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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브스톤 전투 Battle of Craibstone | |||
기간 | |||
1571년 11월 20일 | |||
장소 | |||
스코틀랜드 왕국 애버딘셔 크레이브스톤 크로프트 | |||
원인 | |||
메리 여왕을 지지한 고든 가문과 제임스 6세를 지지한 포브스 가문의 대결.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고든 가문 | 포브스 가문 | ||
지휘관 | |||
아담 고든 | 알렉산더 포브스 | ||
결과 | |||
고든 가문의 승리. |
1. 개요
메리 여왕 내전 시기인 1571년 11월 20일, 메리 여왕을 지지한 고든 가문과 제임스 6세를 지지한 포브스 가문이 맞붙은 전투.2. 상세
고든 가문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각지에 강대한 영지를 가진 강력한 씨족이었다. 그런 고든 가문에게 사사건건 대적하는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포브스 가문이었다. 두 가문은 16세기 내내 길고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두 가문은 서로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기 일쑤였고, 상대방의 수장을 상대로 한 음모를 거리낌 없이 꾸몄다. 개신교가 스코틀랜드에 전래했을 때, 고든 가문은 가톨릭을 고수했고 포브스 가문은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이제 종교까지 다르게 택하면서, 두 가문의 불화는 더 심해졌다. 레슬리 가문, 어바인 가문, 세튼 가문 등은 고든 가문 편을 들었고, 키스 가문, 프레이저 가문, 크리튼 가문과 같은 개신교 가문들은 포브스 가문 편을 들었다.메리 여왕 내전 시기, 고든 가문은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지도하에 메리 여왕을 지지했다. 이에 맞서는 포브스 가문은 제임스 6세를 옹립한 스코틀랜드 정부 편을 들었다. 1571년 10월 10일, 아담 고든 경이 지휘하는 고든 가문의 군대는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과 합류하기 위해 에든버러로 향하는 수이 로드를 따라 이동하던 중 제6대 포브스 경 존 포브스의 막내아들인 아서 '블랙' 포브스가 이끄는 포브스군과 마주쳤다. 이어진 틸리앙구스 전투에서 고든 가문이 승리했고, 아서 '블랙' 포브스는 전사했다.
1571년 11월 20일, 제6대 포브스 경 존 포브스의 아들이자 포브스 마스터를 맡은 알렉산더 포브스는 '치좀 대위', '웨더번 대위'와 함께 카우위에서 애버딘으로 진군했다. 치좀과 웨더번은 머스킷으로 무장한 부대 2개를 지휘했으며, 이들의 총병력은 800명이었다. 한편, 아담 고든은 '커 대위'와 함께 9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 포브스가 에버딘으로 행군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크레이브스톤 마을로 먼저 가서 적과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포브스군은 애버딘 다리를 건너 크레이브스톤에서 아담 고든의 부하들과 한 시간 동안 싸웠다. 그 결과 고든 가문이 승리했고, 치좀과 부하 300명이 전사했으며, 포브스 대장 알렉산더 포브스와 부하 200명이 생포되었다. 고든 가문의 피해는 200명이었다.
존 녹스의 비서를 지낸 스코틀랜드 성직자이자 서기관 리처드 배너타인은 알렉산더 캠벨이 지휘하는 일부 기병대가 포브스 가문과 함께 싸웠다고 밝혔으며, 알렉산더 포브스와 아담 고든의 군대는 식량난에 시달린 끝에 애버딘으로 가서 식량을 확보하려고 했다고 마주쳤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아담 고든이 화력이 부족해 싸우기를 꺼렸지만, 포브스 가문의 군대가 어리석게도 탄약을 낭비하자 기회를 포착하고 역공을 가해 섬멸했다고 기술했다.
두 가문은 이후에도 포브스 가문의 수장이 거주지로 삼았던 드러미노 성이 약탈당했으며, 코가프 성에서 포브스 가문 27명이 살해당하는 등 유혈 충돌을 쭉 이어갔다. 메리 여왕 내전이 끝난 뒤에도 두 가문의 충돌은 계속 이어지다가, 스코틀랜드 의회의 중재로 분쟁을 겨우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