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01 21:18:59

제임스 크로프트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임스 크로프트 경
Sir James Croft
이름 제임스 크로프트
James Croft
출생 1518년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크로프트 성
사망 1590년 9월 4일 (향년 71~72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배우자 앨리스 워네콤, 캐서린 블런트
자녀 에드워드
아버지 리처드 크로프트
어머니 캐서린 허버트
직위 해딩턴 사령관, 아일랜드 총독, 베릭 총독.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기사, 군인. 토머스 와이엇의 난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으며,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 스코틀랜드와의 외교 활동을 맡았다.

2. 생애

1518년경 헤리퍼드셔의 크로프트 성에서 리처드 크로프트 경과 헤리퍼드셔의 지주 리처드 허버트 경의 딸 캐서린 허버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2년 아버지가 죽은 뒤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헤리퍼드셔의 샤이어 기사로서 8차례(1542년, 1563년, 1571년, 1572년, 1584년, 1586년, 1589년) 의회에 선출되었다. 또흔 1547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1549년 거친 구혼에 참전한 그는 해딩턴 사령관에 부임했다. 1551년 5월 23일 아일랜드 총독에 선임되어 잉글랜드 이주민과 아일랜드 현지 주민간의 화해를 도모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1551년 12월 21일 킬메인햄에서 스코틀랜드의 섭정인 마리 드 기즈에게 서신을 보내 인질 교환을 협상했다. 1552년 1월 아일랜드 광산의 현황과 광부 로버트 레코드와 요아킴 굿엔핑거 사이의 분쟁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1553년 제인 그레이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메리 1세 즉위 당시 런던 탑에 갇혔고, 석방되자마자 토머스 와이엇의 난에 가담했지만, 1월 20일 애쉬리지에서 엘리자베스 공주를 만나 런던을 떠나도록 설득했지만 거절당한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다가 다시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다. 이후 몸값을 지불하고 사면받은 뒤 조용히 지내다가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한 뒤 재기용되어 1559년 베릭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베릭 총독으로서 존 녹스와 제임스 맥길 등 스코틀랜드 개신교 설교자들과 자주 접촉해, 스코틀랜드에서 개신교의 세력을 증진하려 노력했다.

1560년 5월 리스 공방전에서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 선임된 그는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섭정 마리 드 기즈와 반역적인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의심을 받았다.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1560년 5월 7일 리스 요새를 향한 공격이 실패해 많은 피해를 입은 뒤 이 책임을 제임스 크로프트에게 있다며 서신에 이렇게 적었다.
"제임스 경보다 더 반역에 가까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께서 그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리스 공방전이 끝난 뒤 10년간 공직 활동을 하지 않던 그는 1570년 추밀원 의원이자 여왕의 가계를 관리하는 관원으로 선임되었다. 1587년 스코틀랜드의 전 여왕 메리의 반역죄를 묻는 재판을 담당한 재판관 중 하나였으며, 1588년에는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와 평화 협상을 하기 위한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는 파르마 공작과 사적인 관계를 맺었고, 이 때문에 잉글랜드로 돌아온 직후 런던 탑에 보내졌다. 1589년 말에 석방되었고, 1590년 9월 4일 런던에서 사망한 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제임스 크로프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레오민스터 근처 이빙턴의 지주 리처드 워네콤의 딸이자 쇼브던의 윌리엄 위그모어의 미망인인 앨리스 워네콤이었다. 두 번째는 에드워드 블런트의 딸 캐서린 블런트였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는 1589년 제임스 크로프트에 대한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의 음해에 대한 복수로 마법을 구사해 로버트 더들리를 죽였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에드워드의 아들인 허버트 크로프트는 헤리퍼드셔의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손자 헢버트 크로프트는 헤리퍼드 주교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