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19 20:32:51

카베리 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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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베리 힐 전투
영어: Battle of Carberry Hill
파일:battleofCarberryhill.jpg
날짜
1567년 6월 15일
장소
스코틀랜드 왕국 이스트로디언 머슬버러 인근 카베리 언덕
원인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의 결혼에 대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발
교전국 및 교전세력
메리 여왕파 남부 연합
지휘관
파일:Arms_of_James_Hepburn,_1st_Duke_of_Orkney.svg.png 제임스 헵번 윌리엄 커콜디
결과
남부연합의 승리, 메리 여왕의 폐위와 제임스 6세의 등극.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전투 이후

1. 개요

1567년 6월 15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의 결혼에 반발한 귀족들이 남부 연합을 결성한 뒤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투. 메리 여왕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생포된 뒤 폐위되었고, 그녀의 1살된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2. 배경

1567년 2월 10일, 메리 여왕의 두 번째 남편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암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세간에서는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이 서로 힘을 합쳐 단리 경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각계 인사들은 메리 여왕에게 사건을 제대로 조사해서 의문점을 깔끔하게 해소하라고 조언했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와 단리 경의 아버지인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는 보스웰 백작이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조언했다.

메리는 조사를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보스웰 백작은 1567년 4월 12일 정식 재판이 아닌 추밀원에서 열린 심리에 참석했고, 같은 계급의 사람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보스웰 백작에겐 단리 경 암살 사건으로 정국이 어수선하니, 여론이 가라앉을 때까지 정계에서 물러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보스웰 백작은 이 권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물러나서 자기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권세를 포기하느니 세력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로 하고, 이를 위해 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1567년 4월 19일, 보스웰 백작은 에인슬리 선술집에서 귀족들을 불러놓고 만찬회를 대접한 뒤, 만찬회가 끝날 무렵에 자신이 향후 단리 경 시해에 대한 비방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여왕이 신하 중 한 명과 결혼할 경우" 자신이 여왕과 결혼하도록 권고하는 증서에 서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귀족들은 술에 취한 채 서명했지만, 상원 대변인인 윌리엄 메이틀랜드는 서명을 회피하고 자리를 떠났다. 얼마 후, 보스웰 백작은 메리 여왕에게 귀족들의 서명을 받은 증서를 보이며 자신과 결혼하자고 제안했지만, 메리 여왕은 그가 진 고든과 결혼 중이며 대중의 시선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메리 여왕의 거절에 몸이 달아오른 보스웰 백작은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1567년 4월 24일, 보스웰 백작은 스털링에서 아들 제임스와 시간을 보낸 뒤 에든버러로 귀환하던 메리 여왕 일행을 엘몬드 브리지에 저지한 뒤 그녀를 던바 성으로 끌고 갔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불순한 무리가 봉기를 일으킬 거라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에 여왕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이후 던바 요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메리 여왕이 보스웰 백작에게 강간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메리 여왕 본인은 이를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의 사건 전개를 보건대, 보스웰 백작은 서로의 안전을 위해 그녀가 자신과 결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득했고, 메리 여왕은 여기에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메리 여왕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낸 뒤, 보스웰 백작은 진 고든과의 이혼 준비에 착수했고, 보스웰 백작의 동맹이었던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도 이에 동조했다. 진 고든은 오빠의 강력한 설득 끝에 남편과의 이혼을 진행하기로 동의했다. 1567년 5월 3일, 보스웰 백작이 하녀이자 재봉사인 베시 크로포드와 간통했다는 이유로, 개신교 위원회 법원에서 두 사람의 이혼을 확정했다. 5월 6일 메리 여왕과 함께 에든버러로 돌아온 보스웰 백작은 5월 7일 가톨릭 법원에서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존 해밀턴에 의해 진 고든과의 결혼이 무효라는 처분을 받았다. 결혼이 무효가 된 사유는 보스웰 백작과 진 고든이 4촌 혈연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특별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존 해밀턴 본인이 1566년 2월 24일에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특별 허가를 내렸다. 개신교 법원과 가톨릭 법원에서 각각 이혼과 결혼 무효 판결을 받아낸 것은 메리 여왕이 가톨릭 신자이고 보스웰 백작이 개신교 신자인데 기인했다.

1567년 5월 12일, 메리 여왕은 보스웰 백작을 오크니 공작이자 셰틀랜드 영주로 선임했다. 5월 15일,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의 결혼식이 개신교 전례에 따라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보스웰 백작은 고대하던 국서의 지위에 올랐지만,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그를 여왕의 남편을 살해하고, 여왕을 납치한 뒤 결혼해 버린 천인공노할 인간으로 간주했고, 메리 여왕 역시 그와 야합하여 남편 살해를 공모한 후 얼마 안 가서 결혼해 버린 방탕한 여자로 낙인찍혔다. 일찍이 에인슬리 선술집에서 보스웰 백작과 메리 여왕의 결혼에 동의한다는 증서에 서명했던 귀족들은 6월 11일 에든버러에 갑옷을 입은 채 집결한 뒤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의 주도하에 남부 연합을 결성한 뒤, 단리 경의 살인에 대한 원수를 갚고, 보스웰 백작에게 납치당한 메리 여왕을 구출하며, 1살 된 제임스 왕자를 보호하겠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에든버러 시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각지에 배포했다.

3. 전투 경과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은 패사이드 성에서 사태를 지켜보다가, 1567년 6월 15일 아침에 200명의 총사, 300명의 창병을 포함한 장병 2,000명을 거느리고 카베리 힐에 진지를 구축하고 남부 연합군을 기다렸다. 존 녹스에 따르면, 그들이 진영을 세운 장소는 20년 전 잉글랜드군이 핑키 전투를 치르기 전에 설치한 참호였다고 한다. 그들은 던바 성에서 가져온 대포 7~8문과 파이크 300개로 무장했다. 나중에 전투가 끝난 뒤 이 무기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스코틀랜드 추밀원은 1567년 9월에 카베리 힐 주변 마을에 서신을 보내 무기 반환을 요청했다.

남부연합은 이 소식을 접하자 동등한 병력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미들로디언의 쿠스랜드 마을에서 북쪽으로 진군했다. 녹스는 그들이 언덕을 돌아 더 쉽게 오르고 눈에 햇빛이 들지 않는 카베리 마을에서 접근했다고 기술했다. 이윽고 양자는 서로의 위치를 확인했고,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대치했다. 그러던 중 프랑스 대사 필리베르 뒤 크록이 중재자로 나서서 협상을 시도했지만,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는 단리 경의 살인범에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며 거부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메리 여왕의 추종자들은 스코틀랜드 왕실의 깃발인 '사자가 포효하는 깃발'을 들었고, 남부 연합 귀족들의 깃발에는 나무 아래에서 죽은 단리 경과 유아 제임스 왕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으며, 그 밑에 "주여, 나의 대의를 심판하고 복수해 주소서."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또한 이 깃발은 에든버러 성에서 게양되었다고 한다. 보스웰 백작은 언덕 위에 포진한 아군을 향해 접근하는 적 기병대에게 대포를 쏴서 내쫓은 뒤, 남부 연합 영주들에게 결투를 제안했다. 윌리엄 커콜디가 도전을 받아들였지만, 보스웰 백작은 그가 단지 남작일 뿐이니 '오크니 공작'인 자신과 신분이 맞지 않다며 결투에 불응했다. 뒤이어 털라바딘의 윌리엄 머레이와 바이어스의 린제이 영주 패트릭 린제이도 결투를 신청했지만, 보스웰 백작은 역시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은 상대라며 거절했다.

그날은 무더웠고, 물을 구할 길이 없었던 여왕의 군대는 갈증에 시달렸다. 이내 군대가 와해할 조짐이 포착되자, 보스웰 백작은 도망칠 궁리를 했다. 이를 눈치챈 보스웰 백작의 지지자인 에드먼드 블랙애더와 웨더번 성의 지주 한 명이 여왕에게 사과한 뒤 떠났다. 이내 탈영병들이 속출했고, 보스웰 백작마저 기병 25명과 함께 던바 성으로 도망쳤다. 결국 메리 여왕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윌리엄 커콜디에게 항복하기로 했다. 윌리엄 커콜디는 여왕의 말을 고삐로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지대인 베릭 요새 사령관 윌리엄 드루리는 당시 메리 여왕이 "붉은색 페티코트에 소매는 뾰족하게 묶었고, '파틀릿'이라고 불리는 벨벳 모자와 머플러를 착용했다"라고 보고했지만,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가 조지 뷰캐넌은 메리가 "무릎 아래까지 닿는 짧고 초라한 옷만 걸치고" 항복했다고 기록했다.

4. 전투 이후

남부 연합 귀족들은 항복한 메리 여왕을 에든버러로 데려갔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구경꾼은 그녀를 간통녀이자 살인자라고 비난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녀는 처음에 크레이그밀러의 사이먼 프레스턴의 하숙집에 갇혔다고 한다. 다음 날 밤, 메리 여왕은 로클레번 성으로 이송되었고,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의 이부형제인 윌리엄 더글러스가 간수를 맡았다. 윌리엄 커콜디는 그녀의 신변을 보장해주기로 맹세했는데 다른 귀족들이 이를 무시했다며 비난을 퍼부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후 메리 여왕은 7월 20일과 23일 사이에 쌍둥이를 유산했다.

1567년 7월 24일, 메리 여왕은 귀족들의 압력에 못 이겨 1살 된 아들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넘겼고,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는 새 국왕의 섭정이 되었다. 7월 29일, 스털링의 교회에서 제임스 6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대관식에 참석한 존 녹스는 대관식 후 열린 예배에서 설교했다. 그는 이 설교에서 메리 여왕을 가리켜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유부남과 결혼한 요부라고 강하게 비판했고 심지어 그녀의 처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메리 여왕은 로클레번 성에 그대로 감금되었다.

한편, 보스웰 백작은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도움을 받아 반격하려 했지만, 헌틀리 백작이 등을 돌려버리면서 좌절되었다. 이후 모레이 백작에 의해 지명수배되자, 몇 주간 스피니에 숨어 있다가 배 4척을 타고 출항해 더 많은 배와 독일 선장들을 고용하기 위해 협상 중이던 언스트로 북상했다. 이때 윌리엄 커콜디가 이끄는 라이언 호가 그의 배 한 척을 맹렬히 추격했고, 두 배 모두 암초에 충돌하여 손상되었다. 그 후 보스웰 백작의 함대는 셰틀랜드 제도에서 재정비하며 그곳의 관리인 올라브 싱클레어의 물자 지원을 받은 뒤, 북해를 건너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그러나 보스웰 백작은 그곳에서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국왕 프레데리크 2세에게 체포되어 드라그스홀름 성으로 보내진 후 10여 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578년 4월 14일에 옥사했다.

이렇게 사태는 종식되는 듯했지만, 단지 메리 여왕의 권력을 박탈하고 명목상 여왕으로나마 남아있게 하길 희망했던 귀족들은 모레이 백작 등이 자기네 잇속을 챙기기 위해 유아 왕을 옹립했다고 여겨 불만을 품었고, 메리 여왕의 추종자들은 개신교 영주들이 가톨릭 여왕을 몰아낸 뒤 스코틀랜드에서 가톨릭을 박멸하려고 이번 반란을 일으켰다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러던 1568년 5월 2일, 메리 여왕은 성주인 윌리엄 더글러스의 동생 조지 더글러스의 도움으로 로클레번 성에서 탈출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 서부의 아가일 일대를 돌며 주요 지지자들과 합류해 6천 명을 모은 뒤 반격을 준비했다. 이에 모레이 백작이 진압에 나섰고, 양측은 랭사이드 전투에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