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서덜리의 시모어 남작 토머스 시모어 Thomas Seymour, 1st Baron Seymour of Sudele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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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토머스 시모어 (Thomas Seymour) |
출생 | 1508년 경 |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울프 홀 | |
사망 | 1549년 3월 20일 (향년 40~41세)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탑 | |
배우자 | 캐서린 파 (1547년 결혼 / 1548년 사망) |
자녀 | 메리 |
아버지 | 존 시모어 경 |
어머니 | 마저리 웬트워스 |
형제 | 에드워드, 헨리, 제인, 엘리자베스, 도로시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남작, 군인. 헨리 8세의 세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의 오빠로서 에드워드 6세의 넷째 외삼촌이고, 에드워드 6세 치세 초기 섭정을 맡은 에드워드 시모어의 남동생이다. 에드워드 시모어가 권력을 독점한 것에 강한 질투와 시기심을 품고 형에 적대하는 당파를 결성하고,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등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파멸했다.2. 생애
2.1. 초년기
1508년경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울프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존 시모어는 헨리 7세와 헨리 8세 2대를 연이어 섬긴 기사로, 1498년과 1527년 사이에 윌트셔, 도싯, 서머셋의 보안관을 여섯 차례 역임했다. 어머니 마저리 웬트워스는 왕실 기사이자 노퍽, 서퍽, 그리고 요크셔의 고위 순회 판사를 역임한 헨리 웬트워스의 딸이다. 그의 부모는 1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토머스는 그중 네번째 아들이었다.토머스의 어린 시절은 알려진 바 없다. 1530년 먼 친척이자 영향력있는 궁정 신하 프랜시스 브라이언의 가신이 되었다. 프랜시스 브라이언은 앤 불린 왕비의 사촌이었다. 1536년 5월 30일 여동생 제인 시모어가 헨리 8세와 결혼하자, 토머스는 궁정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10월 2일 추밀원의 신사로 선임되어 왕에게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덴비셔에 있는 홀트와 처크의 집사로 선임되었고, 웨일스의 여러 영지와 성을 받았다. 그 후 제인 시모어가 아들 에드워드를 낳은 지 6일 만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제인 시모어가 산후 12일 만에 산욕열로 사망한 후에도, 토머스는 형 에드워드 시모어와 함께 왕의 총애를 계속 받았다. 왜냐면 제인 시모어가 전처들처럼 이혼이나 참수로 혼인관계가 끝난 것이 아니라 사별로 끝나서 헨리에게 마지막까지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이다. 1538년 3월 햄프셔, 에식스, 베릭셔에 있는 옛 수도원의 땅을 받았다. 그 해 7월 14일,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미망인이 된 딸 메리 하워드와 토머스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토머스는 이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1546년 노퍽 공작은 다시 결혼을 주선하려 했지만, 노퍽 공작의 아들인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가 토머스의 작위가 낮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며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2.2. 외교 및 군사 업무
1538년, 토머스는 헨리 8세를 대신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를 접견하기 위해 프랑스로 여행했다. 1542년 여름, 토머스는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2세의 궁정이 있는 빈으로 향했고, 헝기라에서 벌어진 오스만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간의 전쟁을 지켜봤다. 1543년 4월 30일, 외교관 니콜라스 워튼과 함께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의 궁정에 잉글랜드 대사로 공식적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대사로서 하루에 1파운드 6실링 8펜스의 급여를 받았다.1543년 여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6월 26일 존 월롭 경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군에서 원수로 선임되어 존 월롭의 부사령관을 맡았다. 7월 24일, 강력한 분견대를 이끌고 프랑스 항구인 불로뉴 근처의 린퀘센 성과 아르브리테인 성을 점령하고 파괴했다. 이후 월롭이 잠시 병에 걸렸을 때 총사령관을 임시로 맡았다. 1544년 4월 18일, 종신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어 모든 잉글랜드 포병, 요새, 군수품 및 야전 병원을 책임졌다. 9월 14일, 형 에드워드와 함께 불로뉴쉬르메르 공략전에 참가했다. 그 해 10월, 토머스는 함대 제독으로 선임되어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영국 해협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1545년 다양한 소규모 해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토머스 체니 경과 함께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의 관리인 직책을 받았다. 11월 29일 그동안에 거둔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햄튼 플레이스 저택을 받고, 그곳의 이름을 '시모어 플레이스'로 변경했다.
헨리 8세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 토머스는 연봉 458파운드 6실링 8펜스의 상당한 수입을 올렸고 여러 지방 관직을 역임했다. 왕이 죽기 불과 5일 전인 1547년 1월 23일, 토머스는 추밀원 의원으로서 선서했다. 헨리 8세는 유언장에서 토머스에게 200파운드를 남겼다. 1547년 2월 16일, 토머스는 서덜리의 시모어 남작에 선임되었고, 해군 대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그 대가로 군수장관직을 포기했다. 이후 연봉 500파운드의 수입을 거둘 수 있는 토지를 받았고, 5월 23일에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2.3. 에드워드 시모어에 대한 음모
토머스는 상당한 지위와 재산을 누릴 수 있었지만, 형 에드워드 시모어가 서머셋 공작에 선임된 데다 호국경을 맡아 어린 국왕 에드워드 6세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자, 자기 역시 왕의 삼촌으로서 권력을 누려야 하는데 형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며 강한 불만과 질투심을 품었다. 그는 헨리 6세의 미성년자 시절에 섭정과 보호자직을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맡았던 것을 사례로 들며, 자기도 호국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자, 그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우선 해군 대장으로서 서해안의 해적들과 접촉하여 동맹을 맺고, 그들로부터 전리품의 일부를 받았다. 이후 형의 정책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날카롭게 비판했고, 공개적으로 호국경과 의회의 절차를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형이 왕실 소유의 토지를 무분별하게 분배한다고 비난했고, 형이 벌이는 스코틀랜드 원정을 크고 불필요한 자금 낭비라고 비난했다. 또한 서머셋 공작이 칼레를 프랑스에 완전히 할양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서 민심이 형에게서 멀어지게 하려 노력했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에드워드 6세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국정 운영에 힘을 쏟았지만, 토머스는 궁정의 인맥을 활용하여 시종 존 파울스와 왕실 가정교사 존 체크 경을 포섭한 뒤 에드워드 6세와 자주 소통했다. 젊은 왕이 서머셋 공작이 자기를 너무 엄격하게 통제한다고 불평하자, 토머스는 파울스를 통해 에드워드 6세에게 지속적으로 금전적 선물을 줘서 왕의 호의를 얻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서머셋 공작을 배제하고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또한 토머스는 다른 방식으로도 왕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1543년 초에 캐서린 파에게 구혼했지만, 헨리 8세가 그녀에게 결혼을 청하자 물러났다. 헨리 8세가 죽기 얼마 전, 그는 13세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남긴 유언에 따르면,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이복 언니인 메리 공주는 의회의 허가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다. 이후 토머스는 1547년에 캐서린 파와 결혼했고, 나중에야 에드워드 6세의 허가를 받았다. 또한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에게 접근해 에드워드 시모어에 대항한 동맹을 제안했으며, 그의 딸인 제인 그레이를 자기 집에서 자라게 하면서 에드워드 6세의 왕비로 삼게 해주기로 했다. 제인 그레이는 왕녀는 아닐지언정 메리와 엘리자베스 공주의 뒤를 잇는 왕위 계승 서열[1]에 있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귀중한 보호 대상이었다.[2]
토머스는 귀족들 사이에서 동맹을 모으려고 노력했다. 서머셋 공작 때문에 대법관 직위를 상실한 토머스 리오슬리는 서머셋 공작에게 강한 불만을 품었는데, 그는 이 점을 노려 리오슬리에게 자기 편이 되어준다면 장차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토머스는 또한 헨리 그레이에게 민중을 설득하고 지지를 모을 수 있는 요먼을 잘 포섭해 추종 세력을 늘리라고 권고했다. 또한 그는 의회에 참석했을 때 추종자들과 하인들을 건물 내부로 데려오려고 시도했고, 1547년 가을에는 의회 절차를 방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증인들에게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많으며, 다들 자신의 부름에 따라 무기를 들 거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는 디 강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차로를 강화하고 브리스톨 조폐국의 차장에게 자신을 위해 특별히 주조된 돈을 발행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홀트에 있는 그의 성에 식량을 비축했다. 이에 많은 이는 그가 장차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무너뜨린 후 에드워드 6세를 좌지우지하려 든다고 의심했다.
2.4.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접근하다
헨리 8세 사후, 엘리자베스 공주는 새어머니 캐서린 파와 함께 지냈다. 캐서린이 토머스와 결혼 후 임신해서 몸 관리에 힘쓰는 동안, 토머스는 엘리자베스에게 접근했다. 엘리자베스의 하인들은 나중에 토머스가 아침에 공주의 방에 자주 들어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서 나온 공주를 발견하면 등이나 엉덩이를 두드리는 식으로 애정 표현을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공주가 아직 침대에 있을 때, 그는 커튼을 활짝 열고 마치 그녀에게 달려들거나 키스하려는 듯 행동했다. 그는 때때로 '맨다리'로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곤 했는데, 당시엔 매우 충격적인 행동이었다. 거기다 토머스가 결혼을 당시 기준으로 워낙 늦게 해서 그렇지 당시라면 엘리자베스가 딸뻘 이상의 나이차가 났다.엘리자베스의 가정교사 캣 애슐리는 이에 분개해 토머스에게 대놓고 항의했고, 엘리자베스 공주도 토머스에게 자기 명예를 의도적으로 훼손하려고 이러는 거냐고 추궁했다. 이에 토머스는 불안해하며 호국경에게 자기가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며, 공주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고 변명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캐서린 파는 남편의 행동을 용인하는 듯했는데, 아마도 남편이 짓궃은 장난을 쳤을 뿐 다른 의도는 없을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는 아침에 두 번이나 남편과 함께 엘리자베스의 방으로 가서 공주를 함께 간지럽혔다. 또 한 번은 토머스가 엘리자베스의 드레스를 자르는 동안 정원에서 엘리자베스를 안기도 했다.
그러나 1548년 5월, 캐서린 파는 남편이 엘리자베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는 걸 깨달았다. 캣 애슐리에 따르면, 캐서린은 남편과 엘리자베스가 서로를 다정하게 안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에 캐서린은 공주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엘리자베스를 체션트로 보냈고, 그곳에서 캣 애슐리의 여동생 집에 머물게 했다. 이후 사건을 대외적으로는 그냥 묻어뒀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가슴 속에 깊은 한을 품은 캐서린 파는 8월 30일 딸 메리 시모어를 낳은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산욕열에 걸려 쓰러졌다.[3] 그녀는 바람을 피운 남편과 엘리자베스를 원망하는 말을 하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자신이 이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죽으면 갓난아기인 딸이 걸리니 자신이 죽으면 그녀의 유일한 보호자가 될 남편에게 전 재산과 모든 권리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1548년 9월 아내가 죽은 후, 토머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엘리자베스에게 접근했다. 지난 날 엘리자베스에게 접근하는 그의 행동을 비난했던 캣 애슐리는 이번에는 지지 의사를 밝혔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접근에 거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의회의 허가 없이 구속력 있는 약속을 하지 않을 만큼 현명했다. 토머스는 엘리자베스의 회계사인 토머스 패리와 오랫동안 논의하여 엘리자베스가 실제로 소유한 땅과 하인의 양, 그리고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어떤 조건 하에 받아야 하는지 파악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추밀원에게 전해졌다. 이후 토머스가 캐서린 파의 시녀들을 자신과 엘리자베스가 결혼한 후 엘리자베스를 섬기도록 포섭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초대 베드퍼드 백작 존 러셀이 토머스를 찾아가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의사가 있는지 대놓고 물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후 추밀원은 캣 애슐리와 토머스 페리를 체포해 토머스가 엘리자베스에게 접근한 경위를 조사했다. 그 후 토머스가 엘리자베스에게 저지른 추행이 드러나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스캔들로 이어졌다. 토머스와 엘리자베스 공주는 의회의 조사 대상이 되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지만 토머스는 유죄를 받을 위기에 처했다.
2.5. 에드워드 6세 납치 시도와 처형
1549년 1월 16일, 토머스는 몇 달간 준비한 음모를 단행하기로 했다. 그는 왕실 정원의 예비 열쇠를 장비하고 권총으로 무장한 두 하인과 함께 에드워드 6세가 있던 궁전에 침입했다. 그러나 침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 에드워드 6세가 키우던 개가 공격했다. 이에 당황한 토머스는 개를 사살했고, 왕실 경호원이 소란을 듣고 출동해 토머스를 체포했다. 토머스는 단지 왕이 잘 보호받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총기를 들고 있었고 이미 개를 사살해버렸기에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그가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한 뒤 형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차지하려 했다는 소문이 확산했다.다음 날, 토머스는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그는 형에게 서신을 보내 비굴한 표현을 써가며 자신을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여러 귀족이 재판에서 그를 상대로 불리한 증언을 했고, 토머스는 2월 18일과 22일에 그들의 진술을 직접 들었다. 그는 왕을 납치하고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결혼을 계획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가 과거에 했던 발언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 있을 때 자신이 궁궐 경비병보다 더 많은 사람을 데리고 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왕을 납치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에드워드 6세와 나눈 여러 대화도 폭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젊은 왕에게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자기 부하를 선택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토머스는 무죄를 호소했지만, 그에게 불리한 증거가 너무 많아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월 5일, 의회는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사형 영장을 발행했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차마 동생을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배신감에 사무친 에드워드 6세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자 별 수 없이 사형 영장에 필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게진 서명을 했다. 토머스는 죽기 전에 생후 6개월 남짓밖에 안 된 딸 메리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소원이 이뤄졌는지는 불확실하다.
1549년 3월 20일, 토머스는 런던 탑의 타워 힐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 후 그의 신발 속에서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두 사람에게 서머셋 공작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며달라고 간청했다. 그가 죽은 후 서덜리의 시모어 남작 작위는 소멸했고, 캐서린 파의 재산을 포함한 그의 재산은 왕실에 의해 몰수되었다.
2.6. 사후
토머스와 캐서린 파의 딸 메리 시모어는 태어난 지 불과 8일 만에 어머니를 잃은 뒤 이모인 서머셋 공작부인 앤 스태호프에게 잠시 맡겨졌다. 토머스는 처형 직전에 제12대 에레스비의 윌로비 남작 부인 캐서린 윌로비를 메리의 보호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캐서린 윌로비의 가계 기록에는 메리가 2살이 된 1550년까지만 그녀를 언급했기에, 메리는 아마도 2살 때인 1550년 직후에 사망했을 것이다. 비록 왕녀가 아니어도 한때 왕비였던 사람의 딸이고 당시 국왕 에드워드 6세의 외사촌이기도 하니 성인은 커녕 소년기까지만 성장했어도 최소한의 기록은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한편 엘리자베스 공주가 토머스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를 "사악한 중상모략"이라고 주장하며 추밀원에 공식적으로 부인할 것을 요구했고, 자기가 임신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법정에 출두하여 공개적으로 증언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애초에 공주 시절부터 여왕으로 즉위한 후까지 한평생 그 양상은 시기마다 크게 달라졌을지언정 사생활 하나하나가 시중들에게 보호 내지는 감시를 받으니 육체적 관계면 몰라도 9개월 안팎까지 숨겨야 하는 임신을 숨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캐서린 파 (Catherine Parr) | ||||
1녀 | 메리 시모어 (Mary Seymour) | 1548년 8월 30일 | 1550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