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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하워드(제4대 노퍽 공작)

<colbgcolor=#CBE0A7><colcolor=#000>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4th Duke of Norfolk
파일:Thomas_Howard_4th_Duke_of_Norfolk_1565.jpg
이름 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출생 1536년 3월 10일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케닝홀
사망 1572년 6월 2일 (향년 35~36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탑 타워힐
배우자 메리 피츠앨런 (1555년 결혼/1557년 사망)
마거릿 오들리 (1558년 결혼/1564년 사망)
엘리자베스 레이번 (1564년 결혼/1567년 사망)
자녀 필립, 엘리자베스, 토머스, 마거릿, 윌리엄
아버지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
어머니 프랜시스 드 베레
형제 제인, 헨리, 캐서린, 마거릿
지위 제4대 노퍽 공작

1. 개요2. 특징3. 생애4.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공작, 군인.

2. 특징

엘리자베스 1세의 육촌으로[1] 그녀의 재위 초기에 여러 고위직을 역임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로 보이면서도 내심 가톨릭을 신봉했다.

스코틀랜드에서 폐위당해 잉글랜드로 망명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계획하며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반발하는 가톨릭 교도들과 접촉한 끝에, 결국 엘리자베스 1세를 페위시키고 메리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려는 리돌피 음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들통나면서 반역죄로 참수당했다.

3. 생애

1536년 3월 10일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케닝홀에서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와 프랜시스 드 베레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제인[2], 헨리[3], 캐서린[4], 마거릿[5]이 있었다. 그의 친조부모는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의 딸 엘리자베스 스태퍼드였고, 외조부모는 제15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와 엘리자베스 트러셀이었다.

어린 토머스 하워드의 부계와 모계의 종교적 차이는 현저했다. 외할아버지는 헨리 8세종교 개혁을 지지한, 옥스퍼드의 첫 번째 개신교 백작이었지만, 친조부인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으로 인한 변화를 수용하긴 했지만 가톨릭 교리를 여전히 신봉했다. 아버지인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는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개혁적 성향을 지냈다. 그는 제3대 노퍽 공작의 후계자였고, 장래에 제4대 공작이 될 운명이었다.

그러던 1546년, 헨리 하워드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개인 문장을 4분할하고 그중 일부를 자기 문장에 집어넣기로 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증조부 존 하워드에드워드 1세의 여섯 번째 아들인 초대 노퍽 백작 토머스 드 브라더튼의 후손이고, 또다른 조상인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문장이 참회왕 에드워드의 문장 일부를 병용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그가 왕실 문장을 도용했다고 비난했고, 하워드 가문이 왕위에 눈독을 들였기에 이런 일을 벌였다고 확신했다.

1546년 12월 12일, 헨리 하워드는 아버지인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함께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두 사람은 왕좌를 탈취하고 가톨릭을 부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았다. 12월 24일, 토머스는 아들 헨리의 거짓 행위를 숨김으로써 반역죄를 은폐했다고 인정하고, 아들이 왕에게만 해당되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문장을 사용하는 걸 막지 못한 걸 회개하겠다며 자기 땅을 왕실에 바쳤다. 그 후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태퍼드, 여동생 메리 하워드, 아버지의 정부 엘리자베스 홀랜드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토머스와 헨리 하워드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시했다.

1547년 1월 13일, 헨리 하워드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1월 19일에 런던 탑 타워힐에서 처형되었다.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처형은 1547년 1월 28일로 에정되었지만, 헨리 8세가 같은 날 새벽에 사망한 뒤 새 국왕 에드워드 6세의 섭정을 맡은 위원회는 대영주를 처형해 새 국왕의 치세를 시작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의 처형을 취소했다. 그러나 토머스 하워드는 6년간 런던 탑에 계속 수감되었고, 그의 재산과 직함 대부분은 왕실에 압수되었다.

어린 토머스는 형제들과 함께 부모의 선택을 받은 네덜란드 의사이자 고전 학자 하드리아누스 유니우스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처형된 뒤 유니우스는 하워드 가문을 떠났고, 이모인 리치먼드 공작부인 메리 하워드의 양육을 받았다. 여기에 초대 웬트워스 남작 토머스 웬트워스의 제안으로 개신교 학자 존 폭스가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다. 토머스는 형제들과 함께 리게이트 성에서 살았고, 폭스로부터 그리스어라틴어를 배웠다. 1553년 7월 메리 1세가 집권하면서 풀려나고 모든 직위와 영지를 돌려받은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손주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존 폭스를 해고하고 윈체스터 주교이자 잉글랜드 대법관 스티븐 가디너의 양육을 받게 했다. 하지만 어린 토머스는 이후에도 남은 생애 동안 존 폭스와 깊이 교류했다. 1554년 3월, 토머스는 동생 헨리와 함께 링컨 주교로 선출된 가톨릭 사제 존 화이트의 집에서 교육받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토머스는 이제 제4대 노퍽 공작이 될 예정이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복권되었을 때 서리 백작에 선임되었고, 1554년 초 조부와 함께 메리 1세에 대항하기 위해 발발한 토머스 와이엇의 난을 진압하는 군대를 이끌었다. 1554년 8월 25일 조부가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어 제4대 노퍽 공작이 되었다. 당시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메리 1세의 후견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할아버지의 장례식과 매장을 프램링엄의 성 미카엘 대천사 교회에서 치르고 자매들의 보호권을 위한 필요한 준비를 하는 등 몇 가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메리 1세는 56개의 영지와 '다른 많은 상당한 재산'으로 이루어진 하워드의 방대한 유산을 조사하기 위해 공식적인 심문을 열었다.이 재산들은 토머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왕실의 손에 넘어갔다.그의 어린 동생들도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인이 되거나 결혼하면 각각 1,000마르크를 받을 예정이었다. 1557년 3월에 성인이 된 뒤, 토머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영주 중 한 명이 되었다. 1558년 11월 메리 1세가 사망했고, 그녀의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 1세의 외할머니인 엘리자베스 하워드는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누이이자 앤 불린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토머스는 엘리자베스 1세의 6촌이었다.

1559년 1월 15일, 토머스는 백작 원수로서 엘리자베스 1세의 대관식과 이후의 축하 행사를 조직하는 책임을 맡았다. 여왕은 즉위 직후 토머스를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 선임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신임을 받았지만, 여왕이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더 총애하는 걸 질투했으며, 엘리자베스의 재상을 맡은 윌리엄 세실을 "비천한 태생"이라며 경멸했다. 1559년 11월, 토머스는 사촌인 제5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헨리 네빌을 대신하여 잉글랜드 북부 국경을 지키는 감독관으로 선임되었다.

1560년 초, 토머스는 마리 드 기즈 왕대비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킨 개신교 성향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지원하는 군대의 지휘권을 맡았다. 그의 옆에는 풍부한 군사 경력을 갖춘 제임스 크로프트와 외교관이자 정치인인 랄프 새들러 경이 배치되었는데, 둘 다 스코틀랜드 정치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졌다. 그의 임무는 프랑스가 스코틀랜드 내전에 개입할 가능성에 대비해 수비대를 배치하고, 반란 지도자인 샤텔로 공작 제임스 해밀턴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프랑스가 눈치채지 않도록 비밀리에 병력과 물자를 반란군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토머스는 즉시 북쪽으로 이동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베릭에 도착했다. 1560년 2월 27일, 토머스는 스코틀랜드 반란 귀족들과 베릭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정복할 의도가 있다고 간주하고,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한다.
2. 엘리자베스 1세는 최대한 빨리 군대를 파견해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돕는다.
3.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요새는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파괴되거나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에게 넘긴다.
4.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군을 돕는다.
5. 잉글랜드의 모든 적은 곧 스코틀랜드의 적이다.
6. 메리 여왕의 결혼으로 인한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연합은 인정되지 않는다.
7. 스코틀랜드는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침공할 때 잉글랜드를 돕는다.
8. 제5대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은 잉글랜드가 아일랜드 북부를 통치하는 데 도움을 준다.
9. 스코틀랜드인은 조약의 완수를 보장하기 위해 잉글랜드 정부에 인질을 보낸다.
10. 인질이 보내진 후 노퍽 공작과 아란 백작의 서명하에 조약이 확정되며, 메리 여왕은 조약의 이행을 보증할 때까지 통치를 행사하지 못한다.

이렇게 베릭 조약이 체결된 후, 제13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윌리엄 그레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6,000명이 베릭에서 출진하여 4월 초 스코틀랜드에 이르렀고, 토머스는 베릭에 그대로 남아서 원정군에 여러 지시를 내렸다. 특히 리스 요새에 고립된 프랑스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벌어진 리스 공방전이 벌어지는 동안 여러 훈령을 원정군에 하달했다. 1560년 7월 7일 윌리엄 세실과 그의 협력자들이 에든버러에 도착한 뒤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 모두 스코틀랜드에서 전원 철수하고, 개신교 영주들이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는다는 내용의 에든버러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식되었고, 토머스는 궁정으로 돌아갔다.

1568년 10월, 토머스는 요크에서 열린 회의에 주요 위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1567년 6월 카베리 힐 전투에서 자기를 상대롤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에게 패배하고 생포된 후 1살된 아들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로클레번 성에 감금되었다가, 1568년 5월 탈출한 뒤 복위를 꾀했으나 랭사이드 전투에서 패배한 뒤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토머스는 메리 여왕이 폐위될 수 밖에 없었던 증거를 반란 귀족들로부터 받았다. 메리 여왕의 외아들이자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인 제임스 6세섭정인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증거를 제출했으니, 그것은 바로 메리 여왕이 1년 전 두 번째 남편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암살 사건에 연루된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과 주고받은 보석함 편지였다.

그 후 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의 보호를 받으며 편히 지내면서 토머스와의 결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토머스와 메리는 둘 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이었으며 메리는 친할머니 마거릿 튜더를 통해 튜더 왕조의 첫번째 군주인 헨리 7세의 후손으로서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강력한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메리는 1536년 헨리 8세앤 불린의 결혼이 무효화된 후 그들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선언되었으므로 엘리자베스 1세의 집권은 무효이고 자신이야말로 잉글랜드의 적법한 여왕이라고 여겼다. 다수의 잉글랜드 내 가톨릭 교도들도 교황청이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를 여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엘리자베스 1세는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았고 직계 후계자가 없었기에 가톨릭 신자인 메리가 잉글랜드의 차기 여왕이 될 가능성은 높았다. 가톨릭 신자인 메리의 잉글랜드 왕위계승권 주장은 엘리자베스 1세가 이끄는 정부가 정착한 잉글랜드 국교회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메리 여왕의 측근인 윌리엄 메이틀랜드는 메리 여왕이 보스웰 백작과 짜고 전 남편 단리 경을 살해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고자 애쓰는 한편 메리에게 노퍽 공작과 결혼하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메리의 수석 고문이자 대리인인 로스 주교 존 레슬리도 동의했고, 메리는 두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후 메이틀랜드는 토머스와 비밀리에 만나서 메리와 결혼하고 토머스의 딸인 마거릿과 제임스 6세를 결혼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토머스는 이 제안을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 후 잉글랜드를 괴롭혀 온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기회라고 보고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다만 그는 엘리자베스 1세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았기에 결혼을 섣불리 확정하지 않았다.

토머스와 메리는 서로 만나지 않고 편지를 통해 소통했다. 메리는 스튜어트 왕조의 모토인 'Virescit vulnere virtus'(상처에서 용기는 강해진다)가 수놓아진 베개와 자신의 문장을 토머스에게 선물로 보냈다. 토머스는 이에 답례하고자 메리의 측근이었던 제5대 보이드 경 로버트 보이드를 통해 다이아몬드를 보냈다. 1569년 12월, 메리는 토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이드 경에게서 다이아몬드를 받았습니다. 이 다이아몬드를 주인과 제게 다시 줄 때까지 목에 걸지 않고 간직하겠습니다."라고 썼다.

메리와 토머스의 결혼 계획이 비밀리에 진행되던 1569년 11월, 토머스의 처남이자 사촌인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잉글랜드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두 백작은 스페인과 프랑스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반란은 곧 엘리자베스 1세가 파견한 제3대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에게 진압당했고, 두 백작은 스코틀랜드로 도주했다. 토머스는 반란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의 의심을 받고 체포되어 1570년 8월까지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뒤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신이 메리 여왕과 결혼할 계획이 있었다고 털어놓고 자비를 간청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여왕과 결혼하려는 계획을 단호히 반대하면서도 그를 풀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풀려난 직후 당시 런던에 살고 있던 이탈리아 은행가 로베르토 리돌피의 꾀임에 넘어가 메리 여왕을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고 가톨릭의 부활을 꾀하는 일명 '리돌피 음모'에 참여했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이며 교황청의 대리인이기도 한 리돌피는 막대한 자금을 풀어서 여러 인사를 포섭해 엘리자베스 1세의 폐위를 노렸다. 1570년 2월, 교황 비오 5세는 칙서 '레그난스 인 엑셀시스(Regnans in Excelsis)'를 반포하여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고 그녀를 "영국의 거짓 여왕이자 범죄의 하수인"이라고 칭하며 이단으로 선포했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맹세한" 신하들을 포함하여 모든 신하들이 그녀에게 충성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천명하며 엘리자베스의 명령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파문했다. 이에 고무된 음모자들은 엘리자베스 1세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토머스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가 지휘하는 군대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계획과 관련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접촉해 스페인군이 잉글랜드에 상륙할 때 동지들과 함께 거병할 테니 이에 대한 보답으로 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1571년 3월 엘리자베스 정부는 광범위한 첩보망을 통해 여왕을 노리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걸 밝혀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로부터 그녀를 향한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경고가 담긴 서한을 받았다. 1571년 4월 12일, 리돌피의 전령이었던 찰스 베일리는 도버에서 위법 서한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윌리엄 헐 등의 고문 전문가들에게 압박을 받은 끝에 자신이 소지한 서신의 암호를 털어놨다.

1571년 8월 29일, 토머스 하워드의 비서 윌리엄 바커와 로버트 히그포드는 슈루즈버리 직물상인 토머스 브라운에게 잉글랜드 북부의 노퍽 관리인 로렌스 베니스터에게 전달할 자루를 줬다. 두 사람은 이 자루에 은화가 들어있다고 주장했지만 브라운은 자루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에 의심을 품고 자루를 열어본 뒤 프랑스 대사가 보낸 600파운드의 금과 메리 여왕을 대신하여 스코틀랜드로 보내진 편지들을 발견했다. 브라운은 곧바로 윌리엄 세실에게 이 사실을 고변했고 히그포드와 바커는 체포되어 심문받았다. 편지들은 부분적으로 해독되었고 하워드 하우스에서 암호 키를 수색한 결과 문지방 아래에 숨겨진 메리 여왕의 서신이 발견되어 곧장 해독되었다. 토머스의 하인들도 체포되어 심문받았고 고문과 협박을 받고 자백했다.

그 후 정부 관료인 토머스 스미스와 토머스 윌슨이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를 찾아가 이 일에 관해 캐물었다. 토머스는 그 자루는 사적인 용도로 쓸 것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자신의 하인들이 자백했고 사전에 지시했던 것과는 달리 소각되지 않은 편지가 남아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반역 혐의를 일체 부인하다가 9월 5일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그 후 사건 조사의 진행 상황을 알게 된 그는 메리와 스코틀랜드 지지자들에게 돈과 서신을 보낸 것과 리돌피 음모에 메리가 가담한 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들에게 이용당한 것일 뿐 엘리자베스 1세를 해칠 의도는 없었다고 호소했다.

1572년 1월 16일에 런던 탑에서 12시간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도 토머스는 무죄를 호소했다. 그러나 귀족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그에게 걸린 반역 혐의를 유죄라고 판결했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반역의 수괴가 되어버린 토머스에게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까운 친족이자 잉글랜드 최고의 거물 귀족을 자기 손으로 죽였을 때의 여파를 우려해 사형 집행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측근들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정하고 2월 9일 사형 영장에 서명했지만 다음 날 지시를 번복했다. 2주 후, 그녀는 윌리엄 세실과 추밀원의 강력한 요구에 다시 사형 영장에 서명했지만 다음 날 또다시 번복했다. 이에 윌리엄 세실은 노퍽 공작과 메리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위협한다는 것을 논의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라고 권고했고 엘리자베스는 이를 따르기로 했다.

1572년 5월 8일, 엘리자베스 1세 통치기의 네 번째 의회가 소집되었다. 이후 3주간의 논의 끝에 노퍽 공작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결의문이 채택되었고 의회 의원 2명이 여왕을 찾아가서 여왕이 공작을 처형하지 않음으로써 유죄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토머스 하워드에게 사형을 선고한 귀족들을 불명예스럽게 한다"고 지적했다. 여왕은 노퍽 공작과 메리의 처형을 요구하는 의회의 강력한 압력에 직면할 때까지 사형 영장 재서명을 계속 거부했다. 여왕은 고심 끝에 노퍽 공작을 처형하되 함께 연루된 메리 여왕은 죽이지 않고 단지 억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 후 노퍽 공작의 처형은 6월 2일로 정해졌다.

1572년 6월 2일 일출 무렵 토머스는 존 폭스와 세인트 폴 대성당의 수석 사제인 알렉산더 노웰과 함께 런던 탑 타워 힐에 특별히 세워진 단두대로 인도되었다. 그는 처형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군중 앞에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무죄라고 연설했다. 그러자 한 관리가 토머스를 방해하며 "이 땅의 어떤 귀족보다도 명예롭게 재판을 받았으니" 본인을 무죄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후 시간이 지났으니 빨리 끝내라는 권고를 받은 토머스는 자기가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부인하며 연설을 마쳤다. 이후 폭스와 노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사형 집행인이 자기 목을 베는 걸 용서하겠다고 밝힌 뒤 더블릿을 벗고 형틀에 머리를 얹었다. 그 후 "주님, 제 영혼을 당신에게 맡깁니다."라는 최후 기도를 했고 사형 집행인은 도끼를 한 차례 휘둘러서 공작의 머리를 단번에 베었다. 사후 시신은 런던 탑의 성 베드로 아드 빈쿨라 예배당에 묻혔다.

토머스 하워드가 반역죄로 처형당하면서 노퍽 공작령의 영지와 작위는 몰수되었지만 그의 재산 대부분은 나중에 아들들에게 반환되었고 노퍽 공작위는 1660년 토머스의 고손자인 토머스 하워드에게 반환되었다. 한편 메리 여왕은 간신히 처형을 모면했지만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엘리자베스 1세를 전복시키려는 가톨릭 신자들의 음모에 연루되었고, 결국 배빙턴 음모에 가담한 게 들통나면서 엘리자베스 1세의 명령으로 1587년 2월 토머스 하워드와 똑같이 참수당했다.

4. 가족

  • 메리 피츠앨런(1540 ~ 1557): 제12대 아룬델 백작 헨리 피츠앨런의 딸.
    • 필립 하워드(1557 ~ 1595): 제13대 아룬델 백작. 초기엔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로 자처했지만 나중에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583년 스록모턴 음모[6]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된 뒤 잉글랜드 국교회로 돌아오면 풀어줄 의향이 있다는 엘리자베스 1세의 권유를 뿌리치고 가톨릭 신자로서 런던 탑에 10년 넘게 감금된 채 신앙 생활을 이어가다가 1595년에 옥사했다.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인 순교자" 중 한 명으로서 시성되었다.
  • 마거릿 오들리(1540 ~ 1564): 초대 윌든의 오들리 남작 토머스 오들리의 딸. 1563년 크리스마스에 남편과 재회하려고 며칠 전 넷째 아이를 낳은 후 몸이 쇠약한 와중에도 여행을 떠났다가 호흡기 질환을 앓고 1564년 1월 9일 사망했다.
    • 엘리자베스 하워드(1560 ~ ?): 유년기에 사망.
    • 토머스 하워드(1561 ~ 1626): 초대 서퍽 백작.
    • 마거릿 하워드(1562 ~ 1591): 제2대 도싯 백작 로버트 색빌의 부인.
    • 윌리엄 하워드(1563 ~ 1640): 나워스 성과 헨더스켈프 성[7]의 영주이자 로마 제국 시대의 유물 수집가.
  • 엘리자베스 레이번(1536 ~ 1567): 켄달 남작령의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웨스트모어랜드 치안판사, 컴벌랜드와 웨스트모어랜드에 광범위한 토지를 소유한 제임스 레이번의 딸이며, 제4대 다크레 남작 토머스 다크레의 미망인이다. 1564년 토머스 하워드와 재혼한 뒤 1567년 9월 성별을 알 수 없는 아기를 낳은 직후 사망했고 이 아기도 어머니를 따라 출생 직후 요절했다.

[1]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 불린과 토머스의 아버지 헨리 하워드가 외고종 사촌지간이었다.[2] 1533/1537 ~ 1593,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의 부인.[3] 1540 ~ 1614, 초대 노샘프턴 백작[4] ? ~ 1596, 제7대 버클리 남작 헨리 버클리의 부인.[5] 1547 ~ ?, 제9대 스크로프 남작 헨리 스크로프의 부인.[6] 1583년 가톨릭 교도였던 프란시스 스록모턴(Francis Throckmorton)이 잉글랜드 주재 에스파냐 대사인 베르나르디노 데 멘도사(Bernardino de Mendoza)와 내통하여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시키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려 든 사건. 사전에 발각돼서 스록모턴은 처형되고 멘도사는 국외로 추방됐다. 이후 살아남은 스록모턴의 인척들은 제임스 1세 시절 다시금 잉글랜드의 국교를 가톨릭으로 복원하기 위해 국왕 암살 계획을 세우는데 그게 바로 화약 음모 사건이다.[7] 오늘날인 하워드 성으로 일컬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