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토머스 와이엇 더 영거 경 Sir Thomas Wyatt the Young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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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토머스 와이엇 Thomas Wyatt |
| 출생 | 1521년경 |
|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채텀 | |
| 사망 | 1554년 4월 11일 (향년 32~33세)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런던 탑 타워 힐 | |
| 배우자 | 제인 오트 (1537년경 결혼) |
| 자녀 | 조지, 프랜시스, 리처드, 찰스, 아서, 헨리, 조이스, 우르술라, 앤, 제인 |
| 아버지 | 토머스 와이엇 |
| 어머니 | 엘리자베스 브룩 |
| 직위 | 켄트의 기사 |
1. 개요
잉글랜드의 기사. 메리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잉글랜드의 저명한 시인 토머스 와이엇의 아들이다.2. 생애
1521년경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채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잉글랜드의 소네트 시인이자 외교관인 토머스 와이엇이고, 어머니는 제8대 코브햄 남작 토머스 브룩의 딸이자 제9대 코브햄 남작 조지 브룩의 누이인 엘리자베스 브룩이었다. 그는 가톨릭신자로 자랐고, 아버지와 함께 스페인을 여러 번 여행했다. 이때 그는 스페인에서 횡행하던 종교재판을 직접 목격하고, 무고한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잔혹하게 죽이는 행태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15살 때 왕궁에 시종으로 출입했지만, 같은 해인 1536년 아버지가 앤 불린과 간통한 협의로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아버지는 다행히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1541년 반역 혐의로 다시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가 캐서린 하워드 왕비의 중재로 겨우 풀려났다.16살 때인 1537년 비숍스본의 기사 윌리엄 오트의 딸인 제인 오트와 결혼했고, 1542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켄트에 있는 올링턴 성과 복슬리 수도원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두 영지 모두 빚에 짓눌려 있었기에 상속 재산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아버지가 정부인 엘리자베스 대럴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형 프랜시스로부터 타란트 영지를 선물받았다. 다소 거칠고 충동적인 기질을 가진 청년으로 알려진 그는 1543년에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를 포함한 다른 귀족들과 함께 술에 취한 상태에서 런던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창문을 깨뜨린 혐의로 체포되어, 추밀원에서 재판을 맏고 런던 탑에 며칠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석방 후, 토머스는 플랑드르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위해 프랑스와 전쟁 중인 잉글랜드군에 합류하여 귀중한 군사 경험을 쌓았다. 1543년 랑드르시 공방전에 참전했고, 불로뉴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이외에도 여러 전투에서 참여해 군공을 세운 그는 1547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550년까지 해외에 머물었다. 그 후 앨리그턴으로 도라온 그는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할 때까지 조용히 살다가 메리 1세 대신 제인 그레이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앉히려는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시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메리 1세는 존 더들리를 처형했지만, 토머스는 단순 참여자로 간주해 사면했다.
1554년 1월, 메리 1세가 스페인 왕자 펠리페와 약혼했다는 소식을 접한 토머스는 과거 스페인에서 목격했던 종교재판의 참상이 잉글랜드에서 재현되는 걸 막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는 메리 여왕을 전복하고 엘리자베스 공주를 여왕으로 옹립하며, 초대 데번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를 그녀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음모자들은 여러 주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해리퍼드셔에서는 제임스 크로프트가 반기를 들 예정이었고, 잉글랜드 서부에서는 피터 케어우가, 켄트에서는 토머스 와이엇이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여기에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인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는 서리에서 분견대를 모은 뒤 토머스와 합류하기 위해 레스터셔로 진군하기로 했다.
1554년 1월 26일, 토머스는 로체스터에서 1,500명을 동원해 봉기를 일으켰고 지역 주민 대부분이 호응했다. 그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왕실군은 대거 탈영하거나 합류했다. 메리 1세는 무기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왕실의 용서를 약속했지만, 토머스는 프랑스에서 곧 자신을 지원할 거라고 선동해 반란군의 이탈을 막았다.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가 이끄는 분견대가 그를 토벌하려 했지만, 병사들이 대거 토머스 편으로 붙어버렸고 노퍽 공작은 도주했다.
이윽고 4,000명으로 불어난 반란군을 이끈 토머스는 런던으로 진군해 2월 2일 블랙히스까지 진군했지만, 메리 1세를 보호하기 위해 자원한 수천 명에 달하는 민병대가 그앞을 가로막았다. 여기에 런던 탑과 왕궁은 특별 보호를 받았고, 토머스를 체포한 이에게는 큰 보상금이 약속되었다. 이에 여러 반란군 장병이 이탈했지만, 토머스는 포기하지 않고 러드게이트를 기습하여 세인트 제임스 궁전을 점거해 메리 1세를 생포하기로 마음먹고, 킹스턴온템스로 향했다. 토벌군은 그의 계획을 눈치채고 그가 그렇게 진군하도록 허용한 뒤, 후미를 끊고 사방에서 몰아붙였다. 이후 벌어진 짧은 교전에서 추종자들이 대거 이탈하자, 토머스는 결국 항복하고 체포된 뒤 런던 탑으로 이송되었다.
1554년 3월 15일,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재판 끝에 반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엘리자베스 공주가 그의 반란에 얼마나 개입했는지 알아보려는 당국의 의도로 사형 집행이 미뤄졌지만, 그는 엘리자베스에 대해 자세한 증언을 하기를 거부했다. 4월 11일, 처형이 집행될 거라는 통보를 받은 토머스는 런던 탑의 총독인 초대 챈터드 남작 존 브리지스에게 데번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와 대화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존 브리지스의 허락을 받은 그는 에드워드 코트니와 만나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진실을 자백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처형대에 오른 그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서도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 코트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참수되었고, 그의 수급은 교수대에 매달렸다가 4월 17일에 도난당했다. 그의 사지는 마을 곳곳에 돌려졌고, 전시용으로 매달렸다.
토머스 와이엇은 제인 오트와의 사이에서 여섯 아들 조지, 프랜시스, 리처드, 찰스, 아서, 헨리와 네 딸 조이스, 우르술라, 앤, 제인을 두었다. 그 중 세 명이 결혼하여 혈통을 이어갔다. 그의 영지는 나중에 아들 조지에게 부분적으로 반환되었고, 조지의 아들인 프랜시스 와이엇은 1621~26년과 1639~42년에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냈다. 딸 앤은 로저 트위스든과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이자 그의 손자인 로저 트위스든 경은 <앤 불린 왕비의 삶>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