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eaa 0%, #005eb8 30%, #005eb8 70%, #003eaa);"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카베리 힐 전투 | 랭사이드 전투 | 잉글랜드 북부 반란 | 채넌리 성 공방전 |
덤버턴 성 공방전 | 틸리앙구스 전투 | 크레이브스톤 전투 | 에든버러 공방전 | |}}}}}}}}}}}}}}} |
틸리앙구스 전투 Battle of Tillieangus | |||
기간 | |||
1571년 10월 10일 | |||
장소 | |||
스코틀랜드 왕국 애버딘셔 틸리앙구스 | |||
원인 | |||
메리 여왕을 지지한 고든 가문과 제임스 6세를 지지한 포브스 가문의 대결.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고든 가문 | 포브스 가문 | ||
지휘관 | |||
아담 고든 | 아서 '블랙' 포브스 | ||
결과 | |||
고든 가문의 승리. |
1. 개요
메리 여왕 내전 시기인 1571년 10월 10일, 메리 여왕을 지지한 고든 가문과 제임스 6세를 지지한 포브스 가문이 맞붙은 전투.2. 상세
고든 가문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각지에 강대한 영지를 가진 강력한 씨족이었다. 그런 고든 가문에게 사사건건 대적하는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포브스 가문이었다. 두 가문은 16세기 내내 길고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두 가문은 서로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기 일쑤였고, 상대방의 수장을 상대로 한 음모를 거리낌 없이 꾸몄다. 개신교가 스코틀랜드에 전래했을 때, 고든 가문은 가톨릭을 고수했고 포브스 가문은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이제 종교까지 다르게 택하면서, 두 가문의 불화는 더 심해졌다. 레슬리 가문, 어바인 가문, 세튼 가문 등은 고든 가문 편을 들었고, 키스 가문, 프레이저 가문, 크리튼 가문과 같은 개신교 가문들은 포브스 가문 편을 들었다.메리 여왕 내전 시기, 고든 가문은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지도하에 메리 여왕을 지지했다. 이에 맞서는 포브스 가문은 제임스 6세를 옹립한 스코틀랜드 정부 편을 들었다. 1571년 10월 10일, 아담 고든 경이 지휘하는 고든 가문의 군대는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과 합류하기 위해 에든버러로 향하는 수이 로드를 따라 이동했다. 이에 제6대 포브스 경 존 포브스의 막내아들인 아서 '블랙' 포브스가 이끄는 포브스군이 막아섰다.
양군은 틸리앙구스의 화이틀 힐에서 격전을 벌였고, 고든 가문이 승리했다. 1571년 11월 16일 갤러웨이 주교 알렉산더 고든이 제6대 슈루즈버리 백작 조지 탈보트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아서 '블랙' 포브스와 포브스라는 이름의 신사 36명이 죽었고, 아서 포브스의 어린 아들을 포함한 100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서 포브스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몸을 굽혔다가 고든 가문원 한 명이 갑옷의 열린 관절을 통해 그에게 치명타를 가했다고 한다. 또한 고든 가문 측에서는 버키의 존 고든이 전사했다고 한다.
두 가문은 이후에도 크레이브스톤 전투에서 다시 맞붙었고, 포브스 가문의 수장이 거주지로 삼았던 드러미노 성이 약탈당했으며, 코가프 성에서 포브스 가문 27명이 살해당하는 등 유혈 충돌을 쭉 이어갔다. 메리 여왕 내전이 끝난 뒤에도 두 가문의 충돌은 계속 이어지다가, 스코틀랜드 의회의 중재로 분쟁을 겨우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