친구가 되었다. 시모어가 캐서린 그레이 부인과의 금지된 결혼으로 불명예를 당하자, 스록모턴은 분노한 여왕을 달래기 위해 시모어의 "이곳에서의 선행이 여왕에게 큰 명예와 훌륭한 봉사를 가져다주었다"라고 장담했다. 1562년 위그노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이에 대한 위그노의 보복 학살도 자행되면서 프랑스의 종교 불안이 심해지자, 스록모턴은 위험에 처했다. 그는 성체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했다가 기즈 가문에게 체포되어 곤경에 처했고, 하인들은 폭행당했으며, 그의 집은 파괴되었다. 이 상황에 넌더리를 낸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1564년이 되어서야 허락받았다.

스록모턴은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재무장관과 잉글랜드 집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메리 여왕이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하기로 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신을 들고 메리 여왕을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 이 결혼에 대한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관찰해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고했다. 그는 메리 여왕이 단리 경과 너무도 빨리 사랑에 빠져 순식간에 결혼을 결정한 것에 매우 놀라면서, 한 때 존경했던 여왕이 너무 어리석고 허풍스러워져서 지금은 사소한 약속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1567년 6월 단리 경 암살 사건,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에게 '납치'된 직후 결혼 등 일련의 사건에 반발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봉기로 메리 여왕이 체포되어 로클레번 성애 투옥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스록모턴을 보내 메리를 여왕답게 대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로클레번을 방문하는 걸 거부당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윌리엄 세실로버트 더들리와 연락을 취하며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사건을 꾸준히 알렸다.

1567년 7월 25일, 윌리엄 메이틀랜드가 스록모턴을 찾아가 메리 여왕을 감옥에 가둔 것에 대해 잉글랜드의 양해를 구하려 했다. 스록모턴이 메리 여왕의 왕위를 유지할 생각이 있느냐며, 만약 그렇다면 엘리자베스 1세가 단리 경의 암살 사건을 기소하고 제임스 왕자를 구출하는 데 도움을 줄 의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스록모턴이 훗날 남긴 기록에 따르면, 메이틀랜드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당신이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는 자리에 있으므로, 나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여왕 폐하를 대신하여 여왕의 위엄을 위해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여 나의 주인이신 여왕에게 접근하거나 그 문제에 대해 위협적인 말을 사용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확신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신 여왕의 생명을 큰 위험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그녀에게 좋은 일을 하려면, 자리를 양보하고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즉, 그는 잉글랜드의 간섭이 환영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으며, 스록모턴이 메리 여왕을 만나는 걸 허락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엘리자베스는 1567년 7월 27일에 스록모턴에게 서신을 보내 로마서를 인용해 스코틀랜드 영주들이 성경이 정한 법에 반하여 메리 여왕을 폐위시켰다고 못 박고, 그들에게 재정 지원을 보내지 않을 뜻을 밝히라고 지시했다. 또한 제임스 왕자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로 등극하는 대관식에 대사로 참석해 반란에 대한 승인이나 확인의 신호를 보내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에 스록모턴은 대관식에 직접 가는 대신 하급 보좌관 헨리 미들모어를 대관식에 보냈다.

그러나 스록모턴은 메리 여왕의 친구로 인지한 스코틀랜드 영주들에게 경원시되었고, 엘리자베스의 지시를 스코틀랜드 영주들에게 직접 보여줬다가 여왕의 불쾌감을 사서 1567년 8월에 소환되었다. 그가 에든버러를 떠나기 전, 제임스 6세의 섭정인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는 자기 숙소에 있는 캐비닛 방에 전시해 둔 은 접시를 제임스 6세를 대신하여 선물로 줬다. 그러나 스록모턴은 자기는 여전히 메리 여왕이 그들의 군주라고 생각한다고 답하면서 이 선물을 거부했다.

1569년, 스록모턴은 잉글랜드에 억류된 메리 여왕과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결혼을 기획했다는 의심을 받아 윈저에 한동안 투옥되었고, 1570년 봄까지 가택연금을 받았다. 1571년 2월 8일 유언장을 작성해 아내 앤 케어우를 유언 집행자로 임명하고, 그녀와 자녀들을 위해 넉넉한 재산을 남겼으며, 청교도 목사를 초대해 장례를 치르기를 원했고, 런던의 네덜란드 교회에 일정 금액을 남겼다. 1571년 2월 12일 런던에서 사망했고, 세인트 캐서린 크리 교회에 안장되었다. 초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우리는 월요일에 좋은 친구 니콜라스 스록모턴 경을 잃었습니다. 그는 제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지난 화요일에 갑자기 중병에 걸렸습니다. 폐가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갑작스러운 감기가 그의 예상치 못한 죽음의 원인이었습니다. 신은 그의 영혼을 잃었고, 그의 친구인 우리는 그의 육신을 잃었습니다."

3. 가족

  • 앤 케어우: 헨리 8세 치세에 외교관으로 활동했지만 엑서터 음모에 휘말려 처형당한 니콜라스 케어우의 딸. 니콜라스 스록모턴 사후 에이드리언 스토크스[1]와 재혼.
    • 윌리엄 스록모턴(1554 ~ 1622): 평생 장신 장애에 시달렸다.
    • 아서 스록모턴(1556 ~ 1626)
    • 토머스 스록모턴(1557 ~ 1590)
    • 로버트 스록모턴(1558)
    • 헨리 스록모턴(1560)
    • 앤서니 스록모턴(1562)
    • 니콜라스 스록모턴(1567 ~ 1644): 서리의 샤이어 기사.
    • 엘리자베스 스록모턴(1565 ~ 1647): 잉글랜드의 탐험가 월터 롤리의 부인.

[1] 서퍽 공작부인 프랜시스 그레이의 두번째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