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Archibald Douglas, 6th Earl of Angu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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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아치볼드 더글러스 Archibald Douglas |
출생 | 1489년경 |
스코틀랜드 왕국 라나크셔 더글러스데일 | |
사망 | 1557년 11월 22일 (향년 67~68세) |
스코틀랜드 왕국 탄탈론 성 | |
아버지 | 앵거스 기사 조지 더글러스 |
어머니 | 엘리자베스 드러먼드 |
형제 | 조지, 윌리엄, 엘리자베스, 앨리슨, 자넷, 마거릿 |
배우자 | 마거릿 헵번 |
잉글랜드의 마거릿 (1514년 결혼/1527년 무효화) | |
마거릿 맥스웰 | |
자녀 | 마거릿, 제임스, 자넷(사생아), 조지(사생아) |
직위 | 제6대 앵거스 백작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 제6대 앵거스 백작. 제임스 4세의 미망인이자 제임스 5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튜더의 두번째 남편이었으며, 제임스 5세를 억류한 뒤 권세를 누렸지만 제임스 5세가 극적으로 탈출한 뒤 반격하면서 몰락했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과 협력해 재기를 꾀했지만 실패했다.2. 생애
1489년경 스코틀랜드 왕국 라나크셔 더글러스데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조지 더글러스는 앵거스 기사로, 1513년 플로든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드러먼드는 초대 드러먼드 경 존 드러먼드의 딸이다. 형제로 조지[1], 윌리엄[2], 엘리자베스[3], 앨리슨[4], 자넷[5]. 마거릿[6]이 있었다.1509년, 아치볼드는 초대 보스웰 백작이자 스코틀랜드 해군 제독 패트릭 헵번의 딸 마거릿 헵번과 결혼했다. 1513년 마거릿 헵번이 사망한 뒤, 그 해 11월 19일 제5대 앵거스 백작이자 그의 조부인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사망한 뒤 제6대 앵거스 백작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 왕국과 전쟁을 지속하는 건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잉글랜드와 화해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친 로우랜드 귀족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1514년 8월 6일,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의 미망인이자 제임스 5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튜더와 재혼했다. 이에 귀족들은 앵거스 백작의 급부상을 두려워했고, 그녀가 재혼했으므로 섭정이 될 자격을 상실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 의회는 마거릿을 섭정직에서 해임하고, 제2대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를 섭정으로 옹립했다.
1415년 5월 26일, 올버니 공작은 지난날 제임스 4세가 루이 12세에게 빌려줬던 제임스호와 마거릿 호를 포함한 8척의 함선을 이끌고 프랑스에서 덤버튼으로 이동했다. 그는 곧장 자기를 따르는 귀족들을 규합해 7,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몬스 메그 대포를 포함한 포병대를 통솔했다. 그의 군대가 마거릿 튜더가 머물던 스털링 성을 포위 공격하자, 마거릿은 8월 6일에 항복하고 섭정에서 물러나는 걸 받아들였다. 그 후 그녀는 1515년 9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궁정을 떠나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의 탄탈론 성으로 망명했다. 1516년 후반, 앵거스 백작은 올버니 공작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앵거스 백작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섭정 의회에 합류했다. 이 시기, 그는 마거릿 튜더와 불화를 벌였다. 그는 트라콰이어 경의 딸인 제인과 성관계를 맺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자넷 더글러스를 낳았다. 앵거스 백작은 네워크에 있는 아내 마거릿 튜더의 영지를 인수한 뒤, 그곳에서 정부 및 사생아와 함께 살았다. 마거릿 튜더는 이 처사에 크게 화가 났고, 그와 이혼하고 올버니 공작과 화해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1517년 올버니 공작이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새로운 협정을 맺었다. 이후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려 했지만, 당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했던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가 프랑수아 1세에게 그를 프랑스에서 억류해달라고 요청했고, 이 때문에 올버니 공작은 수년간 프랑스에 머물러야 했다. 앵거스 백작은 이 때를 틈타 1517년에서 1521년까지 권력을 탈취하려고 시도했고, 올버니 공작의 지지자인 초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과 장기간의 갈등을 벌였다. 에든버러 지배권을 둘러싼 무장 충돌로 이어졌던 앵거스 백작과 아란 백작 사이의 갈등은 내전으로 번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던 1521년 11월, 올버니 공작이 스코트랜드에 귀환했다. 그동안 남편 앵거스 백작과의 사이가 악화한 마거릿 튜더는 올버니 공작과 화해하기로 했다. 에든버러에서 열린 의식에서, 관리인은 올버니 공작에게 열쇠를 주었고, 그는 그것을 왕의 모친 마거릿에게 건넸으며, 마거릿은 그것을 올버니 공작에게 돌려줘서 스코틀랜드 정부가 그의 손에 있음을 확인했다. 그 해 12월, 올버니 공작은 앵거스 백작을 반역죄로 고발했고, 나중에는 프랑스에 보내 사실상 포로 생활을 하도록 했다. 또한 이 시기에 그와 마거릿 튜더와의 결혼은 무효 처리되었다.
1524년, 앵거스 백작은 프랑스를 탈출하여 런던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 마거릿 튜더가 올버니 공작이 랑스로 간 틈을 타 초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의 도움을 받아 제임스 5세의 신변을 확보한 뒤 섭정을 종식하고 12세의 제임스 5세가 조기에 완전한 왕권을 회복했다고 선언한 후, 아란 백작과 함께 공동으로 스코틀랜드를 실질적으로 다스렸다. 앵거스 백작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 아란 백작과 마거릿 튜더의 연립 정권에 반발한 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와 동맹을 맺었다. 앵거스 백작이 무장한 많은 무리와 함께 에든버러로 진군하여 자신도 의회에 참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자, 마거릿은 그들에게 대포를 발사해 내쫓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의회는 두 집단 간의 불화를 종식하기 위해 각 집단이 차례로 젊은 왕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도록 했다.
1525년 11월, 앵거스 백작은 왕을 보내주기를 거부하고 그대로 억류했다. 그 결과, 제임스 5세는 2년 6개월 동안 앵거스 백작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앵거스 백작은 제임스 5세를 감시하는 한편, 온갖 사치스러운 물건을 선불하고 매춘부들과 성관계를 맺도록 해 육체적 쾌락을 선사함으로써, 그를 무능력하게 만들어 완전한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기가 스코틀랜드를 진두지휘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대법관으로서 왕실에서 얻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수익성 있는 직책을 측근 및 친척들에게 나눠줘서 권세를 독점했다.
이러한 그의 행태에 분노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왕을 구출하고 앵거스 백작을 타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1526년 7월 25일, 브랜스홀름과 버클루크 영주이며 스코틀랜드 변경대 지휘관 월터 스콧이 제임스 5세로부터 자기를 구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랜스병 600명을 이끌고 진군했지만, 멜로즈 전투에서 앵거스군에게 패배했다. 월터 스콧은 블랙니스 성에 투옥되었다가 10,000파운드의 벌금을 물고 추방되었다.
한편, 마거릿 튜더는 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에게 아들을 구출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1만이 넘는 군대를 스털링 성에서 집결한 뒤, 제임스 5세가 있는 에든버러로 진군했다. 이에 앵거스 백작은 마거릿 튜더와 결별하고 자기 편이 된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을 선봉대로 보내 이들을 막게 했다. 이어진 린리스고 다리 전투에서, 제임스 해밀턴은 수적 열세로 적에게 거의 압도될 뻔했지만, 앵거스 백작이 급파한 증원군에 힘입어 레녹스군을 격파했다. 레녹스 백작은 부상을 입은 채 항복했지만, 피나트의 제임스 해밀턴에게 살해되었다.
이렇듯 연이은 구출 시도가 실패하면서 앵거스 백작의 권세는 오래도록 이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1528년 5월, 제임스 5세는 변장을 한 채 에든버러 성에서 탈출해 스털링 성으로 도망쳐서 어머니와 합류한 뒤, 앵거스 백작의 전횡에 이를 갈던 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이에 호응한 귀족들이 대거 군대를 이끌고 몰려오면서 대군을 확보한 제임스 5세는 7월에 에든버러 성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앵거스 백작은 탄탈론 성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농성하다가,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항복한 뒤 잉글랜드로 추방되었다.
앵거스 백작은 형제들과 함께 잉글랜드 망명 생활을 하면서 1542년까지 잉글랜드에 머물며 국경지대에서 동포들을 공격하는 잉글랜드군에 가담했다. 제임스 5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앵거스 백작 지지자들을 탄압했고, 1537년 앵거스 백작의 여동생인 자넷이 잉글랜드로 망명한 형제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제임스 5세를 독살하려 한 혐의로 체포한 뒤 화형에 처했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제임스 5세에게 앵거스 백작 가문과 화해하라고 권유했지만 묵살당했다.
1542년 제임스 5세가 사망하자, 앵거스 백작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영지와 작위를 회복했고, 추밀 고문관 겸 중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헨리 8세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유아 여왕 메리와 자신의 외아들 에드워드의 결혼을 협상하라는 권고를 받고, 이를 추진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1543년, 그는 잉글랜드와의 평화 조약을 성공적으로 협상했고, 같은 해에 제5대 맥스웰 경 로버트 맥스웰의 딸 마거릿 맥스웰과 결혼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은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데이비드 비튼 추기경과 그를 따르는 인사들의 압력에 따라 친 잉글랜드 정책을 포기하는 바람에 입지가 위태로워졌고, 1544년 4월 아란 백작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블랙니스 성에 투옥되었다.
아란 백작이 앵거스 백작을 투옥한 뒤 잉글랜드와의 화해 노선을 깨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헨리 8세는 1544년에서 1545년 사이에 잉글랜드군을 급파해 스코틀랜드를 침공하게 했다.(거친 구혼) 잉글랜드군이 로디언에 있는 앵거스 백작의 영지를 파괴하고 멜로즈 수도원에 매장된 더글러스 가문의 무덤을 파헤치자, 앵거스 백작은 이제까지 유지했던 친 잉글랜드 입장을 버렸다. 그는 곧 석방된 뒤 저항군을 이끌었고, 1545년 2월 27일 앤크럼 무어 전투에서 랄프 유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 후, 앵거스 백작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2세로부터 성 미카엘 기사단의 휘장을 받았다.
1546년 잉글랜드와의 결혼 및 평화 조약을 취소하는 법에 서명했고, 1547년 9월 10일 핑키 전투에서 선봉대를 지휘해 잉글랜드군에 맞섰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다. 1547년 10월 초, 선박 5척을 타고 인치콤 섬 탈환 작전을 수행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면서도 브로티 성의 잉글랜드군 사령관 앤드류 더들리와 비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자기가 부하들이 브로티 포위 공격에 가담하는 것을 막았다고 전했다. 1548년 6월, 앵거스 백작은 윌튼의 그레이 남작 윌리엄 그레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달키스 궁전을 접수했을 때 생포될 뻔했지만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탄탈론 성에서 에든버러로 이동해 항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유아 여왕을 대신해 나라를 이끈 마리 드 기즈 왕비를 보좌하는 측근들은 앵거스 백작의 충동적이고 야심찬 성격과 많은 추종자들을 경계했고, 그가 정치 및 군사 작전에서 영향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견제했다. 결국 이후의 전쟁에서 별다른 활약을 못한 채 잠자코 지내던 그는 1557년 11월 22일 탄탈론 성에서 단독에[7] 걸려 사망했다. 사후 스코틀랜드 퍼스셔의 애버네시에 안장되었으며, 형제인 피텐드라이히의 조지 더글러스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데이비드 더글러스가 제7대 앵거스 백작이 되었다.
앵거스 백작은 마거릿 튜더와의 사이에서 외동딸 마거릿 더글러스를 낳았다. 앵거스 백작의 유일한 적자녀였던 마거릿 더글러스는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결혼했으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두번째 남편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를 낳았다. 또한 마거릿 맥스웰과의 사이에서 외아들 제임스를 낳았지만 유년기에 사망했다. 그의 사생아 자넷 더글러스는 제3대 루스벤 경 패트릭 루스벤과 결혼해 루스벤 가문의 본가를 이루었다. 또다른 사생아인 조지 더글러스는 모레이 주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