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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아치볼드 더글러스 Archibald Douglas | |
출생 | 1449년경 | |
스코틀랜드 왕국 이스트 로디언 탄탈론 성 | ||
사망 | 1513년 11월 19일 (향년 63~64세) | |
스코틀랜드 왕국 갤러웨이 세인트 니니안 수도원 | ||
아버지 | 제4대 앵거스 백작 조지 더글러스 | |
어머니 | 이사벨라 시볼드 | |
누이 | 앤, 이사벨라, 엘리자베스, 마거릿, 자넷 | |
배우자 | 엘리자베스 보이드, 캐서린 스털링 | |
자녀 | 조지, 메리엇, 윌리엄, 케빈, 엘리자베스, 아치볼드. 자넷 | |
직위 | 제5대 앵거스 백작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 앵거스 백작.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 헨리 7세와 결탁하여 스코틀랜드 왕실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지만 실패했다.2. 생애
1449년경 스코틀랜드 왕국 이스트 로디언의 틸탈론 성에서 제4대 앵거스 백작 조지 더글러스와 제임스 2세의 궁내장관 존 시볼드의 딸 이사벨라 시볼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남동생으로 존이 있었지만 유년기에 죽었고, 누이로 앤[1], 이사벨라[2], 엘리자베스[3], 마거릿[4], 자넷[5]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조지 더글러스는 제임스 2세를 추종하며 왕에게 반기를 든 같은 씨족 출신인 더글러스 백작가에 맞서 싸웠으며, 1460년 록스버러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제임스 2세가 사고로 사망하자 새 왕 제임스 3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1462년 또는 1463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14세의 나이로 제5대 앵거스 백작이 되었다. 그는 제임스 3세 치세 동안 왕실 행정의 비효율적인 운영, 국왕의 총신들이 최고 권력을 장악하는 상황, 토지 소유권의 안정성 보장 부족 등 일련의 상황에 불만을 품은 스코틀랜드 귀족드들의 수장이 되었다. 1480년, 그는 왕의 승인 없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뱀버러 요새를 불태웠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스코틀랜드의 정계 위기가 커지자, 그는 이를 이용해 제임스 3세 축출을 노렸다. 1482년 7월, 제임스 3세는 로디언에서 귀족들을 소집해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맞서려 했다. 앵거스 백작은 이 때를 틈타 지지자들을 이끌고 로디언으로 가서 총신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제임스 3세를 생포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했고, 곧 권력을 장악한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 스튜어트에게 밀려났다. 1483년 2월 11일, 앵거스 백작은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꾀하는 올버니 공작의 야망을 지지하고 잉글랜드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협정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체겨했다. 그러나 곧 스코틀랜드 의회의 지원을 받은 제임스 3세가 권력을 회복하고 올버니 공작을 몰아냈다. 앵거스 백작은 왕실 행정부의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궁정 출두도 금지되었다.
1488년, 앵거스 백작은 제임스 3세에 대항하는 귀족들의 반란을 주도했다. 그들은 제임스 3세의 장자 제임스 4세를 내세웠고, 소치번 전투에서 왕실군을 격파하고 제임스 3세를 죽음으로 내모는 데 성공했다. 제임스 4세는 그의 반란 덕분에 왕이 되었고, 앵거스 백작은 한동안 제임스 4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곧 홈 가문과 햅번 가문이 대두되어 그의 영향력을 줄였고, 국경 관리 직임은 알렉산더 홈에게 넘어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앵거스 백작은 겉으로는 제임스 4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1489년 또는 1491년경 헨리 7세와 비밀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헨리 7세가 제임스 4세를 칠 때 내응하겠으며, 리즈데일을 통해 스코틀랜드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는 허미티지 성을 넘겨주며, 그 대가로 잉글랜드 영지를 받기로 했다.
1491년 10월, 앵거스 백작은 제임스 4세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뒤 탄탈론 성을 요새화했다. 그러나 헨리 7세의 원군은 오지 않았고, 그 사이에 제임스 4세가 파견한 왕실군에게 포위되자 항복한 뒤 리즈데일 영지와 허미티지 성을 보스웰 영주권과 교환해야 했다. 1493년, 그는 다시 총애를 회복해 여러 토지 보조금을 받았고, 스코틀랜드 대법관을 맡아 1498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497년 6월, 그는 제닌 호에서 잉글랜드 왕위 주장자 퍼킨 워벡의 일로 분쟁이 일어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의 협상을 이끌었다.
1513년 9월, 앵거스 백작의 두 큰 아들이 플로든 전투에서 제임스 4세와 함께 전사했다. 그 후 앵거스 백작은 제임스 5세의 섭정을 맡은 마거릿 튜더 왕비의 고문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해 11월 19일에 갤러웨이 세인트 니니안 수도원에서 사망했고, 손자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제6대 앵거스 백작이 되었다.
3. 가족
- 엘리자베스 보이드(? ~ 1498): 초대 보이드 경 로버트 보이드의 딸.
- 조지 더글러스(1469 ~ 1513): 플로든 전투에서 전사.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아버지.
- 매리엇 더글러스(1470 ~ ?): 제3대 글렌케언 백작 커스버트 커닝햄의 부인.
- 윌리엄 더글러스(1471 ~ 1513): 플로든 전투에서 전사.
- 케빈 더글러스(1472 ~ ?): 던켈드 주교.
- 엘리자베스 더글러스(1474)
- 아치볼드 더글러스(1475 ~ 1522): 킬스핀디의 기사. 스코틀랜드 재무관.
- 자넷 더글러스(1476)
- 케서린 스털링: 키르의 기사 윌리엄 스털링의 딸.