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1st Earl of Suffol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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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
| 출생 | 1561년 8월 24일 |
|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샤프론 월든 외곽 오들리 엔드 하우스 | |
| 사망 | 1626년 5월 28일 |
|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주 샤프론 월든 | |
| 아버지 |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
| 어머니 | 마거릿 오들리 |
| 형제 | 엘리자베스, 마거릿, 윌리엄 |
| 배우자 | 메리 데이커(1572년 결혼/1578년 사망) |
| 캐서린 니벳(1582년 결혼) | |
| 자녀 | 시오필러스, 엘리자베스, 로버트, 윌리엄, 토머스, 캐서린, 프랜시스, 찰스, 헨리, 에드워드, 마거릿 |
| 직위 | 윌든의 하워드 남작, 초대 서퍽 백작, 왕실 시종장, 대재무관.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정치인.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 잉글랜드 해군에 참여해 스페인 해군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고,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받고 출세를 거듭해 대재무관까지 이르렀지만,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와의 정쟁에서 밀리면서 실각했다.2. 생애
2.1. 초년기
1561년 8월 24일,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샤프론 월든 외곽 오들리 엔드 하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이고, 어머니는 초대 윌든의 오들리 남작 토머스 오들리의 딸 마거릿 오들리였다. 친형제로 엘리자베스, 마거릿[1], 윌리엄[2]이 있었고, 이복형제로 필립 하워드가 있었다. 1564년 1월 9일, 어머니가 호흡기 질환을 앓다가 사망한 뒤 샤프론 윌든 영지와 오들리 가문의 다른 재산을 상속받았다.아버지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개신교로 교육받았고 공개적으로는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를 자처했지만 내심 가톨릭을 믿었다. 1569년 잉글랜드 북부 반란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런던 탑에 갇혔다가 1570년 8월에 석방되었지만[3], 몇 달 후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하고 스코틀랜드의 전임 여왕 메리를 잉글랜드 왕위에 앉히고 가톨릭을 복원하려는 리돌피 음모에 가담했다가, 1571년 9월 음모 가담 사실이 발각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그 후 반역죄로 재판받고 1572년 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같은 해 6월 처형당했다.
아버지가 처형되었을 때 11살이었던 토머스 하워드는 형제자매인 필립, 윌리엄, 마거릿과 함께 삼촌인 초대 노샘프턴 백작 헨리 하워드의 보살핌을 받으며 오들리 엔드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처형된 후 노퍽 공작가의 재산은 대부분 몰수되었지만 토머스는 나중에 재산의 일부분이나마 돌려받았다. 한편 아버지인 4대 노퍽 공작은 런던 탑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장남 토머스에게 그의 의붓누이 메리 데이커[4]와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토머스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지만 메리 데이커는 1578년 4월 윌든에서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첫번째 아내와 사별한 뒤 토머스는 1582년 혹은 그 이전에 찰턴의 헨리 니벳 경의 장녀이자 상속녀였던 캐서린 니벳과 재혼했다. 캐서린 니벳은 당대 잉글랜드에서 미녀로 정평이 나있었으며 제임스 1세의 왕비 덴마크의 아나의 시녀이기도 했다.
2.2. 해군 활동
1584년 12월, 토머스 하워드는 윌든 남작 자격으로 하원에 처음으로 출석했다. 1588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에 맞서기 위해 잉글랜드 전역에서 함대가 결성되었을 때, 그는 골든 라이언호를 지휘했다. 1588년 7월 25일, 골든 라이언 호는 스페인 갈레아스를 공략한 배 3척 중 하나였다. 그는 다음 날 아크 로열호에서 친척이자 잉글랜드 해군 총사령관인 에핑엄 남작 찰스 하워드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1591년, 토머스 하워드는 아메리카에서 오는 스페인 보물 함대를 매복 공격하기 위해 아소르스 제도를 향해 함선 55척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러나 한 함대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스페인에 도착했고, 두 번째 함대는 9월이 되어서야 섬에 도착했다. 오랜 지연으로 인해 아픈 병사들을 상륙시키고 함선을 수리해야 했던 그는 간신히 플로레스 앞바다로 나가 정찰병들이 스페인 함대가 도착하고 있다고 보고했을 때 출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함대는 보물 함대가 아니라 잉글랜드 함대를 섬멸하기 위해 페롤에서 파견된 강력한 스페인 함대였다. 하워드는 주력 함대를 이끌고 탈출했고, 리처드 그랜빌이 지휘하는 리벤지 호는 홀로 잉글랜드 함대를 추격하던 적 함대를 가로막고 혈투를 치르다가 끝내 제압되었다.(1차 플로레스 해전)
1596년, 토머스 하워드는 찰스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전에 참여해 부제독을 맡았다. 이후 1597년 4월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고, 6~8월에는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월터 롤리 등이 이끈 아소르스 제도 원정에 자금을 지원하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번 원정 역시 실패했다.
2.3. 정치 경력
1597년 가을 심각한 병에 시달렸고, 1598년 1월까지 병에서 회복하는 동안 의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1598년 2월 2일, 그는 그레이스 인의 명예 회원으로 인정받았고, 1599년 다운스 항구의 함대를 지휘했으며, 같은 해에 제독이 되었다. 1601년 2월 에식스 백작의 반란이 발발했다가 금세 진압된 후 2월 13일 런던 탑의 경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에식스 백작과 제3대 사우샘프턴 백작 헨리 워리오슬리를 재판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사략선 활동에 적극적이었지만 그다지 큰 이익을 얻지 못했고, 160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걸 토대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고위 관리인으로도 임명되어 1614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초대 솔즈베리 백작 로버트 세실의 친구였던 그는 1602년 말에 임시 궁내 대신이 되었고, 1603년 1월 엘리자베스 1세가 세상을 떠날 무렵 차터하우스에서 여왕을 접대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새 군주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즉시 왕의 총애를 얻어 1603년 4월 6일에 궁내대신으로, 4월 7일에는 추밀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21일에는 서퍽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바스 기사 작위 수여 위원을 맡았고, 1604년부터 1618년까지는 백작 원수 작위 수여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605년에 서퍽 주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보다 몇 년 전에는 케임브리지셔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서퍽 백작은 1604년 평화 조약을 협상하던 스페인 대사로부터 선물을 받았지만, 그의 부인 캐서린 니벳은 가톨릭을 은밀히 신봉했고, 성품이 탐욕스러워서 스페인으로부터 연금 1,000파운드를 몰래 받았다. 서퍽 백작은 아내보다 스페인과 가톨릭에 대한 호감이 덜했지만, 아내는 정치 문제에서 남편을 좌지우지했다. 이는 그가 나중에 몰락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1605년경에는 솔즈베리 백작 로버트 세실, 노샘프턴 백작 헨리 하워드, 우스터 백작 에드워드 서머셋, 그리고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가 제임스 1세의 주요 추밀고문으로 여겨졌다. 서퍽 백작과 솔즈베리 백작 모두 몬테이글 경 윌리엄 파커가 가톨릭 신자들이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고 계획한 화약 음모의 존재를 알린 정보를 일찌감치 입수했고, 서퍽 백작은 지하실을 조사하여 화약을 숨긴 덤불을 발견했다. 그날 저녁 늦게 궁궐 관리인 토마스 니벳 경(토머스 하워드의 처남)이 추가 수색을 하여 화약을 발견했고, 음모는 실패로 끝났다. 서퍽은 음모 가담자들을 조사하고 재판하도록 위촉된 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제임스 1세 치세 초기 솔즈베리 백작, 노샘프턴 백작과 함께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는 "삼위일체 익당" 중 한 명으로 일컬어졌다. 1607년까지 찰턴 파크(Charlton Park)의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이 집은 현재까지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1608년 12월, 솔즈베리 백작 로버스 세실의 장남이자 상속자인 윌리엄 세실은 서퍽 백작의 셋째 딸 캐서린과 결혼했다. 1612년에 사망한 솔즈베리 백작은 유언장에서 서퍽 백작과의 우정을 칭찬했으며, 로버트 세실 사후 서퍽 백작이 왕실 재무관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서퍽 백작은 왕의 총애를 받는 로버트 카 경을 싫어했지만 자신의 딸 프랜시스가 남편인 제3대 웨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이혼하고, 로버트 카와 결혼하려고 하자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그를 사위로 들이면 가문에 더 도움이 될 거라 여겨 딸의 선택을 지지했다. 이윽고 프랜시스는 본래 남편인 로버트 데버루와 이혼한 뒤 로버트 카가 서머셋 백작으로 임명된 직후인 1613년 12월에 그와 결혼했다.
1614년 7월 8일, 서퍽 백작은 친척인 노샘프턴 백작을 대신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614년 7월 11일에는 대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서퍽 백작의 새로운 사위가 된 서머셋 백작 로버트 카가 장인을 대신하여 궁내대신이 되었고 서퍽 백작과 그의 가족들이 제임스 1세의 궁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1615년부터 몰락의 징후가 포착되었다. 우선 이 시기부터 제임스 1세가 조지 빌리어스에게 깊이 매료되면서 서머셋 백작에 대한 총애가 시들해졌다. 결정적으로 서퍽 백작의 딸이자 서머셋 백작의 아내인 프랜시스 하워드가 토머스 오버베리 경의 독살 사건에 연루되었다.[5] 서퍽 백작은 서머셋 백작과 공모하여 오버베리 경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은폐하려 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재판 결과 1616년 프랜시스가 오버베리를 살해한 것을 인정하면서, 유죄와 사형을 선고받고 로버트 카 역시 아내의 살인을 알면서도 관련 서류를 불태우며 은폐한 죄로 똑같이 사형을 선고받고 런던 탑에 수감되자 더욱 궁지에 몰렸다. 다행히도 프랜시스와 로버트 부부는 사형을 면하고 런던 탑에 수감되어 있다가, 1662년 제임스 1세의 명으로 사면받으면서 위기를 무사히 넘기는 듯했다.
이후 서퍽 백작은 다른 잘생긴 남자를 데려와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빼앗아서, 조지 빌리어스의 입지를 약화시키려고 했지만 빌리어스에 대한 제임스 1세의 총애는 굳건했다. 오히려 당시 버킹엄 후작이었던 조지 빌리어스가 대재무관으로서 서퍽 백작의 행태를 비난하며 반격을 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퍽 백작의 재정 상태는 항상 위태로웠다. 그의 초기 사략선 활동과 해군 사업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정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의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다. 제임스 1세 시대에는 궁정에서의 승진으로 숙식과 상당한 보수를 받게 되었고, 아버지로부터 몰수당했던 일부 영지를 되찾으면서 상황이 다소 나아졌다. 그는 이 중 일부를 이스트 앵글리아 의 토지에 투자했고, 여러 차례의 관세 징수권과 친척들의 유산을 통해 더욱 이득을 보았다. 1611년에는 런던에 있던 저택인 차터하우스를 매각해야 했지만, 1614년에 노샘프턴 백작의 차링 크로스 저택을 상속받으면서 그 자리를 대체했다.
서퍽 백작은 사치스러운 건축 사업으로 자신의 재정난을 더 악화시켰다. 1603년부터 1616년까지 건설된 오들리 엔드 하우스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큰 개인 저택이었다. 또한 채링 크로스에 값비싼 새 별관을 추가했고, 그의 아내 캐서린 니벳은 상속받은 니벳 영지에 찰턴 파크를 지었다. 서퍽 백작의 자녀들도 풍족하게 양육되었다. 그는 궁정에서 그들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지출했고, 혼인을 개선하기 위해 후한 결혼 지참금을 제공했다. 이러한 전략은 성공적이었지만, 그에게 엄청난 빚을 안겨주어 1618년까지 채권과 저당권으로 4만 파운드의 빚을 지게 되었다. 1614년 대재무관으로 임명되면서 후원권을 팔고 관세청과 거래를 통해 재정 상황을 개선할 기회를 얻었지만, 빚을 완전히 탕감하지는 못했다. 이 또한 그가 몰락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2.4. 몰락
1618년 7월, 제임스 1세는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를 통해 서퍽 백작이 대재무관으로서 공금을 빼돌리는 짓을 저질렀으며, 서퍽 백작부인이 왕실 채권자들로부터 뇌물을 갈취했다는 보고를 접하자, 서퍽 백작을 대재무관에서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서퍽 백작은 재판을 피하고자 건강이 악화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1619년 10월, 서퍽 백작과 그의 아내, 그리고 측근인 재무부 회계 감사관 존 빙글리 경이 스타 체임버 법정에서 공금을 남용하고 뇌물을 갈취하는 등 부정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되었다. 1619년 11월 13일, 그들은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고, 30,000파운드의 벌금이 부과되었으며, 런던 탑에 갇혔다.열흘 후, 서퍽 백작과 그의 아내는 석방되었고, 버킹엄 공작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버킹엄 공작은 이제 자신의 입지가 확고하게 다져진 만큼 옛 경쟁자에게 관대하게 대하기로 했다. 그는 서퍽 백작과 제임스 1세의 알현을 주선했고, 왕은 7,000파운드를 제외한 나머지 벌금을 면제해 주기로 했다. 1623년, 서퍽 백작의 막내아들 에드워드 하워드가 버킹엄 공작의 조카인 메리 보틀러와 결혼했다. 그 후 서퍽 백작은 다시는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상원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교회 문제 위원직을 2차례 역임했다. 1626년 5월 28일 에식스주 샤프론 월든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메리 데이커(1563~1578): 제4대 데이커 남작 토머스 데이커의 딸.
- 캐서린 니벳(1564~1638): 찰턴의 헨리 니벳 경과 엘리자베스 스탬프의 딸. 미인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제2대 리치 남작 리처드 리치의 아들인 리처드 리치와 결혼했다가 사별한 뒤 1582년 이전에 토머스 하워드와 재혼했다.
- 시오필러스 하워드(1582~1640): 제2대 서퍽 백작.
- 엘리자베스 하워드(1583~1658): 초대 벤버리 백작 윌리엄 놀리스와 초혼, 제4대 해로든의 보 남작 에드워드 보와 재혼.
- 로버트 하워드(1598~1653): 기사. 캐서린 네빌의 남편.
- 윌리엄 하워드(1586~1672년 이전)
- 토머스 하워드(1587~1669): 초대 버크셔 백작.
- 캐서린 하워드(1588~1673):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세실의 부인.
- 프랜시스 하워드(1590~1632): 제3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초혼, 초대 서머셋 백작 로버트 카와 재혼.[6]
- 찰스 하워드(1591~1626): 메리 피츠존의 남편.
- 헨리 하워드(1592~1616): 엘리자베스 바셋의 남편.
- 에드워드 하워드(?~1675): 에스크릭의 초대 하워드 남작.
- 마거릿 하워드(1599~1608)
[1] 1562~1591, 제2대 도싯 백작 로버트 색빌의 부인[2] 1563~1640, 나워스 성과 헨더스켈프 성[7]의 영주이자 로마 제국 시대의 유물 수집가.[3] 그러나 아버지인 4대 노퍽 공작의 여동생이자 잉글랜드 북부 반란의 주동자인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의 아내로, 토머스의 고모인 제인 하워드는 해당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죽을 때까지 풀려나지 못했다.[4] 제4대 데이커 남작 토머스 데이커의 딸.[5] 토머스 오버베리는 원래 로버트 카의 친구였는데 로버트가 웨식스 백작부인이었던 프랜시스와 결혼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제임스 1세의 미움을 사 런던 탑에 수감되어 의문사했다. 프랜시스가 오버베리를 독살한 이유는 로버트와 자신의 결혼을 반대한 원한 때문으로 추정된다.[6] 로버트 카는 조지 빌리어스 이전에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인물로 빌리어스처럼 그리 대단치 않는 가문 출신이었지만 제임스 1세의 총애로 서머셋 백작으로까지 벼락출세했다. 프랜시스는 본래 남편인 로버트 데버루와 이혼하지도 않았는데 로버트 카와 내연 관계가 되었고, 친정인 하워드 가문도 데버루보단 로버트 카와 결혼하는게 집안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겨 두 사람의 사이를 용인했다. 결국 프랜시스는 로버트 데버루와 혼인무효한 뒤 로버트 카와 결혼했지만 이후 로버트 카의 친구이자 자신과의 결혼을 반대했던 토머스 오버베리를 독살한 혐의가 드러나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래도 제임스 1세의 사면으로 감옥에서 풀려났고 거기서 낳은 외동딸 앤을 키우며 조용히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